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선

(발표 수필)

by 권민정

영화 〈기생충〉에는 “선을 넘는다”라는 말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운전기사를 하는 기택에게는 지하 방에서 나는 냄새가 배어 있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 냄새를 지울 수가 없다. 박사장은 “내가 원래 선을 넘는 사람을 제일 싫어하는데”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선은 담장처럼 서 있지 않다. 냄새로, 말투로 드러난다. 가난한 운전기사는 차 안에 남은 냄새 때문만이 아니라, 박사장과의 거리가 좁혀졌다고 느낀 순간에 선을 넘어간다. 그것은 잠시 같은 편에 서 있다고 착각한 감각이다. 그는 의도적으로 무례한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사장의 사적인 영역 안으로, 허락받지 않은 친밀감의 걸음을 반쯤 내디딘 것이다.


선은 보이지 않지만, 넘는 순간에만 또렷해진다. 이상한 일은 그 선이 어디에 있었는지 늘 나중에야 알게 된다는 점이다. 넘기 전에는 특별한 사건이 없다. 뒤돌아보았을 때에야 ‘거기 선이 있었다’라는 말이 뒤늦게 붙는다. 선은 경고하지 않는다.


2025년 동인문학상을 수상한 소설 《마산》을 읽으며 나는 그 말을 떠올렸다. 이 소설은 제목이 도시의 이름이라는 점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마산은 내 고향이다. 한때는 서부 경남의 중심도시였고, 민주화의 상징 같은 도시였다. 그러나 지금은 도시의 이름이 사라졌고, 젊은이들이 떠나고 싶어 하는 곳이 되었다. 소설 속에서 2021년을 사는 은재는 성실하다. 그러나 ‘마산’이라는 도시는 아버지의 호텔이 부도로 넘겨진 뒤, 은재의 시간을 조금씩 헐겁게 만든다. 희망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더 이상 손에 잡히지 않는다. 성실함은 다음을 보장하지 않고, 오늘은 내일로 연결되지 않는다. 은재의 곁에 친구 태웅이 있다. 둘은 아무도 찾지 않을 것 같은 섬에서 대마초를 키운다. 쉽게 ‘선을 넘은 선택’이라 불릴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선을 넘고 있다는 감각을 거의 갖지 않는다. 거기에는 결심의 장면도, 결연한 선언도 없다. 단지 시간이 그들을 기다려주지 않을 뿐이다. 선택은 결단이라기보다 살아가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생겨난 결과다. 넘고 있을 때는 범죄인지, 일탈인지, 생존인지 잘 보이지 않는다. 발은 이미 옮겨졌고, 몸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지방에서 대학을 나오고, 다시 지방으로 돌아온 젊은이들의 삶은 종종 짧은 문장으로 말해진다. “미래가 없다.” 그러나 이 말은 대답이 오지 않던 시간을 모두 생략해 버린다. 그 문장이 쓰이기 전에 이미 많은 시간이 흘렀다.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던 기회들, 기다려도 응답이 없는 시간. 그 시간은 사람을 서서히 다른 쪽으로 이동시킨다. 이 이동은 소리 없이 일어난다. 그래서 스스로도 언제 건너왔는지 알기 어렵다.


돌아보면 나 또한 아이를 키울 때나 직장에서 일할 때 선을 넘은 적이 많았을 것이다. 어느 지점이 경계였는지, 언제 발을 옮겼는지 또렷이 짚어 말하기는 어렵다. 무사히 넘어왔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최근 캄보디아 범죄 집단에 가담한 이들 가운데 지방대 출신이 많았다는 기사를 읽었다. 기사에는 숫자와 경로가 있었다. 나는 그 문장들 사이에서 또 하나의 말을 발견한다. ‘선을 넘었다’는 말. 그러나 그들이 넘은 것이 국경이었는지, 아니면 오래전부터 흐려지고 있던 도덕적 경계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출발과 결과는 기록되지만, 그 사이의 시간은 통계로 남지 않는다. 그 시간 속에서 사람들은 망설였고, 기다렸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하루를 반복했을 것이다. 어떤 선은 넘지 말아야 할 금지선이 아니라, 기다리는 동안 희미해져 결국 사라져 버린 자국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선을 넘었다고 말하지만, 어쩌면 선은 먼저 사라졌고 사람들은 그 빈자리를 지나갔을 뿐이다. 사라지는 선은 소리를 내지 않는다. 그래서 그것이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나중에야 알게 된다.


영화 〈기생충〉에서 문제는 선을 넘었느냐가 아니라, 누군가는 그 선을 늘 감각해야 하고 누군가는 그렇지 않아도 된다는 데 있다. 그 감각의 불균형 자체가 이미 하나의 계급이기 때문이다. 냄새로 드러나는 선은 지울 수 없고, 설명되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관계 속에 배치되어 있으며, 개인의 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감각이 아니다. 소설 《마산》의 인물들 역시 선을 의식적으로 넘는다기보다, 선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공간에 서 있다. 선택은 갑작스러워 보이지만, 실은 오래 누적된 시간의 끝이다. 한 발을 내딛는 순간은 짧지만, 그 발을 그곳까지 데려온 시간은 길다.


선을 넘는 사람들에 대해 말할 때 그들이 넘은 것이 정말 선이었는지, 아니면 선이 사라진 자리를 건넜는지 쉽게 말할 수 없다. ‘선을 넘었다’는 말은 또렷하지만, 그 말이 붙기 전의 시간은 늘 흐릿하다. 그 흐릿함 속에서 사람들은 살아왔고, 기다려왔다. 지금 필요한 것은 선을 넘지 말라는 경고가 아니라, 어떤 선들이 언제, 어떻게 사라지고 있는지를 오래 바라보는 일일지도 모른다. 선은 넘어가는 순간에만 드러난다. 사라질 때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늘 결과를 말하고, 그 이전의 시간을 놓친다. 어쩌면 선을 넘게 만드는 것은 우리 사회인지도 모른다.


계간수필》2026년 봄호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