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유다."

-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by 나그네
Nikos-Kazantzakis-unknown-public-domain.jpg 그리스의 대문호(大文豪)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 문학의 거장 니코스 카잔차키스(Heraklion Nikos Kazantzakis, 1883~1957). 소설가, 시인, 극작가, 철학자, 언론인이다.

그리스 역사와 문화, 인간과 신 사이의 신비한 관계를 다룬 소설을 썼다. 시, 수필, 여행기 등을 썼고, 단테의 신곡이나 괴테의 파우스트 같은 고전 작품을 번역했다.

사회주의 정당 소속으로 장관을 지내는 등 정치적인 활동도 했다. 젊어서부터 유럽을 비롯한 세계 곳곳을 여행했고, 역사상 위인들을 주제로 한 비극을 많이 썼다.




"오스만 제국 치하(治下)의 크레타에서 태어나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1883년 2월 18일, 크레타(Crete)의 이라클리온(Heraklion)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미할리스(Kapetan Michalis)는 곡물과 포도주 중개상이었다. 덕분에 집안 형편은 꽤 괜찮았던 듯하다.

카잔차키스는 독립군의 후예다. 그의 어린 시절 크레타는 아직 오스만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오스만제국의 통치에 저항해 독립투쟁에 참여했다. 때문에 그의 가족은 여러 차례 피난 생활을 해야 했다.

자유를 위해 싸운 투사였던 아버지는 어린 카잔차키스에게 크레타인의 자존심과 자유의 소중함을 가르쳤다. 덕분에 카잔차키스는 튀르키예에 대한 적개심을 가졌으며, 발칸전쟁이 벌어지자 자원 입대하기도 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자유'를 향한 카잔차키스의 구도자적 삶의 배경이 된다.


그의 작품 중 하나인 《대장 미할리스(Freedom or Death)》(1953)는 1889년 크레타 사람들이 오스만제국에 지배에 저항하여 일으킨 무장투쟁에 관한 이야기다.

카잔차키스는 투쟁에 참가해 싸웠던 아버지 미할리스에게서 영감을 얻었다. '자유냐, 죽음이냐'라는 제목 자체에 자유를 갈망하는 크레타 사람들의 간절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seaofcrete-01.png 크레타는 에게 해 남쪽의 섬이다. 청동기 시대 미노아 문명의 발상지로 유럽 문명이 시작된 유서 깊은 섬이다. 가운데 위쪽에 카잔차키스의 고향 이크라리온(Heraklion)이 있다.




자신의 고향 크레타의 역사와 그곳이 처했던 비극적인 운명에 대한 카잔차키스의 감정은 남다르다. 다음은 1955년 5월 6일 프랑스 라디오와 가진 인터뷰 답변 중에서 그가 한 말이다.


저는 크레타가 그림처럼 아름답거나 웃음 짓게 하는 곳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모습은 엄숙합니다.

투쟁과 고통으로 주름져 있습니다.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 사이에 위치한 이 섬은 지리적으로 세 대륙을 잇는 다리가 될 운명이었습니다.

유럽에서 크레타는 동양으로부터 유래한 문명의 여명을 받은 첫 번째 땅이었습니다.


그리스의 기적이 일어나기 2,000년 전,

이른바 에게해 문명이라고 불리는 신비스러운 문명이 크레타 섬에 만발했습니다.

아직은 무지하지만, 생명력이 가득했으며,

놀라움과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색깔과 솜씨, 감각이 넘쳐흘렀습니다.

과거의 흔적에 벋서는 것은 헛된 일입니다.


저는 엄청난 투쟁과 고난을 겪은 고대의 대지에서는 광채, 마법의 광채가 발산된다고 믿습니다.

마치 땅 한 켠에서 몸부림치고, 울부짖고, 사랑했던 사람들이 사라진 후에도 무언가 남아있는 것처럼.


과거로부터 발산된 이 광채는 크레타에서 특히 강렬합니다.

당신이 크레타 땅에 발을 딛는 순간 그것은 당신을 관통합니다.

그러고 나면, 또 다른, 좀 더 구체적인 감정이 당신을 압도합니다.


이 섬의 지난 수 세기 동안의 비극적인 역사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땅에서 자유를 위해 싸운 사람들과 그들을 짓밟으려 날뛴 압제자들 간의 광란의 투쟁을 회고할 때,

꼼짝없이 할 말을 잃게 됩니다.


