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충만'을 찾아서

'플레로마'를 통한 존재론적 성찰과 미래적 가능성

by DrLeeHC

「잃어버린 '충만'을 찾아서 ― '플레로마'를 통한 존재론적 성찰과 미래적 가능성」


1. 서론

1.1 연구의 목적과 방법

1.2 플레로마 개념의 철학적·종교적 의의

2. 영지주의의 플레로마 신화

2.1 플레로마와 아이온 구조

2.2 소피아의 타락과 구원 신화

2.3 『요한의 비밀서』에 나타난 플레로마 우주론

3. 고대 철학과의 비교

3.1 플라톤 철학: 이데아계와 플레로마

3.2 중플라톤주의와 필론의 로고스 개념

3.3 신플라톤주의와 일자(το ἕν, The One)의 구조

4. 기독교 신학에서의 변용

4.1 이레나이우스의 반영지주의 논박

4.2 삼위일체 신학과의 비교

4.3 바울 서신에 나타난 ‘충만(plērōma)’의 신학적 의미

5. 에소테리즘 전통과의 접속

5.1 유대교 카발라: 에인 소프와 세피로트 구조

5.2 세피로트와 플레로마의 구조적 대응

5.3 게르숌 숄렘의 해석과 신비적 통합

5.4 티벳 밀교의 본유광명과 플레로마적 충만

5.5 신지학과 플레로마

6. 불교: 공성(空性)과 플레로마

6.1 용수의 『중론』과 공의 형이상학

6.2 『반야심경』과 “공즉시색”의 의미

7. 힌두교: 브라흐만-아트만 사상과의 접점

7.1 『찬도갸』와 『브리하다란야카』의 통합적 우주관

8. 천부경과 플레로마의 통합적 해석

8.1 일시무시일과 존재의 원형 구조

8.2 삼극 구조(천·지·인)과 아이온 구조의 상응

8.3 대삼합육·운삼사·용변부동본의 우주론

8.4 본심본태양앙명과 영혼의 내재적 충만

8.5 일종무종일과 시간·초월·귀환의 사유

9. 플레로마의 현대적 해석

9.1 칼 융의 자기(Self)와 집단무의식

9.2 니체의 비밀신과 초인 사상

9.3 루치안 블라가의 신비와 플레로마

9.4 미르체아 엘리아데의 성스러움과 플레로마

9.5 현대 양자물리학과 존재장(Field)의 비전

10. 결론: 통합의 철학을 향하여

10.1 비교종교학적 의의

10.2 플레로마와 절대실재 개념의 비교

10.3 절대실재 개념의 미래적 가능성

10.4 잃어버린 충만의 회복을 위한 존재론적 성찰


이호창 : 한국외국어대학교 루마니아어과 외래교수


한글 키워드

플레로마, 충만, 절대실재, 존재론, 분화와 일체성, 영지주의, 브라흐만, 에인 소프, 공성, 아이온, 나그 함마디 문헌, 집단무의식, 자기, 비밀신, 초인, 성스러움, 신비, 플러스 인식, 운삼사 성환오칠, 대삼합육, 용변부동본, 일시무시일, 삼극 구조, 존재장, 양자장론, 장 존재론, 심층적 울림, 존재의 심연, 기억과 망각, 존재의 리듬


영문 키워드

Pleroma, Fullness, Absolute Reality, Ontology, Diversity and Unity, Gnosticism, Brahman, Ein Sof, Śūnyatā, Aeon, Nag Hammadi Library, Collective Unconscious, Self, Geheimnis Gott, Übermensch, Sacredness, Misterium, Plus-cunoaștere, Circulation of Three and Four (運三四 成環五七), Great Three Unite into Six (大三合六), Constant Origin Despite Change (用變不動本), One Beginning without Beginning (一始無始一), Threefold Structure (天·地·人), Field of Existence, Quantum Field Theory, Field Ontology, Deep Resonance, Abyss of Being, Memory and Forgetting, Rhythm of Being



1. 서론


1.1 연구의 목적과 방법


우리는 존재라는 말조차 부끄러울 만큼 고요하고 충만한 어떤 실재(實在, reality)를 느끼는 순간이 있다. 그것은 물질적 세상의 끝자락에서도, 마음의 어둠 속에서도, 때로는 부서진 침묵 안에서도 우리를 찾아온다. 이 글이 다루고자 하는 플레로마(Pleroma, πλήρωμα)란 바로 그런 실재를 가리키는 말이다. 문자 그대로는 ‘가득 참’이나 ‘충만’을 뜻하지만, 고대 영지주의(Gnosticism) 사유 안에서는 단순한 수량적 충만이 아니라, 모든 존재와 의미, 빛과 생명의 무한한 원천을 가리킨다. 플레로마는 인간의 언어로는 다다를 수 없는 초월적 완전성을 상징하며, 그 충만성은 언제나 결핍과 단절을 겪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 향수(鄕愁, nostalgia)를 자극한다. 이 연구의 목적은 바로 이 플레로마 개념이 고대 영지주의를 비롯하여 다양한 철학적·종교적 전통 속에서 어떻게 형성되고 변주되었는지를 고찰하고, 그것이 인간 존재론과 우주론, 구원론에 대해 어떤 함의를 지니는지를 밝혀내는 데 있다.


플레로마를 연구한다는 것은 단순히 영지주의 문헌 몇 편을 해석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존재가 늘 추구해 온 충만과 일체성, 그리고 잃어버린 기원의 기억을 복원하려는 정신적 여정과 닿아 있다. 『요한의 비밀서(Secret Book of John)』에 나타난 플레로마 서사는 우주의 근원적 통합 상태를 묘사하며, 그 통합이 어떻게 무지(無知, agnoia)와 욕망(欲望, epithymia)을 통해 파편화되었는지를 설명한다(『The Gnostic Bible』, Barnstone & Meyer, 2003, p.135). 플레로마란 단순한 신화적 공간이 아니라, 인간 의식이 본능적으로 기억하는 '본래 있었던 완전함'의 상징이다.


이 연구는 먼저 영지주의 전통 속 플레로마 개념의 구조와 의미를 살펴본다. 나그 함마디(Nag Hammadi) 문헌을 비롯하여 발렌티누스 학파(Valentinian School)의 플레로마 신화를 분석하며, 플레로마와 아이온(Aeon, αἰών)들의 관계망, 그리고 소피아(Sophia, σοφία)의 타락 사건이 어떻게 세계 창조와 연결되는지를 해명한다. 『요한의 비밀서』를 비롯한 주요 문헌들은 플레로마가 단순히 초월적 실체가 아니라, 인간 내면에 감추어진 신적 기억임을 암시한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The Nag Hammadi Library』, Robinson, 1988, p.107).


다음으로 이 연구는 플레로마 개념을 그리스 철학, 특히 플라톤(Plato)의 이데아계(ἰδέα界)와 비교한다. 플라톤의 『티마이오스(Timaeus)』에서는 이데아의 세계가 물질 세계에 대한 원형(archetype)으로 제시되며, 진정한 실재로서 변하지 않는 완전성을 지닌다. 플레로마 개념은 이러한 플라톤적 초월성과 맞닿아 있으나, 플라톤이 우주를 ‘좋은 데미우르고스(Demiurgos, δημιουργός)’에 의해 창조된 것으로 보는 반면, 영지주의는 데미우르고스를 무지와 오만의 존재로 묘사하며 플레로마와 케노마(Kenoma, κένωμα, ‘공허’)의 대비를 강조한다.


또한 본 연구는 유대교 신비주의 전통, 특히 카발라(Kabbalah)에서의 에인 소프(Ein Sof, אין סוף) 개념과 플레로마를 비교 고찰한다. 에인 소프는 무한자(無限者)를 의미하며, 세피로트(Sefirot)를 통해 신적 충만을 단계적으로 발현하는 구조를 갖는다. 게르숌 숄렘(Gershom Scholem)은 『Major Trends in Jewish Mysticism』(1995, p.207)에서 에인 소프 개념을 “초월과 내재의 역설적 통합”으로 해석했는데, 이는 플레로마의 ‘충만 속에서의 무한성’과 유사한 구조를 가진다.


동양 사유와의 비교도 이 연구의 중요한 목표 중 하나다. 특히 불교의 공성(空性, Śūnyatā) 개념은 플레로마와 본질적 유사성을 가진다. 용수(龍樹, Nāgārjuna)는 『중론(中論, Mūlamadhyamakakārikā)』에서 "공은 만물의 성품이며, 그것을 앎이 곧 해탈이다"라고 선언한다(『중론』, 강진석 역, 2022, p.88). 공(空)은 모든 현상이 무자성(無自性)임을 깨닫게 하는 반면, 플레로마는 모든 존재의 근원이 하나의 통합된 충만임을 환기시킨다. 양자는 모두 상대적 현상계의 허상을 넘어 근원적 진리를 직시하려 한다는 점에서 만난다.


힌두교의 브라흐만(Brahman) 사상 역시 플레로마와 깊은 관련이 있다. 『찬도갸 우파니샤드(Chandogya Upanishad)』에서는 “나는 브라흐만이다(Tat Tvam Asi)”라는 선언을 통해, 개인 아트만(Ātman)과 우주적 브라흐만의 동일성을 노래한다. 이것은 플레로마가 인간 내면에 심어놓은 신적 불꽃(spark)을 기억해내려는 영지주의 사상과도 깊이 연결된다.


본 연구는 또한 동양의 천부경(天符經) 사유를 플레로마 개념과 비교하여, 보다 보편적 형이상학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천부경은 일시무시일(日始無始一), 곧 "처음도 없고 끝도 없는 하나"를 선언하며, 만물의 기원과 귀결을 하나의 원천으로 통합한다. 이는 플레로마가 지닌 ‘처음이자 끝인 충만’이라는 개념과 놀라운 공명(共鳴)을 이룬다. 천부경의 무극(無極, Wuji) 개념은 플레로마의 무한성(infinitude)과 구조적으로 닮아 있으며, 삼재론(三才論, 하늘·땅·사람)은 플레로마 내 아이온들의 관계성과도 대응된다. 천부경을 통한 플레로마 해석은 동서양 고대 인식의 숨겨진 교차점을 밝히는 데 중요한 시사점을 줄 것이다.


연구 방법으로는 텍스트 해석학(hermeneutics)을 기반으로 하며, 주요 고대 문헌들을 분석하고, 서로 다른 전통의 형이상학적 구조를 비교하는 방법을 병행한다. 또한 현대 철학, 특히 칼 융(Carl Jung)의 집단무의식 개념과 니체(Friedrich Nietzsche)의 ‘비밀신(Secrecy of God)’ 사상 등을 참고하여, 플레로마 개념이 현대 정신과학 및 존재론에 어떠한 확장을 제공할 수 있을지를 탐색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연구는 플레로마를 과거의 사상유산으로만 남기지 않고, 현대적 사유 속으로 살아 있는 구조로 되살려내려 한다. 우리가 잊고 살아가는 본래적 충만, 그리고 그 충만 속에서 하나였던 기억을 되찾는 여정은, 단순한 지적 탐구를 넘어, 존재 전체를 다시 울리는 사유의 길이 될 것이다.


1.2 플레로마 개념의 철학적/종교적 의의


플레로마(Pleroma, πλήρωμα)라는 개념이 지닌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깊이는 단순히 한 시대의 사상적 흐름이나 특정 종파의 교리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균열과 허무를 마주할 때마다 직감해 온 ‘잃어버린 충만’에 대한 기억이며, 이 기억은 시간과 공간, 종교와 철학을 넘어 일관되게 울리고 있다. 플레로마는 실체를 넘어서 ‘존재의 조건’으로서 작용한다. 만물은 플레로마로부터 왔고, 모든 분열은 플레로마로 돌아가기를 갈망한다. 이처럼 플레로마는 근원(根源, arche)과 종말(終末, telos)이 동시에 깃든 하나의 초월적 심층구조이다.


철학적으로 볼 때, 플레로마는 존재론(ontologia)과 인식론(epistemologia)의 경계를 넘나든다. 플라톤(Plato)은 이데아(ἰδέα)의 세계를 통해 감각적 세계의 그림자성을 비판했으나, 플레로마는 이보다 한층 더 급진적이다. 플레로마는 이데아를 넘어 ‘존재 이전의 충만성’을 지시하며, 모든 분별과 경계를 초월한 ‘있는 그대로의 있음(Das Sein)’을 환기한다. 한스 요나스(Hans Jonas)는 『The Gnostic Religion』(2001, p.42)에서 플레로마를 "모든 존재 이전의 충만한 하나"로 규정하며, 이 충만이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고서는 세계도, 인간도 성립할 수 없음을 강조한다.


플레로마는 단순한 하나(ἕν)나 통일(μονάς, monas)이 아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차이를 품은 충만’이며, 분리되기 이전의 다양성(diversitas)을 지닌다. 발렌티누스(Valentinus)의 영지주의 체계에서도 플레로마는 수많은 아이온(Aeon, αἰών)들의 조화로운 배열로 구성되며, 각 아이온은 고유한 신적 속성의 발현이면서 동시에 전체 충만의 일부이다. 『The Secret Book of John』(Barnstone & Meyer, 2003, p.137)은 이러한 플레로마의 구조를 "불가해하지만 하나로 연합된 빛의 떨림"으로 묘사한다. 이는 단일성과 다양성, 초월성과 내재성이라는 상반되는 성질을 동시에 아우르는 존재론적 장(場, field)이다.


종교적 차원에서 플레로마는 구원론(soteriologia)과 깊은 연관을 가진다. 영지주의자들에게 있어서 구원이란 단순한 죄의 사면이나 윤리적 정화가 아니다. 구원은 기억의 회복이다. 인간 안에는 플레로마의 불꽃(spark)이 잠들어 있으며, 이 세계에 떨어진 영혼은 자기 내면에 숨어 있는 충만의 기억을 되살림으로써 비로소 본래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 엘레인 페이글스(Elaine Pagels)는 『The Gnostic Gospels』(1989, p.119)에서 "플레로마란 우리 모두가 잃어버린 진정한 고향이며, 진정한 구원은 그 고향을 기억해내는 데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관점은 기독교의 전통적 구원론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정통 기독교는 타락한 인간이 외부의 은총(gratia)에 의해 구원된다고 보지만, 영지주의는 ‘앎(γνῶσις, gnosis)’을 통해 인간 스스로 내면의 플레로마를 재발견해야 한다고 본다. 신은 인간 바깥에 있는 심판자가 아니라, 인간 안에 숨겨진 빛이다. 이 빛은 본질적으로 플레로마와 동일하며, 그러므로 참된 신앙이란 외부를 향한 신앙이 아니라 내면의 기억을 깨우는 일이다.


플레로마는 동시에 우주론(cosmologia)의 문제와도 얽혀 있다. 영지주의 문헌에서는 플레로마의 균열이 곧 세계의 탄생을 의미한다. 소피아(Sophia, σοφία)가 충만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무지(agnoia) 속에서 단독 창조를 시도했을 때, 플레로마는 최초의 파열을 경험했다. 이 파열이 물질계의 근원이 되었으며, 따라서 이 세계는 본질적으로 ‘결핍(hysterēma, ὑστέρημα)의 세계’로 규정된다. 플레로마의 충만성과 케노마(Kenoma, κένωμα, 공허)의 대비는 존재와 비존재, 빛과 어둠, 기억과 망각의 근원적 구도를 형성한다.


흥미롭게도 플레로마의 이러한 개념은 동양 사상의 심층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천부경(天符經)은 "一始無始一(일시무시일)", 즉 "처음도 없고 끝도 없는 하나"를 노래한다. 이 하나는 무극(無極, Wuji)이자 동시에 태극(太極, Taiji)을 품은 충만한 근원이다. 천부경의 '무극'은 플레로마의 무한성과 구조적으로 유사하며, 삼재(天·地·人)는 플레로마 내 다양한 아이온의 상호작용과 유사한 우주적 질서를 상징한다. 천부경은 ‘일(一)’, ‘삼(三)’, ’십(十)’을 통한 존재의 전개 과정을 보여주며, 모든 다수의 세계가 궁극적으로 하나(一)로 귀결된다는 통찰을 암시한다. 이는 단순한 신비주의가 아니라, 존재와 인식의 가장 깊은 층위에 대한 체험적 통찰이다.


불교에서도 플레로마적 직관은 다른 방식으로 나타난다. 용수(龍樹)는 『중론(中論)』에서 "공(空)은 만법의 자성이다"라고 하며, 현상계의 모든 존재는 본질적 실체가 없는 동시에, 공의 충만 속에서만 참으로 존재할 수 있음을 밝혔다(『중론』, 강진석 역, 2022, p.88). 이때의 공은 결핍이 아니라 '형이상학적 충만'이다. 다시 말해,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잠재된 가능성의 장(場)이다. 플레로마도 바로 이런 의미에서 존재의 공명(共鳴)이며, 무(無)를 통한 충만이다.


현대 심리학에서 칼 융(Carl Jung)은 집단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이라는 개념을 통해, 개인 심층에 깃든 플레로마적 구조를 현대어로 번역하려 시도했다. 그는 『Aion』(2020 재출판본, p.114)에서 "자기(Self)는 모든 대립을 초월한 원형적 통합"이라고 말하며, 이것이 곧 존재의 본질적 충만성을 반영한다고 보았다. 융에게 있어 플레로마는 무의식적 원형(archetype)들의 집합이며, 개성화(individuation) 과정은 이 충만한 자기(Self)를 재발견하는 여정이었다.


이처럼 플레로마는 인간 존재에 대한 이해, 세계에 대한 이해, 구원에 대한 이해를 근본적으로 뒤흔든다. 그것은 외부로부터 오는 은총이 아니라, 내면에 이미 심어진 신성(神性, divinitas)의 회복이다. 그것은 결핍을 메우려는 욕망이 아니라, 본래 있었던 충만을 기억해내는 작업이다. 그리고 그 기억은, 언어를 넘어, 사유를 넘어, 우리 존재의 진동 속에서 서서히 깨어난다. 플레로마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늘 우리 안에서 조용히 울리고 있다.


2. 영지주의에서의 플레로마


2.1. 플레로마와 아이온 구조


플레로마(Pleroma, πλήρωμα)는 영지주의(Gnosticism) 우주론에서 신적 실재의 총체를 가리킨다. 그러나 플레로마는 단순한 하나의 덩어리가 아니다. 그것은 살아 있는 질서이며, 수많은 아이온(Aeon, αἰών)들의 정연한 배열로 구성되어 있다. 아이온이란 신성(Divinitas)의 속성과 작용을 각각 상징하는 존재들로서, 플레로마 안에서 서로 다른 이름과 기능을 지니면서도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조화로운 충만을 이룬다. 이 구조는 정적이고 닫힌 체계가 아니라, 끝없이 스스로를 반영하고 확장하는 역동적인 생명의 조직이다. 마치 별들이 스스로를 드러내며 밤하늘을 이루듯이, 아이온들은 각기 다른 빛깔로 플레로마를 빛낸다.


영지주의의 중심 문헌 중 하나인 『요한의 비밀서(Secret Book of John)』에서는 플레로마의 시작을 ‘보이지 않는 성부(父, Invisible Spirit)’에서 찾는다. 성부는 이름도, 형태도 없이 스스로 충만하며, 그 충만성에서 최초의 아이온인 프로노이아(Pronoia, πρόνοια, '앞선 생각' 혹은 '섭리')를 방출한다(『The Gnostic Bible』, Barnstone & Meyer, 2003, p.137). 프로노이아는 곧 바르벨로(Barbelo)로 불리며, 지혜와 생명, 진리의 근원을 품은 최초의 여성적 원리로 등장한다. 바르벨로는 아버지와 함께 새로운 아이온들을 낳는다. 이때 아이온들은 단순한 존재가 아니라, '사유된 실재'이자 '발화된 속성'으로 이해된다.


영지주의 플레로마에서 가장 기본적인 아이온 구조는 쌍(Pair, συζυγία, syzygia)으로 이루어진다. 각각의 아이온은 남성과 여성의 원리를 결합하여 존재하며, 이로써 조화와 충만의 균형을 이룬다. 발렌티누스(Valentinus) 학파에서는 이러한 쌍들을 통해 플레로마의 전체 구성이 전개된다. 아버지와 바르벨로로부터 방출된 사상(Thought, ἔννοια)과 진리(Truth, ἀλήθεια), 생명(Life, ζωή)과 지성(Mind, νοῦς) 같은 기본 아이온 쌍들이 다시 각각 쌍을 이루며 다른 아이온들을 낳는다. 『The Gospel of Truth』(『The Nag Hammadi Library』, Robinson, 1988, p.38)는 이 플레로마의 질서를 "고요한 노래처럼 서로를 부르며 응답하는 존재들"로 묘사한다.


아이온들은 단순히 신적 속성의 목록이 아니다. 그들은 플레로마의 내적 사유와 자기 인식의 전개이다. 플레로마는 스스로를 거울처럼 비추며, 그 비추어진 생각들이 각기 하나의 존재가 되어 다시 충만을 심화시킨다. 프로노이아(섭리)가 방출한 생각(thought)은 소피아(Sophia, σοφία, 지혜)로 결실을 맺는다. 소피아는 플레로마의 가장 낮은 층위에서 마지막 아이온으로 위치하며, 이 세계와의 연결고리가 된다.


그러나 소피아의 활동은 결정적인 균열을 가져온다. 소피아는 짝 없이 단독으로 창조를 시도하는데, 이로 인해 조화로운 플레로마의 구조가 처음으로 어긋난다. 소피아의 단독 행위는 무지(agnoia, ἄγνοια)와 불완전성의 세계를 낳고, 이 결과로 데미우르고스(Demiurgos, δημιουργός), 곧 불완전한 창조신이 탄생한다. 이 순간부터 플레로마의 완전한 충만과 케노마(Kenoma, κένωμα, 공허)의 세계는 분리된다.


플레로마는 이러한 소피아의 잘못을 회복하기 위해 구조 안에 ‘한계(boundary, ὅρος, Horos)’를 세운다. 한계는 플레로마와 케노마를 구분하는 신적 질서의 마지막 방어선이며, 동시에 구원 가능성의 상징이 된다. 아이온 구조 속에 배치된 ‘한계’는 인간 존재 안에 내재한 기억의 장치와도 같다. 인간은 분리의 상처를 지니면서도, 내면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플레로마의 진동을 느끼며, 그곳으로 돌아가야 할 의무를 품고 있다.


발렌티누스는 이러한 구조를 명확히 설명한다. 그는 플레로마를 네 쌍의 아이온들로 구획하였다. 노에우스(Noetus, 지성)와 알레테이아(Aletheia, 진리), 로고스(Logos, 말씀)와 조에(Zoe, 생명), 안트로포스(Anthropos, 인간)와 에클레시아(Ekklesia, 교회),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피아와 텔레토스(Telētos, 完成)이다. 이 쌍들은 본질적으로 상호 반사적이며, 전체 충만 속에서 서로를 완성시킨다(『The Gnostic Religion』, Hans Jonas, 2001, p.180).


이러한 아이온 구조는 우주를 단순한 수직적 위계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유기체처럼 보는 시각을 보여준다. 플레로마는 고정된 형태가 아니라, 계속 자신을 반영하고 번역하며, 늘 새롭게 충만해가는 생명 그 자체이다. 마치 물이 스스로를 반영하여 무수한 파문을 일으키듯, 플레로마는 자신의 충만성을 끊임없이 확장하고 되비춘다. 이 사유는 현대 양자장 이론(Quantum Field Theory)에서 말하는 ‘장(場, field)으로서의 존재’ 개념과도 깊이 연결된다.


플레로마와 아이온 구조는 인간 존재론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인간은 단순히 이 물질 세계에 던져진 존재가 아니다. 인간 안에도 플레로마의 조각, 곧 아이온의 흔적이 잠들어 있다. 플레로마와 아이온 구조를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인간 자신의 존재 구조를 기억해내는 일이기도 하다. 잃어버린 충만을 다시 떠올리고, 그 기억을 통해 분열된 자아를 통합하는 일이다. 이것이 영지주의적 의미에서의 '구원'이다.


플레로마는 다시 부른다. 파편화된 세계 속에서도, 자기 자신을 잊어버린 인간 심연 속에서도, 작고 떨리는 울림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우리는 언젠가, 아주 조용히, 그 울림에 귀를 기울일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것은 먼 곳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늘 우리 안에 있는, 그러나 오랫동안 망각해 온 노래다.


