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부: 자비의 길, 세상 속으로 - 대승보살도(大乘菩薩道)와 근원과의 합일
제19장: 마구스(Magus)와 붓다(Buddha) - 신과 대자연과 인간의 합일
1절: 르네상스 마법사, 신의 대리인이자 자연의 주인
대승보살도(大乘菩薩道)의 길이, 지혜와 자비의 두 날개로 세상의 모든 중생을 구원하려는 동양적 완성의 길을 보여준다면, 우리는 이제 서양의 정신사 속에서 이와는 다른 방식으로 신과 인간의 합일을 추구했던 또 다른 위대한 인간형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는 바로 ‘르네상스 마법사’, 즉 마구스 (Magus)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마법사’라는 단어는, 동화 속의 사악한 흑마술사나, 현실과는 동떨어진 판타지의 주인공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15세기와 16세기 유럽의 심장부에서 일어났던 르네상스 (Renaissance) 시대에, ‘마구스’는 인류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숭고하고도 완전한 인간의 이상형을 의미하는 이름이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원죄(原罪)의 굴레 속에서 신음하는 나약한 피조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신의 비밀을 탐구하는 철학자이자, 신의 뜻을 세상에 구현하는 사제이며, 마침내 신의 권능을 위임받아 자연의 질서를 다스리는 ‘신의 대리인’이자 ‘자연의 주인’이었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인간상의 탄생은, 중세의 신 중심적인 세계관이 서서히 막을 내리고, 인간의 존엄성과 가능성에 대한 새로운 믿음이 싹트던 시대적 배경 속에서 가능했습니다. 그 중심에는, 잊혀졌던 고대의 지혜, 즉 플라톤 (Platon)의 철학과 헤르메스주의 (Hermeticism)의 문헌들이 다시 빛을 보게 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탈리아 피렌체 (Firenze)의 위대한 학자, 마르실리오 피치노 (Marsilio Ficino)는 동방에만 남아있던 이 고대의 텍스트들을 라틴어로 번역하여 서양 세계에 소개했습니다. 특히 그가 번역한 『코르푸스 헤르메티쿰, Corpus Hermeticum』은, 인간이 단순한 피조물이 아니라, 그 안에 신적인 지성 (Nous)을 품고 있는 ‘죽어야만 하는 신 (mortal god)’이라는, 충격적이고도 영감에 가득 찬 비전을 제시했습니다.
이 새로운 인간 존엄의 정신을 가장 웅변적으로 선언한 인물은 바로 피치노의 제자였던 피코 델라 미란돌라 (Pico della Mirandola)입니다. 그의 유명한 저서 『인간 존엄성에 관한 연설, Oration on the Dignity of Man』에서, 그는 신이 아담을 창조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이야기합니다. “오 아담이여, 나는 너에게 정해진 거처도, 고유한 얼굴도, 특정한 임무도 주지 않았다. (…) 다른 모든 존재들의 본성은 나의 법칙 안에서 정해져 있지만, 너는 어떤 한계에도 갇히지 않고, 너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너 자신의 본성을 스스로 결정하게 될 것이다. 나는 너를 세상의 중심에 두었으니, 너는 그곳에서 세상의 모든 것을 더 쉽게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너를 하늘의 존재로도, 땅의 존재로도 만들지 않았으며, 필멸의 존재로도, 불멸의 존재로도 만들지 않았으니, 이는 네가 너 자신의 자유로운 창조자로서, 네가 원하는 어떤 형태로든 너 자신을 빚어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것은 얼마나 혁명적인 선언입니까. 인간은 더 이상 선과 악, 천사와 악마라는 정해진 틀 안에 갇힌 존재가 아닙니다. 그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위대한 카멜레온’이며, 자신의 의지에 따라 가장 낮은 짐승으로 타락할 수도, 가장 높은 천사처럼 신과 하나가 될 수도 있는, 자기 운명의 유일한 주인이 된 것입니다. 바로 이 무한한 가능성을 실현하고, 신과 자연 사이를 잇는 위대한 중재자가 되는 것이 르네상스 마법사, 즉 마구스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마구스는 어떻게 이 위대한 사명을 수행합니까. 