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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빛 레오 Jan 29. 2024

전세살이에 마상 입다

내 나이 오십에

도시의 아파트를 정리하고 시골에 주택을 지으면서 전셋집이 필요했다. 고등학교 다니는 딸아이 때문이다. 하필 전셋집을 구하는 시기에 부동산 정책이 바뀌면서 전세대란이 일어나 부동산정보지에 처음 실린 집을 바로 계약해서 얼마 전까지 3년 남짓을 살고 정리하게 되었다. 그 사이 은행이율이 높아져 대출이자가 두 배이상 올랐고 이미 시골집으로 이주한 우리 부부는 전세계약기간까지 이자를 그냥 내는 것이 아까운 나머지 스스로 상처입을 일을 만들고 말았다.

 나는 코로나에 걸리고 후유증으로 2달이 지나도록 병원을 드나들었고 남편이 전세금 반환절차를 집주인과 협의했는데 그게  실수였다. 이제 생각해 보니 집을 사고팔고 하는 모든 일을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내가 해왔고 남편은 그런 분야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를 못했던 거다.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할까 봐 걱정이 되었던 남편은 집주인이 요구하는 모든 걸 다 들어주었다. 그것도 아주 공손하게(나중에 문자메시지 대화를 보고 안 사실). 이사하는 날이 되어 관리비 지급 문제로 집주인과 통화를 처음 했다. 집주인은 20여 일 후에 우리가 이사 나간 집으로 들어온다고 했는데 입주한 다음날 전세금을 입금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집 비밀번호를 알려달라고 했다. 처음 듣는 요구에 당황해서 곤란하다고 답을 하고 전화를 대충 끊었다.  찜찜한 마음에 동생에게 전화를 했더니 짐을 다 빼지 말고 조금 남겨두고 비밀번호는 알려주지 말라고 하기에 작은 가전 제품 두어 개를 남겨두었다. 그리고 재차 비밀번호를 알려달라는 요청을 결국 들어주고 말았다.

 이사를 한 다음날 저녁에 외출했던 남편이 씩씩거리며 돌아와 집주인과 통화로 언쟁을 했다며 마룻바닥 얼룩과 세탁기 뒤 벽면 곰팡이 등의 사진과 함께 문자메시지 내용을 보여주었다.


 " 임대차 계약이 종료되면 임차인은 임대목적물을 원상 복구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내일 업체에 견적을 받기로 했으니 받은 후에 연락하겠습니다."


 모든 요구조건을 다 들어준 남편과 나는 바뀐 태도에 속았다는 생각이 들어  분노했고 전세금을 반환받지도 못한 불안감과 호구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집 비밀번호는 다시 바꾸도록 하겠습니다. 업체 방문 등 필요할 경우에 사전에 연락 주세요"


 "비밀번호는 제가 이미 바꿨습니다."


어라? 전세금을 돌려받지도 못했는데 집주인이 비밀번호를 바꿔버렸다고? 고려거란전쟁이 막 시작했을 늦은 시간인데 우리는 입은 채로 서둘러 외투를 걸치고 이사 나온 전셋집으로 차를 달렸다.


 "지금 집으로 가는 중입니다. 바꾼 비밀번호 알려주세요"


 이렇게 메시지를 보냈는데 아무 답이 없자 나는 주인에게 전화를 걸어 비밀번호를 알려달라고 재차 말했다.

그런데 퉁명스럽게

 "우리한테 비밀번호를 알려줬잖아요"라는 답이 왔고


 "알려드려서 용무 보셨으니 다시 알려주셔야죠. 짐까지 들어 있는 우리 집입니다. "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통화로 한참 실랑이 끝에 자기들도 전셋집으로 가는 중이니 만나서 이야기를 하자고 했다.


( 우아하게 살고자 하는 나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버린 슬픈 날)

그렇게 10시가 다 돼가는 늦은 시각에 이사 나온 휑한 아파트로 낯선 집주인 부부와 함께 들어가 한참을 2대 1로 언쟁을 했다. 그 사이에 비밀번호를 바꾸는 게 범죄임을 알았는지 집주인은 얼른 다시 원상태로 번호를 바꾸었다  왜 2대 1이냐면 남편은 싸움이라고는 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말싸움이 되었건 뭐가 되었건. 일심동체가 되어 쏟아붓는 부부를 혼자 상대하는 건 참 어려웠다. 전세금을 반환하기 전에 리모델링을 하고 하루 전에 입주까지 허락해 준 우리 부부의 이해심은 그 순간 바보 같은 짓이 되고 만 것이다. 나는 전세금도 돌려주기 전에 리모델링을 누가 하라고 했냐고 공격을 한 번 했다가 반격을 세게 맞고 말았다. 이미 내 남편이 허락한 일이라면서 녹음한 내역 중에 있다며 틀어주기까지 했다. 녹음이라니! 우리 부부는 나이 50이 넘도록 왜 이렇게 바보 같이 살았던 걸까? 그렇게 궁지에 몰린 나는 남편의 도움이 간절했지만 결국 남편은 옆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기세를 몰아 주인 부부는

 "비밀번호 바꾸고 안 가르쳐줄 거면 리모델링 공사 할 때마다 와서 문 열어주면 되겠네"라고 비아냥 거렸고 이렇게 케이오당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누가 할 때마다 와서 열어준대요. 사전에 협의해서 시간을 조율해야죠"라고 받아쳤다. 다행히 이게 먹혔는지 집주인 여자는 흥분해서 대체 왜 그러냐는 말만 계속 되풀이했다.  

 이런저런 언쟁 끝에 집주인 내외는 비밀번호를 마음대로 바꾼 것에 대해 사과를 했고 본인들이 전세금 반환을 빨리 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하고 있는지를 장황하게 설명했다. 마음이 약한 나는 비밀번호는 서로 알고 있는 채로 일단 두겠다고 하고 공사를 시작하게 되면 미리 문자메시지라고 해달라고 했다. 그리고 마룻바닥의 얼룩 부분에 대해서도 견적을 받은 후 연락해 달라고 했다.

 이틀이 지난 지금 가슴 한쪽이 아릿하니 아프다. 이유를 모르겠다. 사람에게 바보취급을 당한 것이 서러운 것인지 아니면 전세금을 아직 못 돌려받아서 불안한 것인지, 혼자 2대 1로 붙는 동안 말 한마디 도와주지 못했던 남편에 대한 원망 때문인지......

 거울을 보니 마음이 안 좋은 만큼이나 얼굴도 안 좋다. 짠하게 생긴 나이 들어가는 여자가 거울에 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이제 다시 전세살이를 할 일이 없을 것 같아서다. 오늘 출근해서 하루를 보내는 동안 내가 근무하는 직장에 대한 고마움을 느꼈다. 직장에서는 나를 바보취급하는 사람도 없고 내 돈을 떼어먹을 사람도 없다. 다들 서로 선생님이라 부르며 존중하려 노력한다.

 어서 마음의 평온을 되찾고 이제부터 시작될 본격적인 전원생활을 즐기고 싶다.  앞 뒤 옆까지 꽉 막힌 아파트 따위에 사는 집주인이 뭐가 좋냐? 게다가 바로 앞에 분리수거장까지 있어서 여름에는 문도 열지 못하고 살아야 한다. 거기에 비하면 공기 좋고 뒤에는 졸졸졸 물 흐르는 소리 들리는 내 시골집이 백배 천배 좋다! 아파트 열 채 줘도 안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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