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의 일은 천천히 알아도 되었는데,
부모님 때문에 마음이 심란할 때면 외숙모에게 안부문자를 보내본다. 대모이기도 해서 어찌 보면 나의 또 다른 엄마인 셈이다. 어느덧 60대가 된 외숙모는 요즘 특히 자신이 노인이 되었음을 실감한다고 했다. 외숙모가 겪는 노화 증상에 대해 듣다 보니, 파킨슨 증상과 유사한 점들이 많았다. 사실은 엄마가 호소했던 증상들이 파킨슨 증상이 아니라 노화 증상이라는 것이 더 맞는 말일 것이다. 파킨슨 병과 노화가 뒤죽박죽 섞여 뭐가 뭔지도 모른 채 처방받은 약을 꾸준히 먹었다. 나는 틈틈이 파킨슨 병에 대해 공부했다. 엄마에게 내가 공부한 정보를 주고 보호자인 아버지에게 관련 교육도 찾아 듣게 했다. 그러나 사실 나의 노력은 크게 소용이 없었다. 특히 무릎 수술 이후 생긴 원인을 알 수 없는 통증으로 엄마는 점점 더 약에 의존했고 사소한 일도 아버지를 시킬 정도로 잘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엄마가 파킨슨 진단을 받고 나서 10년 동안은 황금기였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엄마가 병에 걸렸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약으로 충분히 스스로 기능할 수 있는 상태였다.
엄마는 일과 살림을 놓고, 운동을 한다고 날마다 놀이터에 나가 엄마보다 30세는 더 많은 할머니들과 어울려 놀았다. 할머니들의 말상대가 되어주면서 밖에서는 세상 좋은 사람이 되었고, 얼굴엔 늘 미소가 흘러넘쳤다. 엄마는 할머니들에게 베풀며 자신이 그들보다 젊고 능력이 있다는 것으로 내심 위안받았거나, 할머니들로부터 받는 인정이 엄마의 인정 같아서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집에만 들어오면 늘 아프다며 아버지 얼굴만 보면 인상을 쓰고 운다고 했다. 실컷 잘 놀다 들어와서 집에만 오면 아프다고 난리니 아버지는 엄마를 되도록 못 나가게 했고, 빨리 들어오라고 했다. 하루는 아버지와 집에서 말다툼을 하고 씩씩대며 나갔는데, 마스크를 놓고 와서 다시 들어가다가 아파트 공동문에 머리를 부딪쳐 넘어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팔이 골절되어 급히 수술을 받고 한동안 입원을 해야 했다. 엄마는 그 일에 대해 아버지를 탓했고 원망했다. 아버지는 그 이후로 엄마가 밖에 나가면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엄마는 아버지가 너무 자신을 따라다니며 옭아맨다고 숨 막힌다고 했다. 한 번은 밤에 일어나 화장실을 가다가 방에서 그대로 넘어져서 허리를 다쳤다. 급하게 허리 시술을 받았으나, 그때 쓴 약물과 진통제 때문인지 엄마의 망상이 시작되었다. 병원에서 아버지가 간호사와 바람이 났다고 하며 욕을 퍼붓고 난동을 피웠다. 집에서조차 아버지는 마음을 놓을 수 없었고, 엄마의 배변까지 받아내기 시작했다. 움직이지 않는 엄마의 몸은 점점 더 굳어갔을 것이다.
엄마는 병을 진단받고 나서부터 자신의 일과 살림을 다 내려놓고 하루 종일 우울해했다. 나는 매일 엄마와 통화를 하며 말상대가 되어 주었다. 사실 나도 그 어느 때보다 엄마가 필요한 시기였다. 처음 아이를 낳아 키우며 모든 것이 어려웠고, 모든 것이 아이에게 맞춰져 마치 내가 사라지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내 시간이 절실히 필요했지만 그 시간마저도 엄마의 안부를 챙기는데 써야 했다. 전화를 하면 엄마의 하소연이 시작되었고, 근처에 사는 오빠네와 아버지 험담이 이어졌다. 나는 엄마가 불쌍했고, 다른 가족들이 미웠으며,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죄책감을 느꼈다. 엄마는 시시때때로 가족들과 갈등을 일으켰고, 엄마의 부탁으로 엄마와 갈등이 있는 대상마다 내가 연락해 중재하려 애썼다. 엄마랑 얘기를 하다 보면 엄마의 감정이 내게 전이되어 내가 겪지도 않았으면서 내가 다른 사람에 대해 나쁘게 말하곤 했다. 사실 아버지나 오빠나 올케언니가 내게 잘못한 것은 없었지만, 나는 그들이 자주 미웠고 점점 더 불편해졌다.
오빠는 그동안 엄마와 수없이 단절을 시도했다. 모자간의 적절한 거리는 없었고, 늘 너무 가깝다 싶으면 위태롭게 느껴지다가 결국엔 터져서 크게 싸우고 다시 멀어지기를 반복했다. 1년 전 엄마와 꽤 오래 단절상태였던 오빠는 결국 엄마에게 되돌아갔고, 그 이후 얼마 안 있다가 짐을 싸서 엄마 집에 왔다고 했다. 이혼을 할 거라고.
