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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 읽는 엔지니어 Jan 20. 2024

칩워 - 크리스 밀러

넓고 깊고 정확하며 재미 또한 겸비한 놀라운 책

인상적인 구절 다섯 가지


1. "실리콘밸리 스타트업 창업자들은 이 회사 저 회사 돌아다니며 실질적인 "공장 밑바닥" 경험을 쌓아 나간 반면에 쇼킨은 모스크바의 장관 책상에서 명령을 하달했다."


2. "실리콘에 트랜지스터를 새겨 넣을 능력이 있는 자가 향후 세계 경제를 주름잡게 될 터였다. 팰로앨토와 마운틴 뷰 같은 캘리포니아의 작은 마을이 세계 패권의 새로운 중심지로 떠오르고 있었다."


3. "몇 년 전 학교를 떄려 부순 장발에 턱수염을 기른 꼬마들이 아니라, 우리야말로 오늘날 이 세상의 진정한 혁명가다."


4. "일본에서와 마찬가지로 한국의 하이테크 기업은 차고에서 태어난 스타트업이 아니었다. 정부 지원을 등에 업고 은행에서 저리로 대출받을 수 있었던 거대 재벌의 산물이었다."


5. "단기간에 높은 이윤을 내는 일에만 매몰되어 있다 보니 장기적인 기술 우위를 확보하는 일은 관심에서 멀어지고 말았다. 사내 권력이 엔지니어에서 경영자로 넘어간 것 또한 이런 변화를 가속화했다."


미국대학의 전기 컴퓨터 공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 반도체 기업에서 엔지니어로 일하는 나는 간혹 곤란할 때가 있다. 엔지니어가 아닌 사람들은 내가 요즘 최신 기술이라고 많이 보도되는 인공지능을 잘 알 거라고 생각한다던가 혹은 한국에서 중점을 두는 메모리 반도체에 대한 지식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 나의 세부 전공분야는 인공지능이나 메모리 반도체와는 거리가 한참 멀기 때문이다. 적어도 공학의 세계, 특히 산업계에서 일하는 엔지니어들은 자신의 특화된 분야를 잘 벗어나지 않는다. 다른 말로 하면 이미 기술과 지식이 매우 많이 고도화되어서 한 사람이 평생을 공부하고 일하며 갈고닦아도 한 전공을 다 알기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대학 때 전공이 한번 정해지고 석사, 박사를 거치면서 자신의 분야가 정해지며 또 박사 학위 이후에 자신만이 잘할 수 있는 특화된 분야를 또다시 좁혀 일하게 된다. 엔지니어나 연구자의 역량을 평가할 때에도 그 사람이 얼마나 넓게 많이 아느냐 보다는 얼마나 깊이 있게 하나라도 제대로 아느냐로 그 역량이 평가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이유로 나는 과학기술을 다룬 일반 대중서 또는 기사나 글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많은 경우 너무 좁은 자료조사로 인해 아주 지엽적인 내용을 전체인양 다루거나, 기술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수박 겉핥기 식의 글이거나 (특히 이런 글에는 "핵심", "매우 중요한" 같은 두루뭉술한 단어들이 많이 들어가는 게 특징이다), 혹은 그냥 대강 이해하고 자기 마음대로 글을 쓴 것인지 아예 틀린 내용을 당당하게 쓰는 경우이다.


이 책도 의심 반, 호기심 반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그야말로 충격적으로 퀄리티가 좋은 책이다. 내가 이전에 다녔던 회사, 지금 다니는 회사도 이 책에 등장할 뿐만 아니라 나에게 익숙한 많은 반도체 용어들이 나오지만 단어 하나도 잘못 설명되거나 사용된 부분이 없을 정도로 정확하며 내용은 아주 상세하고 또한 매우 방대한 내용을 아주 잘 추려놓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치 재미있는 역사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아주 재미있게 서술한 책이었다. 


그리고 이 책을 읽고 난 후 나의 느낌은... 심장이 뛴다. 내가 이 책에 나오는 기술의 방향을 바꾼, 혹은 기술이 한 단계 점프하게 만든 그런 위인 중에 한 명은 되지 못할 확률이 높겠지만, 그럼에도 혁명적으로 변해가는 기술 세상 속에 아주 작은 기여라도 할 수 있는 엔지니어로 일한다는 사실이 가슴이 뛴다. 그리고 나의 삶에 감사하다. 나는 그저 어린 시절부터 수학, 물리가 좋았고 그래서 이런 길로 자연스럽게 흘러오게 되었는데, 내가 가진 작은 재능으로 밥도 먹고살 수 있고 이 세상에 기여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감사하다.


어떤 엔지니어가 돼야 할까에 대해 고민해 본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라는 일반적인 노력은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요즘 내가 느끼는 점은 정말 자신의 일을 즐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남이 만든 기준을 맞추기 위해 열심히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아무리 잘나도 남이 정한 기준만큼만 세상에 기여할 수 있다. 정말 세상에 큰 기여를 한 사람들은 자신만의 생각으로 자신의 일을 사랑했기에 남들이 기대하고 예상했던 것을 뛰어넘어 세상에 기여를 했다. 


나는 이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처럼 세상에 큰 기여를 못할 수는 있지만 적어도 나만의 생각으로 나의 일을 사랑하는 삶을 언젠가 일을 놓는 그때까지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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