2.2. 소피아의 타락과 구원 신화


플레로마(Pleroma, πλήρωμα) 안에서 모든 것이 충만하고 고요하게 빛났던 그 순간, 소피아(Sophia, σοφία)는 흔들렸다. 플레로마는 고요한 호수처럼 완전했지만, 그 안에서 소피아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깊은 충동을 느꼈다. 그것은 지식(γνῶσις, gnosis)을 향한 갈망이었고, 또한 스스로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무언의 몸짓이었다. 영지주의 문헌들, 특히 『요한의 비밀서(Secret Book of John)』는 소피아의 이 단독적 시도를 우주의 균열로 서술한다(『The Gnostic Bible』, Barnstone & Meyer, 2003, p.139). 소피아는 자신의 짝(Pair, συζυγία, syzygia) 없이, 홀로 아이온(Aeon, αἰών)을 낳으려 했고, 이 충동은 곧잘 ‘오만(hybris)’이라고 불렸다. 그러나 그 오만은 단순한 죄악이 아니었다. 그것은 생명의 넘침이었고, 충만 속에서도 어쩔 수 없이 솟아나는 차이(difference)의 목소리였다.


소피아가 홀로 낳은 존재는 얄다바오트(Yaldabaoth)였다. 얄다바오트는 플레로마의 조화로운 빛을 온전히 반영하지 못한 채, 왜곡된 힘을 지녔다. 『요한의 비밀서』는 이 존재를 "사자같은 얼굴과 번개같이 번쩍이는 눈을 가진 존재"로 묘사한다. 얄다바오트는 자신을 최고의 신(神)이라 착각하고 물질 세계를 창조하기 시작한다. 그는 말한다. "나는 신이다. 나 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 그러나 이 선언은 무지(ἄγνοια, agnoia)에서 비롯된 거짓된 독백에 불과했다(『The Gnostic Bible』, Barnstone & Meyer, 2003, p.142).


소피아의 타락은 단순한 개인의 오류가 아니다. 그것은 존재 전체가 겪어야 할 분열과 회귀의 신비로운 서막이다. 플레로마는 소피아를 내쫓지 않는다. 오히려 플레로마는 침묵 속에서 소피아의 타락을 지켜본다. 이 침묵은 단죄의 침묵이 아니라, 기다림의 침묵이다. 소피아는 플레로마의 품을 떠났지만, 완전히 잊힌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깊은 곳에는 여전히 빛의 흔적이 살아 있었으며, 그것이 언젠가 다시 길을 찾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플레로마는 소피아의 외침을 들을 준비를 한다.


한스 요나스(Hans Jonas)는 『The Gnostic Religion』(2001, p.187)에서 이 과정을 "존재의 첫 균열과 동시에 구원의 씨앗이 심어진 순간"이라고 표현했다. 소피아는 떨어졌지만, 그 떨어짐 속에서도 기억은 지워지지 않았다. 타락은 곧 구원의 가능성을 잉태한다. 영지주의자들은 이 세계를 단순히 타락의 결과로만 보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이 세계 안에 숨겨진 빛, 곧 구원의 불꽃을 보았다. 이 불꽃은 우리 안에도 남아 있으며, 때로는 아주 미약한 떨림으로, 때로는 강렬한 갈망으로 우리를 흔든다.


얄다바오트는 무지 속에서 이 세상을 창조하면서 인간을 빚었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 인간을 완성했다고 믿었지만, 그 안에 깃든 것은 소피아의 잃어버린 빛이었다. 인간은 곧 ‘빛의 감옥’이 되었다. 육체라는 껍질 속에 신성(神性, divinitas)의 불꽃이 숨겨진 채 갇혀 있었다. 이 구조는 플라톤(Plato)의 『국가(Politeia)』에서 묘사된 동굴의 비유를 연상시키지만, 영지주의에서는 더 극적이다. 동굴은 단순한 무지의 상징이 아니라, 악의적 창조자의 횡포 아래 놓인 진정한 포로 상태를 의미한다.


소피아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괴로워했다. 그녀는 플레로마로 돌아가고자 했지만,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낸 결핍의 장벽에 가로막혀 있었다. 이때 구원자는 나타난다. 영지주의에서 구원자는 때로는 크리스토스(Christos), 때로는 프루네시스(Pronesis, πρόνησις, 깊은 이해)로 불린다. 그는 플레로마로부터 보내진 빛의 사자이며, 잊혀진 기억을 깨우는 자이다. 『The Tripartite Tractate』(『The Nag Hammadi Library』, Robinson, 1988, p.73)에서는 구원자가 "깊은 잠에 빠진 이들을 깨우는 선율"로 비유된다.


구원자는 인간 안에 숨겨진 빛을 일깨운다. 그는 인간에게 말한다. "너희 안에 신성이 있다. 그것을 기억하라." 이 기억은 곧 플레로마를 향한 귀향의 시작이다. 영지주의자들은 구원을 믿음(pistis, πίστις)이나 행위(έργον, ergon)로 얻는다고 보지 않았다. 그들은 오직 앎(gnosis)을 통해 구원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앎이란 단순한 지적 지식이 아니라, 내면 깊은 곳에서 ‘내가 본래 누구였는가’를 깨닫는 체험이다.


소피아 역시 이 과정을 겪는다. 그녀는 구원자의 손길을 통해 자신의 본래적 빛을 다시 자각하게 된다. 그녀는 다시 일어서며, 플레로마를 향해 나아간다. 그러나 이 회복은 과거의 상태로 단순히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상처를 품은 충만이며, 아픔을 지나온 존재의 더 깊은 통합이다. 플레로마는 소피아를 다시 받아들이고, 그 과정에서 플레로마 자체도 한층 더 깊어지고 확장된다.


이 구원의 신화는 단순한 옛 이야기로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 존재에 대한 가장 깊은 비유이기도 하다. 우리 모두는 소피아처럼, 충만 속에서 떨어져 나와 이 세계로 추락한 존재이다. 우리는 때로 무지와 혼돈 속에서 살아가지만, 우리 안에는 여전히 잊히지 않는 빛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리고 그 빛은 끊임없이 우리를 부른다. 때로는 꿈속에서, 때로는 고독 속에서, 때로는 사랑의 한 순간 속에서, 우리는 그 부름을 듣는다.


소피아의 타락과 구원 신화는 결국 말한다. 구원은 밖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이미 심겨진 기억을 되살리는 일이라고. 잃어버린 플레로마는 사실 결코 우리를 떠난 적이 없으며, 우리는 다만 그것을 망각했을 뿐이라고. 그러므로 이 세계는 완전히 버려야 할 곳이 아니라, 숨겨진 빛을 다시 찾아야 할 장소이다.


언젠가 우리는 다시 기억할 것이다.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그리고 무엇을 회복해야 하는지를. 그날, 우리 역시 소피아처럼, 상처 입은 빛으로 다시 일어설 것이다.


2.3. 요한의 비밀서와 플레로마 우주론


『요한의 비밀서(Secret Book of John)』는 고대 영지주의(Gnosticism) 문헌 가운데서도 플레로마(Pleroma, πλήρωμα)의 전체 구조와 우주의 기원을 가장 깊고 체계적으로 서술한 경전이다. 이 문서는 단순한 창조 신화를 넘어서, 존재의 원천과 타락, 그리고 회복에 이르는 형이상학적 서사를 노래한다. 『요한의 비밀서』는 시작부터 물질적 창조를 부정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궁극적 근원, 즉 보이지 않는 성부(Invisible Spirit)로부터 모든 것이 비롯되었음을 선언한다(『The Gnostic Bible』, Barnstone & Meyer, 2003, p.135). 성부는 이름도 없고 형상도 없으며, 오직 무한한 빛과 생명의 충만으로 존재한다. 그는 말해지지 않는 침묵 속에서 모든 가능성과 실재를 품고 있으며, 그의 본질은 '앎(γνῶσις, gnosis)' 자체이다.


성부로부터 최초로 나온 것은 프로노이아(Pronoia, πρόνοια, 섭리)이다. 프로노이아는 신적 생각이자 지혜로서, 바르벨로(Barbelo)라 불린다. 바르벨로는 성부와 함께 새로운 존재들을 낳으며, 플레로마의 첫 번째 구조를 형성한다. 이 플레로마는 아이온(Aeon, αἰών)들의 조화로운 세계로 펼쳐지는데, 각각의 아이온은 성부의 속성과 의지를 반영하는 존재이다. 『요한의 비밀서』에 따르면 플레로마의 첫 세대에는 생각(Ennoia)과 진리(Aletheia), 생명(Zoe)과 지성(Noūs)이 탄생한다. 이 네 가지 원리는 이후 로고스(Logos, 말씀), 빛(Phōs, φῶς), 의지(Thelēma, θέλημα)와 같은 속성들을 낳으며, 플레로마의 충만성을 점차 확장해 간다.


『요한의 비밀서』가 묘사하는 플레로마 우주론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이 충만이 자발적 사랑과 지혜의 운동으로 생겨났다는 점이다. 플레로마의 각 아이온은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 서로 반사하고 반향하는 하나의 유기적 음악과 같다. 플레로마는 고정된 구조가 아니라 살아 있는 관계망이며, 각각의 아이온은 전체 플레로마의 일부분으로서 기능하면서도 스스로 충만을 이루는 신비로운 존재이다.


그러나 이 조화는 소피아(Sophia, σοφία)의 단독적 행위로 균열을 맞는다. 소피아는 짝(Pair, συζυγία, syzygia) 없이 홀로 무언가를 창조하려 하고, 그 결과 왜곡된 존재, 얄다바오트(Yaldabaoth)를 낳는다. 얄다바오트는 자신이 최고신이라 착각하고, 물질 세계를 창조하며, 이 과정에서 빛의 불꽃을 감추어 버린다. 이때부터 플레로마와 물질 세계, 충만과 결핍(케노마, Kenoma, κένωμα)의 극적인 분리가 시작된다.


『요한의 비밀서』는 이러한 우주론적 균열을 신화적 언어로 세밀히 그려낸다. 얄다바오트는 하늘과 땅을 만들고, 그 안에 수많은 권세(Archons, ἄρχοντες)들을 배치한다. 이 권세들은 인간 영혼을 물질에 묶어 두기 위해 다양한 속임수와 억압을 사용한다. 그러나 플레로마는 이 모든 사태를 방관하지 않는다. 플레로마의 깊은 곳에서 다시 빛의 사자들이 보내어진다. 그들은 인간 안에 심어진 '생명의 불꽃'을 깨우기 위해 오며, 그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구원자는 '진리의 빛(Phōs tēs alētheias, φῶς τῆς ἀληθείας)'을 지니고 세상에 나타난다.


『요한의 비밀서』는 이 빛의 사자가 인간 영혼에 대해 "너는 나의 것이다, 본래부터 나의 빛 안에 있었다"고 속삭인다고 전한다(『The Gnostic Bible』, Barnstone & Meyer, 2003, p.143). 이 부름은 단순한 명령이 아니다. 그것은 잊혀진 기억을 일깨우는 부드러운 환기이며, 본래적 고향에 대한 미세한 떨림이다. 인간은 이 부름을 들을 때마다 플레로마의 빛을 어렴풋이 느끼며, 자신이 누구였는지,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지를 기억하기 시작한다.


『요한의 비밀서』의 플레로마 우주론은 단지 신화적 설명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 존재론에 대한 심오한 해석을 제시한다. 인간은 이 세계의 피조물이 아니라, 빛의 본질을 지닌 존재이다. 우리는 육체라는 껍질 속에 있지만, 우리의 진정한 본성은 플레로마에 속한다. 얄다바오트가 주장하는 이 세계의 질서, 권력, 법칙은 일시적이며 거짓된 것이다. 참된 법은 플레로마에 있으며, 참된 자유는 이 세상의 권세로부터 벗어나는 것에 있다.


또한 『요한의 비밀서』는 구원의 과정을 단순히 외부 구세주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안에 내재된 신성을 스스로 인식하고 실현하는 과정으로 그린다. 앎(gnosis)은 단순히 지식을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망각에서 깨어나 빛을 기억하는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내면에서 신적 불꽃을 발견하는 순간, 그는 더 이상 이 세계의 포로가 아니며, 다시 플레로마로 돌아갈 준비가 된 존재가 된다.


『요한의 비밀서』를 읽을 때 우리는 느낀다. 이 세계는 결코 끝난 세계가 아니라, 숨겨진 세계이며, 우리 안에 살아 있는 빛은 결코 소멸되지 않았다는 것을. 구원은 멀리 있는 신비가 아니다. 그것은 잊혀진 기억의 회복이며, 오랜 침묵 끝에 다시 울리는 본래적 노래다. 우리는 그 노래를 듣기 위해 이 세계에 남아 있는 것이다.


3. 고대 철학과의 비교


3.1 플라톤 철학: 이데아계와 플레로마


플라톤(Plato, Πλάτων)이 구상한 이데아계(世界, κόσμος τῶν ἰδεῶν)는 고대 서양 사유의 심연에 깊은 울림을 남겼다. 그의 이데아론은 가시적 세계가 단지 모상(模像, εἰκών)에 불과하며, 참된 실재(實在, οὐσία)는 변화하지 않는 원형(原型, ἀρχέτυπον)에 있다는 인식을 통해 출발한다. 플라톤에게 있어 이데아란 단순히 관념적 존재가 아니라, 존재자들이 존재할 수 있게 하는 근원적 형상이며, 그것 없이는 그 어떤 것도 진정으로 있을 수 없다. 이데아는 변하지 않으며, 영원하고, 절대적으로 아름답고 선(善, ἀγαθόν)하다. 이러한 이데아계는 영지주의(Gnosticism)가 말하는 플레로마(Pleroma, πλήρωμα)와 여러 점에서 신비롭게 연결된다. 플레로마도 이데아계도 모두 가시적 세계 너머에 있으며, 결핍과 변화를 넘어서 존재하는 완전한 충만의 세계를 말한다.


그러나 두 사유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도 존재한다. 플라톤은 이데아의 세계를 물질계의 원형이자 모범으로 보았고, 데미우르고스(Demiurgos, δημιουργός)가 이 이데아를 본받아 세계를 조화롭게 창조했다고 믿었다. 그의 『티마이오스(Timaeus)』에서는 데미우르고스가 최고의 선(善)을 사랑하여, 그것을 모방하고자 세계를 빚었다고 서술한다(『Timaeus and Critias』, Robin Waterfield, 2008, p.49). 즉, 플라톤적 세계관에서는 창조자가 무지하거나 사악하지 않다. 오히려 그는 선을 바라보며 최선을 다해 세계를 형상화하려는 지혜로운 장인(δαμιουργός)이다. 반면 영지주의에서는 데미우르고스가 무지와 오만의 존재로 등장하고, 물질 세계는 본질적으로 결함과 왜곡의 산물로 간주된다. 이 차이는 플라톤과 영지주의가 존재의 충만성과 이 세계의 의미를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대한 근본적 관점 차이를 드러낸다.


플라톤에게 이데아계는 초월적이지만 여전히 이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본질이다. 인간 영혼(ψυχή, psyche)은 이데아계를 기억(ἀνάμνησις, anamnesis)함으로써 참된 지식을 얻을 수 있으며, 철학(φιλοσοφία)은 그 기억을 일깨우는 수련이다. 『파이돈(Phaedo)』에서 플라톤은 인간 영혼이 이데아계에서 내려와 육체에 갇히기 전, 진정한 실재를 보았으며, 철학이란 그 기억을 다시 떠올려 영혼을 순수하게 하는 작업이라고 설명한다(『Phaedo』, David Gallop, 2009, p.79). 이때의 기억은 단순한 정보의 회상이 아니라, 존재의 깊은 근원으로 돌아가려는 영혼의 내밀한 울림이다. 이 사유는 플레로마가 말하는 ‘본래 있었던 충만을 기억하는 구원’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


인간 영혼 안에는 플레로마에서 온 빛의 불꽃이 심겨져 있으며, 그것은 물질계의 억압과 망각 속에서도 지워지지 않는다. 이 빛은 단지 본질의 흔적이 아니라, 잃어버린 기억의 파편이며 구원의 열쇠다. 플라톤이 이데아계로의 회귀를 철학적 삶의 목표로 삼았다면, 영지주의는 플레로마로의 귀향을 영적 구원의 목표로 삼았다. 플라톤은 사랑(ἔρως, eros)을 통해 인간이 점진적으로 선(善)을 향해 상승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영지주의는 더 급진적으로, 이 세계 전체를 거짓된 권세의 장치로 간주하고, 앎(gnosis)을 통해 근원적 탈출을 꾀한다. 그러나 그 방향성, 즉 ‘본래의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인식만큼은 양자 모두 동일하다.


플라톤의 이데아계와 플레로마를 비교할 때, 또 하나 중요한 차이는 이데아계가 질서정연한 서열 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플라톤은 이데아들 사이에도 위계가 있다고 보았으며, 그 최상위에는 ‘선(ἀγαθόν)’이라는 이데아가 자리한다. 『국가(Politeia)』에서 그는 선의 이데아를 "태양처럼 모든 이데아를 비추고 존재하게 하는 궁극적 원천"으로 비유한다(『Republic』, Robin Waterfield, 1993, p.275). 이에 비해, 플레로마는 신성과 존재의 충만함으로 이루어진 원초적 실재이다. 이곳에서는 각 아이온이 고유한 본질을 간직한 채 전체 안에서 조화롭게 울린다. 플레로마는 단순한 무한성이나 혼합이 아니라, 빛과 생명과 진리의 다양한 속성들이 서로 반사하며 충만을 이룬다. 여기서 어느 하나도 다른 것 위에 군림하지 않으며, 각각이 전체를 위해 상호 반향하면서 제자리를 지키는 내적 질서가 생명을 관통한다.


플라톤의 철학에서 이데아계는 인간에게 항상 열려 있는 가능성이다. 이 세계가 불완전하더라도, 인간은 이데아를 향한 기억과 사랑을 통해 참된 실재를 다시 볼 수 있다. 플라톤은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데미우르고스의 선의(善意)와 세계 안에 깃든 질서에 대한 신뢰를 지켰다. 반면 영지주의는 보다 비극적이다. 이 세계는 본래부터 오류였으며, 인간은 구원을 위해 반드시 그 오류로부터 깨어나야 한다. 플레로마는 이 세계 너머에 있지만, 우리 안에 여전히 남아 있는 희미한 울림을 통해 부단히 우리를 부른다.


결국 플라톤과 영지주의는 서로 다른 길을 걸었지만, 둘 다 하나의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우리가 보는 이 세계는 진짜가 아니며, 참된 실재는 다른 곳에 있다는 것, 그리고 우리는 그 실재를 다시 기억하고, 돌아가야 한다는 것. 이데아계든 플레로마든, 그것은 결국 ‘본래의 충만’을 향한 인간 존재의 오래된 그리움이며, 사라지지 않는 내면의 울림이다.


3.2 중플라톤주의와 필론의 로고스 개념


플라톤(Plato)의 사유가 세상에 뿌리를 내린 후, 그 씨앗은 시간이 흐르며 다양한 가지로 뻗어 나갔다. 기원전 1세기에서 2세기에 이르는 중플라톤주의(Middle Platonism)는 플라톤적 형이상학을 보존하면서도, 새로운 시대의 사유들과 융합하려는 시도를 보인다. 중플라톤주의는 순수한 이데아론을 단순히 반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존재론(ontologia)과 신학(theologia)의 영역을 확장하여 보다 일관된 우주론(cosmologia) 체계를 구축하려 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플레로마(Pleroma, πλήρωμα) 개념과 깊이 호응하는 사유의 움직임이 탄생했다.


중플라톤주의자들은 플라톤의 ‘선(善, ἀγαθόν)’을 초월적 일자(One, ἕν)로 재구성했다. 이 일자는 절대적이며 무형의 존재로, 모든 것의 근원이자 모든 존재의 궁극적 통일성을 나타낸다. 플로티노스(Plotinus) 이전에도 이미 많은 중플라톤주의자들은 이 일자와 그로부터 흘러나오는 신적 질서(신성의 발출, πρόοδος)를 통해 세계를 설명하려 했다. 플로티노스가 이 개념을 체계적으로 발전시키기 전, 안티오쿠스(Antiochus of Ascalon)와 알키노우스(Alcinous) 같은 사상가들은 이데아를 신의 생각으로 재해석하면서, 이 세계와 신적 세계 사이에 중간 단계(mediatores)를 설정했다. 이들은 물질계가 신적 계획과 충만에서 비롯된 반사적 그림자임을 주장했다.


이러한 사유는 플레로마와 아이온(Aeon, αἰών) 구조를 설명할 때 나타나는 '내적 발출' 개념과 유사하다. 플레로마에서 아이온들이 성부로부터 자연스럽게 발출(proodos)하여 조화롭게 존재하듯이, 중플라톤주의에서도 일자로부터 지성(νοῦς)과 영혼(ψυχή)이 유출되어 나오는 사슬이 상정된다. 플레로마가 충만(plērōma)이라는 신비로운 완전성으로 존재한다면, 중플라톤주의의 일자도 '가득 참'의 상징으로 기능한다. 신은 완전하기 때문에 넘쳐흐르고, 그 넘침이 곧 세계를 낳는다.


이런 흐름 속에서 특별히 주목해야 할 인물이 필론(Philo of Alexandria, Φίλων ὁ Ἀλεξανδρεύς)이다. 필론은 유대교 전통과 헬레니즘 철학을 종합한 독특한 사상가로, 플라톤과 모세를 조화시키려 한 인물이다. 그는 『창세기 주석』(Legum Allegoriae) 등에서 신(יהוה, Yahweh)이 직접 세계를 창조한 것이 아니라, 로고스(Logos, Λόγος)를 통해 창조했다고 주장했다(『The Works of Philo』, translated by C.D. Yonge, Hendrickson Publishers, 2020, p.32). 로고스는 신적 사유이자, 신과 세계 사이를 매개하는 다리이다. 필론은 로고스를 '신의 맏아들(πρωτόγονος)'이라고 부르면서, 이 로고스 안에 모든 이데아의 본형이 들어 있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필론의 사유는 플레로마 개념과 매우 흡사하다. 플레로마에서는 성부로부터 바르벨로(Barbelo)와 여러 아이온들이 발출하며, 이들은 플레로마 전체를 구성한다. 필론은 신으로부터 로고스가 발출하고, 이 로고스 안에서 이데아적 세계가 존재하며, 그것이 물질계의 원형이 된다고 말한다. 즉, 필론의 로고스는 플레로마의 첫 번째 방출로서의 바르벨로에 대응하고, 이데아들의 세계는 아이온들의 조화로운 질서에 대응한다.


그러나 필론은 물질 세계에 대해 영지주의자들처럼 부정적이지 않았다. 그는 물질 세계가 불완전할 수는 있지만, 본질적으로 신의 질서가 반영된 장소로 보았다. 이 점에서 필론은 플라톤적 낙관주의를 어느 정도 유지한다. 필론에게 있어 인간은 로고스의 빛을 통해 이 세계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으며, 신성에 참여할 수 있다. 그는 『온건한 사람에 대하여』(De Sobrietate)에서 "신의 로고스를 아는 자는 신을 아는 것"이라고 말한다(『The Works of Philo』, p.378).


한편 영지주의에서 플레로마는 물질 세계와 완전히 단절되어 있으며, 인간은 이 세계를 넘어 플레로마로 돌아가야 한다. 플레로마와 케노마(Kenoma, κένωμα, 공허)는 대립적인 구조를 이룬다. 그러나 필론의 세계관에서는 신의 로고스가 물질 세계 안에도 흔적을 남겼으며, 그 흔적을 따라 인간은 상승할 수 있다고 본다. 이 차이는 존재의 균열에 대한 해석, 그리고 구원의 가능성에 대한 관점 차이를 보여준다.


필론의 사유는 훗날 기독교 신학에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 요한복음은 "태초에 로고스가 있었다(Ἐν ἀρχῇ ἦν ὁ Λόγος)"로 시작하며, 로고스를 신 자체와 동일시했다. 이 전통은 결국 영지주의의 플레로마 개념과 맞물리면서, 신성한 충만이 어떻게 세계에 드러나고, 또 어떻게 인간이 그 충만에 다시 참여할 수 있는지를 둘러싼 논의로 확장된다.


결론적으로, 중플라톤주의와 필론의 사유는 플레로마의 사상을 직간접적으로 준비했다. 이들은 모두 초월적 일자 또는 신적 근원에서 세계가 발출하고, 인간은 그 근원을 기억하고 되돌아가야 한다는 인식을 공유한다. 단, 그 과정의 성격과 세계에 대한 태도는 서로 다르게 발달했다. 플레로마는 본래적 충만을 잃어버린 뒤에 그것을 회복하는 서사를 가지지만, 중플라톤주의와 필론은 세계 안에도 여전히 신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믿었다.