그의 마법, 즉 ‘마기아 (magia)’는 결코 초자연적인 기적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온 우주가 보이지 않는 ‘공감 (sympathy)’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헤르메스주의의 대원칙, 즉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의 원리를 깊이 이해하고, 그 자연의 비밀스러운 힘들을 조화롭게 사용하는 ‘자연학 (Natural Philosophy)’ 혹은 ‘자연 마법 (Magia Naturalis)’에 가까웠습니다. 피치노는 우주를 하나의 거대한 류트(lute)에 비유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한 줄을 튕기면, 그와 공명하는 다른 줄이 저절로 울리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주의 모든 것, 즉 하늘의 별과 행성, 땅의 돌과 식물, 동물의 장기, 그리고 인간의 감정과 기질은 서로 보이지 않는 공감의 힘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마구스는, 이 연결의 법칙을 아는 자입니다. 그는 특정한 행성의 기운을 담고 있는 식물이나 보석을 사용하여, 인간의 몸과 마음속에 있는 그 행성의 기운을 강화하거나 약화시킬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는 우울증 (melancholy)을 앓고 있는 사람을 치유하기 위해, 우울함의 근원인 토성 (Saturn)의 차가운 기운을 중화시키려 했습니다. 그는 이를 위해 토성과 반대되는, 밝고 따뜻한 기운을 지닌 태양 (Sun)이나 목성 (Jupiter)의 힘을 빌려오고자 했습니다. 그는 점성술을 통해 목성의 기운이 가장 강해지는 날과 시간을 선택하고, 목성을 상징하는 색깔인 자수정색 옷을 입고, 목성을 상징하는 보석을 몸에 지닙니다. 그리고는 목성의 조화로운 기운을 담고 있다고 믿어지는 음악, 즉 고대의 ‘오르페우스 찬가 (Orphic Hymns)’를 노래하고 연주합니다. 이 모든 행위는, 우주라는 거대한 교향곡 속에서 불협화음을 내고 있는 한 개인의 영혼을, 다시 전체의 조화로운 리듬 속에 맞추려는, 일종의 ‘우주적 심리치료’였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가장 박식한 마법사 중 한 명이었던 하인리히 코르넬리우스 아그리파 (Heinrich Cornelius Agrippa)는 그의 대작 『비의 철학 삼서, De occulta philosophia libri tres』에서, 이러한 마법의 체계를 세 가지의 위계로 나누어 집대성했습니다. 가장 낮은 단계는 원소와 자연물들의 숨겨진 힘을 다루는 ‘자연 마법’입니다. 그 위에는 행성과 별들의 천상적 기운을 끌어내리는 ‘천상 마법’이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높은 단계에는, 카발라 (Kabbalah)의 지혜를 사용하여 천사들과 소통하고, 궁극적으로는 신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의식 마법 (Ceremonial Magic)’ 혹은 ‘신성 마법 (Divine Magic)’이 있습니다. 마구스는 이 세 개의 세계, 즉 물질계와 천상계, 그리고 신성계를 자유롭게 오르내리며, 그 모든 차원의 힘을 조화롭게 사용하여 자신과 세계를 완성시키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위대한 힘에는 언제나 그만큼의 위험이 따르는 법입니다. 르네상스 마법사들은, 자신들의 신성한 기술 (theurgy)과, 단지 개인적인 욕망을 위해 악마나 저급한 영들을 부리는 이기적인 ‘흑마술 (goetia)’ 혹은 ‘요술 (sorcery)’을 엄격하게 구분했습니다. 진정한 마구스는, 이러한 힘을 사용하기에 앞서, 반드시 자기 자신을 정화하는 도덕적이고 철학적인 수행을 거쳐야만 했습니다. 그의 마음이 탐욕과 교만으로 가득 차 있다면, 그가 불러내는 천상의 힘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될 것이며, 그는 자신이 다스리려 했던 그 힘의 노예가 되어 파멸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검증되지 않은 ‘영적인 힘’을 가졌다고 주장하며 사람들을 현혹하는 수많은 거짓 스승들에게 가장 날카로운 경고가 됩니다. 그들은 ‘우주의 비밀’을 알려주겠다며 비싼 세미나를 열고, ‘에너지 힐링’이나 ‘기적 체험’을 약속하며 사람들의 돈과 영혼을 착취합니다. 그들은 마구스의 길 중에서, ‘힘’과 ‘지배’라는 가장 매력적인 측면만을 훔쳐내어, 그것을 얻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자기 정화’와 ‘윤리적 책임’이라는 가장 중요한 부분을 삭제해 버립니다. 그들은 신의 대리인이 아니라, 자신의 에고를 신의 자리에 올려놓으려는 사기꾼에 불과합니다. 진정한 마구스는 힘을 ‘추구’하는 자가 아니라, 스스로를 비우고 정화하여, 신의 힘이 자신을 통해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하는 ‘통로’가 되는 자입니다.
