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없는 숲 속에서'

- 버클리(G. Berkeley)의 주관적 관념론에 대하여

by 나그네

〈아무도 없는 숲 속에서〉라는 드라마가 있다.

한여름 나타난 수상한 손님으로 인해 조용한 마을의 평온하던 일상이 무너지는 서스펜스 드라마다.

영상미와 효과음이 돋보였고, 배우들 연기도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건 드라마 첫 장면의 독백이다.


"아무도 없는 숲 속에서 커다란 나무가 쓰러졌다. 쿵 소리가 났겠는가, 안 났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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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적 경험론자 버클리는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Esse est percipi)"라고 선언했다.

우리가 '존재'라 부르는 것은 결국 우리가 '지각하는 것'의 총합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관적 관념론은 현실의 모든 것을 지각의 산물로 환원한다.


의문이 남는다.

지각이 존재를 규정한다면, 인식되지 않는 '잠재적 존재'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예컨대, 내가 방을 떠난 뒤에도 의자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면

그것은 누군가 지각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지각과 무관하게 의자 자체가 존재하기 때문일까?


성공회 주교 버클리의 답은 분명했다.

세상을 언제나 바라보고 있는 신=영원한 지각자(eternal perceiver)가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신의 의식 속에 있기 때문에, 지각하지 않는 순간에도 세계는 사라지지 않는다.


흥미롭게도, 현대 과학은 버클리의 사유를 부분적으로 뒷받침한다.

소리(sound)는 인간의 뇌가 공기의 진동을 해석한 결과다.

그런 의미에서 아무도 없으면 '진동'은 있어도 '소리'라는 청각적 경험은 없다.

소리는 객관적 물리 현상이 아니라, 주관적 인식 과정의 산물이다.

때문에 '존재는 지각되는 것'이라는 버클리의 명제는 물리학적 언어로도 일리가 있다.


현대 물리학, 특히 양자 역학은 또 다른 의미에서 버클리의 사유와 맞닿아있다.

입자의 상태는 관측되기 전까지 '결정되지 않은(superposition)' 상태에 머문다.

지각(관측)이 존재를 현실화한다.

철학적으로 보면, 버클리의 주장 - '존재는 지각되는 것' - 은 현대 과학의 언어로 다시 태어난 셈이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현대 과학은 '진동'과 '소리'를 동시에 바라본다.

'진동'을 지각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물리적 실재'임을 인정한다.

경험을 통해 존재하는 '주관적 실재'인 '소리'만을 주장하는 버클리의 급진성과 어긋난다.


아무도 없는 숲 속에서 일어난 일은, 아무도 몰랐기에 '의미'가 없을 수 있다.

아무도 듣지 않았고, 아무도 그것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미 없음'이 곧 '존재하지 않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소리는 지각의 산물이고, 진동은 그 배경이다.

존재는 지각에 의해 의미를 얻지만, 지각이 닿지 않아도 존재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숲에서 나무가 쓰러졌는데 소리를 들을 사람이 주변에 아무도 없다면, 나무는 소리를 낸 것일까?

If a tree falls in a forest and no one is around to hear it, does it make a so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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