우리가 이 사유들을 따라 걷다 보면 느끼게 된다. 존재란 결코 고립된 것이 아니며, 항상 그 뒤편에는 말없는 충만과 빛의 울림이 숨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울림을 기억하는 순간, 우리는 다시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3.3 신플라톤주의와 일자(το ἕν, The One)의 구조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는 플라톤(Plato, Πλάτων)의 사유가 세기를 넘어 스스로를 다시 새롭게 태어나게 한 철학적 운동이다. 기원후 3세기경 플로티노스(Plotinus, Πλωτῖνος)를 중심으로 시작된 이 흐름은, 단순히 플라톤 사상의 해석이나 계승을 넘어, 존재의 심연에 깃든 무한한 하나(One, τὸ ἕν)를 중심으로 세계를 다시 그려보려는 근원적 시도였다. 플로티노스에게 있어 일자(το ἕν)는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원이자, 존재를 넘어선 초존재(超存在, hyperousia)였다. 일자는 이름 붙일 수 없고, 규정할 수 없으며, 심지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조차 과한 표현이 된다. 그는 『엔네아데스(Enneads)』(A.H. Armstrong ed., Harvard University Press, 2020, vol.5, p.32)에서 "일자는 모든 규정 이전에 있으며, 존재보다 먼저 있다"고 썼다. 이 일자 개념은 영지주의(Gnosticism)의 플레로마(Pleroma, πλήρωμα) 사유와 깊은 울림을 주고받는다.


플레로마는 완전한 충만을, 일자는 완전한 단순성을 상징한다. 플레로마는 많은 아이온(Aeon, αἰών)들의 질서 정연한 충만한 세계를 이루지만, 그 근원은 오직 하나의 빛나는 중심이다. 플로티노스의 일자 역시 모든 존재를 낳으면서도 그 자체로는 나뉘지 않으며, 나뉨 없이 흘러넘치는 넘침(περίσσεια, perisseia)이다. 일자는 넘쳐흐르기 때문에 지성(νοῦς, Nous)이 나오고, 지성은 다시 영혼(ψυχή, Psyche)을 낳는다. 이러한 발출(proodos, πρόοδος)은 플레로마에서 성부로부터 바르벨로(Barbelo)가, 그리고 이어 다양한 아이온들이 발출되는 구조와 평행을 이룬다.


그러나 신플라톤주의는 영지주의와 달리, 이 발출 과정을 타락이나 실수로 보지 않는다. 일자에서 지성이, 지성에서 영혼이 나오지만, 이는 원죄나 오류가 아니라 넘치는 풍요로부터 비롯된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플로티노스는 『엔네아데스』(vol.5, p.35)에서 "선은 선을 머물러 있을 수 없기에 넘쳐흘러 존재를 낳는다"고 말한다. 이때 선(善, ἀγαθόν)은 단순한 도덕적 개념이 아니라 존재 이전의 존재이며, 생명 이전의 생명이다. 반면 영지주의에서는 소피아(Sophia, σοφία)의 단독 창조 시도가 플레로마의 균열을 가져왔다고 보았고, 세계의 탄생을 '실패'로 해석했다. 두 사유는 존재의 흘러나옴에 대한 평가에서 서로 다른 빛깔을 드러낸다.


일자는 모든 이원성을 초월한다. 인간과 신, 존재와 무, 생각과 존재물 사이에 어떠한 구분도 허락되지 않는 자리이다. 이 일자와 플레로마의 심층적 공통점은, 이원적 대립을 넘어 존재의 통합성과 초월성을 동시에 품고 있다는 점이다. 플레로마는 아이온들의 다수성 속에서도 하나의 완전한 조화를 이룬다. 일자는 모든 존재가 나오기 전, 그 가능성과 충만을 이미 품고 있는 침묵이다.


또한 신플라톤주의의 발출론은 영지주의 플레로마 사유에 비해 더 철저하게 '회귀(epistrophē, ἐπιστροφή)'를 강조한다. 모든 것은 일자로부터 흘러나오지만, 동시에 다시 일자로 돌아가야 한다. 인간 영혼은 지성의 세계를 거쳐, 결국 존재를 넘어 일자와의 합일(unio mystica)을 이루어야 한다. 플로티노스는 이를 "일자와의 합일은 '나는 하나였다'는 기억도, 감정도 남기지 않는 소멸의 순간"이라고 묘사했다(『Enneads』, vol.6, p.7). 이것은 영지주의가 말하는 플레로마 귀환과도 닮았다. 그러나 영지주의가 잃어버린 충만을 다시 찾는 기억의 여정을 강조했다면, 플로티노스는 존재 전체를 넘어서 존재 이전의 고요한 중심에 융합되는 신비를 강조했다.


신플라톤주의에서 일자를 향한 회귀는 철학적 훈련과 영적 수련을 통해 이루어진다. 인간은 자신의 영혼을 정화(κάθαρσις, katharsis)하고, 지성적 삶을 통해 물질 세계의 그림자를 벗어나, 일자와 조용히 다시 만나는 길을 걷는다. 이 점에서 플로티노스는 플라톤적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그것을 신비주의(mysticismus)로 밀어 올렸다. 플레로마 사유 역시 인간 내면 깊은 곳에 남아 있는 빛의 기억을 깨워 플레로마로 되돌아가는 여정을 요구한다. 플레로마는 밖에 있는 장소가 아니라, 잊힌 기억 너머에서 우리를 부르는 고향이다.


그러나 신플라톤주의와 영지주의가 만나는 지점은 단순한 철학적 개념을 넘는다. 그것은 인간 존재에 대한 직관적 통찰이다. 우리는 이 세계에 있지만, 이 세계만으로 완성될 수 없다. 우리는 어떤 깊은 충만에서 왔고, 언젠가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야 한다. 신플라톤주의는 이 귀향을 철학적 순례로서, 영지주의는 신비적 기억의 회복으로서 노래한다.


결국 플레로마와 일자는 이름만 다를 뿐, 같은 진실을 가리킨다. 우리는 잊었지만, 결코 잃어버리지 않은 하나의 충만. 우리는 흩어졌지만, 여전히 하나의 울림을 품고 있는 존재. 신플라톤주의와 영지주의는 서로 다른 길을 걸었지만, 모두 그 길 끝에서 ‘하나’를, '완전한 충만'을 다시 찾으려 했다.



4. 기독교 신학에서의 변용


4.1 이레나이우스의 반영지주의 논박


2세기 말, 기독교는 스스로를 정립해 나가는 과정을 거쳤다. 그 과정은 단순한 조직화나 교리 정비에 머무르지 않고, 존재론적 질문과 신론(神論, theologia)에 대한 치열한 대결을 요구했다. 이 시기에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가 이레나이우스(Irenaeus of Lyon, Εἰρηναῖος)였다. 그는 『이단 반박과 논박(Adversus Haereses)』(Against Heresies)이라는 방대한 저작을 통해 영지주의(Gnosticism)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초대교회 신앙의 정통성을 수호하려 했다(『Against Heresies』, Robert M. Grant, 1997, p.52). 이레나이우스에게 있어 영지주의의 최대의 오류는 플레로마(Pleroma, πλήρωμα)와 물질 세계를 이원화하고, 세계의 창조를 무지(agnōsia)와 오류의 결과로 설명하는 데 있었다. 그는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하나님(Θεός, Theos)은 선하며 전능하며, 그가 창조한 세계 역시 본질적으로 선하다고 주장했다.


이레나이우스는 먼저 플레로마 사상을 문제 삼는다. 영지주의자들은 성부로부터 바르벨로(Barbelo)를 비롯한 수많은 아이온(Aeon, αἰών)들이 발출(proodos)되고, 이 아이온들이 모여 충만한 신적 세계, 즉 플레로마를 구성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레나이우스는 이러한 복잡한 신적 위계와 발출 구조를 "인간적 상상력의 산물"이라 일축했다. 그는 신은 단일하며 단순하고, 나누어지지 않는 분리 불가능한 존재라고 강조했다. 이레나이우스에 따르면, 신에게는 복수성(divisio)이 있을 수 없으며, 오직 하나의 의지와 하나의 사랑, 하나의 계획만이 존재한다(『Against Heresies』, Grant, p.66).


특히 이레나이우스는 소피아(Sophia, σοφία)의 타락 신화를 강하게 비판했다. 영지주의 전통에서는 소피아가 짝 없는 창조를 시도하다가 얄다바오트(Yaldabaoth)를 낳고, 이로 인해 물질 세계가 생겨났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레나이우스는 물질 세계를 오류의 부산물로 보는 이 관점을 신성 모독(blasphemia)으로 간주했다. 그는 『이단 반박과 논박』에서 "이 세계는 하나님의 솜씨이며, 그 솜씨는 지혜롭고 선하며 조화롭다"고 단언했다(『Against Heresies』, p.78). 이레나이우스에게 있어 창조는 사랑의 표현이며, 인간 존재는 하나님의 의지 속에서 완성되어 가는 존재였다. 인간이 육체를 가진 것은 추락의 결과가 아니라, 창조의 계획 안에 포함된 신비였다.


이레나이우스는 영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구원론(soteriologia)에도 이의를 제기했다. 영지주의자들은 앎(gnosis)을 통해, 곧 자기 안에 숨어 있는 빛의 기억을 깨달아 플레로마로 돌아가는 것을 구원의 본질로 보았다. 반면 이레나이우스는 구원이란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Χριστός, Christos)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인간이 자신의 힘이나 비밀 지식을 통해 얻을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인간성을 입으신 것은 인간을 전인격적으로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다"고 강조하며, 구원은 단지 영혼의 해방이 아니라, 육체와 영혼 모두의 온전한 재창조라고 설명했다(『Against Heresies』, p.90).


이레나이우스는 플레로마라는 용어 자체도 다시 재해석했다. 그는 바울(Paul)이 사용하는 플레로마를 인용하며, 그것은 초월적 신비세계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신적 충만(Colossians 2:9)을 뜻한다고 보았다. 즉, 플레로마는 멀리 떨어진 초월적 세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이 세계 안으로 들어온 신적 생명의 충만이었다. 이레나이우스는 이를 통해 영지주의자들이 플레로마를 세계와 분리된 신적 공간으로 설정한 것과 달리, 신성과 세계가 그리스도를 매개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이레나이우스의 반영지주의 논박은 단순한 교리상의 논쟁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론에 대한 근본적 입장 차이에서 비롯된다. 영지주의는 세계를 타락한 결과로 보았고, 구원을 잃어버린 기억의 회복으로 이해했다. 반면 이레나이우스는 세계를 하나님의 의도된 창조로 보고, 구원을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reconciliatio)로 이해했다. 이레나이우스는 인간 존재를 결코 이 세계로부터 도피시키려 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인간이 이 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εἰκών, eikōn)을 따라 완성되어 가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레나이우스의 신학은 세상을 긍정하려는 의도 속에서도 인간의 내면적 긴장과 구원의 갈망을 완전히 설명해 주지는 못했다. 플레로마 사상은 여전히 우리 안에 숨겨진 깊은 울림처럼 남아 있다. 우리는 종종 이 세계의 고통과 분열 앞에서, 이레나이우스의 낙관적 신학을 넘어서는 더 깊은 그리움을 느낀다. 어쩌면 영지주의자들이 말했던 '잃어버린 충만'에 대한 기억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이레나이우스의 논박은 기독교가 정통 신앙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러나 플레로마의 기억, 영혼 깊숙한 곳에서 울리는 고향에 대한 향수는, 이레나이우스의 단호한 논박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지워지지 않았다. 우리는 여전히 그 기억의 조각을 가슴에 품고 살아간다. 그리고 언젠가, 기억을 넘어 충만으로 다시 걸어갈 길을 찾아야 한다.


4.2 삼위일체 신학과의 비교


삼위일체 신학(Trinitarian Theology)은 기독교 정통 교리의 중심축이다. 그것은 아버지(Πατήρ, Pater), 아들(Υἱός, Huios), 성령(Πνεῦμα, Pneuma)이 본질적으로 하나(μία οὐσία, mia ousia)이며, 동시에 셋의 구별된 위격(ὑποστάσεις, hypostaseis)으로 존재한다는 신비로운 고백이다. 초대 기독교가 이 교리를 정식화하는 과정은 수 세기에 걸쳐 복잡한 논쟁과 변증을 동반했으며, 결국 4세기 니케아 공의회(325년)와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381년)를 통해 공식화되었다. 이 삼위일체 구조는 놀랍게도 영지주의(Gnosticism)가 묘사하는 플레로마(Pleroma, πλήρωμα)의 아이온(Aeon, αἰών) 구조와 어느 정도 평행을 이루지만, 그 지향과 의미는 분명하게 다르다.


플레로마에서는 수많은 아이온들이 성부로부터 발출(proodos, πρόοδος)되어 충만한 신적 세계를 구성한다. 각각의 아이온은 성부의 속성을 반영하며, 개별성과 전체성 속에 조화롭게 존재한다. 이 구조는 삼위일체의 위격들 사이의 구별과 관계를 떠올리게 하지만, 삼위일체 신학은 플레로마와 달리 위격들의 본질적 단일성과 영원한 상호내재(perichōrēsis, περιχώρησις)를 강조한다. 즉, 아버지, 아들, 성령은 서로 다른 존재들이 아니라, 한 본질(ousia)을 공유하면서도 서로 구별되는 관계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아타나시우스 신조(Athanasian Creed)』는 이를 "세 위격은 한 신성을 나눈다"고 표현하며, 나뉘지 않는 단일성과 구별되는 삼성을 동시에 고백한다(『The Creeds of Christendom』, Philip Schaff, 2020, vol.2, p.66).


삼위일체 신학에서 아버지는 원천적 근원(ἀρχή, archē)으로서, 아들을 낳고(γεννάω, gennaō), 성령을 발출(προϊέναι, proienai)한다. 그러나 이 관계는 시간 안에서 발생하는 사건이 아니라, 영원한 본성 안의 내적 운동이다. 반면 영지주의 플레로마에서는 성부로부터 시간적 순서를 따라 아이온들이 방출되며, 그 과정에서 균열과 타락이 발생한다. 소피아(Sophia, σοφία)의 단독 행위는 플레로마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물질 세계의 탄생을 야기했다. 삼위일체 신학에는 이와 같은 타락이나 균열이 없다. 위격들의 관계는 언제나 완전하고 변함없으며, 충만(plērōma)이 단 한 번도 손상된 적이 없다.


또한 삼위일체 신학은 존재론적 낙관주의를 지향한다. 창조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ἀγάπη, agapē)에서 흘러나온 선한 행위이며, 이 세계는 비록 죄로 인해 상처를 입었을지라도 본래 선한 창조로 여겨진다. 반면 플레로마 신화에서 물질 세계는 타락과 결핍(kenōma, κένωμα)의 결과이며, 인간은 이 세계로부터 깨어나 플레로마로 돌아가야 한다. 삼위일체적 창조관은 이 세계를 신성한 질서의 일부로 긍정하는 반면, 영지주의는 이 세계를 본질적으로 넘어서야 할 대상으로 본다. 이 차이는 세계에 대한 존재론적 태도뿐 아니라, 인간 구원의 방식에도 깊은 차이를 만든다.


삼위일체 신학에서 구원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아들이 성육신(ἐνανθρώπησις, enanthrōpēsis)하여 인류를 구속하고, 성령을 통해 그 구원이 인간 개인 안에 적용되는 과정이다. 플레로마에서 구원은 망각된 기억을 되살리고, 본래의 충만을 회복하는 영적 깨달음(gnosis)을 통해 이루어진다. 삼위일체 구원론은 역사 속 사건, 즉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이라는 구체적 시간적 사건 안에서 구원의 실재를 본다. 반면 플레로마 신화는 개인 내면의 기억과 존재의 심층적 구조를 구원의 장소로 본다. 둘 모두 인간 존재의 깊은 상처를 인식하지만, 치유의 길은 서로 다르게 제시된다.


삼위일체적 관계성은 또한 플레로마의 관계성과 중요한 차이를 보인다. 삼위일체 안에서는 아버지, 아들, 성령이 서로를 온전히 선물하고 받아들이는 영원한 사랑의 춤을 이룬다. 이 사랑의 춤은 누구도 중심이 아니며, 누구도 주변이 아니다. 이는 중세 신학자 리차드 오브 세인트 빅터(Richard of St. Victor)가 "완전한 사랑은 반드시 다자(多人, multi-personal)를 필요로 한다"고 한 말(『De Trinitate』, 2021 재출판, p.112)과 일치한다. 반면 플레로마에서는 성부가 절대적 중심이며, 다른 아이온들은 성부의 발출로서 존재한다. 물론 플레로마에서도 조화는 중요하지만, 삼위일체처럼 순환적이고 상호내재적인 관계성을 강조하지는 않는다.


삼위일체 신학과 플레로마 사상의 비교는 결국 인간 존재의 이해에도 영향을 미친다. 삼위일체적 인간관에서는 인간이 공동체적 존재이며, 사랑과 관계 안에서 스스로를 실현한다고 본다. 인간은 홀로 존재하기 위해 창조된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성을 반영하는 존재로서, 서로를 향해 열려 있어야 한다. 반면 영지주의적 인간관에서는 개인적 깨달음과 내면적 기억의 회복이 중심에 있다. 물론 이는 고립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인간 존재를 보다 ‘기억하는 자’로서 강조하는 방식이다.


삼위일체 신학과 플레로마 사유는 인간에게 다른 길을 제시하지만, 둘 다 인간의 가장 깊은 그리움, 곧 하나였던 충만을 향한 그리움을 잊지 않는다. 삼위일체는 역사 속에서 사랑을 드러내고, 플레로마는 기억 속에서 충만을 불러낸다. 우리는 이 둘 사이를 오가며, 인간 존재의 신비를 조금씩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4.3 바울 서신에 나타난 ‘충만(plērōma)’의 신학적 의미


바울(Paul, Παῦλος)의 서신들 속에는 ‘충만’(plērōma, πλήρωμα)이라는 단어가 여러 차례 등장한다. 이 단어는 단순히 양적인 충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신적 실재와 존재의 완성을 의미하는 깊은 신학적 함의를 담고 있다. 그러나 바울이 사용한 플레로마는 영지주의(Gnosticism)에서 말하는 초월적 신적 세계, 곧 플레로마(Pleroma)와는 성격을 달리한다. 바울에게 있어서 충만은 하나님(Θεός, Theos)의 본성이자, 그리스도(Χριστός, Christos)를 통해 세상에 현존하게 된 신성의 표지이며, 인간 구원의 실재적 토대였다.


대표적으로 골로새서(Colossians) 1장 19절은 말한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plērōma)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하시기를 기뻐하셨다.” 또한 골로새서 2장 9절에서는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θεότης, theotēs)의 모든 충만(plērōma)이 육체 안에 거한다”고 선언한다(『The New Testament: A Translation』, David Bentley Hart, 2017, p.369). 여기서 플레로마는 물질 세계를 넘어 있는 초월적 영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이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속에 온전히 현존하는 사건을 가리킨다. 신성은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 역사 속에, 인간의 삶 속에 충만하게 들어왔다. 바울은 이 신비를 통해 인간 존재의 구원 가능성을 설명하려 했다.


또한 에베소서(Ephesians) 1장 22-23절에서는 교회를 “그의 몸, 곧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분의 충만(plērōma)”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플레로마는 단순히 신적 세계의 반영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구속된 공동체가 신성한 충만에 참여하는 현실적 관계를 가리킨다. 교회는 단순한 인간 모임이 아니라, 플레로마의 실재를 이 땅에서 구현하는 신비로운 몸(σῶμα, sōma)이다. 이처럼 바울은 플레로마를 초월적 세계의 닫힌 공간으로 보지 않고, 인간과 세계를 변화시키는 살아 있는 에너지로 보았다.


바울에게 있어서 플레로마는 또한 구원의 완성을 가리킨다. 로마서(Romans) 11장 25절에서는 “이방인의 충만(plērōma)이 들어오기까지”라고 하여, 구원의 역사가 충만해지는 과정을 설명한다. 여기서 충만은 단순한 수적 완성을 넘어, 하나님의 계획이 모든 민족 가운데 이루어지는 종말론적 성취를 뜻한다. 바울은 구원이 개인적 체험을 넘어서 우주적 차원에서 성취되는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음을 강조했다.


영지주의 플레로마와 바울의 플레로마 개념은 이처럼 방향성과 의미가 다르다. 영지주의에서 플레로마는 물질계와 분리된 완전한 초월적 세계로서, 인간은 내면의 기억을 통해 그곳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바울에게서 플레로마는 이미 세상 속으로 침투해 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 안에서, 그리고 최종적으로 새 창조 안에서 충만하게 실현된다. 인간은 단순히 이 세계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 안에서 플레로마를 실현하는 존재로 부름받는다.


이 점에서 바울의 충만 사상은 존재에 대한 긍정과 구원의 현실성을 강조한다. 바울은 인간이 죄(ἁμαρτία, hamartia)로 인해 하나님과 분리되었지만,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충만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고 본다. 골로새서 1장 20절은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기를 기뻐하셨다"고 선언한다. 여기서 화목(καταλλάσσω, katallassō)은 단순한 용서가 아니라, 존재 자체의 재조정이며, 플레로마로의 귀환이다.


바울의 충만 개념은 삼위일체 신학과도 연결된다. 아버지의 충만이 아들 안에 있으며, 성령을 통해 인간 안에 적용된다. 이 삼중적 운동은 하나님의 내적 충만이 인간 역사 속에서 드러나고 완성되는 역동적 구조를 반영한다. 플레로마는 단지 초월적 원형이 아니라, 시간과 역사를 통하여 흐르는 생명의 힘이다.


결국 바울의 플레로마는 인간 존재의 고귀함을 새롭게 비추어준다. 인간은 본래 결핍 속에 머물도록 창조된 것이 아니라, 충만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도록 예정된 존재다. 존재의 완성은 먼 하늘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씨앗처럼 심겨져 있다. 바울은 이 씨앗을 일깨운다. 그리고 말없이 초대한다. "너희 안에 있는 충만을 기억하라."


5. 에소테리즘 전통과의 접속


5.1 유대교 카발라: 에인 소프와 세피로트 구조


유대교 신비주의(Kabbalah, קַבָּלָה)는 중세 이후 유대 사상의 심층에서 고요히 숨 쉬어 온 신비적 전통이다. 그 핵심에는 에인 소프(Ein Sof, אין סוף)라는 심오한 개념이 자리 잡고 있다. 에인 소프는 문자 그대로 "끝이 없음"을 뜻하며, 이름도 형상도 없는 절대적 초월자를 지시한다. 에인 소프는 어떤 언어도 닿을 수 없는 무한(無限, infinitas)이자, 모든 존재의 궁극적 근원이며, 신적 충만의 심연이다. 이 에인 소프에서 세피로트(Sefirot, ספירות)가 발출되고, 이 발출의 구조 속에서 우주와 인간, 그리고 모든 영적 존재들이 태어난다. 이러한 사유 구조는 영지주의(Gnosticism)의 플레로마(Pleroma, πλήρωμα) 개념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 둘 모두 한 초월적 근원으로부터 다층적 발현이 이루어지며, 각각의 층위는 근원과 단절되지 않고 그 충만을 반영한다.


카발라(Kabbalah)의 세피로트(Sefirot, ספירות)는 총 열 개의 신적 속성(divine emanations)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은 에인 소프(Ein Sof, אין סוף)의 무한함이 점차 제한(tzimtzum, צמצום)되면서 빛을 드러내는 과정 속에서 태어난다. 첫 번째 세피라(Keter, כֶּתֶר, '왕관')는 에인 소프에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존재하며, 이후 지혜(Chokhmah, חָכמָה), 이해(Binah, בִּינָה) 등으로 펼쳐진다. 이 구조는 플레로마(Pleroma, πλήρωμα)에서 성부로부터 최초의 아이온(Aeon, αἰών)이 발출하고, 그 이후 다양한 아이온들이 질서를 이루는 방식과 유사하다. 플레로마에서는 성부의 사유와 의지가 다수의 신적 존재로 펼쳐지며, 각각의 아이온은 본래의 충만성을 반영하면서도 고유한 성격을 지닌다.