크레타 사람들은 죽음에 너무나 익숙해져서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수 세기 동안 그들은 너무나 많은 고통을 받았고,

죽음 자체가 그들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자주 증명했습니다.

숭고한 이상의 승리를 위해서는 죽음이 필요하고, 구원은 절망의 절정에서 시작된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맞아요, 진실은 들이켜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투쟁과 삶에 대한 갈망으로 강인해진 크레타 사람들은 한 잔의 찬물을 마시듯 그것을 들이마십니다.

미궁 같은 크노소스 궁전. 크레타 이라클리온 남동쪽 5km에 있다. 기원전 1700년 경 건축되어 기원전 1400년까지 이용됐다. 반은 인간이고 반은 황소인 미노타우로스가 살았다.




그리스 최고의 신 제우스가 자라난 신화의 보금자리 크레타(Crete)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제우스의 아버지 크로노스는 자신이 아들에 의해 왕좌에서 쫓겨날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 자식을 낳는 족족 먹어 삼켜버렸다.

이에 제우스의 어머니 레아는 크레타로 가서 동굴에서 비밀리에 제우스를 낳고 요정과 정령에게 맡겨 키우도록 했다. 대신 크로노스에게는 포대에 싼 돌덩이를 넘겼고, 크로노스는 이를 아이라고 믿고 삼켜버렸다. 제우스는 염소젖을 먹으며 크레카 산속에서 자랐다.

성장한 제우스는 지혜의 여신 메티스의 도움을 받아 크로노스가 삼킨 형제 다섯을 모두 토해내도록 했다. 이후 제우스와 오 남매는 힘을 합쳐 크로노스와 싸워 이겼다. 그리고 제우스는 하늘, 포세이돈은 바다, 하데스는 저승을 다스리게 되었다.




글 쓰기를 좋아하던 철학도(哲學徒)


어린 카잔차키스는 크레타를 떠나 낙소스(Naxos)의 성십자 프란치스코 학교를 다녔다. 1902년에는 아테네대학에 입학, 법학을 공부했다. 변호사가 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뜻에 따른 것이다.

글쓰기를 좋아했던 그는 졸업 전에 에세이와 소설, 희곡 등을 써 출판했다. 학창 시절에 쓴 희곡 《날이 저문다(Day Is Breaking)》가 드라마상을 수상하고, 상연까지 되면서 그는 순식간에 유명해졌다.

니체(F. Neitzsche)와의 만남은 그의 인생과 문학 세계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그가 깊이 빠져든 니체의 사상은 절망적인 순간에 울려 퍼지는 '디오니소스의 춤' 같은 것이었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은 〈프리드리히 니체, 정의와 국가 철학에 관하여〉(1906)였다.


졸업 후 1907년부터 3년간 프랑스 소르본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그곳에서 프랑스의 유명한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의 가르침에 큰 영향을 받았다.

그는 베르그송의 핵심 사상인 '생명악동(élan vital)'에 심취했는데, 이는 생명과 의식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고 끊임없이 변화하고 움직이며 자신을 초월하는 동적인 힘이라는 개념이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조르바는 이 '생명 약동'의 정신을 몸소 실천하는 자유롭고 투쟁적인 인간상이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 유학 시절 카잔차키스는 니체 사상을 본격적으로 탐구했다. 니체의 사상은 카잔차키스에게 근본적이고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니체는 자기 극복과 자유 추구라는 그의 작품 세계와 정신을 깊숙이 관통한다. 그것은 마치 그의 생애 내내 흐르는 혈관 속 피와 같았다.

카잔차키스는 니체를 통해 인간 존재의 한계와 고난, 절망을 극복하고 스스로의 삶을 창조하는 삶을 배웠다. 니체의 위버멘쉬는 기존의 도덕과 이념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자신을 믿고 운명을 극복하는 존재였고, 조르바는 바로 이 정신을 구현하는 인물이다.

카잔차키스는 《영혼의 자서전》(1947~1948)에서 그리스도, 붓다와 함께 니체의 가르침을 통해 자신의 영혼이 성장했다고 고백했다.