르네상스의 마구스는 중세의 나약한 인간상을 극복하고, 신과 같은 존엄성과 창조적 자유를 지닌 새로운 인간의 이상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세상으로부터 도피하여 개인의 구원만을 찾는 소극적인 순례자가 아닙니다. 그는 우주의 모든 비밀을 탐구하고, 그 지식을 바탕으로 자연의 힘을 다스리며, 마침내 이 땅 위에 신의 조화로운 질서를 구현하려는 적극적인 창조의 동반자입니다. 그의 길은, 개인의 완성을 넘어 세계의 완성으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보살의 길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길이 신의 ‘대리인’이자 자연의 ‘주인’이 되려는, 강력한 의지의 길이었다면, 이제 우리가 살펴볼 붓다 (Buddha)의 길은, 그 ‘주인’이라는 관념마저도 소멸시키는, 전혀 다른 차원의 합일을 우리에게 보여줄 것입니다.
2절: 붓다(Buddha),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한 존재
르네상스의 마구스 (Magus)가, 신의 권능을 위임받아 자연의 주인이 되려는, 인간 의지의 가장 장엄한 비상을 보여주었다면, 이제 우리는 동양의 지혜가 제시하는 또 다른 형태의 완성된 인간, 즉 붓다 (Buddha)의 모습을 마주하게 됩니다. 붓다는 산스크리트어로 ‘깨어난 자’를 의미합니다. 그는 세상을 지배하거나 자연을 조종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는 오히려, 세상 모든 존재가 무명 (無明, avidyā)이라는 깊은 잠에 빠져 고통의 악몽을 꾸고 있음을 보았고, 그 꿈에서 완전히 깨어나, 존재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게 된 존재입니다. 그의 위대함은 힘의 행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앎’과 그 앎에서 비롯되는 무한한 ‘자비’에 있습니다. 붓다는 신의 대리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곧 깨어난 진리 그 자체가 된 사람입니다.
우리가 붓다라는 존재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2,600여 년 전 인도의 특정 왕자로 태어났던 역사적 인물, 싯다르타 고타마 (Siddhārtha Gautama)를 넘어, 그가 성취한 ‘붓다됨 (Buddhahood)’이라는 우주적인 상태 그 자체를 탐구해야 합니다. 대승 불교 (大乘佛敎, Mahāyāna)의 심오한 통찰은, 이 ‘붓다됨’의 상태가 세 가지의 다른 차원, 즉 삼신 (三身, Trikāya)의 모습으로 현현(顯現)한다고 가르칩니다. 이 세 가지 몸은, 깨달음이라는 하나의 실재가 어떻게 절대적인 차원과, 신성한 차원, 그리고 역사적인 차원에서 동시에 작용하는지를 보여주는 위대한 지도입니다.
그 첫 번째이자 가장 근원적인 몸은 법신 (法身, Dharmakāya), 즉 ‘진리의 몸’입니다. 법신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모든 형태와 개념을 초월한, 붓다의 궁극적인 본질입니다. 그것은 눈으로 볼 수도, 손으로 만질 수도, 심지어는 마음으로 상상할 수도 없는, 완전한 비현현(非顯現)의 상태입니다. 그것은 나가르주나 (Nāgārjuna)가 말했던 ‘공 (空, Śūnyatā)’의 다른 이름이며, 모든 것이 비롯되었으나 그 자체는 태어난 적이 없는 ‘불생불멸 (不生不滅)’의 실재입니다. 카발라 (Kabbalah)의 언어로 말하자면 ‘아인 소프 (Ein Sof)’의 침묵과도 같고, 서양 신비주의의 언어로 말하자면 ‘신성 (Godhead)’ 그 자체와도 같습니다. 이 법신이야말로 모든 붓다들이 공통적으로 공유하는 하나의 바탕이며, 그들이 성취한 깨달음의 절대적인 본체입니다. 법신은 아무런 형상이 없기에, 어떠한 형상으로도 나타날 수 있는 무한한 잠재력 그 자체입니다.