세피로트 구조 안에서 중요한 것은 이 열 개의 세피로트가 결코 분리된 독립적 존재가 아니라는 점이다. 각각의 세피로트는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고, 하나의 세피로트가 다른 세피로트로 자연스럽게 흐르며 전체를 구성한다. 이것은 플레로마 안에서 각각의 아이온들이 독자적 실체로 존재하기보다는, 성부의 충만을 반사하고 확장하는 유기적 관계망을 이룬다는 영지주의적 세계관과도 닮아 있다. 『The Essential Kabbalah』(Daniel C. Matt, 2021, p.48)에서는 세피로트가 "빛의 강물처럼 서로를 따라 흐르며, 하나의 무한한 생명체를 이룬다"고 표현한다.


이제 각각의 세피로트를 자세히 살펴보자.

가장 위에 위치한 첫 번째 세피라는 케테르(Keter, כֶּתֶר, '왕관')로, 에인 소프의 최초 발현이며, 존재의 씨앗이자 모든 가능성의 근원이다. 케테르는 무한한 의지(Ratzon, רָצוֹן)를 품고 있으며, 아직 형태를 가지지 않은 순수한 가능성의 빛이다.

다음으로 두 번째 세피라인 호크마(Chokhmah, חָכמָה, '지혜')는 케테르의 첫 번째 구체화로서, 신성한 직관과 창조의 불꽃을 상징한다. 호크마는 모든 이데아(ἰδέα)의 잠재태를 품고 있으며, 일자에서 최초로 흘러나온 생명의 방향성을 가리킨다.

세 번째 세피라인 비나(Binah, בִּינָה, '이해')는 호크마의 원초적 지혜를 수용하고, 이를 체계화하는 능력을 상징한다. 비나는 모성적 품(רחם, rechem)과도 같아서, 호크마의 창조적 불꽃을 시간과 공간 속에서 구체화하는 틀을 마련한다. 호크마와 비나의 결합은 카발라 전통에서 '아바(Abba, אבא, 아버지)와 이마(Ima, אמא, 어머니)'의 신성한 결합으로 묘사되며, 이 둘 사이에서 모든 생명과 형상이 탄생한다.

네 번째 세피라는 헤세드(Chesed, חֶסֶד, '자애')로, 무한한 자비와 선의 확장을 상징한다. 헤세드는 신적 사랑의 흐름이며, 존재하는 모든 것에 생명을 부여하는 역동적 에너지이다.

이에 대응하는 다섯 번째 세피라인 게부라(Gevurah, גְּבוּרָה, '엄정')는 헤세드의 무한한 확장을 조율하고 경계 짓는 힘이다. 게부라는 정의(δικαιοσύνη)와 경계(גבול, gvul)를 상징하며, 무차별적 확산을 막고 질서와 균형을 세운다.

여섯 번째 세피라인 티페레트(Tiferet, תִּפְאֶרֶת, '아름다움')는 헤세드와 게부라의 균형 속에서 탄생한다. 티페레트는 조화와 통합의 중심이며, 신적 아름다움이 인간 세계에 반영되는 자리이다. 플레로마에서도 아이온들의 조화로운 충만이 중심을 이룬 것처럼, 세피로트 구조에서도 티페레트가 전체 균형의 심장부를 담당한다.

일곱 번째 세피라인 네자흐(Nezah, נֵצַח, '영원')는 승리와 인내의 에너지를 상징하며, 생명력의 끈질긴 확산을 담당한다. 이에 대응하는 여덟 번째 세피라인 호드(Hod, הוֹד, '영광')는 신적 질서와 의사소통을 상징하며, 진리와 표현의 에너지를 지닌다. 네자흐와 호드는 서로 반사적 관계를 맺으며, 인간 세계에서 신적 계획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설명한다.

아홉 번째 세피라인 예소드(Yesod, יְסוֹד, '기초')는 상위 세피로트들의 에너지를 통합하고, 현실 세계로 매개하는 통로 역할을 한다. 예소드는 플레로마의 아이온들이 물질 세계로 은밀히 영향을 미치는 구조와도 비슷하며, 보이지 않는 세계와 보이는 세계 사이를 잇는 다리이다.

마지막 열 번째 세피라인 말쿠트(Malkuth, מַלְכוּת, '왕국')는 모든 신적 에너지가 완성되어 구체적 현실로 드러나는 자리이다. 말쿠트는 하늘과 땅의 결합을 상징하며, 인간과 세계가 신적 충만에 참여하는 문턱이다. 말쿠트는 단순히 세계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순환과 상승을 위한 출발점이기도 하다.

이렇게 열 개의 세피로트는 하나의 유기체처럼 서로 흐르고 반사하며, 에인 소프의 무한한 충만이 다양한 형태로 펼쳐진 결과물이다. 플레로마의 아이온들도 본래 성부의 충만을 각기 반영하며 질서를 이루었듯이, 세피로트는 각기 다른 이름과 성격을 지니면서도 궁극적으로 하나의 신적 심연을 가리킨다. 이 구조는 단순한 위계적 배열이 아니라, 생명과 존재의 신비로운 파동을 드러낸다.

또한 플레로마와 세피로트 구조 모두에서 '발출'이라는 개념이 핵심을 이룬다. 영지주의에서는 성부로부터 아이온들이 자연스럽게 발출하며, 이 발출 과정은 충만(plērōma)의 확장으로 이해된다. 카발라에서는 에인 소프가 스스로를 숨긴 후, 그 숨김 속에서 첫 빛(אור אין סוף, Or Ein Sof)이 나타나고, 이 빛이 수축과 방출을 거쳐 세피로트의 구조를 형성한다. 여기서 발출은 결코 근원으로부터의 단절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발출은 근원의 심연이 드러나는 방식이며,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 드러남의 다양한 형태일 뿐이다.


5.2 세피로트와 플레로마의 구조적 대응


다만 플레로마와 세피로트 사이에는 차이도 존재한다. 영지주의 플레로마는 일종의 원형적 재난, 곧 소피아(Sophia, σοφία)의 타락 사건을 통해 균열을 겪는다. 소피아의 단독 창조 시도는 얄다바오트(Yaldabaoth)라는 왜곡된 존재를 낳고, 그 결과 물질계가 탄생한다. 플레로마는 이 사건 이후 케노마(Kenoma, κένωμα, 결핍)와 분리되며, 인간 존재는 기억 상실과 분열의 운명을 짊어진다. 반면 카발라에서는 세피로트 구조 자체가 균열을 전제로 하지는 않는다. 물론 '그릇의 파괴(Shevirat HaKelim)'라는 사상이 등장하여 세피로트가 빛의 과도한 충격으로 깨졌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이 파괴는 존재론적 재앙이 아니라, 신비적 회복의 과정을 가능하게 하는 시작점으로 해석된다. 게르숌 숄렘(Gershom Scholem)은 『Major Trends in Jewish Mysticism』(1995, p.270)에서 "그릇의 파괴는 존재의 어두운 심연을 드러내지만, 동시에 새로운 창조의 가능성을 연다"고 분석했다.


이 점에서 카발라와 플레로마 사유는 세계에 대한 태도에서 차이를 보인다. 영지주의는 물질 세계를 본질적으로 결핍과 왜곡의 장소로 본다. 그러나 카발라는 세계가 본질적으로 신의 빛을 품고 있으며, 인간의 의식과 행위를 통해 그 빛을 다시 모을 수 있다고 본다. 이를 '티쿤 올람(Tikkun Olam, עולם תיקון)', 곧 '세상의 수선'이라 부른다. 인간은 흩어진 신적 빛을 모아 세피로트 구조를 회복시키는 영적 노동을 부여받은 존재이다. 플레로마 귀환이 기억과 앎(gnosis)을 통한 내면적 여정이라면, 세피로트의 회복은 일상적 행위와 세계 안에서의 신성 구현을 요구한다.


세피로트와 플레로마는 둘 다 인간 존재를 단순한 생물학적 존재로 보지 않는다. 인간은 근원의 빛을 품은 존재이며, 각자의 영혼은 잊혀진 충만을 다시 회복할 능력을 지닌다. 플레로마는 내면 깊숙한 곳에 숨겨진 고향이며, 세피로트는 세계 곳곳에 흩어진 신의 조각들이다. 우리는 기억을 통해, 혹은 사랑과 행위를 통해, 이 잃어버린 충만을 다시 짜 맞추어야 한다. 그것이 곧 인간 존재의 은밀한 소명이다.


5.3 게르숌 숄렘의 해석과 신비적 통합


게르숌 숄렘(Gershom Scholem)은 20세기 유대 신비주의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연 인물이다. 그는 단순히 종교사를 해명한 학자가 아니라, 카발라(Kabbalah)의 신비적 사유를 철학의 영역까지 밀어 올린 해석자였다. 숄렘은 『유대 신비주의의 주요 흐름(Major Trends in Jewish Mysticism)』에서 카발라의 중심 개념들을 체계적으로 복원해냈으며, 그 안에 내재한 존재론적 전복성과 우주적 윤리성을 함께 조명했다. 그에게 있어 에인 소프(Ein Sof, אין סוף)는 단순한 신 개념이 아니었다. 그것은 모든 형상을 초월하고, 존재와 비존재를 아우르며, 언어로는 닿을 수 없는 신비 자체였다. 에인 소프는 무(無, ayin)로부터의 무한한 가능성이며, 동시에 모든 발현 이전의 고요한 심연이었다.


이 에인 소프에서 세피로트(Sefirot, ספירות)가 발출(emanatio)된다. 숄렘에 따르면, 세피로트는 단지 신의 속성이 아니라, 신 자신이 자신을 열어 세계로 드러내는 방식이었다. 세피로트는 하나의 존재가 아닌 하나의 구조이며, 그 구조는 영원히 닫히지 않는 빛의 사다리였다. 숄렘은 이 구조를 “신의 내면에서 발생한 생명의 리듬”이라 불렀으며, 각각의 세피라는 그 자체로 하나의 ‘신적 사유의 얼굴’이었다. 그에 따르면, 플레로마(Pleroma)가 아이온의 배열로 구성된 영지주의적 충만의 세계라면, 세피로트는 에인 소프의 생명 자체가 조화와 균열, 발산과 반성을 통해 끊임없이 펼쳐지는 신비의 나선 구조였다.


그러나 이 발출은 단순한 아름다운 확장만은 아니었다. 숄렘이 깊이 탐구한 카발라의 핵심은 그릇의 파괴(Shevirat ha-Kelim, שְׁבִירַת הַכֵּלִים) 개념이다. 신의 빛을 담기엔 그릇이 너무 약했고, 그 결과 그릇은 깨져버렸다. 빛은 흩어졌고, 일부는 하강하여 이 물질 세계에 갇혔다. 이 균열은 단순한 실패가 아니다. 숄렘은 이것을 신 안에서조차 발생한 자기붕괴로 해석했으며, 존재의 균열은 오히려 자유와 책임, 구원의 가능성을 낳는 신학적 사건이라고 보았다. 세계는 신의 실패 위에 세워졌지만, 동시에 그 실패 안에서 새로운 신성을 품고 있었다. 이 사유는 영지주의가 말하는 소피아의 타락과 깊은 대화를 이룬다. 신성은 분열되었고, 그 분열은 존재 안에 빛과 어둠의 이중성을 남겼다. 그러나 이 균열은 단지 절망이 아니라, 회복의 길을 열어주는 통로였다.


그래서 숄렘은 "티쿤(Tikkun, תיקון)"이라는 개념을 강조한다. 티쿤은 '수선' 또는 '회복'을 뜻하며, 신의 세계가 무너진 이후 인간에게 주어진 우주적 과제다. 인간은 단순히 율법을 지키는 존재가 아니라, 흩어진 빛의 조각들을 다시 모아 세피로트의 구조를 회복시키는 존재다. 인간의 행위 하나하나가 이 세계에 흩어진 신적 파편을 회복시키는 도량이며, 작은 윤리적 결단조차도 세계의 구조를 조금씩 복원하는 신비한 수선이 된다. 이는 영지주의에서 말하는 기억의 회복과 플레로마로의 귀환 사상과 깊이 공명한다. 다만 영지주의가 구원을 내면의 앎(gnosis)과 해탈로 이해했다면, 숄렘은 카발라의 윤리적이고 세계 내적인 구원 가능성에 집중했다.


플레로마와 세피로트 구조는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이어진다. “깨진 신의 빛은 어디에 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다시 엮을 수 있는가.” 숄렘은 이 질문을 단순한 신학의 언어가 아니라, 신비적 실천의 언어로 변환했다. 그는 신은 완전하지 않으며, 세계는 원래부터 금이 가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금 간 세계 안에야말로 인간의 자유와 영혼의 책임이 새겨질 수 있었다. 플레로마가 충만의 빛이라면, 카발라적 우주는 파편의 어둠 속에서 다시 충만을 회복하려는 신의 고통스러운 몸짓이다.


게르숌 숄렘의 해석은 고요하지만 급진적이다. 그는 존재의 중심이 파괴를 통해 드러날 수 있으며, 파괴 이후에야 비로소 신성은 통합될 수 있음을 역설한다. 플레로마가 초월의 질서라면, 세피로트는 파열된 질서 속에서 되찾아야 할 신의 맥박이다. 숄렘의 신비주의는 이 분열된 현실을 떠나는 도피가 아니라, 분열 속에서 다시 빛을 찾으려는 존재의 윤리다.


숄렘이 말한 신의 파괴와 회복은, 본래 하나였던 우주가 자신을 다시 통합하려는 고요한 숨결과 같다. 우리 안에 흩어진 빛은 여전히 살아 있고, 그 빛을 다시 하나로 모을 수 있는 자가 곧 인간이다.


5.4 티벳 밀교의 본유광명과 플레로마적 충만


티벳 밀교(密敎, Vajrayāna)는 모든 존재의 근원을 ‘본유광명(本有光明, Prabhāsvara)’이라 부른다. 본유광명은 시간이나 공간의 한계 이전에 존재하는 원초적 빛이며, 생성도 소멸도 없는 무시간적 심연이다. 『티벳 사자의 서(Bardo Thödol)』에서는 이 본유광명을 “모든 생명이 죽음 이후 가장 먼저 마주치는 절대적 빛”으로 묘사한다(Thurman, The Tibetan Book of the Dead, Bantam, 1994, p.87). 본유광명은 인간이 죽음의 경계를 넘어설 때 만나는 최심부의 실재이며, 살아 있을 때도 진정한 깨달음(悟り, bodhi)에 이르면 접촉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중생은 본유광명을 인식하지 못하고, 그 압도적 충만에 압도되어 다시 윤회(輪回, saṃsāra)의 세계로 떨어진다.


본유광명은 단순한 광휘(光輝)가 아니다. 그것은 형상도 경계도 없는 근원적 충만이다. 티벳 밀교에서는 이 빛을 체험하는 순간, 자아(自我, ego)와 세계의 경계가 녹아내리고, 남김없이 퍼져 있는 존재의 심연과 합일한다고 가르친다. 이 심연은 공허(空虛, śūnya)로 느껴질 수 있으나, 사실은 무한한 가능성의 바다이며, 어떤 부족함도 없는 온전한 빛의 심층이다. 이 점에서 티벳 밀교의 본유광명 개념은 고대 영지주의(Gnosticism) 전통의 플레로마(Pleroma, πλήρωμα) 개념과 심오하게 접속한다.


플레로마는 모든 신적 존재(Aeon, αἰών)들이 서로를 반사하며 살아가는 무한한 충만의 장(場)이다01 플레로마 개념에 대한 논문. 플레로마는 고정된 형태나 단일한 실체가 아니라, 다양한 발현과 반사 속에서도 본질적 일체성을 잃지 않는 심층적 구조를 가진다. 티벳 밀교의 본유광명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개별적 빛이 아니라, 모든 존재가 뿜어내는 근원적 울림이다. 본유광명은 스스로를 드러내는 동시에 감춘다. 플레로마도 아이온들을 발출하면서도 자신의 근원적 심연을 잃지 않는다. 둘은 생성과 소멸을 초월한 차원에서 존재의 근원을 드러낸다.


특히 본유광명과 플레로마는 존재의 양극을 모두 포괄한다. 본유광명은 생명과 죽음, 깨달음과 무지(無知, avidyā)를 초월한다. 플레로마는 선(善, agathos)과 악(惡, kakos)을 넘어서는 충만이다. 『The Gnostic Bible』에서도 플레로마는 “어떤 결핍도 알지 못하는 심층적 존재”로 묘사된다(Barnstone & Meyer, The Gnostic Bible, Shambhala, 2006, p.113). 본유광명도 결핍을 모른다. 깨달은 이에게 본유광명은 단순히 빛나는 경관이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의 본질적 울림이며, 어떠한 욕망도 결여도 없는 원형적 충만이다.


티벳 밀교에서는 본유광명에 이르는 길을 다양한 관문으로 설정한다. 죽음 이후에 펼쳐지는 바르도(bardo) 세계에서, 중생은 환영(幻影, māyā)과 망상(妄想, moha)에 휘둘리지만, 본유광명을 인식할 경우 곧바로 해탈(解脫, mokṣa)할 수 있다. 영지주의적 플레로마 구원론도 유사한 구조를 가진다. 플레로마를 망각한 인간은 물질 세계의 환상에 갇히지만, 내면 깊은 곳에 숨은 플레로마의 기억을 되살릴 때, 영혼은 다시 충만으로 돌아갈 수 있다01 플레로마 개념에 대한 논문.


그러나 이 두 전통은 방법론에서 미묘하게 다르다. 밀교는 본유광명을 ‘보는 것’보다 ‘사라지는 것’에 강조점을 둔다. 주체가 사라질 때, 본유광명은 저절로 드러난다. 반면 영지주의는 플레로마를 인식하는 데 있어 ‘알음(知, gnosis)’을 강조한다. 기억하고 인식하는 주체적 행위가 구원의 열쇠가 된다. 밀교는 무심(無心)으로, 영지주의는 깨어 있는 앎으로 본질을 회복하려 한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도달하는 세계는 동일하다. 주체도 객체도 없는 무한한 충만의 심연이다.


또한 본유광명과 플레로마는 모두 '관계성 속의 일체성'을 지닌다. 티벳 밀교에서 깨달음은 개인적 구원만이 아니다. 모든 존재의 근원이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자아와 타자, 생명과 죽음 사이의 모든 경계가 허물어진다. 플레로마도 마찬가지다. 각 아이온은 독립된 존재처럼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하나의 심층적 충만을 반사할 뿐이다. 『The Tree of Gnosis』에서 이오안 쿨리아누(Ioan P. Couliano)는 플레로마를 "다양성 안에 내재하는 절대적 일체성"으로 정의하였다(Couliano, The Tree of Gnosis, HarperOne, 1992, p.154).


흥미로운 것은 티벳 밀교가 본유광명을 단순한 초월적 차원에 고정시키지 않고, 매 순간의 인식 속에서 구현하려 한다는 점이다. 살아 있는 자가 수행과 관조를 통해 본유광명을 체험할 수 있으며, 일상 속에서도 작은 순간마다 본질적 빛을 기억할 수 있다고 한다. 이 실천적 태도는 플레로마적 존재론과도 조응한다. 플레로마는 죽은 뒤 저편 세계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플레로마는 지금 이 존재 속에서, 기억하고 경청할 때마다 다시 살아난다. 존재의 모든 순간이 플레로마적 충만을 회복하는 순간이 될 수 있다.


결국 티벳 밀교의 본유광명과 플레로마적 충만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했을 뿐, 존재의 근원적 심연에 대한 동일한 체험을 노래하고 있다. 하나는 끝없이 빛나는 심연이며, 다른 하나는 끝없이 충만하는 심층이다. 우리는 이 둘을 통해, 존재가 단순히 ‘있음’이 아니라, 끝없이 울리고 흐르며 자신을 새롭게 태어내는 심층적 리듬임을 다시 배운다. 존재는 고정되지 않고, 플레로마는 멈추지 않으며, 본유광명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너무 오래 고개를 돌리고 있었을 뿐이다.


5.5 신지학과 플레로마


신지학(神智學, Theosophy)은 19세기 말 엘레나 블라바츠키(Helena Petrovna Blavatsky, 1831–1891)에 의해 정립된 독특한 영적 운동이었다. 『비밀교의(The Secret Doctrine)』에서 블라바츠키는 모든 종교와 철학의 심층에 하나의 공통된 지혜(智慧, sophia)가 흐르고 있다고 선언하며, 이 보편적 지혜를 신지학이라 불렀다(Blavatsky, The Secret Doctrine, Theosophical University Press, 2018, p.21). 신지학은 우주의 탄생과 진화, 인간 정신의 근원과 목적, 그리고 존재의 심층적 구조를 해명하려는 시도였으며, 물질과 정신, 과거와 미래를 하나의 통합된 비전 안에서 바라보았다.


신지학에서 제시하는 우주의 구조는 단순하지 않다. 블라바츠키는 모든 존재는 근원적 충만(充滿, fullness) 상태인 ‘불가해한 원초적 실재(The Unknowable Absolute)’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한다. 이 원초적 실재는 어떤 이름으로도 정의될 수 없고, 어떤 형태로도 파악될 수 없는 심연(深淵, abyss)이다. 그러나 이 무명(無名, Anonymity)의 심연은 스스로를 드러내려는 충동을 품고 있으며, 이로부터 다양한 차원의 존재들이 발출(發出, emanatio)된다. 『비밀교의』는 이를 "근원적 밤(Mulaprakriti)"과 "근원적 정신(Parabrahman)"의 이중 구조로 설명한다(Blavatsky, The Secret Doctrine, p.46).


이러한 신지학의 구조는 고대 영지주의(Gnosticism)의 플레로마(Pleroma, πλήρωμα) 개념과 놀라운 평행을 이룬다. 플레로마는 신적 존재들이 무수히 발출하면서도 근원적 하나를 잃지 않는 충만의 심층 구조이며, 결핍이나 왜곡 없이 본래적 빛과 생명이 넘치는 심연이다01 플레로마 개념에 대한 논문. 신지학에서도 발출된 세계들은 스스로를 잊지 않는 한, 여전히 원초적 충만의 반사이며, 존재하는 모든 것 안에는 그 근원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설명한다.


특히 신지학은 인간 존재를 단순한 육체적 실재로 보지 않았다. 블라바츠키는 인간을 "칠중적 존재(sevenfold being)"로 설명하며, 물질계(물리적 육체)에서부터 정신계(영적 자아)까지 여러 층위로 구성된 존재로 본다(Blavatsky, The Secret Doctrine, p.607). 이 층위들은 단순히 계단식 구조가 아니라, 근원적 심층과 끊임없이 연결되어 있으며, 인간의 참된 존재는 이 심층적 빛과 조화될 때만 충만을 회복할 수 있다. 플레로마의 사유와도 일치한다. 영지주의에서도 인간은 단순한 물질적 존재가 아니라, 플레로마로부터 파견된 빛의 불꽃(spark of Pleroma)을 품고 있으며, 그 기억을 회복해야만 본래적 충만을 다시 살아낼 수 있다.


신지학은 존재의 진화(evolution)를 물질적 진화만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그것은 물질계에서 정신계로 나아가는 내적 진화, 곧 존재의 심층적 충만을 다시 깨닫고 구현해 가는 과정이었다. 『비밀교의』는 인간 영혼이 반복적 윤회(samsara)를 통해 점차 자신 안의 신성을 드러내는 과정을 상세히 설명한다(Blavatsky, The Secret Doctrine, p.274). 플레로마에서도 구원은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기억을 다시 깨우고, 스스로 충만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내적 변형(transformation)을 통해 이루어진다.


흥미롭게도 신지학은 우주의 역사 또한 '리듬(rhythm)'과 '대순환(大循環, Mahāpralaya)'의 관점에서 이해했다. 존재는 끝없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며, 모든 것은 다시 심층의 충만으로 돌아간다. 플레로마적 존재론도 비슷한 구조를 지닌다. 플레로마는 발출과 반사, 소멸과 귀환을 반복하면서도, 근원적 충만을 결코 상실하지 않는다. 존재는 소멸되지 않고, 충만은 끊임없이 자신을 심화시킨다. 우리는 이 심층적 리듬 속에서 태어나고, 흔들리고, 다시 본래의 빛으로 귀환한다.


그러나 신지학과 플레로마 사유는 방법론적 차이를 가진다. 신지학은 다양한 종교와 신화를 통합하려는 시도 속에서 우주적 진화와 존재의 심층을 설명하려 했으며, 다소 체계적이고 계층화된 존재론적 설명을 선호했다. 반면 영지주의는 존재의 심연을 보다 직접적이고 체험적인 앎(gnosis)으로 접근하려 했다. 플레로마는 설명하는 대상이 아니라, 기억하고 살아내야 할 충만이었다.


