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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laudia Park Mar 31. 2024

17세기 네덜란드 초상으로

흑인 형상화의 역사 2편

(좌)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동방박사의 경배> (1485-1500) 일부 (우) 한스 멤링의 <동방박사의 경배> (1479-80) 일부. 출처: 위키피디아


16세기 플랑드르 미술(Flemish art: 16세기까지 네덜란드와 벨기에게서 발전한 미술)에서 보이던 긍정적인 모습의 흑인형상화는 17세기 네덜란드에 이르러 변화하게 됩니다. 당시 해상무역으로 황금기를 누리던 네덜란드인들은 선원이나 군인 혹은 그들의 하인이나 노예로 흑인들을 생활 속에서 빈번히 접할 수 있었기에 그들에게 흑인은 더 이상 상상 속의 신비로운 인물이 아니었던 것이지요. 이 같은 흑인에 대한 인식 변화는 17세기 네덜란드 초상화를 통해 여실히 드러납니다.  


Anthony van Dyck, Marchesa Elena Grimaldi Cattaneo, 1623.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D.C.


백인 주인의 시중을 들면서 상반신 정도만이 작게 그려진 수동적인 모습의 흑인은 플랑드르 미술 속에서 보이던 긍정적이면서도 주체적인 모습과 사뭇 다릅니다. 이 초상화 속 흑인 하인들의 모습은 그들이 성공한 상업국가의 번영을 상징하는 부산물 정도로 치부되었음을 말해줍니다. 점차 이러한 형태의 흑인형상화는 물질문명을 상징하는 일종의 미술도상으로 유럽 초상화 속에 자리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전통을 가장 잘 답습한 다음주자는 18세기 영국 초상화였습니다.   


레이놀즈의 <찰스 스탠호프 백작과 마커스 리처드 피츠로이 토마스> (1782). Yale Center for British Art.


1688년 영국에서 일어난 명예혁명(Glorious Revolution)은 의회가 가톨릭화 정책을 옹호하던 제임스 2세를 몰아내고 국왕의 장녀인 메리 2세(Mary II, 1662-94)와 그 남편인 네덜란드 총독 오렌지공 윌리엄(윌리엄 3세 William III, 1650-1702)을 공동즉위케 한 역사적 사건으로 큰 무력충돌이 없었기에 명예혁명이라고 합니다. 기독교 옹호자이자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을 지닌 윌리엄 3세는 당시 네덜란드가 동인도 회사 등을 통해 익힌 주식회사의 경영 기법 등을 영국에 들여왔고 이는 영국 산업혁명의 발판이 되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영국은 명실상부 상업국가로 물질문명 시대에 들어서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시대 영국 초상화에도 흑인하인이나 노예를 물질화한 흑인도상이 등장합니다. 안토니 반 다이크(Anthony Van Dyck, 1599-1641)나 고드프리 넬러(Godfrey Kneller, 1646-1723)를 이어 18세기 영국 미술계에 새로운 초상화 스타일과 기법을 확립한 궁정화가 조슈아 레이놀즈(Sir Joshua Reynolds RA, 1723-1792) 역시 이 흑인도상을 작품에 접목했고 그의 1782년 작품인 <찰스 스탠호프 백작과 마커스 리처드 피츠로이 토마스 Charles Stanhope, third Earl of Harrington and Marcus Richard Fitzroy Thomas>는 그 대표적 예가 됩니다. 성공적인 해상무역으로 획득한 막대한 이득은 18세기 영국인의 삶을 윤택하게 했으며 이와 함께 당시 영국 사회에 등장한 흑인 하인 혹은 노예와 같은 새로운 계층이 영국의 초상화에 그려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지만 물질문명의 그림자인 노예무역에 대해서는 이견이 분분했으며 이 어두운 밑낮을 어떻게 용납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은 영국 내의 많은 영국인들을 불편하게 하였습니다.  



현재 예일 브리티쉬 아트 센터(Yale Center for British Art)에 소장되어 있는 레이놀즈의 이 초상화는 사실 2022년에 와서야 작품명에 소년의 이름이 기재가 되면서 현재의 타이틀인 <찰스 스탠호프 백작과 마커스 리처드 피츠로이 토마스 Charles Stanhope, third Earl of Harrington and Marcus Richard Fitzroy Thomas>로 명칭 되었습니다. 1783년 왕립아카데미 전시 카탈로그에는 <귀족 초상 Portrait of a Nobleman>으로 기록되었고 최근까지도 <찰스 스탠호프 백작 Charles Stanhope, Third Earl of Harrington> 혹은 <찰스 스탠호프 백작과 하인 Charles Stanhope, Third Earl of Harrington, and a Servant> 정도로 알려져 있었는데요. 이 흑인 소년의 이름이 밝혀진 것은 작품의 240년 전시 역사상 처음 있는 일로 2020년 미국에서 조지 프로이드(George Floyd)의 죽음으로 촉발된 시위로 말미암아 더욱 활발해진 흑인인권운동(Black Lives Matter movement)이 학계의 연구방향에도 영향을 미친것이라 판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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