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가서 내가 할 수 있는 걸 알릴 수가 없어서,

책을 만들었다.

by 신구언

어디 가서 내가 할 수 있는 걸 알릴 수가 없어서, 책을 만들었다.

미디어 리터러시에 대한 교육 콘텐츠에 관심이 생기기 시작한 건 3년 전쯤이었다.
이론적으로 아주 잘 알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공부하면 될 거라는 이상한 자신감은 있었다. 어쨌든 미디어 공부를 계속해왔으니까. 낯설거나 두렵지는 않았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그래서, 뭘 하지?


막막했다. 가르쳐주는 곳도,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었다.
졸업한 대학의 전자도서관에 가서 무작정 논문과 책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유독 자주 등장하는 이름 하나를 발견했다. 관련 책을 찾아 읽다가, ‘아, 이거다’ 싶은 지점들이 보이기 시작해서 결국 책을 사서 다시 읽었다.


조금씩 감이 잡혔다.
내가 호주에서 공부했던 방식 자체가 바로 ‘미디어 리터러시’였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그래서 이 모든 게 이상하리만큼 자연스럽게 이해됐던 거였다.


그럼 이제 뭘 하지?


자료를 더 찾다 보니 자격증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언론학회에서 주관하는 ‘미디어교육사’ 자격증. 시험 준비용 문제집도 없고, 홈페이지에 올라온 PDF 파일 하나가 전부였다. 다운로드하여 읽어 내려갔다. 내용 대부분은 익숙한 이론이었지만, 이걸 ‘필기시험’으로 본다는 사실은 부담스러웠다.


시험을 앞두고 벼락치기를 했다.
정말 오랜만에, ‘시험을 위한 공부’를 했다.
(아, 정말 오랜만이었다.)


2급을 땄고, 1년쯤 지나 1급 시험 공고를 봤다. 조건이 조금 까다로웠지만 다행히 응시 자격이 되었고, 시험을 봤다. 붙었다. 그렇게 미디어교육사 1급을 갖게 됐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자격증을 따면 뭐가 달라질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강사 공고에 지원하면 계속 떨어졌다. 한 번은 너무 화가 나서 복수 지원이 가능한 곳에 7개 분야를 동시에 지원했고, 7개의 강의계획서를 거의 미친 듯이 썼다.


결과는 똑같았다.
전부 불합격.


이유가 궁금했다. 도대체 누굴 뽑는 건지, 왜 나는 안 되는 건지. 문의를 해보면 돌아오는 답은 늘 같았다.
“점수가 되지 않아 안 됐습니다.”


나는 정말 이런 콘텐츠 개발 일을 하고 싶은데, 일할 곳이 없었다.
교수가 되는 길도 논문 조건이 맞지 않았다. (정말 그것 때문이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할 말은 많아도 여기서는 하지 않겠다.)


불안해졌다.
일을 하고 싶은데 할 곳이 없었다. 내세울 만한 이력도 없었다. 자격증 하나? 학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점점 실감했다. 결국 중요한 건, 뭔가를 시작했다는 증거라는 걸 깨달았다.


그런데 그 ‘줄’이 없었다.
한국에 아무런 줄이 없는 나는—해외에서 공부한 내 탓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면서—혼자 일어나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시작한 게 AI 리터러시 숏폼 영상 제작이었다.
구독자는 22명. 한때 5명 늘고, 그 뒤로 그대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뭔가를 더 해야만 했다.


그래서, 책을 만들기로 했다.


찾아보니 자가출판이 가능한 플랫폼이 있었다. 기획, 글쓰기, 디자인 툴까지—적어도 ‘만드는 것’ 자체는 내가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조금 무모하게 첫 책을 시작했다.


12월, 첫 번째 책이 나왔다.
지금 다시 보면 고치고 싶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폰트도, 디자인도. 그래도 처음으로 펴낸 교사용 AI 리터러시 교육 책이었다. 얇지만 알찬, 숏북 (Short Book).


이렇게 된 거, 두 번째도 만들어보자 마음먹었다.
박사 논문 쓸 때처럼 매일 같은 시간에 앉아 정해진 분량을 쓰고 다듬었다. 글쓰기는 정해진 시간에 꾸준히 해야 한다는 말을 슈퍼바이저에게 귀에 피가 나도록 들은 덕분에, 그런 훈련은 이미 되어 있었다.


매일 정해진 분량을 해내다 보니 1월 말, 두 번째 책이 나왔다.
이번에는 더 길고, 더 체계적인 15주 차 교육용 책. AI 리터러시가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한 청소년과 대학생을 위한 책이다.


반복하면 늘게 되어 있다.
130페이지가 넘는 책이 완성됐다. 디자인은 ‘국민학교’ 시절의 『탐구생활』이 떠오르도록 잡았다. 톤 앤 매너도, 분위기도.


마음에 들었다.
아직 판매는 거의 없지만(ㅎㅎ), 그래도 몇몇 서점에 입점은 됐다.


뿌듯했다.

안 팔려도, 누가 안 읽어도, 매일 들어가서 책 소개 페이지를 들여다봤다.


그렇게 나는 책을 만들었다.
일할 곳이 없어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자리가 없어서, 내가 책을 만들어버렸다.


지금은 세 번째 책을 쓰고 있다.
다섯 번째 책쯤 나올 때는, 일을 하고 있으면 좋겠다.
(그전이라도, 제발.)


이 책이 너무 재밌다.
장수돌침대 사장님의 마음을 이제야 알 것 같다.
너무 좋은데,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진짜 즐겁게, 정말 열심히 만든 책이다.


앞으로도 나는 이 일을 계속할 생각이다.
AI 리터러시라고 하면 아직도 사람들은 프롬프트 잘 쓰는 법부터 떠올린다.
그게 아니라고, 정말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AI가 일상이 되어갈수록 가장 중요한 건 인간이다.
나 자신, 우리 자신.


그 ‘나’를 좀 더 잘 보게 만드는 것.
그게 내가 생각하는 AI 리터러시다.


프롬프트를 잘 쓰는 법도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는 걸, 왜 모를까.


나는 존버한다.
그동안 책을 만들고 이런저런 일을 하느라 글을 못 썼지만, 다시 이곳에 일기를 쓰려고 한다. AI와 인간, AI 리터러시, 인성교육, 그리고 이 일을 하고 싶어 죽겠는 ‘나’에 대한 이야기들을.


세 번째 책은, 누굴 위한 책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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