또한 신지학은 인간이 근원적 심층을 인식함으로써 신성과 합일하는 길을 제시했지만, 이 과정은 개별 영혼의 자율성과 능동성을 강조했다. 플레로마적 구원도 마찬가지다. 어떤 외부 신적 권위나 강제적 개입 없이, 인간 스스로 내면의 플레로마를 기억하고, 다시 충만 속으로 걸어들어야 한다.


결국 신지학과 플레로마는 서로 다른 시대와 언어로, 존재의 심층적 충만을 노래했다. 하나는 19세기 현대 세계 속에서, 다른 하나는 고대의 신비 전통 속에서 울려 퍼졌지만, 둘 다 존재는 단순히 '있음'이 아니라, 충만한 울림이며, 우리는 그 울림을 기억하고 살아내야 함을 말하고 있다. 존재는 닫히지 않고, 충만은 사라지지 않으며, 심연은 여전히 우리 안에서 부르고 있다. 다만 우리가 다시 듣기로 결심하는 순간, 그 충만은 조용히 우리 안에 깨어날 것이다.



6. 불교: 공성(空性)과 플레로마


6.1 용수의 『중론』과 공의 형이상학


용수(龍樹, Nāgārjuna)는 『중론(中論, Mūlamadhyamakakārikā)』을 통해 대승불교의 심장부에 자리한 공(空, śūnyatā) 사유를 체계화하였다. 그는 『중론』 제1장 '관인연품(觀因緣品)' 첫 구절에서 "모든 것은 인연으로 생긴다. 나는 인연을 가르친다. 그것이 곧 공이며, 그것이 바로 중도이다(一切法從因緣生 我說是因緣 即是空 亦是假名 亦是中道義)"라고 밝히며 모든 존재가 인연(緣起, pratītyasamutpāda)에 의해 조건적으로 생기고 소멸함을 강조한다(용수, 『중론』, 강승민 옮김, 민족사, 2022, p.25). 여기서 공은 단순한 부정이 아니라, 고정된 자성(自性, svabhāva)이 없다는 사실, 그리고 존재가 상호의존적 관계 안에서만 의미를 가진다는 심오한 통찰을 담고 있다.


용수는 『중론』 제15장 '자성 없음을 관하는 품(觀自性品)'에서 "자성이 있다면, 변화는 있을 수 없다. 변화하는 것은 자성이 없다(若有自性者 不應從緣生 若從緣生者 云何有自性)"라며, 자성 자체가 변화와 인연을 부정하기 때문에, 존재가 살아 움직이는 한 결코 자성적일 수 없다고 단언한다(용수, 『중론』, 강승민 옮김, p.157). 이로써 그는 존재의 본질을 고정된 실체로부터 철저히 해방시키고, 모든 존재를 조건적이며 관계적인 것으로 규정한다. 공은 곧 존재를 영구히 열려 있게 하는 근본 구조이며, 그것은 허무가 아니라 살아 있는 가능성의 장(場)이다.


『중론』 전반을 통해 드러나는 공의 형이상학은, 존재를 실체로 보려는 모든 메타피지카를 넘어선다. 플라톤(Plato)의 이데아(ἰδέα)도, 아리스토텔레스(Aristotélēs)의 본질(οὐσία)도, 심지어 스토아(Stoa)의 논리적 형상들도 모두 존재의 고정성을 전제하지만, 용수는 이 고정성을 해체하면서 존재를 끊임없이 열리고 변하는 구조로 바라본다. 존재는 고정된 ‘있음’이 아니라, 끝없이 서로를 반영하며 생성되는 관계망이다. 이 점에서 『중론』은 현대 존재론적 탈구축의 가장 오래된 근원을 이룬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러한 용수의 공 개념은 영지주의(Gnosticism) 전통의 플레로마(Pleroma) 개념과도 중요한 철학적 대조를 이룬다. 플레로마는 모든 신적 실재가 충만하게 머무는 장소로서 결핍이 없는 충만을 가리킨다. 『The Gnostic Bible』에서는 플레로마를 "빛과 생명의 충만한 바다"로 묘사하며, 그 안에서 아이온(Aeon, αἰών)들이 서로 조화롭게 존재한다고 설명한다(Barnstone & Meyer, The Gnostic Bible, Shambhala, 2006, p.113). 그러나 이 플레로마는 고정된 실체들의 집합이 아니라, 무한히 관계하고 발산하는 신성한 리듬이기에, 오히려 존재의 고정된 자성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공의 세계와 내밀하게 겹친다. 다만 플레로마는 신성(divinitas)의 긍정적 충만으로, 공은 무성(無性, niḥsvabhāva)의 부정을 통해 충만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존재론적 접근 방식에 차이가 있다.


용수는 공을 논함에 있어 언어와 개념이 진실을 포착할 수 없음을 지적한다. 그는 "언어로 말해진 것이 실재가 아니라, 언어는 단지 인연의 그물을 엮는 것이다"라고 하며, 모든 명칭이 임시적 가명(假名, prajñapti)에 불과하다고 선언한다(용수, 『중론』, 강승민 옮김, p.68). 따라서 존재는 이름 붙여질 수 없고, 어떤 개념으로도 포섭될 수 없다. 플레로마 역시 모든 이름을 초월하는 충만을 지닌다. 『비밀 요한 복음서(Apocryphon of John)』에 따르면, "플레로마는 이름도 없고, 형태도 없으며, 다만 충만한 빛으로 존재할 뿐"이라고 말한다(Meyer, The Nag Hammadi Scriptures, HarperOne, 2008, p.116). 이처럼 플레로마와 공은 모두 언어로 정의할 수 없는 심층적 실재를 지향한다.


또한 공은 해탈(解脫, mokṣa)의 조건이 된다. 용수는 "공을 모르면 사성제도 알 수 없고, 고의 소멸도, 열반도 있을 수 없다"고 역설하며(용수, 『중론』, 강승민 옮김, p.208), 존재가 고정되지 않았음을 깨달을 때 비로소 집착에서 벗어나 참된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본다. 플레로마에서도 참된 구원은 무지(agnoia)의 파괴, 즉 무명(無明, avidyā)을 넘어 본래적 충만으로 돌아가는 데 있다. 영지주의 전통에서는 무지가 존재를 속박하는 것이지, 본래 존재 자체는 언제나 충만하다고 본다. 이 점에서 공의 해방과 플레로마로의 귀환은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동일한 존재론적 방향을 가리킨다.


그러나 한 가지 미묘한 차이가 있다. 공은 철저한 무자성(無自性, niḥsvabhāva)을 강조하며, 모든 형상과 실체를 해체하고, 그 해체 안에서 자유를 찾는다. 반면 플레로마는 실체 없는 충만이라기보다는 충만한 존재들의 관계망이며, 아이온들은 각각의 고유한 빛을 지니고 있으나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플레로마는 부정과 초월의 사이에서 '긍정된 충만'을 꿈꾼다면, 공은 모든 긍정을 초월하는 무(無) 위에서 스스로 충만해지는 자유를 연다.


용수의 공은 존재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모든 집착을 내려놓게 하는 철학적 수련이다. 그는 『중론』 전체를 통해 끊임없이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너는 무엇을 붙잡고 있는가.” 그리고 말없이 속삭인다. "공을 본 자는 더 이상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이때 공은 단순히 '없음'이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열린 가능성이다. 이것이 공의 형이상학적 깊이다.


플레로마도 결국 같은 진실을 가리킨다. 충만은 닫혀 있지 않고, 끝나지 않으며, 언제나 열린 리듬 속에서 스스로를 드러낸다. 공과 플레로마, 두 개념은 서로 다른 길을 따라 걸었지만, 그들이 가리키는 지평은 다르지 않다. 하나는 해체를 통해 충만을 말하고, 다른 하나는 충만을 통해 해체를 품는다. 용수는 이 여정을 사유의 강물 위에 펼쳐 놓았고, 우리는 그 강을 따라 고요히 건너야 한다.


6.2 『반야심경』과 “공즉시색”의 의미


『반야심경(般若心經, Prajñāpāramitāhṛdaya)』은 대승불교의 공(空, śūnyatā) 사상을 가장 응축된 형태로 드러낸 경전이다. 짧은 문장 속에 존재론과 인식론, 그리고 구원론이 겹겹이 스며 있으며, 그 핵심이 바로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는 명구에 담겨 있다. “색(色, rūpa)은 곧 공이고, 공은 곧 색이다”라는 이 구절은, 존재하는 모든 사물과 현상이 고정된 자성을 지니지 않으며, 동시에 공성(空性) 자체가 현상으로 드러난다는 심오한 역설을 표현한다.


『반야심경』 원문에서는 이렇게 노래한다.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即是空 空即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사리자야, 색은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은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이다. 수(受), 상(想), 행(行), 식(識) 또한 그러하다)”The Nag Hammadi Library. 여기서 색(色)은 모든 물질적 형상과 감각적 경험을 뜻하며, 수(受)·상(想)·행(行)·식(識)은 인간 존재를 구성하는 심리적 작용들을 가리킨다. 결국 인간과 세계를 이루는 모든 구성요소는 자성(自性, svabhāva)이 없고, 서로 조건 지어진 인연(緣起, pratītyasamutpāda)의 흐름 속에 잠정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은 단순한 무(無)가 아니다. 공은 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형상이 가능해지는 근원적 조건이다. 존재는 고정되지 않았기에 무한히 변할 수 있으며, 무한히 변할 수 있기에 존재는 살아 있다. 이때 공은 비어 있음이 아니라, 모든 것을 품을 수 있는 심연이다. 존재는 공하므로 생성되고, 공하므로 변화하며, 공하므로 소멸하고, 다시 태어난다. 이러한 사유는 플레로마(Pleroma)의 구조와 긴밀하게 연결된다. 영지주의 전통에서 플레로마는 신적 충만의 장(場)이며, 그 안에서 아이온(Aeon)들은 서로 분리되지 않고 조화롭게 존재한다. 플레로마는 고정된 실체들의 집합이 아니라, 끊임없이 상호 발현하는 생명의 맥락이다. 공이 모든 사물의 무자성(無自性)을 통해 존재의 개방성을 말한다면, 플레로마는 모든 신적 존재의 상호 연관성을 통해 충만을 노래한다. 결국 둘 다 닫힌 실체가 아니라 열린 관계망이라는 점에서 깊이 공명한다.


『반야심경』은 이러한 공의 구조를 단순히 존재론적으로만 설명하지 않고, 구원론적으로까지 확장한다. 경전은 말한다. “無苦集滅道 無智亦無得 以無所得故 菩提薩埵 依般若波羅蜜多故 心無罣礙(고(苦)도 없고, 집(集)도 없으며, 멸(滅)도 없고, 도(道)도 없다. 지혜도 없고 얻음도 없다. 얻을 것이 없기 때문에 보살은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마음에 걸림이 없다) 이는 존재가 본질적으로 공하기 때문에, 고집할 것도, 버릴 것도, 얻을 것도 없다는 통찰을 가르친다. 진리는 실체를 붙잡음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집착을 내려놓음으로써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이와 유사하게 플레로마 또한 결핍을 채워야 완성되는 곳이 아니라, 본래 충만한 존재 상태로서 인간의 인식이 막힌 무지를 걷어낼 때 비로소 체험될 수 있는 영역이다.


“공즉시색”은 단순히 현상이 공에서 나온다는 뜻이 아니다. 현상은 공과 다르지 않으며, 공은 현상과 다르지 않다는 말은, 존재하는 모든 것은 비어 있음 속에서 드러나고, 비어 있음은 끊임없이 존재로서 표현된다는 깊은 상호성의 원리를 드러낸다. 이는 플레로마가 하나의 고정된 신적 영역이 아니라, 충만과 발현의 끝없는 리듬이라는 점과 정확히 호응한다. 플레로마 안에서 모든 아이온은 개별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전체의 충만을 반영하며, 그 충만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새롭게 한다.


철학적으로 보자면, 『반야심경』의 “공즉시색”은 고대 서양 형이상학이 추구했던 존재와 현상의 이원론을 넘어서는 구조를 제시한다. 존재는 결코 현상을 초월해 있지 않으며, 현상 또한 단순한 허상이 아니다. 존재는 현상 속에 드러나고, 현상은 존재의 공적 본성을 반영한다. 플레로마 또한 초월적 실재를 현상계와 단절된 장소로 설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플레로마는 세계의 심층에서 모든 존재를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리듬이며, 이 리듬은 때로는 광휘처럼, 때로는 침묵처럼, 때로는 고통과 죽음 속에서도 스스로를 드러낸다.


『반야심경』이 “심무괴애(心無罣礙)”라고 할 때, 이는 공을 통찰한 존재는 더 이상 마음에 얽매임이 없다는 의미이다. 얽매임이 없기에 두려움도 없고, 얽매임이 없기에 세계를 가르거나 차별하지 않는다. 플레로마 역시 차별이 없다. 그 안에서는 빛과 그림자가 따로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하나의 충만만이 다양하게 울려 퍼진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플레로마의 울림이며, 그 울림은 공의 구조를 따라 끊임없이 자신을 열고 닫으며 진동한다.


결국 『반야심경』이 말하는 “공즉시색”은, 존재의 궁극적 진실이 결코 비어 있기만 한 것도, 실체로만 고정된 것도 아님을 가리킨다. 존재는 텅 비어 있기 때문에 충만하고, 충만하기 때문에 텅 비어 있다. 플레로마도 이 이중적 진실을 품고 있다. 모든 것은 충만한 하나 속에 있지만, 그 충만은 결코 닫히거나 고정되지 않고, 끝없이 살아 있다. 그러므로 공과 플레로마는,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존재의 가장 깊은 자리에서 울려오는 같은 노래를, 다른 음으로 부르고 있는 것이다.


7. 힌두교: 브라흐만-아트만 사상과의 접점


7.1 『찬도갸』와 『브리하다란야카』의 통합적 우주관


『찬도갸 우파니샤드(Chāndogya Upaniṣad)』와 『브리하다란야카 우파니샤드(Bṛhadāraṇyaka Upaniṣad)』는 고대 인도 사유의 정수를 담고 있으며, 존재의 본질과 우주의 구조에 대한 심오한 통찰을 제공한다. 두 경전 모두 브라흐만(Brahman, ब्रह्मन्)과 아트만(Ātman, आत्मन्)의 동일성을 중심 주제로 삼으며, 모든 세계의 근원이 하나의 무한한 실재임을 노래한다. 『찬도갸』 제6장에서는 우달라카 아루니(Uddālaka Āruṇi)가 아들 슈베타케투(Śvetaketu)에게 가르친다. “이 모든 것은 존재(有, sat)에서 태어났고, 존재로 살아가며, 존재로 돌아간다. 그것이 브라흐만이다. 너는 곧 그것이다(Tat tvam asi)”(『찬도갸 우파니샤드』 6.8.7, 김형준 옮김, 동문선, 2020, p.138). 이 선언은 개인과 우주의 본질적 동일성을 직설적으로 드러낸다.


『브리하다란야카』 역시 비슷한 사유를 전개한다. 야즈나발크야(Yājñavalkya)는 말한다. "이 모든 것은 아트만이다(सर्वं खल्विदं आत्मा, sarvaṃ khalvidaṃ ātmā)"(『브리하다란야카 우파니샤드』 2.4.6, 김형준 옮김, 동문선, 2020, p.89). 존재하는 모든 것은 아트만이며, 아트만은 곧 브라흐만이다. 이때 브라흐만은 단순한 신이나 창조주가 아니라, 모든 존재의 심층에 스며 있는 무한한 실재다. 브라흐만은 무형(無形, arūpa)이고 무한(無限, ananta)하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것의 근원, 유지, 귀결이 된다.


이러한 사유 구조는 영지주의(Gnosticism) 전통의 플레로마(Pleroma) 개념과 놀라운 유사성을 지닌다. 플레로마는 모든 신적 존재가 충만하게 머무는 무한의 장(場)이며, 거기에는 결핍이 존재하지 않는다. 『The Gnostic Bible』에서는 플레로마를 "모든 빛과 생명의 근원적 충만"이라고 묘사하며, 아이온(Aeon, αἰών)들이 그 안에서 서로를 반영하며 하나의 조화를 이룬다고 설명한다The Gnostic Bible. 플레로마는 단순한 실체의 모음이 아니라, 무한한 관계성과 발현성 속에서 스스로를 완성하는 존재의 리듬이다. 브라흐만 또한 어떤 고정된 형상이 아니라, 스스로를 통해 무수히 발현하고, 발현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근원적 리듬이다. 이 점에서 플레로마와 브라흐만은 모두 존재의 '충만한 무형성'이라는 형이상학적 구조를 공유한다.


『찬도갸』에서 브라흐만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내적 본질이며, 모든 변화의 배후에서 조용히 스스로를 지속하는 실재이다. 그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색(色, rūpa)이나 소리(聲, śabda)가 아니라, 그 모든 표현의 심연이다. 이때 브라흐만은 "보고자(見者, draṣṭṛ), 듣고자(聞者, śrotṛ), 생각하는 자(思者, mantṛ), 이해하는 자(知者, vijñātṛ)"로서 모든 감각과 인식의 배후에 존재한다(『찬도갸 우파니샤드』 6.8.7, 김형준 옮김, p.140). 플레로마 역시 눈에 보이는 어떤 형상이 아니라, 모든 형상들의 근원적 가능성이며, 모든 존재가 흘러나오는 무한한 심연이다.


『브리하다란야카』는 보다 급진적으로 나아간다. 야즈나발크야는 "네가 무엇을 아는가?"라는 물음에 "아트만만이 앎을 넘어 있다"고 대답한다(『브리하다란야카 우파니샤드』 4.5.15, 김형준 옮김, p.178). 아트만은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인식 자체를 가능케 하는 조건이며, 모든 존재는 그 아트만에 의존해 나타난다. 플레로마적 존재도 마찬가지다. 플레로마는 인식될 수 있는 대상을 초월하며, 오히려 모든 인식 행위의 심층적 기반이 된다. 이처럼 브라흐만과 플레로마는 각각 인도와 지중해 세계에서, 존재의 절대적 근원성과 초월성을 설명하려는 시도 속에 태어났다.


또한 이 두 개념은 구원론적 구조에서도 공명한다. 『찬도갸』는 "진리를 아는 자는 해탈(mokṣa)한다"고 말한다(6.14.2). 진리를 아는 것은 외부의 어떤 존재를 믿거나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 안에 내재한 브라흐만을 깨닫는 것이다. 플레로마에서도 구원은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인간 존재 안에 심어진 신적 불꽃(spark)을 깨달아, 본래의 충만한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 구원의 본질이다. 구원은 외부의 신적 은혜가 아니라, 자기 존재의 본질을 기억하고 회복하는 일이다. 이 점에서 『찬도갸』와 『브리하다란야카』의 해탈론과 영지주의의 구원론은 깊은 친연성을 보인다.


그러나 미묘한 차이도 있다. 브라흐만-아트만 사상은 궁극적으로 하나(一, eka)로서 통일된 실재를 노래하는 데 비해, 플레로마는 다양성 속의 충만을 강조한다. 플레로마 안에는 다양한 아이온들이 있으며, 이들은 분리되지 않으면서도 각자의 독특한 빛을 발한다. 플레로마는 일자(一者)의 단순한 반영이 아니라, 관계적 다양성 속에서 하나의 충만을 이룬다. 이에 비해 브라흐만은 차이를 초월하여 모든 것을 하나의 심연으로 흡수하는 방향성을 지닌다. 따라서 플레로마는 다양성과 충만의 긴장 속에서 존재하는 반면, 브라흐만은 무차별적 평등 속에서 고요히 모든 것을 포괄한다.


『찬도갸』와 『브리하다란야카』는 이러한 브라흐만의 속성을 종교적 신비주의가 아니라 철학적 사유로 제시했다는 점에서, 플레로마 신화와는 또 다른 접근법을 보여준다. 플레로마는 신화적 서사를 통해 존재의 충만을 이야기하지만, 브라흐만 사상은 직접적 직관과 논증을 통해 존재의 근원을 사유하려 한다. 그러나 결국 둘 다 말한다. 세계는 무한히 열려 있으며, 존재는 결코 닫히지 않았고, 우리는 그 심연을 기억해야 한다.


8. 천부경과 플레로마의 통합적 해석


8.1 일시무시일과 존재의 원형 구조


천부경(天符經)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一始無始一(일시무시일)”, 하나가 시작이었으며 또한 시작 없는 하나였다. 이 짧은 한 구절 안에는 존재에 대한 고대적 직관과 형이상학적 비전이 압축되어 있다. ‘일(一, ἕν)’은 단순한 수적 단위를 넘어서, 모든 존재를 가능케 하는 근원적 통일성을 가리키며, 그 하나는 어느 시점에 생긴 것도 아니고, 시간과 공간, 생성과 소멸의 구분이 있기 전부터 있었던 무시(無始, beginningless)한 하나였다. 이 하나는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모든 움직임을 가능케 하고, 생성되지 않으면서도 모든 생성을 품고 있으며, 따라서 존재하는 모든 것의 보이지 않는 심층이 된다.


이러한 “시작 없는 하나”라는 사고는 플라톤(Plato)이 『파르메니데스(Parmenides)』에서 논의한 일자(一者, ἕν) 개념과 깊이 상응한다. 플라톤은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어떤 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이다”라고 말했으며(Platon, Parmenides, Oxford University Press, 2005, p.136),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로부터 흘러나오며, 하나는 어떤 분화도 허용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천부경의 일시무시일 또한 분화 이전의 순수한 하나를 선언한다. 그러나 천부경은 플라톤적 일자가 가진 형이상학적 구분(초월적 일자와 그 복제물들)조차 넘어, 하나가 분화 속에서도 여전히 하나임을 암시한다. 시작이 없기 때문에 끝도 없고, 생성이 없기 때문에 소멸도 없다. 하나는 모든 변화를 끌어안고 있으나 스스로는 결코 변하지 않는다.


이 사유는 영지주의(Gnosticism) 전통의 플레로마(Pleroma, πλήρωμα) 개념과도 깊은 공명을 이룬다. 플레로마는 모든 신적 존재가 충만히 머무는 심층의 장(場)으로, 그것은 나뉨 없이 충만하며, 모든 분화된 존재를 품고 있다. 『The Gnostic Bible』에서는 플레로마를 “하나의 빛에서 나뉘었지만 본질상 하나로 남아 있는 무한한 생명의 바다”로 묘사한다(Barnstone & Meyer, The Gnostic Bible, Shambhala, 2006, p.103). 플레로마 안에서 아이온(Aeon, αἰών)들은 각각의 개별성을 가지지만, 그 본질은 하나의 충만함으로 얽혀 있다. 일시무시일이 말하는 “시작 없는 하나”와 플레로마가 말하는 “분화 속의 일체성”은 서로 다른 언어로 표현되었을 뿐, 존재의 근원적 구조를 동일하게 지시한다.


『찬도갸 우파니샤드(Chāndogya Upaniṣad)』에서도 이 하나의 통찰은 반복된다. 우달라카는 아들 슈베타케투에게 말한다. "이 모든 것은 존재(有, sat)로부터 생겨났고, 존재 속에 살아가며, 존재로 돌아간다. 너는 곧 그것이다(Tat tvam asi)"(『찬도갸 우파니샤드』 6.8.7, 김형준 옮김, 동문선, 2020, p.138). 여기서 말하는 존재(sat)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드러내면서도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는 심연이다. 천부경이 말하는 무시일(無始一)과 우파니샤드가 말하는 존재(sat)는, 시간적 시작을 가지지 않는 영구적 근원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같다.


그러나 천부경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하나가 단순한 초월적 실재가 아니라, 삼극(三極)과 만물 속으로 스스로를 펼친다고 본다. 일시무시일은 고정된 신적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생성하고 변주하는 존재의 리듬이다. 하나는 분화 속에서도 변하지 않고, 변화 속에서도 본질을 잃지 않는다. 이 역동적 존재 구조는 플레로마가 충만한 가운데 계속해서 아이온들을 발현하는 구조와 유사하다. 플레로마는 단일한 정태적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생명과 의식과 사랑을 발산하는 살아 있는 심층이다. 『비밀 요한 복음서(Apocryphon of John)』에서는 플레로마의 빛이 “끊임없이 자신을 밖으로 보내며, 다시 자신 안으로 회귀한다”고 묘사되어 있다(Meyer, The Nag Hammadi Scriptures, HarperOne, 2008, p.107).


