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eeyaChoi Jan 28. 2024

여행의 조건

정상인이십니다요!

        몇 년에 걸쳐서 매달 5만 원씩 모은 곗돈으로 우리 네 자매는 대만으로 첫 해외여행을 떠나기로 했지만, 들뜬 마음과 달리, '패키지 여행? 자유 여행?'이라는 질문이 나왔을 때부터, 우리 여행에는 수많은 선택의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도 우리나라 도시와 비슷한 타이베이에서는 여자 넷이 돌아다녀도 괜찮다는 지인들의 말에 힘입어서, 우리는 3박 4일 자유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일하는 나와 동생에게 맞춰서 날이 정해졌지만, '할 줄 모른다'는 언니들의 말 때문에,  수 없이 나는 자매들의 안전한 첫 해외여행을 위해서 수많은 사이트를 뒤져서 비행기표와 호텔을 예매했다. 한숨 돌린 후, 나는 다들 어디 가서 뭘 보고 싶은지 물었다. 나는 무엇보다 장개석이 중국에서 도망올 때 만리장성 빼고 다 들고 왔다는 중국 보물이 있는 '박물관'과 센과 치히로의 모험에 나오는 '지우편'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대만을 두어 번 다녀온 큰 언니는 박물관과 함께 기암괴석이 있는 '예류'를 추천했다. 작은 언니는 '따라다닐께' 하고 대답했지만, 일하느라 정신없이 바쁜 동생은 묵묵부답이어서, 박물관과 타이베이 외곽  '예류, 지우펀'으로 떠나는 택시투어 빼고는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채 또박또박 시간이 흘렀다.

        출발 며칠 전에 가방을 싸며 뒤늦게 발동이 걸린 동생은 택시투어를 미리 예약하고 싶어 했다. 나와 동생이 찾은 비교적 짧은 6시간짜리 택시 투어는 '예류, 지우펀, 스펀' 중 둘을 골라야했다. 작은 언니와 동생은 바위가 있는 '예류' 보다는 풍등 날리기를 하는 '스펀'에 가고 싶어했고, 동생이 큰 언니를 설득해서 큰 언니는 '그래, 나는 다 봤으니까 괜찮아, 동생들 하고 싶은 대로 해' 하며 흔쾌히 '예류'를 포기했으며, 나도 일찌감치 '예류'를 포기하여, '스펀-지우펀'으로 최종 결정되는 듯했다.

         큰 언니    예류-지우펀  =>지우펀

         작은 언니 스펀-지우펀

         나           예류-지우펀 => 지우펀

         동생        스펀-지우펀

그런데, 딴 일로 바쁘던 큰 언니가 한숨 돌렸는지 '예류는 파리의 에펠탑인데...' 하고 한 마디 남기자, 작은 언니와 동생은 '어......? 에펠탑은 봐야지!' 하더니, '그럼, 예류......!'로 바꾸겠다고 말하며, 2 라운드가 시작됐다. 똑같은 일을 또 하는 걸 싫어하는 나는 '왜 바꿔? 그냥 각자 하고 싶은 대로 해!' 하고 만류했지만, '아직 출발한 거도 아닌데, 바꾸면 어때?' 하더니, '언니 의견대로...', '동생들 원하는 대로...' 하며, 서로 양보하여, 또다시 혼란에 빠졌다. 할 수 없이 나는 카톡방 투표에 부쳤고, 떠나기 전 날 간신히 만장일치로 처음 그대로 '예류-지우펀'이 결정됐다.

        후유! 의견이 없을 리가 없는데, 아무도 의견이 없는 같더니, 막상 모두 의견을 내놓으니까, 겨우 4 명이 3 중에서 2개를 선택하는 일이 이리 복잡할 줄이야! 경우의 수를 따져보니, 4 사람이 '예류, 지우펀, 스펀' 중에서 둘을 고르는 방법이 무려 81가지다!  그러니, 이렇게 의견이 갈리는 건 지극히 당연하다. 그래도 떠나기 전에 이 어려운 결정을 내려둔 덕분에, 나머지 여행 일정은 일사천리로 결정되었고, 우리는 택시와 전철을 번갈아 타며 우리나라 도시와 비슷한 듯 다른 타이베이를 구석구석 재미있게 둘어봤다.  

        긴 코로나 팬데믹과 나의 재활 이후 첫 해외여행이었고, 더 긴 세월 모은 자매들 곗돈으로 떠난 첫 해외여행이었으며, 어쩔 수 없이 가이드가 되어 애쓴 여행이다 보니, 박물관의 알록달록 예쁜 도자기나 파도에 깎인 신기한 바위나 애니메이션 속 같은 시장 골목보다, 여행준비와 시간맞춰 길찾기에 더 몰두했다. 여행을 위해서 필요한 건강, 돈, 시간, 비행기표, 호텔, 가고 싶은 곳, 여행 책, 일정, 와이파이, 보험, 지도 등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소중한 여행의 조건은 '같이 떠나는 자매들'이었으며, 수많은 선택마다 각자 의견을 말하고, 서로 들으며, 합의할 줄 아는 마음이었다. 무사히 여행을 마치고, 나 혼자 서울로 향하는 비행기를 타고 돌아와 집 현관을 들어서며 '집 도착' 하고 카톡을 올리니, 부산으로 향한 두 언니와 동생의 도착 메시지도 거의 동시에 올라왔다.


        같이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큰 행운이며, 긴 인생을 같이 살아가며 마음을 나눌 사람이 있다는 건 축복이다.


'예류, 지우펀, 스펀' 중 둘을 고르는 경우: 3가지 A 예류-지우펀, B 예류-스펀, C 지우펀-스펀

4명이 A, B, C 중 하나를 고르는 경우: 3x3x3x3=81 가지

 


이전 09화 SF 전성시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