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으면 죽는 이야기

by 황 운

내가 그림을 그렸다면 어땠을까. 음악을 만들었더라면 어땠을까. 나는 글이 싫다. 지나가는 나뭇잎에도 속 편히 풀지 못할 감정을 대놓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이 방식이 나는 싫다. 찰나의 지나가는 누군가는 내 글을 필히 읽을 것이고, 그것이 술술 읽혔다가도 언젠가는 길을 잃어 문단을 오가고, 굳은 결심으로 처음으로 돌아가도 두 세 글자 정도는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자연스레 건너뛰는 이 방식이, 나에게 혐오감을 가져다준다. 그러니까 내가 오늘 할 말은, 얼마 전 무염한 인생을 산다고 했지만, 그것은 나에게 있어 전혀 좋은 방향은 아니라는 것이다.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나부터 착상해 볼까. 아니, 지금까지 내가 모아 온 수많은 잡념들로는 그저 이렇게 태어났음이라는 단 하나의 쓰레기 같은 이유가 무질서의 세계로 한데 모인다. 다시 말해 존나 답이 없다는 것이다. 이유를 찾으면 핑계가 생기고, 그 핑계는 이유가 아니었음을 반증한다. 이 따위의 것으로 내가 이렇게 되었나. 터무니없는 소리다. 진작에 죽고 말았을 것이다. 그렇다면야 나는 반드시 이런 사람으로 엄마의 몸에서 두 발 뻗고 나와 세상을 보았나. 세상은 이따위로 불공평하게 설계되었나. 내가 본 일본의 한 작가도, 그런 병신은 이 세상에 또 없지만, 그 병신마저도 거장 취급을 받으니 나라고 그렇게 태어나지 말란 법이 있나. 나는 그보다 특출 난 부분이 없는 더한 병신이겠지 라는 합리적인 생각으로 변질되었다.


이쯤 되니 나도 신을 한 번 찾아본다. 말 그대로, 찾아서, 본다. 그뿐이다. 그는 어떻게 목소리 한 번 기록되지 않고, 발자국 한 번 남기지 않고 수 세기동안 사람들의 주인이 되었나. 종교인들, 반박은 받지 않겠다. 실컷 믿어라. 나는 나대로 신의 가치를 믿을 테니. 내가 생각하는 신은 수염이 수북하고 하얀 옷을 입고 팔은 여섯 개 정도 되며 양반 다리를 한 채 한 손으로 오케이 싸인을 보내고 있다. 얼마나 인자하고 복합적인가. 아주 기분 좋은 이별을 하고 조금은 복잡한 재회를 한 날에 그에게 말을 걸었다. 씨발, 이게 한계니? 이왕 할 거였음 더 좆되게 하던가, 애초에 좆되지 않게 하던가를 간절히 바라는 하수인의 외침이었다.


나는 그랬다. 고요할 때면 늘 이런 시간이 찾아왔다. 그러니까 넘치는 행복을 바라지도 않았건만, 그렇다고 노력을 안 하지도 않았건만 으레 무의 정수에 가까운 시기는 결국 도래하고 말았다. 무의 정수란 말은 예전에 보던 웹툰에서 인용했다. 모든 것에서 싫증을 느끼는 시기. 정확히는 허해지는 마음이 나를 잠식한 상태. 그것이 왔다. 또.


변화를 한 번씩 줬던 것 같다. 이번엔 외국까지 온 상태다. 그래서인지 더 억울하다. 아예 지구를 나가버려야 하나. 어떤 경험을 해야 내가 완전히 바뀌어 다른 사람이 될까. 더 이상 뭘 어떻게 이 감정을 떨궈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그냥저냥 하소연하려고 글을 썼다. 일단 지금까지는 다시 말해 그냥 이렇게 태어났다는 게 내 결론이다. 주기적으로 무기력해지는 새끼. 공허함을 느끼는 새끼. 인생의 해답을 반드시 찾으려는 새끼. 어느샌가 잊었다가도 또 힘들어하는 새끼. 신에게 한마디 하자면, 나는 만사 오케이다 이 새끼야.


나의 해방일지는 좋은 드라마다. 해방이라는 단어에서 오는 위압감이 사람들의 시선을 앗아갔다. 쑥스럽지만 나에게도 적용되었다. 해방, 그래 씨발, 나도 해방이란 걸 하고 싶다. 내 힘으로 해방하고 싶다. 해방된다는 어리석은 말은 하지 말자. 그렇게 힘들어할 깜냥이 애초에 안되었던 것처럼 보이니까. 온전한 이유를 밝혀내 꼬인 실을 직접 풀어내기로. 해방은 그렇게, 내가 하는 것이니까.


확실한 건 글보다는 그림이나 음악 같은 예술이 나 같은 화자에겐 더 이롭다는 것이다. 나도 모르는 이유를 어떻게 백지에 적확하게 적어버리나. 두리뭉실하게 붓이나 멜로디에 담아버리지. 무서운 사실은 난 똥손에 음치라는 것이다.


아, 이 얼마나 아름다운 쓰레기통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