이러한 존재론적 리듬은 시간관에도 반영된다. 일시무시일은 시간의 선형적 흐름을 부정한다. 시작이 없는 하나에게는 단순한 과거, 현재, 미래가 있을 수 없다. 오히려 시간은 하나가 자기 자신을 펼쳐가는 다양한 방식일 뿐이며, 모든 순간은 본래의 하나와 연결되어 있다. 플레로마 안에서도 시간은 직선적으로 흐르지 않는다. 플레로마는 '항상 지금'이며, 모든 충만이 영원한 현재의 빛 속에서 드러난다. 따라서 일시무시일과 플레로마는 모두, 시간과 존재를 일방향적 진행이 아닌 순환적이고 심층적인 구조로 본다.


일시무시일은 또한 존재의 윤리적 구조를 암시한다. 하나에서 갈라진 모든 존재는 본래 하나였기 때문에, 서로를 해할 수 없고, 서로를 해하면 결국 자신을 해치는 것이다. 플레로마 안에서도 아이온들은 서로를 파괴하지 않고, 서로의 빛을 더욱 밝히기 위해 존재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이 연결성은 도덕의 근거가 된다. 우리는 모두 하나의 기억을 품고 태어났고, 하나의 심연을 향해 돌아가야 할 존재들이다.


결국 일시무시일은 단순히 존재의 기원을 설명하는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 전체의 구조, 시간의 흐름, 인간 윤리의 기초를 하나의 심오한 사유로 묶어낸 형이상학적 선언이다. 이 선언은 플레로마, 브라흐만, 공성(空性) 등 다른 전통의 심층적 사유들과도 깊게 공명하며, 우리로 하여금 존재의 본래적 울림을 다시 듣게 한다.


8.2 삼극 구조(천·지·인)과 아이온 구조의 상응


천부경(天符經)은 “析三極無盡本(석삼극무진본)”, 곧 하나가 갈라져 세 극(三極, 삼재: 天·地·人)을 이루었으나 그 본질은 끝이 없다는 명구로 존재의 분화와 근원적 일체성을 동시에 선언한다. 여기서 천(天)은 우주의식(宇宙意識)을, 지(地)는 에너지의 장(場)을, 인(人)은 생명적 의지(意志)를 상징하며, 이 셋은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 하나의 심연에서 울려 나오는 삼중적 진동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하늘과 땅과 사람은 본질적으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근원적 하나가 스스로를 삼중 구조로 펼친 결과이며, 이 삼극은 서로를 반사하고 끌어안으면서 존재 전체를 이룬다.


플레로마(Pleroma, πλήρωμα)의 아이온(Aeon, αἰών) 구조도 이와 닮아 있다. 『The Gnostic Bible』에 따르면 플레로마는 단일한 신적 실체가 아니라, 다수의 아이온들이 서로를 반사하고 발산하는 살아 있는 충만으로 이루어진다. 아이온들은 각각 독특한 속성과 개성을 지니지만, 플레로마의 일체성 속에서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심층적 울림을 이룬다(Barnstone & Meyer, The Gnostic Bible, Shambhala, 2006, p.103). 특히 초기 발렌티누스(Valentinus) 전통에서는 프로파토르(Propator, 최초의 아버지)와 에노이아(Ennoia, 사유)의 발출을 시작으로 수십 개의 아이온들이 쌍을 이루어 발현된다고 설명하며, 이들은 각기 ‘지성(Nous)’, ‘진리(Aletheia)’, ‘생명(Zoe)’, ‘말씀(Logos)’ 등의 속성을 상징한다. 즉 삼극 구조가 단순한 수적 분할이 아니듯, 아이온들도 각각이 고유한 존재론적 기능을 가지면서도 본래적 하나를 흐릿하게 반영하고 있다.


천부경의 삼극(三極) 구조는 수직적 위계가 아니다. 하늘이 윗자리를 차지하고 땅이 아랫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과 땅과 인간이 서로를 통해 존재하며, 서로를 비추며 하나의 순환을 완성한다. 이는 플레로마의 아이온들도 서로 상하나 종속관계로 존재하지 않고, 각자 고유성을 지니면서 전체 조화에 기여한다는 영지주의적 사유와 완전히 일치한다.


천(天)은 모든 의식(意識, consciousness)의 원형이며, 플레로마에서는 최초의 프로파토르와 사유(Ennoia)가 이 역할을 맡는다. 지(地)는 모든 에너지(energia)의 원형이며, 이는 플레로마 안에서 생명(Zoe)이나 힘(Dynamis) 같은 아이온들이 드러내는 근원적 에너지성과 대응된다. 인(人)은 모든 생명체의 주체적 행동(行動, praxis)을 상징하며, 이는 플레로마에서 로고스(Logos)나 구세주(Soter)가 하는 역할과 겹친다. 인간은 단순히 피조물이 아니라, 의식과 에너지를 통합하여 자율적 행동을 통해 세계를 반영하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천부경의 삼극은 우주적 사유-에너지-행동의 삼위일체(三位一體)를 형상화한 구조라 할 수 있다.


삼극(三極) 구조가 중요한 것은, 이것이 인간 존재론에도 직접적으로 적용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늘과 땅과 사람, 곧 의식과 에너지와 행동이 하나로 통합된 존재이며, 이 세 요소가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참된 인간으로서 완성된다. 플레로마의 아이온 구조도 인간 존재론과 깊게 연결된다. 영지주의에서는 인간 안에 플레로마적 불꽃(spark of Pleroma)이 깃들어 있다고 보며, 인간은 이 잃어버린 충만을 기억하고 회복해야 한다고 말한다01 플레로마 개념에 대한 논문. 인간 안의 의식, 에너지, 행동이 조화를 이룰 때, 인간은 본래의 충만성을 다시 반영할 수 있다.


한편 플레로마의 아이온 발출은 순수한 수직 확산이 아니라, 내적 반사(reflection)와 자기 심화(intensification)로 이루어진다. 하나의 근원이 다양한 방식으로 스스로를 심화하고 변주하는 것이다. 천부경의 삼극도 마찬가지로, 일(一)이 삼(三)으로 펼쳐지면서 자기 자신을 심화하고, 삼극이 다시 만물(萬物)로 확산되면서 존재의 무진본(無盡本)을 구현한다. 분화는 본질적 분리가 아니며, 다양성은 충만의 표현이다. 이 철학은 현대 양자장 이론(Quantum Field Theory)에서 말하는 ‘장(場, field)으로서의 존재’ 개념과도 깊은 연결을 가진다. 존재는 고정된 입자가 아니라, 끝없이 진동하고 상호작용하는 장이며, 삼극과 아이온은 모두 이 장적 존재론을 상징하는 구조라 할 수 있다.


결국 천부경의 삼극 구조와 플레로마의 아이온 구조는, 존재를 단순한 실체가 아니라, 열린 흐름과 관계망으로 이해하는 심층적 통찰을 공유한다. 하나는 갈라지지만, 갈라진 것들은 서로를 통해 본래 하나였음을 증명한다. 모든 차이는 궁극적으로 충만의 다른 방식이며, 모든 다양성은 하나의 심연에서 울려 나오는 공명이다.


8.3 대삼합육·운삼사·용변부동본의 우주론


천부경(天符經)은 단순한 신화적 세계관을 넘어, 존재의 심층 구조를 정밀하게 암시하는 철학적 시(詩)이다. 그중에서도 “大三合六 生七八九(대삼합육 생칠팔구)”, “運三四 成環五七(운삼사 성환오칠)”, “用變不動本(용변부동본)”은 우주의 생성과 순환, 그리고 불변하는 근원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준다.


“대삼합육”은 하늘(天), 땅(地), 사람(人)의 삼극(三極)이 합쳐져 여섯(六)을 이루는 것을 뜻한다. 이 여섯은 단순한 수의 조합이 아니라, 삼극이 서로를 반영하고, 대칭하고, 포괄하는 관계적 완성의 수이다. 여기서 육(六)은 물질계의 기본 구조를 상징한다. 탄소(C)는 원자번호 6을 가지며, 생명체의 기본 골격을 이루고 있으며, 생명체의 리듬과 구조 역시 6의 배수로 맞춰져 있다. 하늘·땅·사람의 통합이 물질적 생명체를 창조하고, 그 안에서 다양한 생명이 꽃피게 되는 것이다.


이어지는 “생칠팔구”는 이 육의 조화 속에서 일곱(七)과 여덟(八)과 아홉(九)이 생겨나는 과정을 설명한다. 칠(七)은 완성(completion)을 상징한다. 우주의 기본 구조가 6이라는 균형 위에서 하나의 창조적 도약을 통해 완성을 이루는 것이다. 팔(八)은 무한한 확장(擴張)을 상징하며, 구(九)는 마침과 완성에 이르는 문턱을 가리킨다. 이는 단순한 숫자 나열이 아니라, 존재가 물질계(六)를 초월하여 보다 고차원적 리듬(七, 八, 九)으로 승화해 가는 우주의 생성 구조를 표현한다.


이러한 전개는 플레로마(Pleroma) 구조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플레로마에서도 최초의 프로파토르(Propator)와 에노이아(Ennoia)가 발출되고, 이어 생명(Zoe)과 진리(Aletheia), 말씀(Logos)과 지성(Nous) 등 다수의 아이온(Aeon, αἰών)들이 질서 정연한 구조로 발현된다[Ioan_P._Couliano]_The_…. 초기 발렌티누스(Valentinus) 사상에서는 이 발출이 30개 아이온의 구성으로 마무리되는데, 그 구조는 6의 배수와 3의 관계성을 기본 틀로 삼는다. 이는 천부경의 육·칠·팔·구 전개와 존재론적 구조상 놀라운 평행을 이룬다.


“운삼사 성환오칠”은 삼과 사(三四)가 운행하여 오와 칠(五七)을 성환(成環), 즉 하나의 순환적 고리(cycle)를 이룬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삼(三)은 천·지·인의 기본 구조이며, 사(四)는 그 구조가 현실계에서 물질적 방위(東西南北)를 형성하며 퍼져 나감을 뜻한다. 삼과 사가 서로를 따라 움직이며 존재의 운동을 만들고, 이 운동은 오(五, 중심과 사방)와 칠(七, 완성의 상징)이라는 새로운 차원을 열어 순환의 고리로 완성된다. 시간 또한 이 구조 안에서 탄생한다. 시간은 단선적 직진이 아니라, 삼과 사가 운행하고, 다섯 방향과 일곱 단계를 거치는 순환 속에서 탄생하는 생명의 리듬이다.


플레로마에서도 시간은 직선적 흐름이 아니다. 『비밀 요한 복음서(Apocryphon of John)』에 따르면, 플레로마의 발출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끊임없는 내적 반사와 자기 심화를 통해 순환하며 확장되는 흐름이다(Meyer, The Nag Hammadi Scriptures, HarperOne, 2008, p.116). 플레로마 안에서 아이온들은 단순히 탄생한 후 멈추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빛을 반사하고, 그 반사 속에서 다시 자신을 심화시키며 끝없이 충만을 증식시킨다. 이 점에서 천부경의 “성환(成環)” 구조와 플레로마의 순환적 발현 구조는 깊은 형이상학적 통일성을 공유한다.


마지막으로, “용변부동본(用變不動本)”은 존재의 본질을 꿰뚫는 선언이다. 비록 변화(變)가 끊임없이 일어나더라도, 그 근원(本)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때 변화는 표면에 나타나는 형상들의 전환이며, 본질은 그 모든 변화의 심연에서 고요히 스스로를 지키고 있는 절대적 존재이다. 이 사유는 힌두교의 브라흐만(Brahman, ब्रह्मन्) 개념과도, 불교의 공성(空性, śūnyatā)과도 연결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플레로마와 가장 깊이 맞닿는다. 플레로마는 수많은 아이온들의 발출과 운동을 품고 있지만, 그 근본 충만 자체는 변하지 않으며, 모든 발출은 그 충만의 다양한 반사일 뿐이다.


또한 현대 과학, 특히 양자장론(Quantum Field Theory)에서도, 장(場, field)은 끝없이 변동하는 입자들의 운동을 허용하지만, 장 자체는 변하지 않는 에너지 구조로 존재한다고 설명한다. 변화는 일어나지만, 그 변화를 가능케 하는 심층 구조는 움직이지 않는다. 천부경이 말하는 “용변부동본”은 바로 이 존재의 심층적 불변성을 꿰뚫어본 사유라 할 수 있다.


결국, 대삼합육·운삼사·용변부동본은 하나의 연속적 우주론을 이룬다. 하나는 스스로를 셋으로 펼치고, 셋은 여섯과 일곱과 여덟과 아홉으로 진화하며, 그 모든 흐름은 순환의 고리를 만들고, 그 순환 속에서도 근원은 변하지 않는다. 이 거대한 울림은 플레로마의 발출과 반사, 그리고 심층적 충만 구조와도 정확히 맞물린다. 우리는 천부경과 플레로마가 서로 다른 시공간 속에서, 그러나 동일한 존재의 심연을 들여다보았다는 사실을, 이 고요한 진동 속에서 다시 확인하게 된다.


8.4 본심·본태양·인중천지일과 인간 존재론


천부경(天符經)은 존재의 심연뿐만 아니라 인간 존재의 본질을 정교하게 압축해 전한다. “本心本太陽昻明(본심본태양앙명)”과 “人中天地一(인중천지일)”이라는 구절은, 인간이 단순한 물질적 존재가 아니라, 우주적 의식과 에너지, 그리고 생명적 행동이 하나로 통합된 ‘살아 있는 신비(神秘)’임을 선포한다.


“본심(本心)”은 단순한 감정이나 생각을 넘어, 존재의 근원적 울림을 품은 마음이다. 본심은 뒤엉킨 욕망이나 흔들리는 감정이 아니라, 빛처럼 맑고 깊은 고요이다. “본태양(本太陽)”은 바로 이 본심의 상징이다. 천부경은 인간의 참된 마음이 태양처럼 높이 솟아 밝게 빛난다고 노래한다. 이 태양은 단지 하늘에 떠 있는 항성(恒星)이 아니라, 인간 존재 깊은 곳에 숨은 영원한 광명(光明)이다. 모든 인간은 이 본태양을 품고 태어난다. 그러나 일상의 고단함, 감정의 혼탁, 무명의 어둠 속에서 이 본태양은 종종 가려진다.


플레로마(Pleroma, πλήρωμα) 개념도 본심본태양과 구조적으로 대응한다. 플레로마는 모든 신적 존재들이 서로를 반사하며 하나의 충만을 이루는 무한한 빛의 장(場)이다. 『The Gnostic Bible』에 따르면 플레로마는 “어둠이 없고, 충만한 빛만이 있는 곳”이다(Barnstone & Meyer, The Gnostic Bible, Shambhala, 2006, p.113). 아이온(Aeon, αἰών)들은 각각 독특한 성격을 지니지만, 본질적으로 하나의 빛에서 발현된 다양한 울림들이다. 인간 안의 본태양 역시 이러한 플레로마적 구조를 반영한다. 각각의 인간은 독립된 존재 같지만, 모두 하나의 근원적 빛을 품고 있으며, 서로 다른 방식으로 그 빛을 드러낸다.


“인중천지일(人中天地一)”은 인간이 단순히 하늘과 땅 사이에 낀 존재가 아님을 선언한다. 인간은 하늘(天, 우주의식)과 땅(地, 물질에너지)을 통합하여 새로운 차원을 여는 존재이다. 인간 안에는 의식, 에너지, 행동이라는 삼극(三極)이 하나로 응축되어 있다. 인간은 이 세 가지 힘을 조율하고 통합함으로써 우주적 존재가 된다. 이 구조는 플레로마의 아이온 구조와도 정확히 상응한다. 플레로마의 아이온들은 각각 지성(Nous), 생명(Zoe), 말씀(Logos) 등의 속성을 지니며, 서로를 보완하며 하나의 충만을 이룬다.


특히 영지주의 전통에서는 인간이 플레로마의 ‘신적 불꽃(spark of Pleroma)’을 품고 있다고 말한다. 인간은 본래 충만의 기억을 지니고 있으며, 이 기억을 되살리고 회복하는 것이 구원의 길이다. 천부경의 인중천지일 또한 인간이 우주의식과 물질에너지를 통합하여 다시 하나로 돌아가는 존재임을 시적으로 선언한다. 인간은 우주의 축소판이며, 동시에 우주의식 그 자체다.


『The Secret Teachings of All Ages』에서도 만리 홀(Hall)은 “인간의 본질은 단순한 육체를 넘어, 우주의 심층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고 강조한다(Hall, The Secret Teachings of All Ages, TarcherPerigee, 2021, p.287). 철학자는 육체와 영혼을 분리하지 않고, 영혼의 힘을 통해 물질계를 넘어선다고 한다. 이 철학적 통찰은 천부경의 인간론과 완전히 겹친다. 인간은 단순한 생명체가 아니라, 존재 전체를 다시 울릴 수 있는 공명체(共鳴體)다.


플레로마와 천부경 모두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이 이 본심본태양을 잊을 때, 스스로를 상실한다는 점이다. 영지주의에서 무명(ἀγνωσία, agnosia)이 인간을 타락시키고, 외부 세계의 허상(illusion)에 속박하게 만든다면, 천부경에서도 인간이 본래 하나였던 본심과 본태양을 망각할 때, 삼극의 조화가 깨지고 내적 균형을 잃게 된다. 결국 인간은 다시 본심으로, 본태양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 과정은 간단하지 않다. 『The Gnostic Handbook』에서는 인간이 진정한 영적 인간(Homo spiritualis)이 되기 위해서는 “루나적(lunar) 육체를 넘어 솔라적(solar) 육체를 창조해야 한다”고 말한다the-gnosis-of-kali-yuga. 즉 무명과 욕망에 찌든 현재의 상태를 넘어, 신적 충만에 합당한 존재로 스스로를 변형해야 한다는 것이다. 천부경도 “일적십거(一積十鉅)”를 통해, 하나가 열로 확장되면서도 본질을 잃지 않음을 말한다. 인간은 끊임없이 확장하고 변화하지만, 본질(본심본태양)을 지킬 때만 진정한 완성에 도달할 수 있다.


인중천지일은 인간 존재론의 궁극을 암시한다. 인간은 단순한 피조물이 아니다. 인간은 하늘과 땅을 잇는 다리이며, 존재하는 모든 층위를 통합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플레로마의 아이온 구조처럼, 인간 안에는 하늘의 지성(Nous), 땅의 에너지(Dynamis), 생명의 행위(Zoe)가 함께 깃들어 있다. 이 세 가지를 조화시킬 때, 인간은 본래적 충만을 회복한다.


결국 본심본태양과 인중천지일은 인간 존재의 신성(神性)과 책임을 동시에 선언한다. 우리는 단순한 물질적 기계가 아니다. 우리는 하나의 심연을 기억하는 존재이며, 이 기억을 통해 존재 전체를 다시 울릴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존재이다. 플레로마가 우리 바깥에 있는 신적 세계가 아니라, 우리 안에 울리고 있는 본래적 심층이듯, 천부경의 본심과 본태양도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서 여전히 빛나고 있다. 그것은 결코 꺼지지 않는 태양이다. 다만 우리가 너무 오래 고개를 돌리고 있었을 뿐이다.


8.5 일종무종일과 시간·초월·귀환의 사유


"일종무종일(一終無終一)"은 천부경(天符經)의 마지막 구절이다. 하나는 끝이면서도 끝이 없고, 끝없는 하나이다. 이 간결한 구절 속에는 인간 존재가 시간(時間, tempus)과 초월(超越, transcendere), 귀환(歸還, reditus)을 어떻게 사유해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통찰이 압축되어 있다. 존재는 시간 속에 있지만, 또한 시간을 넘어서는 가능성의 심연을 품고 있으며, 모든 움직임은 결국 본래적 하나로 귀환하려는 충동을 지니고 있다.


일종무종일이 던지는 가장 깊은 메시지는 시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이다. 시간은 단순한 직선적 흐름(linear progression)이 아니다. 시간은 시작과 끝을 가진 폐쇄된 직선이 아니라, 끝없이 자신을 굽이치며 심층을 드러내는 파동(波動, unda)이다. 니체(Friedrich Nietzsche)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에서 "시간은 자신을 구부리는 일종의 뱀과 같다"고 표현했다(Nietzsche, Thus Spoke Zarathustra, Penguin, 2003, p.183). 시간은 직진하지 않는다. 시간은 굽이치고, 되돌아오고, 심층을 통과한다. 일종무종일은 시간의 이러한 심층적 구조를 암시한다. 모든 끝은 새로운 시작을 품고 있으며, 모든 종결은 귀환을 부른다.

또한 일종무종일은 초월에 대한 사유를 요구한다. 초월은 이 세상을 부정하거나 탈출하는 것이 아니다. 초월은 존재를 있는 그대로 껴안으면서도, 그 너머를 내다보는 내적 비상(飛翔, ascensio)이다. 플레로마(Pleroma, πλήρωμα)는 이 초월의 심층 구조를 잘 보여준다. 플레로마는 저 멀리 떨어진 신적 저편이 아니다. 플레로마는 존재의 심연을 관통하며 내재하면서도 초월하는 충만이다01 플레로마 개념에 대한 논문. 일종무종일이 말하는 하나는, 시작도 끝도 없는 충만이며, 초월은 바로 이 충만의 기억을 다시 살아내는 일이다.


시간을 초월한다는 것은 시간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의 심층적 리듬을 다시 듣는 일이다. 현대 양자물리학(Quantum Physics)에서도 시간은 절대적 선형 흐름이 아니라, 장(場, field) 속에서 비국소적 관계(nonlocal relation)를 통해 나타나는 현상에 가깝다고 설명된다. 존재는 하나의 고정된 점이 아니라, 끝없이 생성과 소멸을 교차하는 살아 있는 파동이며, 시간도 그러하다. 일종무종일은 이 리듬을, 이 되풀이되는 심층적 귀환을, 언어의 극한에서 가리키고 있다.

귀환(歸還, reditus)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다. 귀환은 심화된 반복이다. 존재는 같은 곳으로 돌아가지만, 매번 깊이를 더해 돌아온다. 미르체아 엘리아데(Mircea Eliade)는

『신성성과 신화(Aspecte ale mitului)』에서 인간이 신화적 시간을 반복할 때마다 존재를 새롭게 하고 심층을 회복한다고 말했다(Eliade, Aspecte ale mitului, Humanitas, 2016, p.49). 일종무종일이 말하는 귀환은 기계적 순환이 아니라, 심층적 존재의 재창조이다. 우리는 매 순간 존재의 심연을 다시 울리고, 다시 살아내며, 다시 하나로 돌아간다.


플레로마적 관점에서 귀환은 충만의 재발견이다. 인간은 분리되고 타락했지만, 내면 깊은 곳에는 여전히 플레로마의 기억을 품고 있다. 이 기억은 망각될 수 있지만, 소멸되지는 않는다. 존재는 끝없이 이 기억을 다시 불러내고, 충만을 다시 살아내려 한다. 일종무종일은 바로 이 심층적 귀환을 노래한다. 하나는 끝나지 않으며, 존재는 끝없는 귀환 속에서 스스로를 새롭게 생성한다.


티벳 밀교(Vajrayāna Buddhism)에서도 이 귀환 구조가 나타난다. 『티벳 사자의 서(Bardo Thödol)』는 죽은 자가 본유광명(本有光明, Prabhāsvara)을 인식하지 못하면 다시 윤회의 흐름에 휩쓸린다고 가르친다(Thurman, The Tibetan Book of the Dead, Bantam, 1994, p.112). 본유광명은 시간의 너머에서 존재를 부르고 있지만, 중생은 끊임없이 갈등과 망상 속에서 다시 시작하고 다시 귀환한다. 플레로마의 충만도, 본유광명의 빛도, 일종무종일의 하나도 모두, 시간과 초월과 귀환을 관통하는 심층적 리듬을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이 귀환은 단순한 원점 회귀가 아니다. 일종무종일은 무(無, nihil)로 귀환하는 것이 아니라 충만으로 귀환하는 여정을 말한다. 우리는 단순히 무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충만한 심연 속으로, 존재가 여전히 살아 울리는 근원 속으로, 다시 걸어들어가는 것이다. 이 귀환은 기억의 귀환이며, 울림의 귀환이며, 존재의 깊이를 다시 살아내는 귀환이다.