이 무한한 잠재력의 법신으로부터, 자비의 동력에 의해 하나의 빛나는 형상이 드러납니다. 그것이 바로 두 번째 몸인 보신 (報身, Sambhogakāya), 즉 ‘과보(果報)의 몸’ 혹은 ‘지복(至福)의 몸’입니다. 이것은 붓다가 수억 겁의 시간 동안 쌓아온 무한한 공덕과 수행의 결과로 얻게 된, 순수한 에너지와 빛으로 이루어진 신성한 몸입니다. 이 보신의 붓다는 우리의 육안으로는 볼 수 없으며, 오직 정토(淨土, Pure Land)와 같은 고차원의 세계에서, 깨달음의 높은 단계에 이른 보살 (Bodhisattva)들을 위해 그 모습을 드러내어 심오한 가르침을 설파합니다. 아미타불 (Amitābha)이나 비로자나불 (Vairocana)과 같은 수많은 부처님들의 장엄하고도 빛나는 모습이 바로 이 보신의 현현입니다. 그의 몸의 모든 모공에서는 헤아릴 수 없는 세계가 펼쳐지고, 그의 음성은 온 우주에 동시에 울려 퍼지며, 그의 마음은 모든 존재를 향한 지극한 자비와 환희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이토록 영광스러운 보신불마저도, 아직 고통의 세계 속에 있는 평범한 중생들에게는 너무나도 멀고 눈부신 존재입니다. 따라서 붓다의 위대한 자비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와 똑같은 모습의 육체를 가지고 이 땅 위에 나타납니다. 이것이 바로 세 번째 몸인 화신 (化身, Nirmāṇakāya), 즉 ‘변화하여 나타난 몸’입니다. 화신은, 마치 하늘에 떠 있는 달(법신)이, 지상의 모든 강과 연못(중생의 근기)에 자신의 모습을 차별 없이 비추는 것과 같습니다. 연못의 크기와 모양, 그리고 물의 맑기에 따라 달의 모습은 각기 다르게 비치지만, 그 본질은 하늘의 달과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붓다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편으로서, 왕자의 모습으로, 수행자의 모습으로, 혹은 때로는 평범한 사람의 모습으로 기꺼이 자신을 드러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 인물, 싯다르타 고타마는 바로 이 화신의 가장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는 우리처럼 음식을 먹고, 잠을 자고, 늙고 병드는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그의 마음은 언제나 법신(法身)의 고요한 평화 속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이처럼 세 가지 몸을 통해 드러나는 붓다의 경지는, 몇 가지의 완전한 덕성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그 첫째는 ‘완전한 지혜 (般若, 반야, Prajñā)’입니다. 그는 우주의 모든 현상이 연기(緣起)의 법칙에 따라 어떻게 일어나고 사라지는지를 남김없이 꿰뚫어 봅니다. 그의 전지(全知)함은 세상의 모든 자질구레한 정보를 아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가장 근본적인 문법을 아는 것입니다.
둘째는 ‘위대한 자비 (大悲, 대비, Mahākaruṇā)’입니다. 그의 자비는 감상적인 동정심이나 ‘선택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존재가 ‘나’와 근본적으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지혜에서 비롯된, 무조건적이고도 필연적인 마음의 작용입니다. 그의 자비는 마치 태양이 선인과 악인을 가리지 않고 모든 존재 위에 평등하게 빛을 비추는 것과 같습니다.
