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다시 읽기
한동안 '야성의 영혼' 조르바에게 푹 빠졌다.
거침없이 삶을 향해 달려드는 그의 자유분방한 몸짓,
책과 이론 따위는 가볍게 여기며 살과 피로 부딪치며 살아가는 기세,
삶을 사랑하면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대담함은 읽는 내내 가슴을 두드렸다.
그가 바닷가에서 춤추던 장면에서는 함께 어울려 어깨를 들썩이고 싶다는 충동까지 일었다.
그러나 책장을 덮은 뒤, 마음 한켠에는 씁쓸함이 남았다.
그가 부르는 자유의 노래 뒤편에 드리운 어두운 그늘 때문이다.
책 속에서 거듭 되풀이되는 여성을 조롱하고 멸시하는 언행, 쉼 없이 노골화되는 원초적인 욕망은
단순한 농담이나 기행으로 넘어가기 어려웠다.
여성은 인간이 아니다.라는 명제가 다양하게 변주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왜 많은 여성들이 "책을 집어던지고 싶다"라고 질색하는지 조금은 알 수 있었다.
소설 속에서 조르바가 여성에 대해 내뱉는 말들은 이런 식이다.
"… 여자에게 뭘 기대할 수 있겠어요? 한다는 짓이, 처음 만난 사내와 붙어 새끼를 까놓는 게 고작이오. 사내에게서 뭘 기대할 수 있겠어요? 사내들이란 그 덫에서 걸리고 맙니다. 내 말 명심해 둬요. 두목도!" (108-109쪽)
"여자는 맑은 샘물과 같습니다. 거기 들여다보면 모습이 비칩니다. 마시면 되는 겁니다. 뼈마디가 녹신 녹신할 때까지 마시면 되는 겁니다. 이윽고 목이 마른, 다음 사람이 옵니다. 그 사람도 자기 모습을 들여다보며 마시면 되는 겁니다. 세 번째 사내가 오겠지요." (131쪽)
조르바의 자유가 가장 불편한 점은 그것이 '남성만의 자유'라는 사실이다.
소설 속에서 여성은 자기 목소리를 갖지 못하고, 남성의 서사를 장식하는 그림자에 머문다.
남성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연약한 암컷'으로 그려질 뿐이다.
여성들은 '삶을 탐구하는 주체'가 아니라, 그저 '삶을 꾸며주는 도구'인 것이다.
고전은 시대를 초월해 읽히지만, 동시에 그 시대의 편견도 함께 품고 있다.
그렇기에 여성을 '암컷'으로 보며 거침없이 내뱉는 조르바의 언행은
단순한 개인적 생각을 넘어 마치 '삶의 지혜'처럼 포장되어 여성 혐오를 정당화할 위험이 있다.
그렇기에 이 작품은,그것이 지닌 문학성과 철학적 깊이에도 불구하고 불편함을 갖게 만든다.
어떤 이들은 말한다.
20세기 초 그리스의 시골을 배경으로 한 작품임을 감안해야 한다고.
그리스의 오랜 남성 중심의 문화와 전쟁이 남긴 상흔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겼다고.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여성을 '조르바를 빛내기 위한 주변 장치'로 설정한 것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인간 존재의 탐구라는 보편성에서 스스로를 제약하는 결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도스토옙스키 연구자로 '자유'에 대해 오랫동안 천착해 온 석영중 교수는
자신의 책(《자유》)에서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는 내내 불편했다는 심경을 감추지 않았다.
'이기적인 노인' 조르바의 자유란 오로지 '자유 욕'일뿐이라며 다음과 같이 일갈했다.
카잔차키스의 자유는 보편적인 것도 아니고,
현실적인 것도 아니며 무엇보다 고결한 가치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남성 독자들은 조르바를 삶의 철학자로 예찬하는 경향을 보이는 반면에
많은 여성들은 '끔찍하다'라며 몸서리치는 현상도 벌어진다.
이를 단순한 과민 반응이라고 할 수는 없다.
여성들이 현실에서 숱하게 겪은 성적 대상화와 차별, 폭력이
문학 작품 속에서 반복되고 재생산되는 순간에 느끼는 절망이기 때문이다.
여성들이 일상에서 겪는 불편함과 부당함을 겪어보지 못한 남성이어서
여성 혐오를 '시대적 맥락'에서 이해하자거나
'존재의 탐구'라는 측면에서 너그럽게 받아들이자고 말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빛과 그림자를 함께 지닌 작품이다.
한쪽에서는 '존재의 이중성과 자유의 본질을 독창적으로 탐구한 명작'이라며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다른 쪽에서는 '여성 혐오의 전형'이라고 날을 세운다.
어느 쪽이 옳을까?
조르바가 보여주는 여성 멸시와 비하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작품 전체를 단순히 여성 혐오 조장으로만 보는 것은 너무 좁은 해석이라고 여겨진다.
자유를 외치면서 동시에 폭력을 저지르는 '모순적인 인간' 조르바를 통해
카잔차키스가 인간 존재의 이중성과 삶의 복잡성을 선명하게 드러냈다.
조르바와 '나'라는 대비되는 인물에 대한 생생한 묘사와 서사적 매력도 독자를 매혹한다.
고전은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시대의 한계를 통해 오늘을 비추는 거울이다.
그 안의 스며 있는 상처와 침묵을 직시할 때 비로소 살아 있는 텍스트가 된다.
삶의 자유와 존재의 심연을 사유하는 동시에 그 사유가 여성을 배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
이 긴장이 독자로 하여금 이 책을 다시 펼치게 만드는 힘이라 생각된다.
조르바의 춤은 지금도 눈부시다.
그러나 그 황홀한 춤사위 뒤에는 시대가 외면한 침묵이 그림자처럼 따라붙는다.
자유의 환희와 배제의 상처가 뒤엉킨 그 자리에 서서
그 시대가 외면한 침묵의 메아리를 듣기 위해 묻는다.
과연 누구를 위한 자유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