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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민정 Apr 28. 2024

함께 사는 세상


 4월 20일이 장애인의 날이지만 우리 교회에서는 오늘 장애인 주일로 예배드렸다. 오늘은 특별 순서로 찬양대가 찬양하는 대신 우리 교회에 다니는 장애인들의 찬양이 있었다. 힘겹게, 그러나 최선을 다해 찬양하는 그들을 보니 눈물이 솟구쳤다.


 몇 년 전에 국민일보에 1년 동안 칼럼을 썼다. '바이블 시론' 코너였는데 성경을 통해 세상을 조명하는 글이었다. 금요일마다  4명의 필자가 돌아가며 쓴 칼럼이 사설 바로 옆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때  <함께 사는 세상>이라는 제목으로 장애인에 대해 쓴 글이다.



                         


                        

 

수필가 장영희 교수의 10주기가 되는 올해 그를 추모하는 몇 가지 행사가 있었다. 그를 사랑했던 사람들이 모여 추모제도 하고, 그의 책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100쇄 기념 특별판도 나왔다. 수필집 100쇄를 찍었다는 것은 그만큼 그의 글을 좋아하는 독자가 많다는 의미다. 소아마비 장애인으로, 결코 평탄하지 않았던 그의 삶에서 나온 진솔한 이야기는 많은 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준다. 그의 많은 글 중에서도 나는 수필 ‘킹콩의 눈’을 가장 좋아한다.
 
 ‘킹콩의 눈’은 Y대학 박사과정 시험 날 장애인은 받지 않는다는 면접 교수의 퉁명스러운 말을 듣고, 부모님께 낙방 소식을 조금이라도 늦게 전하기 위해 본 영화 ‘킹콩’에서 느낀 이야기, 그 킹콩이 꼭 자신과 같다고 쓴 글이다. “그 눈, 그 슬픈 눈을 나는 잊지 못한다. 그에게는 그녀를 사랑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가 인간이 아닌 커다랗고 흉측한 고릴라였기 때문에…. 그때 나는 전율처럼 깨달았다. 이 사회에서는 내가 바로 그 킹콩이라는 걸. 사람들은 단지 내가 그들과 다르게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나를 미워하고 짓밟고 죽이려고 한다.” 그는 편견과 차별에 의해 죽어야 하는 괴물이 아닌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는 곳으로 가기로 결심하고 이듬해 8월 전액장학금을 준 뉴욕 주립대로 가 공부한다. 1978년, 40년 전 일이다.
 
 30여 년 전 나는 원호병원 사회사업과에서 잠시 일을 했다. 그때 만난 한 청년의 눈물을 잊을 수 없다. 그는 대학 재학 중 군대에 갔다가 척추를 다쳐 하반신이 마비됐다. 수술도 여러 번 하고 병원에 몇 년을 입원해 있으면서도 병원 밖으로 나간 적이 거의 없었다고 했다. 딱 한 번 있었던 외출에서 너무나 큰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꼭 한번 가보고 싶었던 자기가 다니던 대학교에 어느 날 용기를 내어 갔다. 그런데 사람들이 휠체어를 타고 있는 자기를 원숭이 구경하듯이 둘러싸서 봤다는 것이다. 그는 그 이야기를 하며 서럽게 울었다.
 
 지금은 지하철에서, 길에서 휠체어를 탄 장애인을 보고 원숭이 구경하듯 보지 않는다. 장영희에게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입학을 거부했던 대학도 그런 차별을 하지 않는다. 그러면 이제는 우리나라의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없어졌을까. 결코 그렇다고 말할 수 없다. 30년, 40년 전보다는 많이 나아졌지만 장애인이 살기에 우리나라는 너무나 힘들고 불편한 나라다. 2007년에 ‘장애인 차별 금지법’이 제정돼 모든 생활 영역에서 장애를 이유로 한 차별을 금지하고 있지만 가장 기본적인 교육받을 권리에 있어서도 여전히 장애아들은 다닐 수 있는 학교가 부족하다. 장애아 부모는 학교를 짓게 해 달라며 지역주민에게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려야 한다.
 
 미국의 경우 90% 넘는 장애아들이 비장애아와 함께 공부한다. 어릴 때부터 같이 어울려 공부하며 서로가 배우는 것이다. 나와 다른 사람이지만 이상하게 보거나 차별하지 않고 ‘도우며 함께 사는 사람’으로 어울리는 법을 배운다. 재정 형편에 따라 주마다 다르지만 일반학교에 입학한 장애아에게는 보조선생님이 붙어 돌봐준다. 학교선생님과 학생들도 장애아가 학교에 잘 적응할 수 있게 도와준다.
 
 20년 넘게 장애아와 그 가족들 곁에서 지원활동을 해 온 정신분석학자 시몬 소스는 책 ‘시선의 폭력’에서 “남을 죽이는 시선이 있다. 무관심을 드러내는 사회적 행동이 있다. 휠체어가 다닐 수 있도록 도시를 정비하지 않는 것, 장애인에게 일자리를 보장하지 않는 것, 장애아들을 위한 돌봄 시설보다 장애인들의 불임수술에 재정과 노력을 쏟아붓는 것이 모두 무관심을 드러내는 사회적 행동이다”라고 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의 시선을 배우는 것이라는 한 신학자의 말에 공감하며 예수님은 장애를 가진 이들에게 어떤 시선을 보냈는지 생각해 본다. 예수님처럼 고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겐 없지만, 예수님처럼 따뜻한 시선만은 보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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