셋째는 ‘능숙한 방편 (方便, 방편, upāya)’입니다. 그는 중생들의 각기 다른 성향과 수준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들에게 가장 이로운 방식으로 가르침을 펼칠 수 있는 무한한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러한 진정한 붓다의 모습은, 역사 속에서 그리고 오늘날에도 끊임없이 나타나는 수많은 ‘거짓 붓다’들의 모습과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거짓 스승 혹은 사이비 교주들은, 스스로를 ‘살아있는 붓다’ 혹은 ‘재림한 메시아’라고 칭하며, 제자들에게 자신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숭배를 강요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붓다는 결코 자기 자신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그는 언제나 ‘길’이요 ‘진리’인 법(Dharma) 그 자체를 가리키며, 제자들에게 “너희 자신을 등불로 삼고, 법을 등불로 삼으라 (自燈明 法燈明, 자등명 법등명)”고 말합니다. 거짓 스승은 제자들을 자신에게 영원히 의존하는 노예로 만들지만, 진정한 붓다는 제자들이 스스로 깨달아 스승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독립적인 자유인으로 만듭니다.
또한, 거짓 스승들은 종종 기적이나 초능력 (siddhi)을 과시하여 사람들을 현혹하려 합니다. 그들은 병을 고치고, 미래를 예언하며, 물질을 만들어내는 등의 행위를 통해 자신의 신성함을 증명하려 합니다. 그러나 붓다에게 있어, 가장 위대한 기적은 병든 몸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무지에 빠진 마음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그는 제자들이 초능력과 같은 부수적인 것에 집착하는 것을 항상 경계시켰으며, 오직 고통의 소멸이라는 실질적인 목표에만 집중하도록 이끌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붓다라는 존재는 우리가 숭배해야 할 저 멀리 있는 신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내면에 잠들어 있는 궁극적인 ‘가능성’의 이름입니다. 그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장 치열한 자기 성찰과 자비로운 실천을 통해, 모든 고통과 한계를 넘어 완전한 지혜와 자유를 성취할 수 있음을 온몸으로 증명해 보인 위대한 선구자입니다. 마구스 (Magus)가 이성과 의지의 힘을 통해 자연의 주인이 되고 신의 동반자가 되려 했다면, 붓다는 모든 의지와 자아마저도 비워냄으로써, 자기 자신이 곧 우주적인 진리이자 자비 그 자체가 되었습니다. 그의 길은 ‘무언가를 성취하는’ 길이 아니라, ‘모든 것을 내려놓는’ 길이며, 바로 그 완전한 비움 속에서 가장 위대한 충만을 발견하는 길입니다. 그의 존재는, 신과 인간의 합일이 인간의 상승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소멸’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가장 심오하고도 아름다운 역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3절: 신성합일(Theurgy): 인간이 신의 일을 행하는 경지
르네상스의 마구스 (Magus)와 동양의 붓다 (Buddha)는 각기 다른 길을 걸었지만, 그들의 여정은 결국 ‘완성된 인간’이라는 하나의 눈부신 봉우리에서 만납니다. 그들은 모두 개인적인 자아의 한계를 넘어, 우주적인 실재와 깊은 합일을 이룬 존재들입니다. 그렇다면 이 합일의 상태에 도달한 자는, 그 이후에 어떻게 살아갑니까. 그의 모든 행위는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서양 비의 (秘儀, Esoteric) 전통의 가장 심오한 대답은 바로 ‘신성합일 (神聖合一, Theurgy)’이라는 개념 속에 담겨 있습니다. 그리스어로 ‘신 (theos)’과 ‘일 (ergon)’의 합성어인 테우르기아 (theourgia), 즉 ‘신적인 작업’을 의미하는 이 말은, 인간이 더 이상 자신의 유한한 의지로 행동하는 것을 넘어, 신의 의지가 자신을 통해 직접 이 세상에 구현되도록 하는, 가장 높은 차원의 마법이자 가장 완전한 형태의 봉사입니다.
이 신성합일의 길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그것의 그림자인 ‘흑마법 (goetia)’ 혹은 ‘요술 (sorcery)’과 명확한 선을 그어야만 합니다. 역사 속의 수많은 이야기들과 오늘날의 거짓 영성가들은, 마법을 종종 개인적인 욕망을 성취하기 위한 기술로 묘사합니다. 그들은 특정한 주문이나 의식을 통해, 영적인 존재들을 ‘호출’하고 ‘강제’하여, 부와 권력, 혹은 타인의 사랑을 얻어내려 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에고(ego)를 만족시키기 위해, 보이지 않는 세계의 힘을 ‘이용’하려는 시도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결국 그 힘의 노예가 되는 길입니다. 자신의 정화되지 않은 욕망을 동력으로 삼는 자는, 그와 비슷한 수준의 저급한 영들과 거래하게 되며, 결국에는 자신이 통제하려 했던 그 어둠의 힘에 의해 잠식당하고 맙니다.
