곡선을 위한 독서

by 이만희

시각장애 학생들의 손끝에 닿는 점자정보단말기의 차가운 촉감과 책마루의 묵직한 질감을 매일 마주한다. 그 속에서 아이들은, 그리고 나 또한, 활자의 세계로 걸어 들어간다. 우리는 흔히 행복을 누군가 포장해서 건네주는 선물처럼 기대하지만, 나의 오랜 경험과 깊은 사색은 그 기대가 얼마나 무용했는지 깨닫게 했다. 진정으로 나에게 유익이 되는 행복이란, 스스로를 깎고 다듬어 만들어내는 건축물과 같다. 그 건축에 필요한 가장 단단한 자재는 다름 아닌 끊임없는 독서와 행동으로 얻어지는 내공이다.

행복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결심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나는 행복하기로 마음을 먹는다"는 이 단순한 선언이, 책장을 넘기는 손길에 깃든 고요한 열정을 깨운다. 우리가 책을 읽는 순간은, 단순히 지식을 축적하는 행위를 넘어선다. 그것은 행복할 것을 다짐하는 의식이며, 지금 읽는 책을 즐기며 그 자체를 삶의 목적으로서의 독서가 되게 하는 몰입이다.

나는 원하는 시간,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만큼 책을 읽는다. 손만 뻗으면 닿는 곳에 책마루와 노트북이 있는 이곳은, 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고요하고 풍요로운 성채다. 하루 종일 책에 파묻혀, 읽고, 생각하고, 결심하고, 행동하고, 마침내 그것을 습관으로 만들면서 비로소 삶의 깊숙한 곳에서부터 행복을 느낀다. 이 과정은 마치 오랜 세월 거친 파도에 씻겨 매끈해진 조약돌처럼, 나를 단단하면서도 부드럽게 빚어간다.

세상은 숨 가쁘게 변한다. AI 시대의 거대한 물결 앞에서, 평생을 보장하던 평생 직업이라는 개념은 마치 낡은 신화처럼 사라지고 있다. 이제 우리는 거대한 조직의 부품으로 안주할 수 없다. 생존을 넘어, 의미 있는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역량을 키워서 프로가 되어야 한다.

이 시대의 진정한 혁신은 바로 스스로 자기를 고용하는 독립적인 주체성에서 나온다. 앞으로의 삶은 노동의 질과 삶의 질이 나누어지지 않는 경계 없는 지대가 될 것이다. 일은 더 이상 생계의 수단이 아니라, 나를 완성시키고 표현하는 예술이 되어야 한다. 삶과 일이 하나가 되는 그 순간, 우리는 온전한 주체로서 세상을 살아가게 된다. 이 주체성을 확보하는 데 독서는 사유의 뼈대를 제공한다.

나이 듦이라는 과정 또한 독서를 통해 새로운 의미를 얻는다. 그것은 단지 쇠락의 시간이 아니라, 조용한 열정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삶의 본질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이제 격정적이고 충동적인 열정이 아닌, 속삭이듯 고요한, 그러나 깊은 울림을 가진 조용한 열정으로 삶의 본질을 통찰하고 삶을 성찰한다. 독서는 이 고요한 여정의 가장 충실한 동반자다.

우리가 젊은 날을 직선으로 달려왔다면, 40대 이후의 삶은 곡선의 넉넉함으로 채워져야 한다. 목표만을 향해 돌진하던 직선의 속도전에서 벗어나, 주변을 돌아보고 여백을 품을 줄 아는 곡선의 여유가 필요하다. 넉넉함과 포용, 그리고 미소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세월이 선사하는 가장 값진 선물이다.

직선적인 삶이 효율과 완벽을 추구했다면, 곡선의 삶은 인간적인 온기와 여유를 찾는다. 나는 종종 생각한다. 약간 손해 본 듯, 약간 부족한 듯 살아가는 것이 어쩌면 더 좋은 삶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모든 것을 가지려 집착하는 대신, 조금쯤 비워두는 여백. 그 여백이 주는 넉넉함이 우리의 영혼을 더욱 풍요롭게 한다.

행복을 위한 곡선의 삶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남들이 정해놓은 길을 따라가기보다 자신의 발자국을 따라가고 싶은 우직한 용기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편안하게 걸었던 길을 버리고,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우직하게 가는 선택이 주는 고독과 자유는, 독서가 깊어진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우리는 살면서 끊임없이 성을 쌓는다. 이미 이루어 놓은 것만 지키기 위해 쌓는 그 성은, 결국 자신을 가두는 감옥이 된다. 성을 쌓고 사는 것은 기존의 것을 지키고 유지한다는 의미이며, 이는 변화와 성장을 거부하는 수동적인 삶의 태도다. 하지만 삶은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지난 것들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면 우리는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그리고 이 자유로움이야말로 더 큰 세상과 다양한 세계를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문을 열어준다. 이 문을 열어주는 핵심적인 도구가 바로 독서다. 독서를 통해 우리는 세상의 다양한 지혜와 통찰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며, 내 안의 낡은 성벽을 허물 용기를 얻는다.

진정한 독서는 크게 버리고 크게 얻는 역설적인 행위다. 그것은 바로 곡선을 위한 독서다. 직선적이고 물질적인 욕망, 즉 다른 사람들처럼 부동산 시세에 관심을 갖거나 주식을 사려고 시간을 보내기보다, 책을 읽는 시간을 선택한다. 책 속에서 얻는 즐거움과 재미는 비교할 수 없는 마음의 풍요로움이며, 이것이야말로 내가 곡선의 삶으로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는 이유다.

형편에 맞는 음악회나 미술관에 가는 문화 소비를 하며 삶을 즐겁고 재미있게 살아간다. 삶의 깊이는 통장 잔고가 아니라, 내면의 풍경에 의해 결정된다. 잃어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보다는, 그로 인해 얻게 되는 더 큰 즐거움과 행복에 집중한다. 삶의 깊이와 내공을 깊게 하고 싶다면, 망설이지 말고 책을 읽어야 한다. 책은 얄팍한 지식이 아니라, 세월의 풍파를 견디게 할 심지를 만들어 준다.

학생들에게 책을 읽어주며 느낀다. 이 작은 활자들이 아이들의 눈이 되고, 마음이 되어 세상을 보게 한다는 것을. 독서는 시력의 유무를 넘어, 통찰력이라는 마음의 시력을 키우는 근본적인 행위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그저 먼 노을을 바라보며 회한에 젖는 시간이 아니다. 독서로 다져진 내공은 우리에게 더 나이가 들기 전에 더 먼 길을 가고 싶은 용기를 선물한다. 과거에 집착하며 성을 쌓고 지키는 삶이 아닌, 미지의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용기 있는 발걸음이다.

나는 나의 발자국을 따라갈 것이다. 책에는 우리가 지어야 할 성채의 설계도가, 그리고 우리가 걸어야 할 곡선의 길이 펼쳐져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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