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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포의 새벽을 걷다

by 권민정

소문만 듣던 천리포수목원에 처음 간 것은, 여름이 거의 끝나가던 8월의 어느 날이었다. 가을이 문턱에 와서인지 하늘이 무척 높고 구름 한 점 없이 푸른 날이었다. 파란 하늘 아래 무궁화 꽃이 수천수만 송이 피어 있는 그 동산을 처음 보았다. 구불구불한 오솔길을 따라 무궁화 꽃이 동산 가득 피어 있는 그 풍경은 경이로웠다. 흰색, 분홍색, 자주색, 붉은색의 꽃들이 홑꽃, 반겹꽃, 겹꽃으로 피어 있는데 조금씩 다른 그 많은 종류의 무궁화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무궁화 품종이 이렇게나 많다니!’하고 감탄했다. 꽃 중의 꽃을 장미라고 하지만, 무궁화 또한 장미 못지않은 아름다움을 뽐냈다. 품종이 300여 종에 이른다는 설명을 들었다.


“무궁화에는 벌레가 많다고 들었는데, 여기 것은 어쩜 이렇게 깨끗하고 탐스러운가요?”


내 질문에 수목원 직원은 웃으며 말했다.


“저희는 화학비료를 쓰지 않고, 퇴비만으로 토양을 가꿔요. 그러다 보니 병에도 강하고 벌레도 덜 끼지요.”


수십 년 동안 땅이 병들지 않도록 돌보고 가꾸었다는 말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땅속에서 일어난 일이, 결국 이렇게 고운 꽃을 피워냈다는 사실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그때 이후 나는 천리포수목원을 찾아가는 여행을 거의 철마다 한다. 특히 봄이면 목련을, 여름이면 무궁화를 만나러 간다. 하룻밤을 묵고 천리포의 새벽을 걷는다. 아무도 밟지 않은 숲길을 걷는 일은 마치 하루 전체를 고요히 여는 의식 같다.


30센티미터만 파도 소금 섞인 흙이 나오는 황량한 바닷가 땅을 일궈, 아시아 최초로 ‘세계의 아름다운 수목원’을 만든 돌아가신 원장님의 이야기가 그 산책길의 공기를 더욱 특별하게 만든다. 원장님은 새벽 산책길에 거미줄이 있으면 그것을 치우지 않으셨다고 한다.


“거미가 밤새 애써 지은 집인데, 내가 함부로 없앨 수는 없지요.”


나도 원장님처럼 거미줄을 피해 걸어 본다. 작은 벌레 하나도 죽이지 않으려고 조심하는 삶, 그것이 자연을 향한 사랑이라는 걸 나는 천리포에서 배웠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목련이다. 나는 그저 하얀 목련과 자주 목련 정도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천리포에서 수박 향이 나는 ‘불칸’, 사람 얼굴만큼 큰 꽃잎을 가진 ‘로부스터’, 딸기에 크림을 얹은 듯한 ‘스토로베리 앤드 크림’, 마치 선녀의 날개옷 같은 아름다운 분홍색 꽃 ‘스위트 하트’, 꽃잎이 일반 목련보다 많은 별 목련인 ‘라즈베리 펀’ 같은 목련들을 처음 보았다. 900여 종의 목련이 자라고 있는 이 수목원은 세계 수목원 중에서 가장 많은 품종을 자랑한다.


식물원에는 모든 나무가 이름표를 달고 있다. 원산지와 이 식물원에 식재된 날, 학명과 불리는 이름 등이 적혀 있다. 이름을 가진다는 것은 존재의 고유성을 인정받는 일이다. 병이 났을 때는 그 병력까지 기록으로 남긴다는 이 수목원은 모든 나무 하나하나의 기록을 보관하고 있다.


나무에도 감정이 있을까? 그 질문은 내 안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다. 원장님이 아침마다 찾아가 이름을 불러주고 말을 건네던 두 그루의 목련 나무가, 그분이 세상을 떠난 다음 해에 시들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나무는 그분이 다시 오지 않음을 알았던 걸까. 누군가를 매일 부르고, 다정하게 쓰다듬는 그 반복이, 살아 있는 존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가는지를 생각하게 했다. 고다 아야의 『나무』를 보면 그 역시 나무에게 감정이 있음을 느낀 것 같다. 죽은 가문비나무 위에서 자라는 나무 이야기에서 뜻밖에도 그 죽은 나무의 중심부에 온기가 있음을 알았고 그는 그 온기에서 나무의 감정을 보았다고 했다. 그는 상당한 주의를 기울여야 나무가 숨긴 감정을 찾아낼 수 있다고 말했다.


나무를 보러 일본 전국의 산을 찾아다니는 고다 아야에게 “묘목을 심는 사람에게는 그 나름의 마음이 있습니다. 한번 심은 나무는 평생의 자식으로 여기기 때문에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라고 산을 지키는 사람은 말했다. 똑같은 마음인 것 같다. 원장님은 “나무는 자식을 키우듯이 키워야 합니다.”라고 했다. 천리포의 숲길을 걷다 보면 돌아가신 원장님의 뜻을 받들어 이 식물원을 가꾸고 있는 가드너들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다.


무궁화의 여름이 지나면 나는 가을의 수목원을, 눈 덮인 겨울의 정원을 기다린다. 그리고 목련이 피는 봄이 다시 오기를 기다린다. 가끔은 특별한 날에만 개방되는 ‘비밀의 정원’을 걷는다. 남편과 나는 매달 적은 액수의 돈을 후원하고 식물원을 나의 정원처럼 즐긴다. 비밀의 정원을 걸을 수 있는 것도 특별한 혜택이다.

가지치기 정도도 손대는 일 없이 꽃 한 송이, 나무 한 그루 모두 본연의 모습대로 자라고 있는 수목원이다. 풀과 나무들, 나무 사이로 부는 바람, 잎이 흔들리는 소리까지 다 들리는 곳. 새벽에 그곳을 걷다 보면 고요가 기도처럼 느껴진다.


-격월간 《그린에세이》 2025. 9 10월호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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