그러나 진정한 신성합일, 즉 테우르기아의 길은 이와 정반대의 방향을 향합니다. 그것은 신을 ‘이용’하는 기술이 아니라, 신에게 ‘이용당하는’ 기술입니다. 이 길을 걷는 마법사, 즉 테우르기스트(theurgist)의 첫 번째 과업은, 자신의 모든 개인적인 욕망과 편견, 그리고 불순한 생각들을 남김없이 정화하는 것입니다. 그는 연금술 (Alchemy)의 니그레도 (Nigredo)와 알베도 (Albedo)의 과정을 거쳐, 자기 자신이라는 그릇을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하고 투명하게 닦아냅니다. 그의 목표는, 자신의 그릇을 비워, 그 안에 신성한 존재가 기꺼이 내려와 머물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는 신에게 무언가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는 단지, “저의 의지가 아니라, 당신의 의지가 저를 통해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할 뿐입니다.
이러한 경지는 후기 신플라톤주의 (Neoplatonism)의 위대한 철학자, 이암블리코스 (Iamblichus)에 의해 체계화되었습니다. 그는 스승이었던 플로티노스 (Plotinus)가 오직 지적인 관상(觀想)만으로 신과의 합일이 가능하다고 본 것과는 달리, 인간이 육체라는 물질적 조건 속에 있는 한, 반드시 구체적인 의례 행위(ritual)를 통해 신과 소통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가 말하는 의례란,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상징물을 사용하여, 신성한 이름을 노래하는 등의 구체적인 행위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행위의 목적은 신을 감동시켜 무언가를 얻어내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주에 편재하는 신성한 힘들과 인간의 영혼을 동일한 주파수로 ‘조율(attunement)’하는 과정입니다. 마구스가 목성 (Jupiter)의 자비로운 기운을 끌어당기기 위해 목성의 상징물을 사용하고 목성의 찬가를 노래할 때, 그는 목성의 신을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영혼을 목성의 주파수에 맞추어 스스로 ‘목성적인 존재’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 자신을 완벽하게 정화하고 조율하여, 신을 담는 깨끗한 그릇이 된 자, 그가 바로 진정한 마구스입니다. 그의 모든 행위는 이제 더 이상 개인의 행위가 아닙니다. 그가 걷는 것은 신이 걷는 것이고, 그가 말하는 것은 신이 말하는 것이며, 그가 행하는 치유는 신의 자비가 그를 통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는 마치 잘 만들어진 악기와 같아서, 위대한 연주자인 신이 그를 통해 우주의 교향곡을 자유롭게 연주합니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작은 의지를 관철시키려 애쓰지 않으며, 그저 우주적인 신의 의지가 자신을 통해 가장 조화롭게 구현되도록 스스로를 내어 맡길 뿐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신의 대리인’이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이며,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차원의 자유이자 능력입니다.
