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마리 앙투아네트가 하룻밤 사이에 흰머리가 되었다고 한다. 그 원인은 스트레스였다.
전교 1등을 독차지하며 동급생들에게 어려운 문제를 설명해 주던 동네 오빠도 고등학생이었는데, 머리가 희끗희끗했다. 그 오빠의 머리는 흰머리가 아니라 새치였을 것이다. 전교 1등이라는 것이 그만큼 스트레스가 많았던가 보다. 그래서일까? 집안의 모든 스트레스를 나에게 넘기고, 스트레스 없는 삶을 사는 우리 아들의 아버지는 여전히 검은 머리를 유지하고 있다.
온 스트레스를 내게 미루어 내가 흰머리라는 말은 하지 않겠다. 나는 정직한 사람이니까. 유전적인 영향으로 인해 내 머리는 이 주일에 한 번은 염색해 주어야 할 형편이다. 3주만 넘어가면 머리 위에 하얗게 눈꽃이 핀 것처럼 흰 머리카락이 벚꽃처럼 돋아난다. 아, 물론 염색을 처음 시작했을 때부터 이 주일에 한 번씩 필요했던 것은 아니다.
새치의 단계를 넘어서 주기적으로 흰머리 염색을 처음 했을 때는 두 달에 한 번이면 되었다. 그러던 것이 10년 후에는 한 달, 8년 후에는 3주, 그리고 다시 5년 후에는 2주마다 필요하게 되었다. 그 사이에 머리카락을 통해 느껴지는 세월의 흔적이 드러난다. 세월이 흐를수록 주기가 짧아지고 있다. 앞으로는 1주일에 한 번이 되겠지만, 더는 줄이지 않을 생각이다. 두피가 버틸 시간이 필요하기에….
성(姓)이 ‘백(⽩)’ 씨인 엄마는 집에서 흰머리를 염색하시곤 했다. 그때마다 국민 학생이던 내가 뒷머리 염색을 맡아 드리곤 했다. 그래서 나도 용감하게 내 흰머리를 스스로 염색할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엄마는 염색할 때마다 “백 씨라서 흰머리가 많다”라고 한탄하셨다. 나는 ‘이(李)’ 씨인데도 흰머리이다.
엄마가 백 씨라 그런지 내 머리에도 처음 흰머리가 돋았을 때 새치라기보다는 흰머리 인생의 시작이구나 하고 받아들였다. 새치 한 올 발견하면 용돈을 주는 재미난 에피소드는 우리 가족에게 없었다. 엄마와 나 사이, 나와 아들 사이에도.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이 그저 아쉽고 귀한 보물과도 같기에….
거의 포기할 뻔했던 결혼도 흰머리를 인식하게 된 후, 내가 발 벗고 뛰어다니며 신랑감을 찾아 성사시켰다. 어느 휴일 염색을 하던 중 문득 ‘앗, 나 할머니잖아’라는 생각이 스쳤다. ‘흰머리 소녀’라는 말은 그저 이름뿐이지. 더 늦기 전에 남들 다 하는 결혼을 하자. 아마 흰머리가 아니었으면 결혼을 더 미루었거나 지금도 독신이었으리라.
흰머리가 듬성듬성 보이던 시절에는 미용실에서 멋 내기 염색도 해보았다. 브릿지와 투톤 등 최신 스타일을 시도하며 눈길을 끌기도 했다. 고대하던 임신 중에는 거금을 들여 고급 미용실에 가서 태아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헤나 염색도 했다. 그러나 염색 주기가 한 달로 줄어들고, 미용실 예약이 필수가 되면서 부담스러워졌다. 엄마는 칫솔로 염색을 하셨는데…. 지금은 전 용 염색 솔과 보조 도구도 편리해지고, 무엇보다 염색약도 다양해졌으니, 이제는 집에서 염색한다. 여유롭게 내 시간에 맞춰 염색하는 것이 좋았다.
그즈음 멋쟁이 친구가 오징어 먹물이 좋다고 해서 한 10년 넘게 사용했다. 그런데 얼마 전 미용실 디자이너에게 핀잔을 듣고, 그녀의 권유로 전문 브랜드의 브라운 톤 염색약으로 바꾸었다. 오징어 먹물은 남자 어르신들이 주로 사용하는 거래서 웃음이 나왔다. 집에서 염색한 것 같지 않다고 칭찬해 준 덕분에 기분도 좋았다. 어릴 적 엄마 뒷머리 염색을 도왔던 경험 덕분인지 뒷머리까지 꼼꼼히 할 수 있었다. 어린 시절의 훈련이 나에게 도움이 되었다. 친구들도 미용실에서 염색한 줄 알았다며 놀라워했다. 헤어디자이너의 추천으로 선택한 염색약 색상 덕인지 만족스럽다.
젊은 시절의 새치는 검은 머리카락과 굵기 차이가 없었지만, 흰머리는 가늘고 힘이 없어 부스스한 것이 특징이다. 흰머리가 올라오기 시작하는 뿌리 부분에만 염색을 하면 모근에 힘이 생겨 헤어스타일을 내기에도 좋다. 그 외에도 내가 귀찮음을 무릅쓰고 흰머리 염색을 하는 이유는 아들에 대한 예의 때문이다. 또래들에 비교 나이 든 엄마가 부담스럽지 않도록 흰머리 염색만이라도 하는 노력을 보여 주고 싶은 것이다. 주위를 돌아봐도 며느리 얻고 사위 보고 손주를 둬도 흰머리를 유지하는 이는 별로 없다.
나도 편하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는가. 사실 흰머리로 있는 것도 멋지지 않을까? 흰머리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나답게 받아들이고 싶다. 흰머리를 나의 모습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아들이 결혼하면 나도 흰머리의 멋을 살려보고 싶다. 머리 위에 하얀 벚꽃 한 아름을 얹어 화환처럼 활짝 웃는 나를 상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