집에서 나와 오갈 데 없는 오빠를 엄마는 당연하게도 받아주었다. 이전에 아버지의 목을 조르는 몹쓸 행동을 했음에도 용서를 구하지 않았고, 집에서 오빠는 아버지를 본체만체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지내던 방도 빼앗기고 불편하게 지내야 했다. 오빠는 엄마에게 올케와 아이들 욕을 했고, 엄마는 동조해서 며느리와 손자들을 내게 헐뜯기 시작했다. 나는 엄마의 말을 들으면서 동조하지 않았고, 오히려 오빠를 비난했다. 엄마가 아들의 역성을 들면서 하는 말들이 내겐 단 한 가지도 공감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엄마의 말을 반박하고 오빠를 비난하자, 엄마는 내가 오빠를 욕하고 언니 편을 든다며 화를 냈다. 나와 통화를 하면서 점점 숨이 차고 열이 올랐으며 온몸에 힘이 빠져서 힘들었다고 했다. 엄마 자신은 아픈 사람이므로 다른 가족들이 알아서 조심해줘야 한다고 했다.
엄마의 말대로라면, 나는 앞으로 엄마에게 내 마음이나 생각을 솔직하게 표현해선 안 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엄마는 누군가 조금이라도 자신의 심기를 거슬리게 하면 즉각적으로 신체증상이 나타나 힘들기 때문이다. 나는 더 이상 엄마와 대화를 하고 싶지 않아졌다. 어떤 주제로 대화를 하더라도 나는 동조하거나 그저 듣기만 해야 한다. 집에 갔을 때, 엄마는 내게 그 이전부터 전화로 그것도 여러 번 들었던 올케언니와 손주들을 비난하는 말을 하고 또 했다. 나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이미 들었다고 말하고 잘라도 잠시 후면 하고 또 했다. 나는 엄마의 행동이 지나치다는 생각을 했고, 정상적이지 않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엄마는 그 이후 헛것을 보고 따라가서 혼자 거리를 헤매다 겨우 돌아왔다고도 했고, 한동안 괜찮다고 했다가 다시 헛것이 자주 보인다고 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엄마와 통화를 할 때 엄마가 하는 말이 진실일지 의심하게 되고 전적으로 다 믿지 않게 되었다.
오빠가 엄마 집에 와있으면서부터 엄마는 계속 몸이 좋지 않았다고 했다. 오빠는 엄마에게 언니와 싸우면서 있었던 일들을 엄마에게 상세하게 말했고, 엄마도 같이 분노했다. 오빠는 부부간의 문제를 자식들에게 전가하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부모한테까지 전가한 것이다. 종종 내 폰에는 아버지 부재중 전화가 늦게 와있던 적도 있었지만, 나는 전화를 다시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왜 전화했는지 알 것 같았고, 더 이상 감정 쓰레기통이 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나만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뭐라고, 그보다 덜 산 내가, 뭘 안다고,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오빠에게 충고를 할 입장도 되지 못했고, 그렇다고 듣고 맞장구치며 동조할 수도 없었다. 내 말을 귀담아 들어줄 이들도 아니었기에, 나는 더 이상 불필요한 일에 내 에너지를 쓰고 싶지 않았다. 몇 달간의 난리통 속에, 오빠는 지나치게 관여하는 엄마와 아버지에게 크게 퍼붓고는 다시 연락이 없다고 했다. 엄마는 오빠와 언니가 다시 화해를 한 것 같다고 했고, 나는 그런 거면 다행이고 잘 된 일이라고 했다. 그 이후로도 아버지는 엄마를 극진하게 보살피며 손과 발이 되어 주고 있고, 엄마는 아버지가 참다 참다 화를 내는 것일 텐데도 본인이 아픈 사람이니 아버지가 좀 더 조심해야 한다고 내게 불만을 토로한다.
대학교 때 한 친구가 내게 너에게 실망했다는 말을 장난스레 했었는데, 나는 그 말이 왠지 모르게 마음에 걸렸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궁금했다. 내게 상처가 되는 말이었기에, 왜 나는 그 말이 아프게 느껴졌을까. 누군가가 내게 실망해서 나를 좋아하지 않을까 봐 그 불안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타인의 시선에 따라 내 가치가 결정된다고 믿도록 길들여졌던 것이다. 나는 나보다 다른 사람의 욕구를 따르는 편이었고, 내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했다. 나는 그렇게 내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지 않는 것이 나의 모든 관계를 안전하게 지키는 것이라고 믿었고 그것이 내가 살아온 생존방식이었다. 나와 친구가 되고 싶어 하고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나는 왠지 모르게 관계에서 지치는 기분을 많이 느꼈고 혼자 있는 것이 제일 마음 편했다.
나는 다른 사람을 실망시켜도 되었다. 실망을 하는 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몫이었다. 그렇다고 내 가치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내 가치는 다른 사람의 인정에 달려 있지 않으므로. 나는 그때 처음으로 가족의 문제에 끼어들지 않았고, 관망하는 태도를 유지했다. 나는 가족 안에서 그리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고, 내가 굳이 관여하지 않아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그 이후 더 이상 중재자 역할을 하지 않기로 했고 내가 오랜 시간 맡았던 역할을 내려놓았다. 나는 엄마의 엄마가 아니고 가족들의 상담사도 아니며 나는 그저 딸이고 집에서 가장 세상을 덜 산 막내일 뿐이다. 내가 내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감히 그들을 통제할 수 있는 위치나 자격은 결코 되지 못한다. 내가 항상 옳지도 않을뿐더러 맞다고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러한 자각은 앞으로 상담을 하는 데 있어서도 도움이 될 것 같다. 내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는 것.
나는 그저 나로서 살면 된다. 매일 한 가지라도 스스로에게만큼은 솔직한 행동을 하면서. 설령 그것이 누군가를 실망시키더라도. 나는 지금 있는 그대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