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형상화의 역사 3편
18세기 전반기는 영국인들에게 물질문명의 득과 실 속에서 그들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중요한 시기였고 미술 역시 이런 시대적 고분군투에 동참하는 현상을 보입니다. 노예무역이 당시 영국인들에게 가져다준 정치, 경제적 이득의 풍요는 한편으론 이 불합리한 제도를 도덕적으로 어떻게 수용하고 미술에 반영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낳았습니다. 이런 고민은 곧 미술로 반영이 되었는데요. 이는 과거 17세기 네덜란드 미술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18세기 영국미술만의 특유한 현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네덜란드 초상화 속 백인에 가린 작은 흑인 하인아이의 모습은 흑인을 완벽히 물질화시켜 백인들이 쟁취한 부를 상징하는 도구정도로 취급한 것에 대한 반증이며 당시 유럽사회와 미술은 깊은 고민 없이 반복적으로 이와 같은 도상을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근대 민주주의의 기반을 다지고 있었던 18세기 영국은 이 불합리한 제도를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정치, 사회적 정세에 놓여있었습니다. 노예 강제노동은 17세기말부터 대서양 노예무역을 주도한 영국에게 엄청난 부를 가져다주었지만 서서히 노예무역의 반인륜적 실태가 폭로되기 시작하면서 영국 내에서도 노예무역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형성되었고 결국 19세기 초 대영제국 전체에서 노예제가 철폐되었습니다. 이후 영국은 다른 유럽국가들의 노예무역 또한 반대하면서 노예제 폐지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고, 노예제도로 가장 큰 이익을 본 국가가 그 제도의 철폐를 선도하는 아이러니한 현상이 벌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애매한 시대상을 반영한 미술장르 18세기 영국 초상화(혹은 가족화, conversation piece라고도 불림)였습니다.
<존 공작 가족화 The Family of John, 2nd Duke of Montagu and an Attendant> (1730-35)는 호가스가 1730년대 제작한 작품으로 인물들이 단란하게 대화를 나누거나 여가를 즐기는 모습을 포착한 전형적인 영국 가족화입니다. 초상 속 인물들은 당시 중국이나 아프리카 대륙에서 들여온 원자재등으로 만든 가구나 도자기와 같은 값비싼 물건들이 진열된 집 안에서 고급스러운 옷차림을 하고 있습니다. 캔버스 왼쪽 하단에 은쟁반을 들고 있는 흑인 하인의 일부 모습이 보이는데 이는 초상 혹 인물들의 부와 신분에 대한 허세를 엿보게 하는 장치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원작에서는 하인의 모습 전체가 다 그려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 작품을 그린 화가 윌리엄 호가스가 그림을 완성한 이후 어떤 이유에서건 캔버스의 크기가 조정되면서 하인의 모습 일부가 잘린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백인을 모시는 작은 흑인하인의 모습은 유럽의 전통적인 초상 속 흑인도상을 떠올리게 하지만 호가스는 이 도상을 물질번영의 영광스러운 상징이 아닌 물질적 허세를 표현하기 위해 그렸다고 해석되기도 합니다. 이런 해석은 호가스의 다른 작품인 <몸단장 The Toilette>(1743)을 살펴봄으로써 더욱 설득력을 가지게 됩니다. 사회적 지위나 부를 얻기 위해 행해진 잘못된 정략결혼을 묘사한 <유행결혼 Marriage à la Mode> (1743-1745) 시리즈 중 한 장면인 <몸단장>은 일부 상류층의 예술에 대한 무분별한 취미 그리고 그들의 타락한 도덕성과 문란한 성생활을 풍자한 작품입니다. 그림 속 부도덕한 인물들은 온갖 사치품과 예술작품에 에워쌓여 있지만 이는 인물의 방탕하고 허세스러운 삶을 비판하는 소재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이런 인물들 사이로 보이는 흑인하인 역시 인간의 도덕성을 타락시키는 물질문명의 폐해로 읽힐 수 있을 것입니다.
무분별한 물질문명에 대한 호가스의 풍자는 필연적으로 노예무역에 대한 그의 비판적인 생각을 수반하며 이런 그의 견해는 다른 영국화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 예로 동시대 영국 화가 아서 데이비스의 <오르데 가족화 John Orde, His Wife Anne, and His Eldest Son William>(1754–56)를 들 수 있는데 흑인하인이 비교적 동등한 모습으로 가족초상에 함께 그려진 독특한 초상화입니다. 전통적 초상화 속 흑인의 모습과는 달리 이 작품 속 흑인하인은 그의 주인들과 비슷한 크기로 그려졌으며 편지를 안주인에게 직접 전달하면서 소통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전통적 유럽초상화에서 흑인이 물질화되어 인물들과의 교류 없이 수동적이며 없어도 무방한 존재로 그려진 것에 비해 데이비스의 가족화 속 하인은 꽤나 능동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 작품에서 인물들의 시선처리가 눈길을 끕니다. 캔버스 가장 왼쪽 의자에 앉은 오르데씨는 막 사냥에서 돌아와 그 전리품으로 꿩을 들고 들어오는 그의 아들을 올려다보고 있고 그의 부인인 앤은 편지를 들고 들어오는 하인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앤의 시선을 따라가 보면 분명 그녀는 흑인 하인과 교류하는 듯 보이지만 실상 그녀가 뻗은 손은 아들 윌리엄이 들고 있는 꿩에 닿아있습니다. 덕분에 하인과의 소통이 단절되는듯한 모호한 느낌을 주는 듯한데요. 물론 크게 의미를 두지 않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노예제도에 관한 당시 국내에서의 부정적인 여론을 가만한다면 흑인하인을 어떻게 그려야 할지에 대한 작가의 고민이 엿보이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데이비스는 이 흑인하인을 능동적이지도 그렇다고 완전히 수동적이지도 않은 모호한 모습으로 처리해 마치 노예무역을 통해 이익을 얻으면서도 그 제도를 용인할 수 없었던 18세기 영국의 애매한 시대상을 반영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요.
호가스가 일반대중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일상적인 장면에 빗대어 사회의 부조리를 비판하고 도덕적 가치를 고무시키는 작품(풍자적 역사화 comic history painting)을 통해 18세기 영국미술의 선구자적 역할을 한 것에 비해 데이비스는 이와 같은 시대의 변화를 감지하고 새로운 유행이나 시대상을 그만의 스타일로 그린 일종의 팔로워였습니다. 유행에 민감했던 데이비스는 침착한 관찰을 통해 18세기 영국의 사회상을 세심하게 그려내어 마치 그림문헌과 같은 작품들을 남겼습니다. 호가스가 진부한 유럽 흑인도상을 통해 사회의 부조리를 비판하는 서사를 이끌어냈다면 데이비스는 관찰적인 태도로 일상 속 사실적인 흑인의 모습을 당시 영국인의 시각으로 표현했다고 생각됩니다. 그 결과 <오르데 가족화> 속 흑인하인처럼 유럽전통을 따른 흑인형상이 아닌 당시 영국시대상을 반영한 흑인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포착하게 된 것 같습니다.
참고문헌
Jonathan Holloway, Commentary by Jonathan Holloway, date of publication, publisher, medium/format, time mark, http://interactive.britishart.yale.edu/slavery-and-portraiture/338/commentary-by-jonathan-holloway.
Simon Gikandi, Slavery and the Culture of Taste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1), 26. New York Public Libra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