귀향과 두 번의 결혼, 공직 생활의 경험


1911년 고향 크레타로 돌아와 번역과 사전 편찬 등의 일을 했다. 키프로스, 이집트, 중국 일본 등을 여행했고, 소비에트 연방에도 여러 차례 방문하여 사회주의 건설 작업을 지켜봤다. 《오디세이아》(1938)와 같은 작품도 집필했다.

귀향 직후 아테네 대학 동문이던 갈라티아 알렉시우(Galatea Alexiou)와 결혼했다. 작가이자 페미니스트였던 그녀와 문학과 예술적 이상을 공유했으나 성격과 가치관의 차이로 불화가 잦았다. 문학과 예술을 위한 삶과 현실적인 부부 생활을 놓고 충돌하곤 했다고 한다. 1926년 별거 후 1929년 이혼했다.

1918-zormpas.jpg 카잔차키스에게 큰 영감을 주고, 조르바의 모델이 된 요르기스 조르바스(Georgios Zorbas, 1867-1942). 《영혼의 자서전》에서 그를 '스승'이라고 칭했다.

1912년 발칸전쟁이 일어나자 자원입대했다. (같은 크레타 출신인) 베니젤로스 총리의 개인 집무실에 배속됐다. 1914년부터 몇 년간 시인 시켈리아노스와 함께 여행을 다녔고, 동화책 등을 썼다. 이 기간 동안 단테의 작품에 심취했다.

1916년에는 전쟁으로 석탄이 부족해는 상황을 틈타 펠로폰네소스에서 갈탄 광산 개발사업에 뛰어들었지만, 여섯 달 만에 거덜 나 버렸다. 이때 조르바의 모델이 된 요르기스 조르바스(Georgios Zorbas)를 갈탄 사업의 현장 책임자로 고용했다. 자유롭고 열정적인 조르바스는 깊은 인상을 남겼고, 이후에도 인간적인 인연을 이어갔다.

서른여섯 살인 1919년, 그리스의 근대화를 이끈 베니젤로스 총리에 의해 공공복지부 국장으로 임명되어 재외 그리스 난민들의 국내 송환을 추진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코카서스 지역에서 살다가 처형당할 위기에 빠진 약 15만 명의 그리스 국민들이 본국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지원했다.


그는 사회 민주주의가 시대적 과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좌파 지식인이었다. 한때 공산주의에 심취했지만 스탈린 등장 이후의 소비에트 공산주의에 반감을 가졌다. 1945년에는 좌파 정당의 지도자가 되었고, 연립정부의 정무 장관직을 맡기도 했다.

마흔한 살이던 1945년 두 번째 결혼을 했다. 자신보다 스무 살이나 적은 엘레니 사미우(Eléni Samiou)를 만나 오랫동안 파트너로 지내다 1945년 11월 재혼했다. 부인 엘레니는 평생의 동반자로서 카잔차키스의 집필에 크게 기여했다.


"그의 곁에 있던 33년 동안, 나쁜 행동으로 부끄러워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요.

그는 정직하고, 속임수가 없고, 순수했죠.

다른 사람에게는 끝없이 상냥했지만, 자기 자신에게는 치열했어요."

- 부인 엘레니가 남편 카잔차키스에 대해 회고하며 한 말




여행('인생의 방황')과 구도자(求道者)의 삶


'20세기의 오디세우스' 카잔차키스에게 여행은 인생의 방황이자 구도의 과정이었다.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러시아 같은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물론이고 아프리카, 아시아(중국, 일본 등)를 여행했다. 잠시 스쳐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한 곳에서 몇 개월 또는 몇 년씩 머물곤 했다.

여행을 통해 그는 다양한 생활 모습과 사상, 이데올로기를 접했다. 무솔리니를 만났고, 레닌을 존경했고, 스탈린을 경멸했다. 이때의 경험을 담은 여행기는 여행 문학의 걸작으로 꼽힌다. 1936년에는 신문사 특파원으로 스페인 내전을 취재·보도하기도 했다.


카잔차키스는 어려서부터 영적 혼란 속에서 삶에 대한 불안에 시달렸고, 실존적 질문에 매달렸다. 젊어서는 니체 철학(무신론과 위버멘시 사상)에 심취했고, 신학을 비롯하여 불교, 공산주의 등에 대해서도 깊이 탐구했다.


