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새 고향

by 나자카

청주. 그 이름의 맑은 음절을 닮은 도시를 찾아 나섰을 때, 나는 ‘물빛 도시’라는 별명을 가진 이곳을 발견했다. 우연이었을까, 필연이었을까. 고향 청주의 ‘청’ 자를 그대로 품은 이 도시의 이름이 마음을 끌었다. 같은 ‘청’ 자를 공유한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낯선 곳이 조금은 덜 낯설게 느껴졌다.


분양 계약서에 도장을 찍던 날, 이것이 단순한 집 한 채를 마련하는 일이 아님을 알았다. 새로운 뿌리를 내릴 땅을 선택하는 일이었다. 입주일을 기다리며 공사 현장을 몇 번이나 찾아갔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건물 사이로 서해가 보였다. 그 푸른 물빛이 약속처럼 다가왔다.


드디어 이사 온 날, 짐을 풀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바다가 보이고, 녹지가 펼쳐져 있었다. 낯선 풍경이었지만 어딘가 포근했다. 아파트 화단에는 수국이 곱게 피어 있었다. 할머니께서 아끼시던 그 꽃. 국민학교 5학년 여름방학 때 그렸던 그 보랏빛 수국이 나를 반겨주었다.


수로가 흐르는 이 도시에 터를 잡는 일은 천천히 진행되었다. 여유로운 날이면 산책길을 따라 조금씩 이 도시의 결을 더듬었다. 물가를 따라 걷다 보면 작은 수로 옆에 수양버들 한 그루가 서 있었다. 바람결에 가지를 흔드는 그 모습이 마음까지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는 듯했다.


중학교 이 학년 때였다. 청주 오정목 물가에 줄지어 선 수양버들 아래를 걷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늘처럼 번져가던 풋풋한 여름의 향기, 친구들과 나누던 소소한 이야기들. 그때의 수양버들과 지금 이곳의 수양버들이 묘하게 겹쳐 보였다. 시간과 공간은 달라도, 나무는 같은 방식으로 바람을 맞이하고 있었다.


아침이면 새들의 울음소리가 하루를 깨운다. 까치의 재잘거림, 직박구리의 지저귐, 비둘기의 구구 소리. 서로 다른 울음으로 이곳의 새벽을 연다. 나도 그사이에 작은 숨을 보태며 이 동네의 일원이 되어간다.


산책길을 걷다 보면 계절의 변화가 선명하게 느껴진다. 봄날엔 이팝나무 꽃잎이 공중에서 흩날린다. 어느 날, 그 꽃잎 하나가 어깨 위로 살며시 내려앉았다. 그 순간, 나도 잠시 꽃이 된 듯했다. 작고 가벼운 꽃잎 하나가 주는 위로. 이곳이 나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신호처럼 느껴졌다.


햇빛이 스며든 공원에서는 분수대의 물줄기가 리듬을 타며 춤을 춘다. 그 앞 벤치에 앉아 책을 읽는 시간이 좋다. 조용히 도서관 책장 앞에 서서 책 한 권을 꺼내 들춰보는 여유도 생겼다. 직장에 다닐 때는 늘 시간에 쫓겼는데, 이제는 시간이 내 편이 되었다.


겨울철이면, 이 동네 곳곳에서 고양이들을 볼 수 있었다. 아파트 화단 구석, 주차장 차 밑, 따뜻한 햇살이 드는 벽 옆. 그들은 지금 어디 있을까. 골목 틈새의 햇빛 속, 숨결처럼 숨어 있을 그들을 생각하면 미소가 지어진다.


어느 봄날 산책하다가 초록빛 아기 뱀을 만났다. 고개를 세운 채 지나가는 그 생명에게서, 새삼스레 다정함을 배웠다. 처음엔 놀랐지만, 이내 이 작은 존재도 이곳의 주민임을 깨달았다. 사람만이 아니라 새들도, 고양이도, 뱀도 함께 살아가는 곳. 그것이 이 물빛 도시의 매력이었다.


입주 초기에는 비슷비슷해 보이는 아파트 단지들, 처음 보는 상가들이 낯설기만 했다. 내비게이션 없이는 집을 찾기 어려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이 동네의 지도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여기가 맛있는 빵집, 저기가 친절한 약국, 그 모퉁이를 돌면 예쁜 꽃집. 하나하나 기억이 쌓이며 이 공간이 ‘내 동네’가 되어갔다.


동네 맛집 주인이 내 얼굴을 알아보고 인사를 건넬 때, 산책길에서 마주치는 이웃과 가벼운 목례를 나눌 때, 나는 깨달았다. 낯섦이 익숙함으로 스며드는 동안 이곳이 조금씩 나의 새 고향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고향이란 태어난 곳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삶의 무게를 함께 나눈 곳, 계절의 변화를 온몸으로 느낀 곳, 작은 일상이 쌓여 기억된 곳. 그곳이 진짜 고향이다. 청주에서 보낸 어린 시절은 내 뿌리다. 하지만 이제 이 물빛 도시에도 새로운 뿌리가 내려지고 있다. 천천히,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수양버들의 뿌리가 물가 깊숙이 내려가듯, 내 삶도 이곳 땅에 단단히 자리 잡고 있다.


창밖으로 바다가 보인다. 매일 다른 빛깔로 반짝이는 서해를 보며, 나는 안다. 이곳이 내가 선택한 곳이자, 나를 선택 해 준 곳임을. 창밖으로 바다가 보인다. 매일 다른 빛깔로 반짝이는 서해를 보며, 나는 안다. 이곳이 내가 선택한 곳이자, 나를 선택 해 준 곳임을. 같은 ‘청’ 자로 시작하는 두 도시 사이에서, 나는 새로운 인생의 장을 펼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이 선택에 감사하며, 오늘도 이 물빛 길을 걷는다.


청라. 이제는 그냥 ‘우리 동네’라고 부른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따뜻하다.




당신에게 ‘고향’ 같은 느낌을 주는 장소가 있나요?

낯선 곳이 익숙한 곳으로 변해가는 순간을 경험한 적이 있나요?



KakaoTalk_20251125_172315376.jpg 새 고향 수변의 수양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