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다시 읽기
- 《그리스인 조르바》 다시 읽기
니체의 아폴론-디오니소스 구도를 통해 《그리스인 조르바》를 해석하는 방식은 유용하다. 조르바와 '나'의 대립적 관계를 통해 인간 내면의 이중성과 삶의 모순을 탐구하고자 하는 소설의 핵심 주제를 파악하는데 도움을 준다. 카잔차키스가 스스로를 '니체의 제자'라고 부를 정도로 니체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그러나 이 같은 해석이 작품의 역사적, 문화적 맥락을 비롯한 다층적인 면모를 모두 설명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작품에 담긴 인물의 복잡성과 모순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카잔차키스가 가졌던 실존주의적 문제의식이나 종교적 탐구 등에 대한 보다 심층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여성 혐오라는 비판도 감안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다 깊이 있는 탐구는 뒤로 미뤄두고, 여기서는 아폴론-디오니소스 구도를 바탕으로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은 소감을 정리해 본다. 소설을 다시 펼쳐들며 느낀 감흥이 사라지기 전에.
야성의 조르바 vs. 이성의 '나'
《그리스인 조르바》를 덮으면, 두 개의 풍경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단테의 《신곡》을 옆에 끼고 사색하는 '나', 바닷가에서 신명나게 춤사위를 벌이는 조르바.
'나'는 늘 머뭇거리며 생각의 그물에 스스로를 가두는 책상물림이다.
조르바는 삶을 불꽃처럼 태우며 자유를 노래하는 '야성의 영혼'이다.
니체는 삶을 두 개의 원리로 나눴다.
태양처럼 빛나는 아폴론, 포도주에 취한 디오니소스.
각각 이성적 통제와 본능적 긍정을 상징한다.
니체는 비극의 힘은 이 둘의 긴장과 화해에 있다고 보았다.
이 둘의 조화·융합이 새로운 삶의 에너지를 창출한다.
니체의 《비극의 탄생》이 철학적 선언이라면,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는 그 선언을 살아 있는 인간의 서사로 변주한 작품이다.
조르바는 디오니소스적인 자유와 긍정의 화신으로,
'나'는 아폴로적인 이성과 질서의 페르소나로 그려진다.
조르바는 불빛을 향해 날아드는 나비처럼 본능에 몸을 맡긴다.
노래하고 춤추며 순간을 뜨겁게 살아간다.
그의 격정은 때로는 파괴적이고 무책임하다.
'나'의 사유는 생기가 없다.
차갑고 메마르다.
글과 사색으로 삶을 붙잡으려 한다.
달빛에 얹힌 그림자처럼 한발짝 물러나 세상을 바라본다.
경계 위에서 흔들리는 인간
조르바와 '나'의 만남은 곧 인간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충돌하는 두 목소리의 대화다.
그러나 이 두 목소리는 끝내 화해하지 못한다.
'나'는 조르바의 삶을 부러워하지만, 그의 세계에 완전히 발을 들이지 못한다.
대다수가 이와 다르지 않다.
책을 열면 조르바의 불꽃같은 삶에 매혹되지만,
책을 덮고 나면 다시 일상의 균형으로 돌아가게 마련이다.
삶을 춤추듯 긍정하기를 꿈꾸지만, 여전히 이성과 질서의 울타리에 머문다.
조르바는 한밤중에 스쳐 지나가는 별빛과도 같은 존재인 것이다.
그 간극 앞에서 우리는 흔들린다.
조르바처럼 살 수 없다는 사실은 때로 안도감을 준다.
그러나 동시에 그처럼 뜨겁게 살지 못하는 내 삶이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어쩌면 인간은 늘 그 간극 위에 머물러야 하는 존재일 것이다.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 아폴론적 인간이며, 조르바는 우리 안에 깃든 디오니소스의 초대다.
그런 면에서 《그리스인 조르바》는 '아폴론적 인간이 디오니소스적 삶 앞에서 느끼는
부러움과 좌절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책을 덮은 뒤에도 조르바의 웃음과 춤사위는 오래도록 뇌리를 맴돌며
우리 삶을 흔들어 놓는다는 사실이다.
그 흔들림이야말로, 우리가 이 책을 다시 펼치게 되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태양이 있으면 그림자가 생겨나고, 바다가 있으면 파도가 일렁이듯, 삶은 원래 모순과 대립을 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