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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인 Jan 11. 2024

방과 후 교실 풍경 2

높다고高 쓰는 순서를 아시나요?  

 수업 시간에 2학년 남학생이 나와서 높다 고를 써 보겠다고 한다. 밑에서부터 차례차례 그려 올라간다. 이유를 물으니 높은 것은 밑에서부터 차근차근 쌓아야 한단다. 순살 아파트를 짓는 아저씨들이 배워야 할 정신이다. 순간 눈물이 날 정도로 반갑다. 이런 창의력이라니. 양손으로 쌍따봉을 마구 날려준다. 본인도 무척 자랑스러워하고 친구들도 머리가 좋다고 칭찬한다. 그다음부터는 더욱 열심히 하고 관련 있는 한자를 서로 연결하며 다양하게 질문을 한다. 제발 이 창의력과 호기심이 잘 지켜지기를 바란다. 획일화된 공교육의 지뢰밭을 잘 피하기를 바란다.

수업 끝무렵에는 항상 자유롭게 나와서 좋아하는 한자를 쓰게 한다. 획도 삐뚤빼뚤 순서도 다들 엉망이다. 그래도 한 번도 획순을 강요하지 않는다. 이런 순간을 기다려 왔다. 어차피 한자는 그려야 제맛이다. 상형문자다. 이제는 한자를 분해했다가 다시 재창조해야 하는 시대다. 로고도 만들고, 뒤집어서 그려보기도 하고 다양한 시도가 요구된다. 일률적인 획순의 강요는 필요 없다. 모든 것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생각할 것. 창의력을 마음껏 펼칠 것. 스스로 길을 찾을 것.     

     

1학년 남학생 두 명이 나란히 앉아 한자를 너무 열심히 쓴다. 고개도 들지 않고 수업 시간 내내 집중한다. 뭐가 저렇게 재밌는지 신기한 마음에 가까이 가서 쓰는 것을 보니 쓱쓱 싹싹 잘 그린다. 꼬물꼬물 고사리 같은 손으로. 한자를 처음 접하는 것일 텐 데 한자 쓰는 것이 너무 좋단다. 둘이 서로 진도도 맞추고 때로는 경쟁도 하면서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보고 있는 나까지 행복해진다. 매 시간 오기 바쁘게 둘이 머리를 맞대고 쓰기에 열중한다. 일생동안 이렇게 좋은 공부 친구를 또 언제 만나게 될까. 계속 좋은 짝꿍을 만나기를 기도한다.  


1, 2학년 학생들은 수업 시작과 함께 여기저기 아프다고, 다쳤다고, 벌레가 물었다고 일제히 하소연을 하며 보여준다. 좀 심하다 싶으면 보건실로 보내고 나머지는 상비한 일회용 반창고를 붙여주고 '호야'를 해준다. 금방 표정이 밝아지고 안 아프단다. 역시 반창고와 관심은 아이들에게 만병통치약이다.

방과후 수업 과목은 학생들의 취미 활동과 기호를 맞춘 것이 대부분이다. 음악 줄넘기, 방송 댄스, 요리 등등 재미있는 것이 넘쳐난다. 다만 한자는 예외다. 공부의 연장이다. 자기가 하겠다고 해서 왔지만 연필과 책을 마주 하고 있다. 꾀병이 날만도 하다. 유튜브를 보면서 다 함께 한자송을 부르고 나면, 한자카드 맞추기 놀이도 하고, 쓰고, 외우고 각자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스스로 고르게 한다. 한 명씩 봐주면서 조금만 잘하면 폭풍 칭찬을 해준다. 물론 영혼을 실어서 해야 한다. 끊임없이 분위기를 끌어올려준다. 수업이 끝나면 거의 탈진상태다. 오늘도 하얗게 불태운다.     

 

3, 4학년 여학생들은 서너 명씩 무리를 이루어 함께 앉는다. 공부 틈틈이 무엇이 그리 재미난 지 수다도 많고 ‘까르르, 까르르’ 웃음소리가 경쾌하다. 가랑잎만 굴러도 웃는다는 사춘기다. 친구들에게 방해된다고 ‘쉿!’ 해보지만 그때뿐이다. 다시 웃음소리가 높아진다. 나까지 빙그레 웃음이 나온다. 전염된다. 싱그러운 시절을 관통하고 있는 맑은 생명들이다.

며칠 전 한 여학생이 편지를 주었다. ‘그동안 너무 시끄럽게 해서 죄송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자꾸 떠들게 되고 웃음이 나온다’ 내가 대답했다. ‘당연한 거야, 사춘기라서 그런 거야’ 아이들의 표정이 밝아진다.  

     

1년 동안 한자와 잘 놀았다. 개인 차에 따라 수확의 양은 다르지만 다들 즐거웠다. 다 함께 읽고, 외우고, 쓰고, 칠판에 써보기도 한다. 그날그날 각자가 선택한 방법으로 익힌다. 한자가 입으로 막 흘러나오고, 머릿속에서 구슬들이 굴러다닌다. 이제는 엮어서 예쁜 목걸이를 만들어 걸어야 한다.

급수시험이라는 시험의 형태는 나도 정말 다. 하지만 이제는 정리가 필요한 때. 처음으로 숙제를 내주고 그동안 했던 것을 정리하도록 한다. 학생들은 적당히 긴장도 하고 집중도 한다. 또 한 계단 올라갈 준비를 한다. 시험을 보고 나더니 다들 흡족해한다. 걱정과는 달리 쉬웠다고 한다.

‘그래, 1년 동안 한자와 열심히 놀은 결과야. 다들 수고했어. 너희들이 있어 행복한 한 해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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