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사람이 행복을 만든다.
이 문장을 한참 들여다보다 보면, 단순해 보이지만 삶의 뿌리를 흔드는 힘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행복은 우연히 찾아오는 손님이 아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초대할 때 비로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존재다.
행복한 엄마는 아이에게 소리 지르지 않는다. 행복한 아빠는 술에 기대어 화를 쏟아내지 않는다. 행복한 아이는 친구를 밀어내거나 따돌리지 않는다. 이 단순한 사실 앞에서 우리는 스스로 묻게 된다. '나는 내 삶의 행복을 얼마나 책임지고 있었을까?'
대부분 사람들은 행복을 고생 끝에 얻는 상처럼 여긴다. 언젠가 한 번쯤은 찾아올 운수 좋은 날, 혹은 먼 미래 어딘가에 있을 거라 믿는다. 하지만 행복은 기다림의 대상이 아니다. 느끼려고 애써야 비로소 느껴지는 감각이다.
우리는 자라면서 그 사실을 배우지 못했다. 행복을 연습해야 한다는 것도, 행복이 또 다른 행복을 부른다는 것도. 그래서 사람들은 같은 패턴의 삶을 되풀이한다. 마음이 바뀌지 않으면 다시 태어난다 해도 삶은 똑같이 흘러갈 것이다.
아이의 마음은 부모의 마음을 닮는다. 한숨의 모양까지 닮고, 말투의 빛깔까지 비슷해진다. 그래서 어른의 마음은 늘 조심스러워야 한다. 행복한 사람이 결국 행복한 가정을 만드는 것이니까.
비교는 불행의 문이다.
사람들은 비교를 당연한 습관이라 여기지만, 사실 비교는 아주 오래전부터 불행의 씨앗이었다. 나를 다른 사람과, 내 아이를 다른 아이와 비교하는 순간 마음의 평정은 흔들린다. 비교하는 순간, 지금 가진 것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비교가 습관이 되어 있다면 그 유전자를 내가 먼저 끊어야 한다. 누구도 대신 끊어줄 수 없다. 내 삶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
목련을 오래 즐기는 방법은 꽃이 만개했을 때가 아니라 꽃봉오리일 때 그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것이다. 인생도 그렇다. 인생 꽃이 활짝 피어나는 시기는 아주 짧고, 그마저도 즐기기 전에 지나간다. 그러니 꽃봉오리, 아직 완성되지 않은 지금의 순간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옳고 그름을 우리가 온전히 판단할 수 없다는 말이다. 비판하는 말은 결국 비판으로 돌아오고, 평가하는 시선은 나를 향해 되돌아온다. 그러니 사람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 헤아림은 결국 나를 지키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품이 넓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참는 능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무조건 참는다고 품이 넓어지는 건 아니다. 사람을 바르게 이해하려는 공부, 인간을 이해하려는 노력 속에서 비로소 인내의 힘이 길러진다. 내 품을 넓히는 일은 결국 내가 나를 더 깊이 이해하는 과정이다.
삶이 어려울수록 행복해야 한다.
사는 것은 원래 어렵다. 어렵기 때문에 행복이 필요하다. 이것이 행복의 실용성이다. 행복한 사람은 더 잘 버티고, 더 잘 견딘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 행복의 파랑새는 늘 집에 있었는데 나는 너무 먼 곳에서만 찾았다. 행복으로 가는 길은 없다. 행복 자체가 길이다.
누군가에게 화가 나서 분노에 휩싸일 때, 우리는 그 사람에게 운전대를 넘겨주는 셈이다. 내 감정, 내 하루, 내 인생의 방향을 남에게 맡기는 일. 결국 가장 먼저 상처받는 사람도 나다. 그러니 내 삶의 운전대를 스스로 잡아야 한다.
지금 머무는 이 순간이 행복을 느끼는 정류장이다. 행복은 먼 곳에서 오지 않는다. '지금'을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이 행복의 시작이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비교하지 않는 마음, 헤아릴 줄 아는 마음, 행복을 선택하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행복한 사람이 행복을 만든다.
그 말은, 바로 지금의 내가 내 내일을, 내 가족을, 내 삶 전체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오늘 나는 어떤 마음을 선택할 것인가.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 행복은 지금, 여기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