나는 피와 땀과 눈물로 빚은 작은 한 덩이 흙만 남을 때까지 내 갈까마귀 영혼의 소중한 깃털을 하나씩 하나씩 뽑으리라. 나는 짐을 벗기 위해 당신에게 내 투쟁의 이야기를 하겠노라. 나는 짐을 벗기 위해 미덕과 수치와 진실을 던져 버리겠노라. - 카잔차키스 《영혼의 자서전》(상)(2008)

카잔차키스 서거 60주년 기념 2유로 동전(2017년 그리스 정부 발행)




"철학적 성찰 속에 인간 존재를 깊이 탐구하다."


'20세기 문학의 구도자'로 불리는 카잔차키스의 글은 열정적이고, 생생하고, 반항적이고, 예측 불가능하고, 종종 신비롭다. 그는 소설과 시, 희곡, 기행문, 에세이, 아동소설 등 방대한 작품을 남겼다. 예순을 넘겨서 화제성이 높은 작품들을 남긴 것이 눈에 띈다.

《오디세이아》(1938)는 14년에 걸쳐 쓴 방대한 서사시다. 33,333개의 구절과 24개의 랩소디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스인 조르바》(1946), 《그리스인의 열정》(1948), 《그리스도의 마지막 유혹》(1951), 《대장 미할리스》(1953),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는 그리스도》(1955) 등이 그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카잔차키스는 니체의 위버멘시 사상,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론, 불교적 세계관, 실존주의적 탐구 등을 결합해 독창적인 철학을 형성했다. 인간이 끊임없는 투쟁과 변화하는 존재라고 보았고, 완전한 해답보다는 끝없는 탐구를 강조했다.


신성(神性)과 인성(人性) 사이에서 갈등하는 예수의 인간적 면모를 다룬 《그리스도의 마지막 유혹(The Last Temptation of Christ)》(1951)은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교회는 크게 반발했다. 이단, 신성모독, 불경죄로 비난했고 단죄하려 했다. 이에 대해 카잔차키스는 예수의 인간적 고뇌를 통해 영적 투쟁을 탐구한 작품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1954년 교황청이 금서 목록에 올리자 카잔차키스는 "주님, 당신의 법정에 상소합니다.(Ad tuum, Domine, tribunal appello)"라는 라틴어로 쓴 문구를 바티칸에 보냈다. 가톨릭 교회와 같은 세속적 기관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자신을 심판할 수 있다고 밝힌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모습. 영화 《그리스도의 마지막 유혹(The Last Temptation of Christ)》(1988)의 한 장면

소설은 30년 후인 1988년 마틴 스콜세지(Martin Scorsese) 감독에 의해 영화화됐다. 기독교인들은 격렬하게 반발했고, 몇몇 나라에서는 상영이 아예 금지됐다. 파리에서는 개봉 중단 요구를 거부한 영화관이 시위자들에 의해 불태워졌다.

우리나라에서도 1988년 수입됐으나 상영을 못했고, 14년이 지난 2002년에 겨우 관람이 가능해졌다.


당신은 나를 저주했지만, 나는 그대를 축복합니다.

바라노니, 그대의 양심이 나만큼 깨끗하기를, 그대가 나처럼 도덕적이고 경건하기를.

You gave me a curse, Holy fathers, I give you a blessing:

may your conscience be as clear as mine and may you be as moral and religious as I.

- 카잔차키스가 그리스 정교회 성직자들에게 쓴 글귀




"카잔차키스가 저보다 100배는 더 노벨문학상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 알베르 카뮈


카잔차키스는 노벨문학상 후보에 모두 아홉 차례나 올랐지만 상을 받지는 못했다. 1957년에는 알베르 카뮈에게 1표 차로 밀려 수상을 못했다고 한다. 노벨상 선정 과정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지기 때문에 사실을 확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정설처럼 알려져 있긴 하다.

문학적으로는 더할 나위 없을 정도의 평가를 받았지만, 교회의 반발과 정치적 성향 및 활동(사회주의 성향과 러시아 혁명에 대한 긍정적 평가), 냉전 분위기 등을 보수적인 스웨덴 아카데미가 수용하지 못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한편에서 보면, 그리스 출신의 작가라는 점이 작용한 건 아니었을까? 실제로 그리스어로 쓰인 그의 작품은 번역하기가 까다로워 국제적으로 알려지고 평가받는데 한계가 있었다고 한다.