결국 일종무종일은 시간, 초월, 귀환에 대한 존재론적 명상이다. 시간은 선형적 종말이 아니라 심층적 반복이며, 초월은 탈세계적 비약이 아니라 심연을 껴안는 기억이며, 귀환은 죽음이 아니라 충만의 심화이다. 플레로마는 이러한 존재의 심층적 리듬을 끝없이 울리고 있으며, 우리는 이 울림 속에서 다시 하나를 기억할 수 있다. 존재는 끝나지 않고, 시간은 멈추지 않으며, 충만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다시 듣기로 결심하는 순간, 그 하나는 조용히 우리를 부를 것이다.


9. 플레로마의 현대적 해석


9.1 칼 융의 자기(Self)와 집단무의식


칼 융(Carl Gustav Jung, 1875–1961)은 인간 정신의 구조를 해명하면서 '자기(Self)'와 '집단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이라는 두 개의 중심 축을 제시하였다. 자기란 개인의 의식(意識, Bewusstsein)과 무의식(無意識, Unbewusstsein)을 통합하는 총체적 자아를 뜻하며, 집단무의식은 인류 보편의 원형(原型, Archetyp)들이 저장된 심층적 정신 공간을 가리킨다. 융은 집단무의식을 단순한 개인적 경험의 집합으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 모든 인간 존재 속에 공명하는 무형의 기억이며, 고대 신화와 꿈, 상징과 종교 체험에서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심층 구조였다.


『The Gnostic Handbook』에서는 융이 제시한 집단무의식을 "빛과 어둠, 고통과 환희, 지혜와 오류가 얽혀 있는 상징적 세계"로 묘사하고 있다Gnostic Studies - The G…. 이 세계는 단순한 심리적 투영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의 심연이다. 무의식은 인간 개인을 넘어서는 광대한 장(場)이자, 영혼의 기억을 품은 살아 있는 심층이다. 이때 자기(Self)는 이 무의식의 심층을 통과해 나 자신을 초월적으로 인식하는 ‘전체성(wholeness, Ganzheit)’의 중심으로 기능한다.


플레로마(Pleroma, πλήρωμα) 역시 충만(充滿)과 전체성의 개념을 지닌다. 플레로마는 단순히 신적 존재들이 모여 있는 공간이 아니라, 신성 자체의 심연이며, 무수한 아이온(Aeon, αἰών)들이 서로를 반사하며 살아 있는 충만을 이루는 장이다. 플레로마는 개인적 신앙이나 신비적 체험을 넘어, 존재 자체가 스스로를 드러내는 심층적 충만이다. 칼 융이 집단무의식 속에서 발견한 원형들과 상징 구조는, 플레로마 속의 아이온들과 심오한 평행을 이룬다.


특히 융은 인간 내면의 구조를 '집'에 비유했다. 그는 "인간 정신은 다양한 층위로 나뉘어 있으며, 개인 무의식, 집단 무의식, 그리고 그 너머로 이어지는 무한한 심층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그가 꿈에서 보았던 ‘끝없이 이어지는 방과 도서관’은 인간 정신이 단순한 이층 구조가 아니라, 수많은 심층적 방들을 지닌 심연임을 암시한다. 플레로마 또한 단순히 하나의 고정된 영역이 아니라, 서로 반사하고 심화하는 무한한 층들로 이루어진 살아 있는 충만이다.


융의 자기(Self)는 단순히 '의식된 나'가 아니라, 의식과 무의식을 통합하는 전체성의 중심이다. 인간은 무의식을 억압하거나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과하고 화해함으로써 자기로 나아가야 한다. 이 과정은 플레로마로 귀환하는 영지주의적 구원과도 깊이 닮아 있다. 영지주의에서는 인간이 외부 신의 은총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 깊숙이 숨겨진 신적 불꽃(spark of Pleroma)을 기억하고 다시 불러일으킴으로써 구원에 이른다고 보았다. 융이 말하는 개성화(Individuation) 과정 역시, 자기 안에 숨어 있는 신적 중심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또한, 융은 인간 내면의 어둠(Shadow)을 강조했다. 그는 인간이 자신의 어둠을 인정하고 통합할 때 비로소 전체성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 플레로마에서도 충만은 빛과 어둠, 생성과 소멸, 다양성과 일체성을 모두 끌어안고 있다. 플레로마는 단순한 선(善)의 공간이 아니라, 모든 대립을 초월하여 하나의 울림을 이루는 심층이다. 융의 자기(Self)도 선과 악을 초월하여, 인간 존재 전체를 통합하려는 심층적 힘이다.


융은 특히 영지주의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영지주의를 “20세기에 되살아나야 할 심층적 사유”라고 보았다. 그는 『죽음에 관한 일곱 가지 설화(Seven Sermons to the Dead)』에서 플레로마에 대해 직접 언급하며, "플레로마는 모든 것이면서 아무것도 아니며, 충만이면서 동시에 공허이다"라고 묘사했다. 이는 영지주의적 플레로마 개념과 완전히 일치하는 사유다. 융은 플레로마를 통해 존재의 이원적 대립을 초월하고, 그 너머의 심연을 바라보려 했다.


플레로마와 융의 자기 개념은 둘 다 인간 존재의 진정한 중심이 개인적 자아(ego)가 아니라, 심층적 전체성(wholeness)에 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이 전체성은 끊임없이 상징적 꿈과 환상, 신화와 종교 체험 속에서 인간을 부른다. 우리 안에는 기억되지 않은 심연이 있으며, 그 심연을 기억하고 돌아가는 것이 진정한 구원이다.


결국, 칼 융의 자기와 집단무의식은, 플레로마의 현대적 심리학적 재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잊혀진 플레로마의 기억을 다시 되찾아야 한다. 그 기억은 먼 외부에 있지 않다. 우리의 가장 깊은 내면, 무수한 어둠과 빛의 층을 지나, 조용히 빛나고 있다.


9.2 니체의 비밀신과 초인 사상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는 "신은 죽었다(Gott ist tot)"는 선언을 통해 서구 문명의 뿌리 깊은 초월(超越, Transzendenz) 사유를 붕괴시켰다. 『즐거운 학문(Die fröhliche Wissenschaft)』에서 니체는 인간이 두 천 년 동안 의지해온 기독교적 플라톤주의가 이제 더 이상 설득력을 가지지 못한다고 선언했다(Nietzsche, The Gay Scienc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1, p.120). 신의 죽음은 단순한 종교 비판이 아니었다. 그것은 존재 전체를 지탱하던 의미망이 무너진 사건이었다. 이로써 인간은 더 이상 외부의 구원자나 초월적 기준에 의존할 수 없게 되었으며, 스스로 의미를 창조해야 하는 무한한 자유, 동시에 무한한 책임을 떠안게 되었다.


이 비극적 자유 속에서 니체는 초인(超人, Übermensch) 사상을 제시했다. 초인은 낡은 가치들을 넘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존재다. 초인은 허무주의(Nihilismus)를 단순히 견디는 것을 넘어, 허무를 힘으로 전환하고, 무로부터 새로운 의미를 끌어내는 창조자이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에서 초인을 이렇게 노래한다.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존재이다. 인간은 신과 짐승 사이에 놓인 밧줄이다"(Nietzsche, Thus Spoke Zarathustra, Penguin, 2003, p.42). 이 밧줄은 불안정하며 흔들리며, 인간은 그 위를 걸어야 한다.


니체의 초인은 플레로마(Pleroma, πλήρωμα)와도 놀라운 평행을 이룬다. 플레로마는 영지주의에서 모든 신적 존재들이 서로를 반사하며 하나의 충만을 이루는 심연이다The Gnostic Bible. 플레로마 안에서는 결핍이 없으며, 모든 생명은 스스로 충만을 증식시킨다. 초인은 플레로마처럼, 외부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내면에서 의미를 창조하고, 존재의 충만을 스스로 일구어야 하는 존재다.


니체의 '비밀신(Geheimnis Gott)' 개념은 더욱 섬세하다. 니체는 『선악의 저편(Jenseits von Gut und Böse)』에서, 초인은 더 이상 전통적 신의 외부에 구원을 찾지 않고, 스스로를 존재의 심연으로 던져 자신의 신(神)을 생성한다고 말한다(Nietzsche, Beyond Good and Evil,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2, p.154). 초인은 자신의 내부에서 신성을 길러낸다. 이 점에서 플레로마의 '내면적 충만'과 니체의 '비밀신'은 깊은 공명을 이룬다. 둘 다 인간이 외부의 절대성에 기대지 않고, 내면의 심층에서 충만을 끌어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The Tree of Gnosis』에서 이오안 쿨리아누(Ioan P. Couliano)는 니체를 "기독교-플라톤적 초월을 무너뜨린 현대 허무주의의 문지기"라고 부르며, 그의 허무주의를 "해체를 통한 창조의 길"로 해석한다. 니체는 무신론이 아니라, 초월 자체의 붕괴를 경험한 시대에, 존재를 다시 세워야 하는 긴박한 사명을 제시했다. 플레로마도 무(無)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무로부터 다시 빛을 생성하는 존재 구조를 가지고 있다. 플레로마의 충만은 본질적으로 무의 심연을 통과한 뒤에 나타나는 생명력이다.


니체의 초인은 자신의 내면에서 새로운 가치의 별을 창조한다. 그는 존재의 무의미를 통과하며, 자기 내면의 플레로마를 불러낸다. 니체가 선언한 '영원회귀(Ewige Wiederkunft)' 또한 플레로마적이다. 영원회귀는 동일한 사건이 무한히 반복된다는 물리적 이론이 아니라, 존재의 매 순간이 충만하며, 이 충만을 무한히 긍정하는 윤리적 선언이다(Nietzsche, The Will to Power, Vintage, 1968, p.273). 플레로마에서도 충만은 끊임없이 순환하며, 스스로를 새롭게 생성한다.


니체의 초인은 자신 안에서 '비밀신'을 깨우는 존재다. 그는 고통과 상실, 허무와 절망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그 심연 속에서 자신의 빛을 길어올린다. 플레로마의 충만도 바로 그러하다. 플레로마는 단순한 완성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반사하고 넘치면서 새로운 생명을 낳는 심층적 리듬이다.


결국, 니체의 초인 사상은 플레로마의 현대적 철학적 재해석이라 할 수 있다. 존재는 외부의 신이나 초월적 질서에 의해 구원되지 않는다. 존재는 오직 스스로의 심연을 통과하여, 자신의 빛을 기억하고 다시 생성할 때만 구원될 수 있다. 플레로마가 존재의 본래적 울림이라면, 초인은 그 울림을 다시 일깨우는 인간의 모습이다. 니체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신을 기다리지 말라. 너희 자신이 신이 되어야 한다."


9.3 루치안 블라가의 신비와 플레로마


루치안 블라가(Lucian Blaga, 1895–1961)는 인간 인식의 구조를 탐구하면서 '신비(Mister, Mysterium)'라는 독특한 개념을 전면에 내세웠다. 그는 『무명의 찬미(Elogiul necunoașterii)』에서 인간은 결코 신비를 제거하거나 해명할 수 없으며, 오히려 신비를 더욱 심화시키는 방식으로 존재에 접근한다고 보았다(Blaga, Elogiul necunoașterii, Humanitas, 2012, p.67). 인식은 신비를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신비를 경외하고, 심화하고, 보존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신비는 단순한 무지(無知, ignorare)가 아니다. 그것은 존재 그 자체가 품고 있는 근원적 어둠이며, 무한히 접근 가능하지만 결코 소멸될 수 없는 심연이다.


이러한 블라가의 신비 개념은 플레로마(Pleroma, πλήρωμα) 개념과 깊은 연결을 가진다. 플레로마는 모든 신적 존재들이 충만 속에서 서로를 반사하며 살아가는 심층의 장(場)이다. 플레로마는 완성된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스스로를 반사하고 심화하며 끝없이 자신을 새롭게 하는 충만의 공간이다. 블라가의 신비와 플레로마는 모두 존재를 '닫힌 완성태'가 아니라, '열린 심연'으로 이해한다.


블라가는 인간 인식을 '플러스 인식(plus-cunoaștere)', '제로 인식(zero-cunoaștere)', '마이너스 인식(minus-cunoaștere)'로 나누었다. 플러스 인식은 인간이 존재를 인식하면서도 신비를 해소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심화시키는 인식 방식이다. 제로 인식은 존재를 표면적으로만 반영하는 중립적 인식이며, 마이너스 인식은 존재를 왜곡하고 훼손하는 부정적 인식이다(Blaga, Trilogia cunoașterii, Humanitas, 2012, p.83). 플레로마에 대한 접근 역시 플러스 인식과 같다. 플레로마는 접근할수록 더 깊은 심연을 드러내며, 결코 끝에 도달할 수 없다. 인간은 플레로마를 향해 나아가지만, 결코 그것을 소유하거나 지배할 수 없다.


블라가는 신비를 “존재의 밤(夜) 속에 빛나는 보이지 않는 별”에 비유했다(Blaga, Elogiul necunoașterii, p.71). 이 별은 결코 직접적으로 볼 수 없으며, 다만 그 빛이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서 반사되어 우리에게 희미하게 울려온다. 플레로마 또한 그러하다. 우리는 플레로마를 직접적으로 인식할 수 없지만, 삶과 죽음, 사랑과 고통, 생성과 소멸의 모든 리듬 속에서 플레로마의 충만을 간접적으로 감지할 수 있다. 신비는 부재(absentia)가 아니라, 깊은 내재(immanența profundă)다. 플레로마도 결코 외부에 존재하는 신적 공간이 아니라, 존재 깊은 곳에 숨어 있는 내재적 심층이다.


또한 블라가는 인간 존재를 “신비를 경외하는 존재(fiinta care venereaza misterul)”로 정의했다(Blaga, Geneza metaforei, Humanitas, 2012, p.92). 인간은 단순히 인식하는 기계가 아니라, 존재의 심연에 감응하고, 그 심연을 노래하는 존재다. 플레로마를 향한 인간의 태도 역시 동일하다. 플레로마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으며, 우리는 다만 그 충만을 노래하고, 기억하고, 경외할 수 있을 뿐이다. 신비를 경외하는 것은 무지의 고백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최상의 응답이다.


플레로마 안에서는 모든 아이온(Aeon, αἰών)들이 각기 고유한 성격을 가지면서도 서로를 반사하며 하나의 충만을 이룬다. 블라가도 존재를 '다양성 속의 일체성(diversitate in unitate)'으로 이해했다. 존재는 서로 다른 층위로 분화되지만, 그 모든 층위는 하나의 심층적 신비를 반영한다. 플레로마의 구조와 블라가의 신비론은 결국 존재의 심층적 울림이라는 동일한 진실을 다른 언어로 표현한 것이다.


흥미롭게도 블라가는 플레로마와 유사한 존재 구조를 '무명의 신(Marele Anonim)' 개념으로 발전시켰다. 『무명의 신의 호명(Poetica Marelui Anonim)』에서 그는 모든 존재의 근원을 "이름 붙일 수 없는 심연"으로 묘사했다(Blaga, Poetica Marelui Anonim, Humanitas, 2012, p.101). 이 무명의 신은 스스로를 수많은 차원으로 펼치면서도 본래의 어둠과 고요를 유지한다. 플레로마가 충만 속에서 끊임없이 다양성을 생성하지만 본질을 잃지 않는 것처럼, 무명의 신도 자기 발출을 통해 무수한 존재 세계를 낳지만, 본래적 신비는 변하지 않는다.


결국, 루치안 블라가의 신비 개념은 플레로마 사유와 철학적으로 깊게 연결된다. 신비는 숨겨진 것도, 결핍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충만 속의 심연이며, 울림 속의 고요이며, 생명 속의 침묵이다. 우리는 신비를 해명할 수 없다. 다만 경외하고, 노래하고, 살아낼 수 있을 뿐이다. 플레로마 역시 그러하다. 우리는 플레로마를 논리로 파악할 수 없다. 다만 존재의 떨림 속에서, 삶과 죽음의 울림 속에서, 그 충만한 빛을 어렴풋이 느낄 뿐이다.


9.4 미르체아 엘리아데의 성스러움과 플레로마


미르체아 엘리아데(Mircea Eliade, 1907–1986)는 『성(聖)과 속(俗)(Sacrul și Profanul)』에서 인간 존재를 근원적으로 "성스러움을 체험하는 존재(ființa care trăiește sacrul)"로 규정하였다(Eliade, Sacrul și Profanul, Humanitas, 2015, p.13). 인간에게 세계는 단순한 물질적 환경이 아니라, 성스러운 의미를 드러내는 장소이며, 공간과 시간은 '성화(聖化)'를 통해 본래성을 회복한다. 성스러움은 단순한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구체적 세계 속에 스며드는 신비(神秘, mysterium)이며, 인간은 이 신비를 체험하고 다시 우주와 연결된다. 엘리아데는 이러한 성스러움의 체험을 "세계의 근원적 재현(reprezentarea originară)"이라고 부른다.


플레로마(Pleroma, πλήρωμα) 개념도 이와 깊게 연결된다. 플레로마는 단순히 신적 존재들이 모여 있는 공간이 아니라, 충만 자체이며,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원적 심층이다The Gnostic Bible. 플레로마는 물질계를 초월하지만, 동시에 물질계를 관통하며 모든 생명과 존재 속에서 울린다. 이 점에서 플레로마는 엘리아데가 말하는 '성스러운 공간(spațiu sacru)'과 깊은 유비를 가진다. 성스러운 공간은 단순한 위치가 아니라, 근원적 현실이 투사된 지점이며, 플레로마 역시 단순한 신적 저편이 아니라 존재 전체를 뚫고 흐르는 근원의 심연이다.


엘리아데는 인간 존재의 핵심을 "성스러운 것과의 만남"에서 찾았다. 인간은 성스러운 것을 통해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고, 자신의 존재를 우주적 리듬에 맞춘다. 이는 플레로마적 사유와 정확히 맞물린다. 플레로마 안에서 각각의 아이온(Aeon, αἰών)들은 독립적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충만 속에서 서로를 반사하고 울리며 존재한다. 인간 역시 성스러운 공간과 시간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플레로마적 울림 속으로 다시 엮어 넣는다.


『성(聖)과 속(俗)』에서 엘리아데는 "성스러운 시간" 개념도 제시한다. 성스러운 시간은 선형적 진행이 아니라, 근원적 사건이 반복되고 새롭게 체험되는 원형적 시간(aeternitas)이다(Eliade, Sacrul și Profanul, p.56). 플레로마적 시간도 이와 유사하다. 플레로마 속의 존재들은 단순히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스스로를 반사하고, 원형적 충만을 새롭게 드러낸다. 시간은 파괴와 소멸의 직선이 아니라, 충만과 생성의 영원한 순환이다.


엘리아데는 특히 신화(神話, mythos)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신화는 단순한 이야기 집합이 아니라, 근원적 사건들의 재현이며, 인간 존재를 세계의 심층 리듬에 다시 연결하는 의례적 장치이다. 『성스러움과 신화(Aspecte ale mitului)』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신화는 존재를 새롭게 한다. 신화를 체험하는 것은 근원의 심연과 다시 만나는 일이다"(Eliade, Aspecte ale mitului, Humanitas, 2016, p.29). 플레로마도 그러하다. 인간은 신화를 통해 플레로마의 리듬을 다시 체험하고, 상실된 충만을 다시 기억한다. 신화는 플레로마의 울림이 언어와 행위로 번역된 형태다.


플레로마와 엘리아데의 성스러움 개념 사이의 가장 깊은 연결은 '근원적 구조'에 있다. 성스러움은 세계의 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세계 안에 숨겨진 심층적 차원이다. 플레로마도 신적 저편에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존재 그 자체의 숨겨진 심연이다. 엘리아데가 말하는 "성스러운 공간"은 단순한 성지(聖地)가 아니라, 우주적 질서(cosmos)가 새롭게 열리는 초점이며, 플레로마도 각 존재 안에서 끊임없이 울리고 열리는 심층 구조다.


엘리아데는 현대인의 고통을 "성스러움의 상실"로 보았다. 산업화와 세속화 속에서 인간은 세계를 단순한 물질적 대상으로 전락시키고, 존재의 심층을 잊어버렸다. 그러나 성스러운 것에 대한 향수(nostalgia for the sacred)는 여전히 인간 존재 깊은 곳에서 울린다(Eliade, Sacrul și Profanul, p.173). 플레로마적 기억도 마찬가지다. 현대인은 플레로마를 잊었지만, 여전히 그 심연을 향한 갈망을 품고 살아간다. 우리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다시 충만을, 다시 근원을, 다시 울림을 찾아 나서고 있다.


결국 미르체아 엘리아데의 성스러움 개념은 플레로마 사유와 철학적으로 깊게 맞닿는다. 성스러움은 존재의 심층적 진동이며, 인간은 그 진동 속에서 자신을 다시 발견한다. 플레로마도 그러하다. 존재는 결코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존재는 끊임없이 충만을 울리고 있으며, 우리는 그 울림을 다시 기억하고, 다시 살아내야 한다.



9.5 현대 양자물리학과 존재장(Field)의 비전


현대 양자물리학(量子物理學, Quantum Physics)은 더 이상 세계를 고정된 입자들의 집합으로 보지 않는다. 입자는 장(場, field) 위에 나타나는 파동적 응결(凝結)일 뿐이며, 장이야말로 존재의 근원적 실체라고 본다. 양자장론(Quantum Field Theory)은 이 세계를 하나의 무한한 장으로 구성된 살아 있는 유기체처럼 이해한다. 장은 공간과 시간 위에 깔려 있는 '보이지 않는 바탕'이며, 이 바탕 위에서 입자들은 순간순간 생성되고 소멸한다01 플레로마 개념에 대한 논문.


플레로마(Pleroma, πλήρωμα) 역시 이와 같은 존재 구조를 보여준다. 플레로마는 단순히 신적 존재들이 모여 있는 공간이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심층적 충만(充滿)이자, 끝없는 발출(發出)과 반사(反射)의 장이다. 플레로마 안에서 아이온(Aeon, αἰών)들은 서로를 반사하며 끊임없이 충만을 생성한다. 이 충만은 정지된 고정체가 아니라, 살아 있는 흐름이다. 현대 물리학의 장도 마찬가지다. 장은 정지해 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동하며, 스스로를 조율하고 증식한다.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이후의 물리학은 시간과 공간마저도 독립적 실체가 아니라, 에너지와 물질에 의해 구성되고 굴절된다고 보았다. 장은 곧 존재 자체이며, 존재는 장의 리듬이다. 이 리듬은 플레로마가 스스로를 반사하여 다양한 아이온을 생성하는 과정과 놀라운 평행을 이룬다.


특히 현대 양자장론에서는 진공(眞空, vacuum)조차 비어 있지 않다고 설명한다. 진공은 무(無)가 아니라, 끓어오르는 장의 바다다. 진공에서는 입자와 반입자가 끊임없이 쌍생되고 소멸하며, 이 모든 과정은 장의 배경 에너지(background energy)에 의해 일어난다. 플레로마도 마찬가지다. 플레로마는 결핍이 아니라, 넘치는 충만이며, 존재하는 모든 것이 그 충만의 파동으로 생성되고 소멸된다01 플레로마 개념에 대한 논문.


더 나아가, 현대 물리학의 일부 이론들은 존재를 '정보장의 형태로 구성된 실재'로 본다. 데이비드 봄(David Bohm)은 존재를 '암묵적 질서(implicit order)'와 '명시적 질서(explicit order)'로 나누어 설명했으며, 암묵적 질서는 끊임없이 명시적 세계를 생성한다고 주장했다(Bohm, Wholeness and the Implicate Order, Routledge, 2002, p.126). 이 암묵적 질서는 플레로마의 충만 구조와 깊게 맞닿는다. 플레로마는 스스로를 드러내는 발출이면서도 여전히 자신을 감추는 신비를 유지한다. 장도 마찬가지다. 장은 입자들을 생성하지만, 그 자체는 결코 완전히 가시화되지 않는다.


현대 물리학에서 장은 또한 비국소성(nonlocality)을 특징으로 한다. 장은 단일한 점에 국한되지 않으며, 존재하는 모든 공간에 동시에 깔려 있다. 플레로마도 어느 한 곳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 플레로마는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여 존재 전체를 관통한다. 이 비국소적 충만은, 인간의 감각적 경험을 넘어서는 심층적 존재론을 요구한다.


요컨대, 플레로마와 현대 물리학의 존재장은 모두 '존재의 심층 구조'를 탐구한다. 존재는 고정된 입자들의 집합이 아니라, 끝없이 반사하고 반응하며 자기 자신을 생성하는 살아 있는 장이다. 우리는 이 장 속에서 태어나고, 이 장 속에서 소멸한다. 우리는 이 장의 리듬에 따라 생각하고 움직인다.