그렇다면, 동양의 붓다 (Buddha) 또한 이러한 신성합일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문자적인 의미에서는 아닐 것입니다. 그는 서양의 마법사처럼 의례를 통해 신적인 존재를 불러내리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도달한 경지의 본질을 들여다보면, 우리는 그가 바로 이 ‘신적인 작업’의 가장 완벽한 체현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붓다는 오랜 수행을 통해, ‘나’라는 개별적인 자아가 본래 실체가 없는 환상임을 깨달았고, 그 자아의 완전한 소멸(無我, anātman) 속에서, 형상 없는 우주적 진리 그 자체인 법신 (法身, Dharmakāya)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깨달음 이후 붓다의 모든 삶은, 더 이상 싯다르타 고타마라는 개인의 삶이 아닙니다. 그의 모든 발걸음, 모든 말 한마디, 심지어는 침묵마저도, 개인적인 의도나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를 향한 무한한 자비와 지혜의 자연스러운 발현이었습니다. 그의 행위는 곧 ‘법(Dharma)의 행위’ 그 자체였습니다. 그가 행했던 수많은 기적들 또한,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함이 아니라, 고통받는 중생들을 깨달음으로 이끌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편 (方便, upāya)’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존재 전체를, 진리가 세상에 드러나는 통로로, 그리고 자비가 세상에 흘러가는 도구로 온전히 내어놓았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붓다는 가장 완전한 의미의 테우르기스트 (theurgist), 즉 ‘붓다의 일을 행하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신성합일의 경지는 마구스와 붓다라는, 동서양의 두 위대한 인간상이 만나는 지점입니다. 그것은 ‘나’의 의지로 세상을 지배하려는 마법이 아니라, ‘나’의 의지를 비움으로써 신의 의지가 나를 통해 일하게 하는, 자기희생적인 봉사의 길입니다. 이 길은, 영적인 힘을 약속하며 추종자들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모든 거짓 스승들의 길과는 정반대의 방향을 향합니다. 거짓 스승은 제자들에게 “나를 따르라, 그러면 너희도 나처럼 강력해질 것이다”라고 말하지만, 진정한 스승은 “너 자신을 비우라, 그러면 너를 통해 더 위대한 것이 일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나’라는 작은 주어가 사라진 바로 그 자리에서, 비로소 신이라는, 혹은 법이라는 진정한 주어가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신과 인간의 진정한 합일은, 이처럼 나의 모든 것을 내어 던진 완전한 자기 포기의 순간에, 가장 눈부신 모습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4절: 깨달음의 완성: 존재의 근원과 하나 되어 세상을 비추는 등불이 되다
우리는 지금까지 신과 인간의 합일을 꿈꾸었던 동서양의 두 위대한 완성자의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한 명은 우주의 비밀을 아는 ‘지식’과 자연을 다스리는 ‘의지’를 통해, 스스로가 신의 동반자이자 세상의 주인이 되려 했던 르네상스의 마구스 (Magus)였습니다. 다른 한 명은 ‘나’라는 존재의 환상 자체를 소멸시키는 ‘지혜’와 모든 존재를 향한 ‘자비’를 통해, 자기 자신이 곧 깨어난 진리 그 자체가 된 동양의 붓다 (Buddha)였습니다. 이 두 길은 언뜻 보기에 서로 다른 방향, 즉 하나는 ‘성취’를 향하고 다른 하나는 ‘소멸’을 향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여정이 도달하는 가장 높은 정상에서, 우리는 이 두 길이 결국 하나의 동일한 경지를 각기 다른 언어로 노래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이야말로 깨달음의 진정한 완성, 즉 개별적 자아가 존재의 근원과 완전히 하나가 되어, 이제는 세상을 비추는 하나의 살아있는 등불이 되는 경지입니다.
이 완성의 경지에서, ‘나’와 ‘신’, 혹은 ‘나’와 ‘진리’ 사이의 모든 경계선은 마침내 사라집니다. 마구스는 더 이상 외부의 신에게 영감을 구하거나 그의 힘을 빌려오지 않습니다. 그의 내면에서 신적인 지성 (Nous)이 완전히 깨어났기에, 그의 생각은 곧 신의 생각이 되고, 그의 의지는 곧 신의 의지가 됩니다. 붓다 또한 더 이상 고통의 소멸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지 않습니다. 그의 존재 자체가 이미 고통이 소멸된 열반 (Nirvāṇa)이며, 그의 모든 행위는 법 (Dharma)의 자연스러운 드러남입니다. 그들은 모두, ‘나는 누구인가’라는 마지막 질문이 소멸한 자리에 서 있습니다. 왜냐하면 질문하는 ‘나’와, 대답을 주는 ‘신’ 혹은 ‘진리’가 더 이상 분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태는 ‘내가 신이 되었다’고 선언하는, 에고의 교만한 자기 신격화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오히려 그것은, ‘나’라고 불리던 작은 물방울이 자신의 경계를 완전히 포기하고 거대한 바다 그 자체가 된 상태에 가깝습니다. 