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있는 모든 답

by 나자카

거울 앞에서 종종 묻곤 한다. ‘언제부터 이렇게 지쳐 보이게 되었을까?’ 고등학교 시절, 미션스쿨의 아침 예배는 낯선 찬송가와 함께 기독교를 처음 접한 순간이었지만, 3대째 불교 집안의 딸이었던 나에게는 그저 졸업까지 견뎌야 할 학교 규칙일 뿐이었다. 부처님 오신 날이면 절에 연등을 달고 소원을 빌던 소박한 믿음이 내 뿌리였다.

하지만 성인이 된 후, 바쁜 일상을 이유로 사찰을 찾는 발걸음은 계속 늦춰졌다. 직장에서 하는 일이 자리 잡게 된 후, 아침마다 출근길 러시아워에 몸을 싣는 순간마다 대학교 졸업 때 품었던 Fine Artist의 꿈은 어디로 갔는지 자문했다. ‘이번 학기 마무리 잘하자’라는 현실적 목표만이 남았다. 수업 발표 대회 후 동료들의 축하 속에서 느꼈던 텅 빈 공허함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날 밤 혼자 사념에 잠겨 ‘이게 내가 원했던 것인가?’라고 물었을 때, 답은 침묵이었다. 그런 삶의 무게 속에서 라디오를 통해 우연히 들은 불교 법문이 나를 얼어붙게 했다. 바쁨에 쫓기며 사는 것은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삶에 끌려가는 것이라는 말이, 마치 나를 보고 하는 말 같았다.



흐르는 강물처럼, 머무는 깨달음처럼


퇴직한 해 11월, 아들의 책장에서 헤르만 헤세의 소설『싯다르타』를 발견했다. 학창 시절 독후감 숙제 정도로 치부하던 그 책은, 60대를 앞둔 나에게 완전히 다른 책으로 다가왔다. 모범생에서 현실주의자로, 때로는 경제적 책임 때문에 고단함을 견뎌야 했던 나의 삶은 수행자, 상인, 도박꾼의 과정을 거치는 싯다르타의 여정과 묘하게 닮아 있었다.

특히 싯다르타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강가에 앉아 자살을 생각하는 장면에서 책을 덮어야 했다. 그가 물에 몸을 던지려던 순간, 어린 시절 들었던 “옴”이라는 신성한 소리가 그를 붙잡는다. 그 장면을 읽으며, 직장 스트레스와 가족 갈등으로 지쳐 퇴근 후에도 차마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아파트 주차장 차 안에 서 깊은 상념에 젖던 어느 겨울밤을 떠올렸다. 강물이 주는 깨달음을 수첩에 적었다. 끊임없이 흘러가면서도 항상 그 자리에 있는 강물처럼, 시간도 흐르면서 동시에 하나로 존재한다는 것을. 이로써 깨달음이 히말라야 산꼭대기가 아닌, 지금 숨 쉬고 있는 나 자신 속에 이미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진리가 내 마음을 근본부터 뒤흔들었다.



사찰 방문과 인연


내면의 목마름을 느낀 후, 4월 어느 날, 아들이 귀가하는 시간을 기다리는 세 시간의 여유가 생겼다. 평소라면 누워서 기다렸겠지만, 스마트폰 지도에 ‘사찰’을 검색했다. 대중교통으로 한 시간이 넘는 거리에 도착한 작은 절은 화려한 단청이나 거대한 대웅전 없이 소박했다. 복잡한 도로에서 겨우 10분 떨어진 곳인데, 마치 다른 세상에 온 듯한 고요함이 느껴졌다. 관세음보살 앞에 서서 어색하게 절을 하고 눈을 감았다. 처음 5분은 온갖 잡념으로 가득했지만, 10분쯤 지나자 신기하게도 머릿속이 조용해졌다. 직장 일이나 집안 대소사 걱정이 사라지고, 그저 내 안에서 들숨과 날숨이 반복되는 소리만 들렸다. 30분 후 눈을 떴을 때, 나는 이유 없이 울고 있었다. 묵은 체증이 내려앉는 듯한 경험이었다.

이사 후, 집에서 가장 가까운 사찰을 찾아보았다. 지리산의 한 유명 사찰 포교당이라는 소개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본 여러 활동 사례 종교에 대한 막연한 부담을 누그러뜨려 주었다. 무엇보다 이곳은 불교를 차분히 배우고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했다.



나만의 불교 해석


내게 불교는 종교라기보다는 ‘마음의 운동법’에 가깝다. 서양의 종교들이 ‘구원’을 말한다면, 불교는 ‘깨어남’을 말한다고 느낀다. 누군가에게 의존하기보다, 스스로 깨어나는 힘을 기르는 것. 60대를 살아가는 지금, 내가 스스로 서는 법을 배우고 싶다는 열망과 맞닿아 있다. 특히 나는 연꽃이 진흙에서 피어나는 ‘순수함’보다 연잎의 특별한 능력에 주목한다. 연잎은 물방울이 떨어져도 젖지 않는 ‘로터스 효과’를 가졌다. 이것이 바로 내가 배우고 싶은 삶의 기술이다.

사회생활에서의 스트레스, 경제적 걱정, 가족 갈등 등 세상의 부정적 에너지가 나에게 달라붙지 않고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게 하는 능력. 연잎을 ‘초록 우산’이라고 부른 시인의 표현이 마음에 든다. 우산은 비를 막아주지만, 비 자체를 원망하지 않는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인생의 비바람을 피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에 완전히 젖지 않고 균형을 잡는 사람이 되고 싶다.



작은 시작의 큰 변화


사찰의 프로그램 등록 전에, 나는 혼자만의 작은 실험을 시작했다. 매일 아침 커피를 마시기 전 5분간 눈을 감고 앉아 숨쉬기에 집중하는 것이다. 처음 며칠은 5분이 50분처럼 길게 느껴졌다. 2주쯤 지나자, 하루를 시작하는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겨도 덜 당황하게 되었고, 지하철에서 화난 승객을 보며 ‘저 사람도 나처럼 힘든 하루를 보냈겠구나’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이런 작은 변화들이 쌓이면서 불교는 절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 곳곳에서 실천할 수 있는 삶의 방식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새벽 예불에 참여하는 사찰의 템플 스테이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기대가 있지만, 그런 도전 자체가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몇 년 전의 나는 지쳐 있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내게 불교는 완성된 답을 강요하지 않는다. ‘한번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라고 제안하며 끊임없이 질문하고 성찰하게 만드는 삶의 동반자다. 초록 우산 아래에서 바람을 쐬러 가듯, 나는 이제 부처님의 자비로운 그늘에서 새로운 삶의 균형을 찾아 나서고 있다. 그 길이 어디로 이어질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 안에 이미 모든 답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하다. 시작은 결코 거창할 필요가 없다. 그저 절의 대문을 조심스럽게 밀고 들어가 내 안의 소리를 듣는 일, 그것만으로도 이미 내 안의 길은 열리고 있으니까.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 평온을 찾는 방법은 무엇인가요?

어디에서 내면의 답을 찾으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