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재인 Jun 20. 2024

인생은 루바토

이 나이에 덕질이라니

TV 화면에 굵은 기둥을 가진 커다란 나무가 햇빛과 바람에 나뭇잎을 여유롭게 흔들고 있는 모습이 나왔다. 임윤찬을 인터뷰하는 특별방송이었다. 임윤찬의 음악의 요체가 완벽히 이해되었다. 내가 유독 임윤찬의 연주에 마음이 움직였는지. 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좋아하는지. 임윤찬이 루바토를 설명하는 순간에 연출된 장면이었다. 리스트의 생각이란다. 근본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가장 자유롭게 흔들리는 박자. 루바토는 이태리어로 ‘훔친다’는 뜻이다. 음악에서는 박자를 이리저리 마음대로 가지고 노는 것을 말한다. 임윤찬의 연주는 바람의 흔들림을 그대로 재현해 내는, 아니 바람 그 자체이다.      


23년도 2월, 일본 베토벤 황제 연주회를 같이 갔던 후배가 통영 음악당에서 올라오는 길이라며 연락을 했다. 통영에 콘서트 표도 없이 갔다가 로비에서 감상하고 왔단다. 그래도 좋았단다. 한국에서 7번의 콘서트가 예정되어 있었지만 감히 피켓팅(피 튀기는 티켓팅)에 참전할 엄두가 나지 않아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부천아트센터의 별명은 ‘음향의 전당’. 통영 다음으로 음향이 좋다고 정평이 나있다. 개관 1년밖에 안 되었는데 유명한 연주자들이 많이 거쳐갔다. 토요일 미리 실내악을 듣고 왔다. 첼로의 잔향이 홀 전체를 감싸 안으며 끝까지 퍼져나갔다. 인상적이었다.      


임윤찬 갤러리에서는 연주회 당일날 표를 구한 이야기가 무용담처럼 올라오고 있었다. 갑자기 용기가 솟아났다. 매표구 앞에서 *거필을 들고 *부리들끼리 순번을 정하여 표를 양도받기로 한단다. 월요일, 부천 아트센터 콘서트. 당일 표를 구하기 위해 수원에서 부천까지 길을 떠났다. 평일이라는 장점 때문에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지만 크게 기대는 하지 않았다. 7시 30분 공연. 5시부터 티켓 수령이 시작된다 하여 4시 15분쯤 도착했다. 다들 거필을 목에 걸고, 손에 들고 부리임을 인증하고 있었다. 나도 거필을 꺼내어 인증하였다. 1번은 3시에 도착했단다. 평일이라고 너무 안심했다. 열혈 부리들의 실행력을 간과했다. 나는 12번이었다. 표 양도는 9번까지 이루어졌다. 조금만 일찍 올걸. 9번 10번은 모녀였는데 1부는 엄마가, 2부는 딸이 나누어 보기로 했단다. 슬기롭고 행복한 모녀다.      


생전 처음 보는 부리들은 임윤찬 음악 안에서 모두가 하나가 되었다. 대부분이 젊은 부리였다. 그간의 임윤찬의 음악을 어떻게 들었으며 직관은 몇 번이나 했는지 간증이 이어졌다. 어떤 부리는 유럽에 간 기회에 예매했는데 그 연주회가 임윤찬의 부상으로 무산되어 기회를 날렸다는. 이미 롯콘이나 통영 연주를 본 부리들도 상당했다. 이러고 다니는 거 시부모님 알면 큰일이라는 부리도. 다른 연주자들의 공연도 더 찾아보게 되었다는 부리들. 피케팅에서 성공하려면 아트센터보다 매체를 통하라는, 아트센터는 대부분 폭파된다고. 티켓의 유무를 떠나 다들 가벼운 흥분과 기쁨으로 들떠 있었다. 아 이런 사랑스러운 부리들. 나도 자연스럽게 그 무리에 속해 있었다.


표 양도가 이루어질 때마다 다들 환호와 박수로 자기 일인 양 축하해 주었다. 나이 많은 나에게는 가서 앉아 있으라며 순번 되면 부르겠다고 배려를 해주었다. 아예 2층 로비 모니터 앞에 자리를 잡았는데 1층에서는 몇 번의 환호가 계속되고 그때마다 표 양도가 꾸준히 이루어졌다. 표를 얻은 부리가 올라와서 가능할 거 같다며 내려오라 했다. 가벼운 전율이 흘렀다. 7시 30분 마지막까지 기대를 걸어보았지만 결국 실패.    

  

100명 정도의 관객이 로비 모니터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20명 정도는 자리가 없어서 서 있었다. 모두 피케팅 실패자들이다. 다들 경건한 자세로 모니터를 지켜보고 있었다. 전에 없던 로비 음악회로 난감해진 건 청소 는 분들이다. 연주가 시작되면 동시에 청소를 하는 루틴일 것이다. 100명 정도가 모니터를 뚫어져라 보면서 소리에 귀 기울이는 진풍경을 보고는 조심해 보지만 소음의 발생은 어쩔 수 없다. 밖의 차소리도 한몫한다. 소음의 한가운데로 임윤찬의 연주는 계속되고, 1부 차이코프스키 사계가 끝났다. 6월 뱃노래가  끝나고, 7월  농부의 노래부터 임윤찬의 머리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신나는 리듬에서는 온몸이 춤을 추었다. 손끝 뿐만 아니라 온 몸으로  연주를 한다. 역시 임윤찬 연주는 보아야 제맛이다. 2부 시작, 사위의 소음도 잦아들고, 청소도 끝난 듯하다. 덕분에 제법 소리에 집중할 수 있었다. 전람회의 그림이 끝났다. 마지막 곡, 키예프의 대문. 커다란 동작으로 피아노를 부수고 있다. 공연장 안은 그야말로 기립박수로 난리가 났다. 로비에서도 박수가 쏟아지고 있었다.    

  

인생은 그저 흘러가는 것일 뿐.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중심을 잃지 않을 것. 때로는 햇빛 앞에 반짝이기도 하고, 때로는 바람에 흔들리며 자유로울 것. 그렇게 살아갈 것.      


*거필:거장필통. 다이소 천 원짜리 필통. 리허설 때마다 피아노 옆에 놓여 있던 필통을 부리들이 찾아내어 임윤찬 굿즈로 등극. 가성비 가장 좋은 굿즈이다. 곰, 토끼, 고양이 중 곰 모양이다. 그 해 겨울 다이소에서 그 필통이 품절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부리들은 굿즈를 찾아 다이소를 전전했다.

*부리:갤러리에서 에부리바디의 부리를 따서 서로를 나부리, 너부리 등으로 부른다

매거진의 이전글 가미가제 정신에 의한 홀로코스트의 재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