물방울은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렸지만, 그 대가로 바다 전체의 깊이와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완성된 자는 자신의 개별적인 의지와 기억, 그리고 욕망을 모두 비워냈지만, 그 텅 빈 공간 속으로 온 우주의 지혜와 자비가 흘러 들어와 그를 통해 작용하게 됩니다. 그의 힘은 개인적인 성취가 아니라, 완전한 자기 포기의 결과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자신을 ‘살아있는 신’ 혹은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마스터’라고 칭하며, 제자들 위에 군림하려는 모든 거짓 스승들의 기만성을 폭로하는 지점입니다. 거짓 스승은 자신의 에고를 비우는 대신, 그것을 영적인 언어와 신비로운 능력으로 더욱 견고하게 포장합니다. 그들은 ‘나’의 위대함을 증명하기 위해 기적을 행하고, ‘나’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비밀스러운 지식을 독점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완성된 자는, 증명해야 할 ‘나’ 자체가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는 마치 텅 빈 대나무 피리와 같습니다. 피리 자체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지만, 위대한 연주자인 우주의 숨결이 그를 통해 불어올 때, 비로소 세상의 모든 영혼을 치유하는 아름다운 음악이 울려 퍼집니다. 그의 모든 행위는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를 통해 흐르는 더 위대한 실재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깨달음의 완성은, 세상으로부터 멀어지는 고립이 아니라, 세상을 향한 가장 깊고도 완전한 참여로 이어집니다. 이전까지 그의 자비와 사랑은, ‘나’라는 주체가 ‘타인’이라는 객체를 돕는, 이원론적인 구조를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나’와 ‘너’의 구분이 사라진 그의 눈에, 타인의 고통은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다른 부분에서 일어나고 있는 고통입니다. 그는 마치 자신의 몸에 난 상처를 돌보듯, 지극히 자연스럽고도 필연적으로 세상의 아픔을 치유하는 일에 자신을 내어 던집니다.
마구스는 이제 더 이상 개인적인 불멸이나 영적인 성취를 위해 마법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이해한 우주의 조화로운 법칙을 사용하여, 전쟁과 질병, 그리고 무지로 고통받는 세상을 치유하고, 이 땅 위에 천상의 질서를 구현하려는 ‘위대한 작업 (Magnum Opus)’을 수행합니다. 붓다는 개인의 열반이라는 고요한 안식에 머무르지 않고, 기꺼이 고통의 세계로 되돌아와, 중생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수억만 가지의 다른 모습(化身, 화신, Nirmāṇakāya)으로 나타나, 그들이 모두 깨달음에 이를 때까지 그들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모두, 자신이라는 등불에 기름을 채우는 것을 멈추고, 그 등불을 들어 세상의 어둠을 비추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들이 세상을 비추는 방식은, 강요나 강제가 아닙니다. 그들은 진리를 교리로서 주입하거나, 자신을 믿으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단지, ‘존재 자체’로 진리를 보여줄 뿐입니다. 붓다는 길을 걷고, 걸식을 하고, 제자들과 대화하는 모든 평범한 행위를 통해, 번뇌가 소멸된 자의 완전한 평화와 자유가 어떤 것인지를 말없이 증명했습니다. 진정한 마구스는 자신의 삶 전체를, 우주의 법칙과 조화롭게 살아가는 하나의 완벽한 예술 작품으로 빚어냄으로써, 다른 이들에게 영감과 귀감이 됩니다. 그들은 마치 거대한 태양과도 같습니다. 태양은 땅 위의 모든 식물들에게 “나를 향해 자라라”고 명령하지 않습니다. 태양은 그저 자신의 자리에서 빛과 열을 발산할 뿐이며, 모든 식물들은 그 빛을 향해 스스로, 그리고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리게 됩니다.
깨달음의 완성이란, ‘나’라는 작은 중심이 사라지고, 존재의 근원이라는 더 큰 중심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위대한 합일은, 필연적으로 세상 전체를 향한 무한한 자비와 봉사의 삶으로 귀결됩니다. 마구스와 붓다는, 서양과 동양이라는 서로 다른 문화적 토양 위에서, 이 동일한 진리를 각자의 방식으로 성취하고 보여준 인류의 위대한 두 봉우리입니다. 그들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단지 유한하고 고통스러운 피조물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의 신성을 완전히 깨워, 마침내 자기 자신이 곧 세상을 비추는 하나의 등불이 될 수 있다는 장엄한 가능성을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이 등불의 빛을 따라 걷는 것, 그리고 마침내 우리 자신의 내면에서도 그와 같은 빛을 발견하여 또 다른 등불을 켜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이 길고 긴 영혼의 순례기를 통해 나아가려는 최종적인 목적지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