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마니아 민요 《미오리짜 Miorița》에는 이름 없는 한 목동이 등장한다. 그 목동은 두 친구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양들은 슬피 울며 목동에게 이 소식을 전한다. 그러나 그는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도망칠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차분하게 자신의 죽음을 맞을 준비를 시작한다. 그리고 그는 말한다. 자신이 죽으면 양들이 풀을 뜯는 넓고 푸른 초원 위에 무덤을 세우라고, 그리고 무덤 곁에 세 개의 피리를 세워 놓아 바람이 불 때마다 피리가 스스로 울리게 하라고, 그렇게 부탁한다.
그 피리 소리는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가 세상에 남아 영원히 노래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만화 원피스의 히루루크 의사가 말했듯, "사람은 기억에서 완전히 잊히기 전까지는 진정으로 죽지 않는다"고 목동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동은 양치기 친구들에게 부탁한다. 자신이 죽었다고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고, 세상의 신부와 혼례를 치렀다고 말해 달라고, 그렇게 부탁한다. "나는 한 아름다운 공주, 곧 세상의 신부와 결혼했다"(“Că m-am însurat / C-o mândră crăiasă, / A lumii mireasă”) (Vasile Alecsandri, Miorița, Humanitas 2020, p. 57)고 말하면서.
닥터 히루루크
이렇게 루마니아 목동은 죽음 이후에야 자연과 하나 되려 하지 않았다. 그는 살아 있는 동안 이미 자연과 혼례를 올렸고, 그래서 죽음은 그에게 더 이상 두려운 사건이 될 수 없었다. 이미 자신의 존재는 자연 속에서 녹아 있었고, 자신은 바람과 별과 구름과 이미 가족이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죽음은 멀리 떨어진 낯선 일이 아니라, 친숙한 품 안으로 돌아가는 자연스러운 변화였고, 귀향이었다.
이 목동의 태도는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의 철학 개념인 아모르 파티(Amor Fati), 즉 운명애와 깊은 공명을 이루고 있다. 니체는 『즐거운 학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점점 더 배우고 싶다, 사물의 필연성을 아름다움으로 보기를… 아모르 파티, 그것이 이제부터 나의 사랑이 되게 하라!” (Friedrich Nietzsche, Die fröhliche Wissenschaft, Penguin Modern Classics 2018, p. 223) 운명을 그저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랑하고 끌어안아 창조적으로 승화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두 존재는 같으면서도 다르게 울린다. 니체의 초인은 자신의 의지와 창조적 불꽃으로 고난과 우연을 끌어안아 운명을 예술로 승화시킨다. 그는 운명을 사랑하며 그 위에서 춤춘다. 반면 미오리짜의 목동은 운명과 싸우지 않고 운명과 이미 오래전부터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목동에게 운명은 자신을 억누르는 적이 아니라, 이미 자신의 존재를 이루고 있는 내적 리듬이었다. 니체가 운명을 불꽃에 던져 새로운 빛을 창조하려 했다면, 목동은 이미 자신의 존재가 운명의 리듬과 하나 되어 있었기에 초월해야 할 경계조차 없었다.
목동은 그렇게 초인의 개념을 넘어선 존재였다. 그는 운명을 사랑하는 차원을 넘어, 전 우주와 혼례한 뒤 운명이 사라진 존재였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정도를 넘어 죽음을 삶과 함께 살아가는 존재였다. 그는 죽음과 삶 사이의 경계를 허물었고, 그래서 그는 죽음 앞에서도 초연할 수 있었다.
이러한 목동의 자세는 또한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의 정신과도 맞닿아 있다. 메멘토 모리는 라틴어로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이다. 고대 로마 시대, 어떤 개선장군이 승리에 취해 행진할 때, 한 노예가 그의 귓가에 이 말을 속삭였다. 죽음을 기억하며 삶의 교만과 허영을 버리고, 인간이 유한한 존재임을 늘 의식하여 겸허하고 충만하게 살아가라는 뜻이었다. 중세와 르네상스를 거쳐 메멘토 모리는 죽음을 삶을 완성하기 위한 가장 깊은 기억으로 간직하라고 계속 속삭였다.
그러나 미오리짜의 목동은 메멘토 모리의 깊은 속삭임을 한 걸음 더 나아가 몸으로 실천했다. 그는 죽음을 그저 기억하거나 의식하는 것을 넘어, 죽음을 삶의 리듬 속에 깊숙이 품어 안았다. 죽음을 멀리서 바라보고 기억할 필요 없이, 그는 살아 있는 동안 이미 죽음을 삶과 하나의 노래로 만들어 부르기 시작했다. 메멘토 모리가 죽음을 겸허와 회개의 계기로 삼으라고 속삭였다면, 미오리짜의 목동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우주적 삶과 하나의 리듬으로 살아내라고 말했다.
오늘날에도 루마니아 트란실바니아의 작은 마을 써르머쉘(Sărmășel)에서는 봄이 오면 청년들이 양피리를 불며 목동의 혼례를 기념한다. 그들은 목동의 노래를 다시 부르며, 삶이 짧아도 노래는 영원하다고 함께 외친다. 그 목소리들 속에 죽음과 탄생, 비극과 기쁨은 하나로 녹아들어 영원한 울림으로 다시 태어난다.
결국 우리는 미오리짜의 목동과 니체의 아모르 파티, 고대 로마의 메멘토 모리 사이에서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지혜를 듣는다. 삶이란 죽음을 잊지 않고 끌어안는 것이며, 죽음이란 삶을 더 풍성하게 노래하게 하는 기억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주어진 운명을 두려워하거나 회피하지 말고, 그 운명과 춤추며, 그 운명을 삶의 깊은 노래로 바꾸어야 한다고 그들은 계속 말한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의 삶이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완성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사람은 육체가 소멸한다고 해서 죽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기억에서 완전히 잊히기 전까지, 사람은 결코 죽지 않으며, 그 기억을 지켜주는 노래가 바로 우리가 살아 있는 이유라는 것이다.
목동의 피리 소리처럼, 니체의 운명애처럼, 메멘토 모리의 깊은 속삭임처럼, 우리도 우리 삶의 노래를 멈추지 않고 계속 불러야 한다.
살아 있는 동안 죽음을 살아내며, 죽음을 기억 속에 영원히 살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삶이자, 우리의 진정한 초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