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의 땅에는 인간이 설 자리가 없다"

최인훈의 소설 《광장》 다시 읽기

by 나그네

시대가 몰아 넣은 인간 조건에 대한 비명(悲鳴)


"동무는 어느 쪽으로 가겠소?"

"중립국."


북한군 포로 이명준은 '중립국'이라는 말을 아홉 번이나 반복했다.

남과 북 양쪽으로부터 설득과 회유, 강요와 협박이 거듭됐지만 답은 한결같았다.

짧고 굵은 한 마디 '중립국'.


아무도 나를 아는 사람이 없는 땅. 하루 종일 거리를 싸다닌대도 어깨 한번 치는 사람이 없는 거리.

명준이 가길 원한 곳이었다.




1950년 여름, 한반도는 피비린내로 가득했다.

총성과 포연이 자욱했다.

끔찍한 피의 살육이 이어졌다.

150만 명의 목숨이 산산이 흩어졌다.


그것은 '나'의 선택이 아니었다.

분단도, 전쟁도 오롯이 ‘남’에 의해 강요된 운명이었다.

그날 이후 이땅의 사람들은 각자의 광장에서 서로 다른 깃발을 흔들며 살았다.

이념의 깃발이 펄럭이는 땅은 인간의 설 자리를 빼앗아갔다.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전쟁은 나쁘다."고.

그러나 인류 역사는 전쟁으로 점철되어 왔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집단은 하나의 생명체처럼 움직인다.

그러나 가장 거대한 생명체인 국가에는 머리는 있어도 심장은 없다.

애국이라는 이름의 북소리가 울릴 때, 개인의 목소리는 모래알처럼 흩어진다.


조국은 피를 요구한다.

폭력과 살인은 정당화된다.

면죄부가 주어진다.

개인은 어느새 짐승이 되어 철조망 사이에서 서로의 피 냄새를 맡는다.




"우리는 누구를 위해 싸우는 거죠?"

"조국(Fatherland)을 위해 싸우는 거지."

"그럼 프랑스 놈들은 누구를 위해 싸우는 거죠?"

"모국(Motherland)을 위해 싸우는 거지."

"그럼 누가 옳은 거죠?"

"그야 이긴 놈이 옳은 거지."

- 영화 〈서부전선 이상 없다〉 중에서 독일 군인들 간의 대화


이긴 놈이 옳다.

간단하다.

명쾌하다.

동시에 참혹하다.


누가 옳은가는 따지지 않는다.

누가 이기는가만 답이 된다.


서부전선에서는 불과 몇 백 미더의 진흙탕을 차지하기 위해 수만 명의 젊음이 스러졌다.

들판은 푸르름 대신 핏빛으로 물들었다.


전쟁터에서 구두공 출신의 고참병 카친스키는 말한다.

"사실 전쟁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런데 느닷없이 전쟁이 터지는 거야.

우린 전쟁을 바라지 않았어.

다른 사람도 그렇게 주장하지.

그런데도 세계의 절반이 전쟁에 참가하고 있어."

전쟁을 바라지 않던 병사들을 몰아넣은 그 지옥의 현장은, 전쟁의 부조리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우주에서 지구를 내려다본 칼 세이건은 말했다.

지구는 '창백한 푸른 점'이라고.

그곳에 국경선은 없다고.


그러나 인간은 지구 위에 선을 긋고, 깃발을 꽂고, 조국의 이름으로 서로를 겨눈다.

국경은 총칼이 되어 사람들의 살과 뼈를 가른다.


2천 5백여 년 전, 도가(道家)의 사상가 양주(楊朱)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외쳤다.

"내 터럭 하나를 뽑아 천하가 이로워진다 한들 하지 않겠다!" 拔一毛而利天下, 不爲也.

그것은 고집이 아니었다.

인간을 집단의 희생양으로 만들려는 모든 시도에 대한 단호한 거부였다.




광장을 벗어난 이명준은 바다로 향했다.

광장은 이념의 공간이었다.

바다는 그의 유일한 안식처였다.


그는 말했다.

"시시한 소리 마라.

역사는 흔히 개가죽을 쓰고 호랑이 춤을 추지 않더냐.

때가 되면 개가죽은 헌 개가죽처럼 동댕이쳐질 텐데 왜 어리궂게 앙앙거리느냐.

국으로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어라."

광장에서 살아갈 수 없었던 인간의 절규다.


조국, 이념, 전쟁. 이 모든 단어들은 인간을 구원하기보다 짐승으로 만든다.

그러나 그 앞에서 터져 나오는 병사들의 넋두리, 양주의 외침, 이명준의 절규 단순한 푸념이 아니다.

시대가 몰아넣은 인간 조건에 대한 비명이다.

그것은 쓰라리지만, 동시에 우리가 아직 인간임을 증명하는 가장 뜨거운 몸부림이도 하다.

부조리한 세상에서도 치열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시지프스처럼.


이념의 땅에서 이런 이야기를 읊조리는 건 허황된 일일까?


201502021621010446_1.jpg 소설 《광장》의 삽화. 중립국으로 가는 배 위에 서 있는 명준. 크고 작은 새를 보고 죽은 은혜와 태어나지 않은 딸을 떠올린 명준은 끝내 바다에 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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