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BTS 리더인 RM과 스페인 언론과의 인터뷰 내용이 소개되어 국민들의 열렬한 반응을 이끌어 냈다. 스페인 앵커와의 우문현답 속에는 가무의 최정상에 있는 예술인의 인문학적, 예술적 식견이 잘 녹아 있었다. 역사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그의 안목과 혜안은 정말 훌륭했다. 거기에 능숙한 영어로 직문직답을 했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K-팝의 거장 박진영과 방시혁이 방송에서 나눈 대담에서 놀라운 내용이 나왔다. ‘주변의 사람이 죽었을 때 어디까지 슬퍼해야 하나’를 방시혁이 질문하고 둘이서 밤새워 토론하였다는 사연이었다. 우리가 겉으로만 알고 있던 K-팝의 내면에 들어있는 인문학적 사색의 뿌리를 발견한 순간이었다. 겉으로 적당히 흉내 내는 일체의 것들은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오랜 사색의 결과물을 진정성을 가지고 내면화시켰을 때 감동을 주고 공감을 이끌어 낸다.
상대적으로 시간적 여유가 많은 주부들 사이에 문화를 향유하는 커다란 두 흐름이 있다. 노래방과 찜질방을 애용하는 '방방파'와 도서관과 미술관 등을 애용하는 '관관파'가 있다. 이들이 만들어 낸 문화적 풍토는 현재 우리들의 모습이고, 거기서 파생된 다양한 내용은 새로운 문화콘텐츠가 되어 전 세계적인 공감과 감흥을 이끌어 내고 있다.
노래방과 찜질방(방방파)
노래방:우리는 음주가무에 능하다
중국 역사서인 『삼국지』 「위지동이전」에서 동이(동쪽변방사람들)의 풍습을 소개하면서 음주가무에 능하다고 하였다. 역사 시간에 스치듯 들은 이 이야기는 유난히 노래와 춤을 좋아하고 잘하는 우리 이웃들을 볼 때마다 떠오르는 말이다. 더군다나 보이그룹이나 걸그룹이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리면서 많은 사람들이 우리 자신의 DNA를 각인하고 자부하는 표현이다.
우리나라 노래방은 음주가무의 꽃이다. 누구나 한을 풀어내고 흥이 폭발한다. 그렇게 다져진 시간들은 누구나 가수가 되는 진풍경을 연출한다. 온갖 노래경연 프로그램을 보다 보면 전 국민이 가수가 된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이다. 나만 빼고. 남편처럼 노래 좋아하고 잘하는 사람들을 보면 신기하고 부럽다. 도대체 흥과 끼가 없는 나 같은 사람들은 그런 공간에 가면 늘 꿔다 놓은 보리자루가 된다. 나에게는 음주가무 DNA가 진정 없는 것인가. 혹 보컬 레슨 같은 것을 받아 양동이라도 쓰고 노래 연습을 한다면 가능하지 않을까?
찜질방:가십거리가 영화와 드라마가 되다
찜질방에서는 일행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하게 된다. 혹 무료할 수도 있는 그 시간 속에는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간다. 쓸데없는 가십거리도 많지만 그 안에서 스토리텔링이 이루어진다.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어 들려주는 사람과 맞장구를 치며 재미있게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 이 전통은 조선시대 소설 읽어주던 이야기꾼들과 둘러앉아 이야기에 몰두하던 사람들이 앉아있던 규방 풍경에서 찾을 수 있다. 또한 근대 이후에 영화관에서 무성 영화에 이야기를 덧씌우던 변사들과 그의 연기에 울고 웃고 하던 서민들의 모습과도 닮아 있다. 찜질방, 규방, 극장이라는 공간은 이야기를 만들고 소비하는 대중들의 후끈한 열기로 가득 차 있다.
지금 전 세계는 우리가 만들어낸 서사에 함께 공감하고 환호를 보내고 있다. 그것은 스스로 폄하하고 비하했던 우리들의 일그러진 모습들이다. 그 뿌리는 이처럼 우리가 일상에서 만들어낸 것들이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함께 영화를 많이 본 나는 영화 보기를 즐긴다. 동네에서는 남편과 개봉영화들을 보고, 시간 나는 대로 씨네큐브에 가서 여러 다양성 영화들을 본다. 이번 여름에는 웨스 앤더슨의 애스터로이드시티를 3번이나 보았다. 3번 다 졸아서 아직 이해를 못 하였다. 다시 보면 졸지 않을까.
도서관과 박물관·미술관(관관파)
도서관:책만 읽는 곳이 아니다
옛날의 도서관은 잊어라. 단순히 책을 보고, 빌리고 하는 1차 기능만을 하는 곳이 아니다. 모든 분야와 연령층을 대상으로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시민들을 교육하고 있다. 수원에는 20개의 도서관이 연계하여 운영되고 있다. 각각의 내용도 좋지만 연계하는 프로그램은 그 시너지 효과가 대단하다. ‘수원시민 한 책 함께 읽기’ 프로그램은 설문조사로 어른, 어린이 도서를 각각 3권씩 선정하여 모든 도서관이 함께 여러 권의 책을 구비하고, 동시에 많은 수의 시민이 같은 책 읽기를 진행하였다. 그 후에 저자의 북토크를 통하여 한 권의 책으로 수많은 인원이 함께 공감하고 생각하는 시간을 갖게 하였다. ‘최재천의 공부’ 북토크에 참가하였다. 150명 넘는 많은 관객이 같은 책을 읽고 저자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풍경은 가슴 뭉클해지는 풍경이었다. 깨어 있는 시민들을 만나는 곳이었다.
내가 글을 쓰게 된 계기도 도서관의 글쓰기 프로그램이었다. 그 후속모임에서 글을 쓰고, 품평하고, 독려하고, 삶의 활력을 찾아간다.
박물관·미술관:예술의 혼을 갖게 하다
정년을 하고 나서 1년간의 출석 수업을 통과하여 나는 중앙박물관회 회원이 되었다. 박물관에 관련된 모든 기초학문을 최고의 권위자에게서 들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 이후에는 조금 전문적으로 선택하여 1 강좌를 1년에 걸쳐 매년 들을 수 있다. 말하자면 교양학부를 거쳐 전공공부를 평생 하는 것이다. 수업을 가게 되면 이른 아침이나 한가한 시간에 박물관에 올라가 실별로 한 번씩 앉아 유물을 감상한다. 나만의 유물을 만들어 집중적으로 감상한다. 어떤 유물은 먼 시간 속의 당시를 떠올리게도 하고, 어떤 유물은 눈앞에 보이는 미적 감각만으로도 충분히 눈길을 사로잡는다. 박물관 강의를 듣고, 박물관 유물 앞에 혼자 앉아 있고 하는 시간들이 나의 영혼을 맑게 하는 느낌이다. 사람 많은 시간이나 특별전은 피한다.
미술관 나들이를 해 보면 많은 사람들이 그림을 보러 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웬만한 전시에는 항상 인파로 북적인다. 유명한 전시회는 떠밀려 다닌다. 앙드레 브라질리에 전도 마찬가지였다. 많은 사람들 틈에서 감상하였지만 나를 강하게 매료시켰다. 그간의 전시회에서는 한 번도 그림을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브라질리에 그림은 몹시 갖고 싶었다. 처음으로 A2 사이즈의 포스터를 여러 장 구매했다. 집 복도와 방에 붙여 놓고 오가며 늘 감상한다. 값싼 포스터면 어떠랴. 보기만 해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