예컨대, 그가 프랑스인이었다면 이미 노벨문학상을 받았을 것이다라거나 카잔차키스가 러시아어로 작품을 썼더라면 그는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을 것이다라는 말이 나오는 것을 보면 그리스인이 쓴 그리스어 작품이 제대로 평가받는 것은 쉽지 않았던 듯하다.


1957년에는 건강 악화로 입원 중이었음에도, 카잔차키스는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알베르 카뮈에게 축하 전보를 보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축전을 보내고 얼마 안 지나 그는 사망했다.

카뮈는 그의 사망 후 미망인에게 편지를 보내 축전에 고마움을 표시하면서 "카잔차키스가 저보다도 백 배는 더 이 영예를 누려야 마땅했다."라고 언급했다. 겸손함을 담은 의례적인 말일 수도 있지만, 카뮈의 성품을 고려하면 진심 어린 존경심을 담은 헌사였다고 여겨진다.


저는 항상 당신의 남편을 동경했고, 어쩌면, 흠모했습니다. 저는 또한 카잔차키스가 저보다는 100배나 더 누릴 자격이 있었던 영예를 수락해야 했던, 그래서 제가 너무도 슬펐던 그날, 그에게서 더할 나위 없이 너그러운 축하 전보를 받았던 사실을 잊어버릴 수가 없습니다. 곧이어 저는, 그 메시지가 그가 세상을 떠나기 불과 며칠 전에 쓰였다는 사실을 알고 소름이 끼쳤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남으로써, 우리는 최근 가장 위대한 예술가 중 한 명을 잃었습니다.


당시 그리스 출신 작가가 프랑스의 저명한 작가를 누르고 노벨 문학상을 받기는 어려웠던 듯하다. 카잔차키스는 1951년에는 스웨덴 작가에게, 1956년에는 스페인 시인에게 밀려 수상하지 못하기도 했다.

196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장 폴 사르트르는 철학적, 정치적인 신념에 따라 수상을 거부했지만, 유럽의 주류 사회를 중심으로 수상자가 선정되는 행태에도 거부감을 드러낸 바 있다.

카잔차키스의 작품을 매우 높이 평가했던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는 카잔차키스처럼 나에게 감동을 준 이는 없다. 그의 작품은 깊고, 지니는 가치는 이중적이다라고 극찬했다. 그는 카잔차키스에게 상이 돌아가지 않는 걸 보고 노벨 문학상은 가치가 없는 상이라고 야유했다.

글쎄~, 거꾸로 만약 카잔차키스가 그리스인이 아니었다면, 《그리스인 조르바》라는 걸작을 쓸 수 있었을까?

Nikos-Kazantzakis-credit-Museum-e1626953738379.jpg 노년의 니코스 카잔차키스 모습(출처 : 카잔차키스 박물관)




'과로에서 위안을 얻는 사람', 카잔차키스


1957년 카잔차키스는 백혈병을 앓으면서도 부인과 함께 중국과 일본으로 여행을 떠났다. 돌아오는 길에 독감에 걸려 독일 프라이부르크로 이송되었다가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그해 10월 26일, 일흔네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스 정교회는 그의 시신을 교회 묘지에 안장하는 것을 거부했다. 시신은 크레타로 운구되었고, 베네치아 마르티넨고 요새((Martinengo Bastion) 성벽의 가장 높은 지점에 묻혔다. 이라클리온의 산과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위치한 곳이었다.

카잔차키스는 세상에는 세 종류의 영혼이 있다고 한다. 일하고 싶어 하는 사람, 일하기를 너무 싫어하는 사람, 그리고 과로에서 위안을 얻는 사람이다. 그는 스스로를 세 번째 종류로 분류했다. 죽음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도 멀리 여행을 떠났고, 쉼 없이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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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타 이라클리온의 카잔차키스의 무덤과 묘비명. 화려한 장식 없이 단순하고 소박하다. 대리석에는 이름이나 사망일도 적혀 있지 않고, 그의 철학을 담은 묘비명만 새겨져 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I hope for nothing. I fear nothing. I am free.

Δεν ελπίζω τίποτα. Δε φοβούμαι τίποτα. Είμαι λεύτερος.

-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墓碑銘). 자신의 작품 《오디세이아》에 썼던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