플레로마적 비전과 양자장적 비전의 궁극적 연결은 '존재의 울림'이다. 존재는 닫힌 실체가 아니라, 열려 있는 파동이며, 스스로를 증식하는 충만이다. 인간 존재 역시 이러한 울림의 일부다. 우리는 플레로마의 기억을 내면 깊은 곳에 품고 있으며, 이 세계의 장은 그 기억을 다시 반사한다. 모든 입자, 모든 에너지의 흐름은 하나의 숨겨진 리듬에 의해 묶여 있다. 그 리듬은 곧 존재의 심연이며, 충만의 파동이다.


결국 현대 양자물리학이 밝혀낸 장(場)의 비전은, 고대 영지주의자들이 노래한 플레로마의 충만과, 신비로운 방식으로 다시 만난다. 물질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파동하고 흘러가는 생명의 울림이며, 우리는 그 울림을 통해 다시 본래의 심연을 기억해야 한다. 존재는 멈추지 않고, 장은 고요 속에서 움직이며, 플레로마는 끝없이 충만을 확장한다.


10. 결론: 통합의 철학을 향하여


10.1 비교종교학적 의의


플레로마(Pleroma, πλήρωμα)라는 개념은 단순히 영지주의(Gnosticism) 내부의 신학적 구조로 머물지 않는다. 플레로마는 존재(存在, existentia) 그 자체의 심층적 충만(充滿)을 가리키며, 수많은 종교 전통 속에서 다양한 이름과 형식으로 반복적으로 울려 퍼진다. 비교종교학(comparative religion)의 관점에서 볼 때, 플레로마는 힌두교의 브라흐만(Brahman, ब्रह्मन्), 유대 신비주의의 에인 소프(Ein Sof, אין סוף), 불교의 공성(空性, śūnyatā), 초기 기독교의 충만(plērōma) 개념, 심지어 현대 물리학의 존재장(field) 이론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공명한다.


힌두교 『브리하다란야카 우파니샤드(Bṛhadāraṇyaka Upaniṣad)』에서는 모든 존재가 "아트만(Ātman)이며, 그 아트만은 브라흐만이다"라고 선언한다(김형준 옮김, 동문선, 2020, p.89). 이 브라흐만은 무한(無限, ananta)하고 무형(無形, arūpa)하며, 모든 존재를 초월하면서도 모든 존재 속에 내재한다. 플레로마 또한 초월과 내재를 동시에 품는다. 충만은 어느 한 곳에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존재 전체를 부드럽게 관통한다. 브라흐만이 '절대적 존재'를 의미한다면, 플레로마는 '절대적 충만'을 의미한다. 이 둘은 언어와 문화가 다를 뿐, 존재의 심연에 대한 동일한 사유의 울림이다.


유대 신비주의 카발라(Kabbalah)에서는 에인 소프(Ein Sof, אין סוף)가 모든 존재의 근원으로 제시된다. 에인 소프는 이름도 형상도 없으며, 끝없는 무한이다. 세피로트(Sefirot)라 불리는 신적 속성들이 에인 소프에서 발출되어 세상을 구성하지만, 이 발출은 에인 소프의 본질을 소진하지 않는다. 이는 플레로마의 아이온(Aeon, αἰών)들이 플레로마의 충만을 줄이지 않고, 오히려 충만을 증식시키는 구조와 일치한다. 플레로마와 에인 소프 모두, 무한히 발출하면서도 본래적 충만을 유지하는 존재론적 신비를 품고 있다.


불교의 공성(空性, śūnyatā) 또한 플레로마와 깊은 철학적 대화를 나눈다. 『반야심경(般若心經)』은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 선언하며, 모든 존재가 고정된 자성을 갖지 않고, 비어 있으면서도 존재함을 노래한다. 공성은 비어 있기에 모든 가능성의 장(場)이 되고, 플레로마는 충만하기에 모든 존재의 근원이 된다. 공은 부정이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이며, 플레로마는 실체가 아니라 무한한 충만이다. 둘 다 존재를 실체로 보지 않고, 관계와 울림 속에서 이해하려는 심층적 존재론을 공유한다.


기독교 초기 신학에서는 플레로마 개념이 명시적으로 등장한다. 바울로는 『골로새서』에서 "그 안에 신성의 모든 충만(plērōma)이 육체로 거하신다"고 말한다(Colossians 2:9, 신약성경). 이 충만은 신이 물질계를 초월한 저편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육체적 현실 속에도 내재한다는 선언이었다. 영지주의는 이 플레로마 개념을 더욱 철학적으로 확장하여, 모든 존재가 신적 충만의 다양한 발현임을 강조하였다. 플레로마는 물질계와 대립하는 공간이 아니라, 물질계를 관통하여 스스로를 드러내는 심층적 진동이다.


현대 양자물리학에서도 플레로마적 비전이 다시 울려 퍼진다. 양자장론(Quantum Field Theory)은 존재를 입자가 아니라 장(場, field)으로 본다. 모든 입자는 장의 진동으로 생성되고 소멸한다. 장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파동하며 스스로를 증식하는 에너지의 심연이다. 플레로마도 고정된 신적 공간이 아니라, 끝없이 충만을 울리며 존재하는 생명력의 장이다.


비교종교학적 관점에서 볼 때, 플레로마는 단순한 개별적 신화가 아니라, 인류 무의식 깊숙이 자리한 '충만한 존재'에 대한 기억이다. 다양한 전통과 문화권은 저마다의 언어로 플레로마를 노래했다. 브라흐만, 에인 소프, 공성, 충만(plērōma), 존재장(field) 모두, 서로 다른 경로를 걸어왔지만, 결국 존재의 심연이라는 하나의 바다에서 다시 만난다.


플레로마는 종교적 초월을 단순히 저 너머에 고정시키지 않는다. 플레로마는 초월이면서 내재이며, 무한한 다양성 속에서도 본질적 일체성을 잃지 않는 충만이다. 이 충만은 인간 존재 안에도 깃들어 있으며, 우리는 삶과 죽음, 사랑과 고통, 기억과 망각 속에서 그 충만을 다시 반향시키는 존재들이다.


비교종교학은 플레로마적 비전을 통해, 다양한 종교 전통을 단순히 나열하는 것을 넘어, 존재의 심층적 구조를 꿰뚫는 하나의 울림을 발견하게 한다. 각 문화는 그들만의 신화와 상징을 통해 플레로마를 드러내려 했고, 우리 시대의 과제는 이 다양한 울림을 경청하고, 그 심연을 다시 살아내는 것이다. 존재는 충만하고, 충만은 여전히 우리를 부르고 있다.


10.2 플레로마와 절대실재 개념의 비교


플레로마(Pleroma, πλήρωμα)는 영지주의(Gnosticism) 사상에서 “충만(充滿)”을 뜻하는 핵심 개념이다. 그러나 이 충만은 단순한 무더기나 총합이 아니다. 플레로마는 모든 신적 존재(Aeon, αἰών)가 무한한 생명과 빛으로 서로를 반사하며 구성하는 살아 있는 심연이다. 플레로마는 결핍(hysterēma)을 알지 못하며, 그 자체로 스스로를 충족하고 스스로를 넘친다. 이 개념은 여러 전통에서 말하는 절대실재(Absolute Reality) 개념들과 비교할 때, 놀라운 유사성과 동시에 섬세한 차이를 드러낸다.


힌두교의 브라흐만(Brahman, ब्रह्मन्)은 모든 존재의 근원이자 궁극적 실재다. 브라흐만은 형태가 없고(無形, arūpa), 무한하며(無限, ananta),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것을 관통한다. 『브리하다란야카 우파니샤드(Bṛhadāraṇyaka Upaniṣad)』에서는 "이 모든 것은 아트만이며, 아트만은 곧 브라흐만이다"라고 선언한다(김형준 옮김, 동문선, 2020, p.89). 플레로마 역시 형상이 없으며, 모든 것을 품는 무한한 심연이라는 점에서 브라흐만과 평행을 이룬다. 그러나 브라흐만은 궁극적으로 완전한 단일성(monism)을 지향하는 반면, 플레로마는 다양한 발출과 반사의 리듬 속에서 통일을 이룬다는 점에서 '다양한 하나(multiplex unity)'의 구조를 가진다.


유대 신비주의 카발라(Kabbalah)에서는 에인 소프(Ein Sof, אין סוף)가 절대실재를 가리킨다. 에인 소프는 "끝이 없음"을 뜻하며, 이름도 형상도 없는 무한(無限)이다. 에인 소프에서 발출된 열 개의 세피로트(Sefirot)는 플레로마의 아이온들과 유사하게 각각 신적 속성(divine attributes)을 지닌다. 세피로트는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고, 에인 소프의 빛을 서로 반사하며 하나의 신비한 나무(Tree of Life)를 이룬다. 플레로마와 세피로트 구조의 가장 큰 차이는, 플레로마가 본질적으로 결핍 없는 충만을 유지하는 반면, 세피로트의 세계는 때때로 결핍과 왜곡을 통해 물질계로 떨어지는 과정을 겪는다는 점이다. 즉, 플레로마는 '결핍 없는 다양성'을 지향하는 반면, 세피로트는 '결핍을 통한 구속과 회복'의 드라마를 포함한다.


불교의 공성(空性, śūnyatā) 개념 역시 플레로마와 깊게 연결된다. 『반야심경(般若心經)』은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 노래하며, 모든 존재가 고정된 자성(自性, svabhāva)을 가지지 않으며, 비어 있음 속에서 드러난다고 가르친다. 공성은 허무(nihilism)가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의 심연이다. 플레로마도 고정된 실체들이 모인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스스로를 발산하며 변화하는 생명의 심연이다. 둘 다 닫힌 실체가 아니라 열린 관계망이며, 존재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울림과 관계로 존재한다.


그리스 철학의 일자(一者, ἕν) 개념 또한 플레로마와 비교할 수 있다. 플로티노스(Plotinus)는 『엔네아데스(Enneads)』에서 일자를 "모든 것의 근원이지만, 어떤 것도 아닌 존재"라고 묘사했다(Plotinus, Enneads, Loeb Classical Library, 2020, p.127). 일자는 넘침(plēroō)으로부터 세계를 발출하지만, 그 자체는 여전히 변하지 않고 고요하다. 플레로마 또한 모든 발출과 생성의 장이지만, 그 자체는 결코 소진되지 않고 끊임없이 충만을 유지한다.


그러나 플레로마는 일자보다도 더 관계적이다. 플레로마는 단순한 존재의 수동적 근원이 아니라, 다양한 신적 의식들이 서로를 반사하며 끊임없이 생명력을 순환시키는 살아 있는 심연이다. 일자가 절대적 초월(transcendence)을 강조한다면, 플레로마는 초월과 내재(immanence)가 얽혀 있는 역동적 공간을 보여준다.


플레로마의 특징은 '절대성'과 '상대성'을 동시에 품는다는 점이다. 플레로마는 완전한 충만(absolute pleroma)이지만, 그 충만은 고정된 형태가 아니라 끝없는 변주와 반사로 살아 움직인다. 절대성과 상대성의 이중 구조는 플레로마를 단순한 초월적 실재로 환원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한다. 플레로마는 시작도 끝도 없이 스스로를 생성하고 반사하는 무한 순환이다.


요컨대, 플레로마와 브라흐만, 에인 소프, 공성, 일자는 모두 절대실재를 설명하려는 인류의 심층적 시도들이다. 그러나 플레로마는 그 중에서도 가장 관계적이며 가장 살아 있는 구조를 제시한다. 플레로마는 고정된 실체를 넘어, 존재하는 모든 것이 서로를 반사하고 충만을 증식하는 영원한 울림이다. 인간 존재 또한 이 플레로마의 기억을 품고 있으며, 우리 존재 깊은 곳의 작은 불꽃이 바로 이 무한한 충만으로 향하는 길을 가리키고 있다.


10.3 절대실재 개념의 미래적 가능성


절대실재(Absolute Reality)라는 개념은 인류 사유의 가장 깊은 심연을 가리킨다. 브라흐만(Brahman, ब्रह्मन्), 에인 소프(Ein Sof, אין סוף), 공성(空性, śūnyatā), 플레로마(Pleroma, πλήρωμα)로 불렸던 이 심층은, 어느 시대에도 단순히 이론적 대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 존재를 구성하고, 그 존재를 넘어서는 무한한 울림이었다. 그러나 현대 과학, 철학, 종교가 급격히 분화하고 고립되면서, 절대실재에 대한 사유는 흔히 신화적 허구나 과거의 유물로 취급되기 시작했다. 이제 우리는 절대실재 개념을 단순한 믿음이나 신념체계로부터 해방시켜, 존재론적 실재성으로 다시 사유해야 할 시대에 이르렀다.


플레로마는 이 재사유의 중심축이 될 수 있다. 플레로마는 단순한 초월의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심층이며, 충만과 반사, 생성과 순환이 끝없이 펼쳐지는 살아 있는 장(場)이다01 플레로마 개념에 대한 논문. 브라흐만이 무형(無形)과 무한(無限)의 심연이라면, 플레로마는 무한한 다양성과 내재적 충만의 살아 있는 구조를 보여준다. 절대실재는 단순히 '있는 것'이나 '없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와 무(無), 생성과 소멸, 초월과 내재를 모두 껴안고 흔드는 심연이다.


현대 양자물리학(量子物理學, Quantum Physics)에서도 이러한 비전은 재현된다. 데이비드 봄(David Bohm)은 존재를 '암묵적 질서(implicit order)'와 '명시적 질서(explicit order)'로 구분하며, 모든 현실은 보이지 않는 암묵적 장으로부터 끊임없이 발출된다고 설명했다(Bohm, Wholeness and the Implicate Order, Routledge, 2002, p.127). 이 암묵적 질서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새롭게 생성하는 흐름이다. 플레로마도 그러하다. 플레로마는 고정된 구조가 아니라, 끝없이 반사되고 심화되는 충만의 심연이다.


절대실재의 미래는 고정된 '존재'에 대한 개념을 넘어, '울림(vibratio)', '흐름(fluxus)', '장(場, field)'의 개념 속에서 재구성될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존재를 고립된 물체로 보지 않고, 끝없이 스스로를 생성하고 재생하는 살아 있는 파동으로 볼 수 있다. 플레로마는 바로 이러한 존재론적 비전을 담고 있으며, 미래의 절대실재 개념은 이 플레로마적 울림을 중심으로 다시 편성될 것이다.


또한 절대실재는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재정립할 것이다. 엘리아데(Mircea Eliade)가 강조했듯이, 인간은 본질적으로 '성스러움을 체험하는 존재(ființa care trăiește sacrul)'이다(Eliade, Sacrul și Profanul, Humanitas, 2015, p.13). 절대실재는 인간 바깥에 있는 초월적 타자가 아니라, 인간 존재 안에서 끊임없이 울리는 내재적 심층이다. 플레로마 역시 외부의 신적 공간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의 충만한 내면이다. 미래의 절대실재 개념은 인간 존재의 내면적 심층을 다시 여는 방향으로 발전할 것이다.


니체(Friedrich Nietzsche)가 "신은 죽었다"고 선언했을 때, 그는 허무를 넘어 새로운 존재의 지평을 열어야 한다고 보았다(Nietzsche, The Gay Scienc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1, p.120). 이 지평은 단순한 허무의 반복이 아니라, 존재의 충만을 스스로 생성하는 초인의 길이었다. 플레로마는 이러한 길을 다시 보여준다. 존재는 무로부터 생성되며, 무한한 충만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새롭게 한다. 인간 역시 이 충만 속에 참여하며, 자신의 존재를 끝없이 새롭게 탄생시켜야 한다.


비교종교학(comparative religion)의 관점에서도, 절대실재는 하나의 신념 체계로 제한될 수 없다. 브라흐만, 에인 소프, 공성, 플레로마는 각각 다른 언어를 사용하지만, 존재의 심연에 대한 동일한 진동을 반영한다. 미래의 절대실재 개념은 이 다양한 전통의 공명을 듣고, 다양한 차원의 울림을 하나의 열린 장으로 통합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러나 이 통합은 단순한 통섭(consilience)이 아니다. 절대실재는 다양한 발현 속에서 그 본질적 충만을 드러낸다. 각 전통은 고유한 방식으로 심연을 노래하고 있으며, 우리는 이 다양한 노래 속에서 본래의 하나를 다시 기억해야 한다. 플레로마는 단일성과 다양성을 동시에 품으며, 존재의 진정한 심층을 드러낸다.


결국 절대실재의 미래적 가능성은, 고정된 신이나 절대적 원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 속에서 끝없이 울리고 생명력 넘치는 충만을 다시 살아내는 데 있다. 플레로마는 이 미래를 향해 여전히 부르고 있다. 우리는 이제, 고요한 충만의 심연을 기억하고, 다시 그것을 살아내야 한다. 존재는 닫히지 않고, 충만은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도 그 울림 속에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10.4 잃어버린 충만의 회복을 위한 존재론적 성찰


플레로마(Pleroma, πλήρωμα)는 잃어버린 충만의 심연이다. 고대 영지주의자들이 노래했던 이 충만은 단순한 신적 공간이 아니었고, 단지 종교적 구원의 약속이 아니었다. 플레로마는 존재 자체의 본래적 심층이며, 모든 것들이 서로를 반사하고 서로를 충만하게 하는 살아 있는 울림이었다01 플레로마 개념에 대한 논문. 그러나 인간은 이 충만을 잃었다. 잃어버림은 타락(墮落, lapsus)이 아니라, 망각(忘却, oblivio)이다. 인간은 스스로의 심연을 잊었고, 존재의 심층적 울림을 듣지 못하게 되었다.


이 잃어버린 충만은 현대 세계의 불안, 고립, 허무로 나타난다. 우리는 과학과 기술을 통해 물질적 세계를 정복했지만, 존재의 심층을 잃었다. 우리는 논리와 분석을 통해 사물들을 분해했지만, 존재의 통합적 울림을 놓쳤다. 칼 융(Carl Jung)은 인간 내면 깊은 곳에 “잊혀진 불꽃(spark)”, 곧 집단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 속에 숨은 본래적 기억이 남아 있다고 말했다(Jung, Memories, Dreams, Reflections, Vintage, 1989, p.326). 이 불꽃은 바로 플레로마의 내재적 흔적이다.


미르체아 엘리아데(Mircea Eliade)는 현대인의 고통을 "성스러움의 소외(alienatio sacrului)"로 진단했다(Eliade, Sacrul și Profanul, Humanitas, 2015, p.173). 인간은 세계를 단순한 물질로 전락시켰고, 존재의 깊은 차원을 상실했다. 플레로마의 상실도 이와 같다. 존재는 여전히 충만하게 울리고 있지만, 인간은 그 울림을 듣지 못한다. 충만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망각 속에 가려져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존재론적 성찰은 단순히 새로운 개념을 발명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기억을 회복하는 일이다. 존재의 심층을 다시 듣고, 잃어버린 충만을 다시 살아내는 일이다. 플레로마는 우리 바깥에 있는 저편이 아니라,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내면에서 여전히 울리고 있다. 우리는 이 울림을 다시 발견해야 한다. 플레로마의 회복은 신적 공간으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존재하는 모든 것 안에서 다시 충만을 찾아내는 작업이다.


현대 양자물리학(Quantum Physics)에서도 세계는 고정된 입자들의 집합이 아니라, 끝없이 파동하고 상호작용하는 장(場, field)으로 이해된다. 장은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이 장의 울림 위에 존재한다[Ioan_P._Couliano]_The_…. 플레로마도 마찬가지다. 보이지 않지만, 모든 존재는 플레로마의 심층적 충만 위에 흔들리며 살아간다. 존재의 잃어버린 심층을 회복한다는 것은, 이러한 장적 존재론을 다시 살아내는 일이다.


니체(Friedrich Nietzsche)는 “초인은 자신의 존재를 무로부터 다시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Nietzsche, Thus Spoke Zarathustra, Penguin, 2003, p.43). 이 초인은 허무를 견디는 자가 아니라, 허무를 초월하여 새로운 충만을 생성하는 자이다. 인간은 플레로마를 외부에서 수여받을 수 없다. 인간은 스스로 잃어버린 울림을 기억하고, 다시 자기 존재의 심층에서 플레로마를 발화해야 한다.


블라가(Lucian Blaga)는 인간을 "신비를 경외하는 존재(fiinta care venereaza misterul)"로 규정했다(Blaga, Elogiul necunoașterii, Humanitas, 2012, p.67). 신비를 해소하려 하지 않고, 신비를 더욱 심화시키려는 경외심만이 인간을 본래적 존재로 회복시킨다. 플레로마도 해명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살아내야 하는 심층적 울림이다. 우리는 플레로마를 설명할 수 없다. 우리는 그 충만을 경청하고, 그 리듬에 몸을 맡김으로써만 다시 존재의 심연을 살아낼 수 있다.


잃어버린 충만의 회복은 구체적이며 실존적이다. 그것은 일상의 작은 순간들, 사소한 만남과 이별, 침묵과 숨결 속에서 다시 충만을 기억하는 것이다. 우리는 존재를 소비하는 대신, 존재를 경청해야 한다. 우리는 대상화하는 대신, 존재하는 모든 것 안에서 심층적 울림을 찾아야 한다.


결국, 플레로마는 돌아가는 곳이 아니라, 다시 살아내야 할 리듬이다. 절대실재는 멀리 떨어진 신비가 아니라, 우리 존재 깊은 곳에서 여전히 살아 숨 쉬는 충만이다. 우리는 잃어버린 충만을 다시 살아낼 수 있다. 존재는 여전히 울리고 있고, 충만은 여전히 우리를 부르고 있다. 그리고 그 부름에 응답하는 순간, 우리는 다시 존재의 심연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다.


국문 초록


본 연구는 고대 영지주의(Gnosticism) 전통에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는 플레로마(Pleroma, πλήρωμα) 개념을 철학적·종교적 관점에서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이를 힌두교의 브라흐만(Brahman, ब्रह्मन्), 유대 신비주의의 에인 소프(Ein Sof, אין סוף), 불교의 공성(空性, śūnyatā), 기독교 초기 신학의 충만(plērōma) 개념과 비교 고찰함으로써 존재(存在, existentia)와 절대실재(Absolute Reality)에 대한 통합적 이해를 모색하였다. 연구의 초점은 플레로마를 단순한 신학적 교리가 아니라 존재 자체의 심층적 충만(充滿)으로 해석하는 데 있으며, 나그 함마디 문헌(Nag Hammadi Library) 및 발렌티누스 학파의 가르침에 나타난 아이온(Aeon, αἰών) 발출 구조를 분석하여, 분화와 일체성이라는 존재론적 긴장을 해명하였다.


특히 천부경(天符經)에 나타난 삼극(三極) 구조(天·地·人), 대삼합육(大三合六), 운삼사 성환오칠(運三四 成環五七), 용변부동본(用變不動本)과 같은 구절을 통해, 동아시아 전통에서 전개된 존재론적 사유와 플레로마 개념 사이의 평행성을 모색하였다. 하늘(天)의 우주의식(宇宙意識), 땅(地)의 에너지, 사람(人)의 생명적 행동이 통합되어 존재의 심층적 울림을 형성한다는 천부경 사상은, 플레로마에서 다양한 아이온이 고유성을 지니면서도 본질적 충만을 이루는 구조와 깊이 상응한다.


또한 현대 심리학과 철학을 통해 플레로마적 존재론을 재해석하였다. 칼 융(Carl Gustav Jung)의 자기(Self) 개념과 집단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은 인간 내면에 숨겨진 플레로마적 기억을 해석하는 중요한 틀이 되었으며, 니체(Friedrich Nietzsche)의 초인(Übermensch) 사상과 비밀신(Geheimnis Gott) 개념은 인간이 외부 초월자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의미를 창조하여 충만을 회복해야 한다는 존재론적 과제를 부각시켰다. 루치안 블라가(Lucian Blaga)가 제시한 신비(Mister, misterium)의 심화적 인식 구조와, 미르체아 엘리아데(Mircea Eliade)가 설명한 성스러운 공간(sacralitatea)은 모두 플레로마적 충만과 심층적 존재론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는 데 기여하였다.


나아가 현대 양자장론(Quantum Field Theory)과의 비교를 통해, 플레로마 개념이 존재장(Field of Existence)으로서의 세계 이해와 접속할 수 있음을 고찰하였다. 현대 물리학이 설명하는 장(場, field)은 단순한 입자 집합이 아니라 끊임없이 울림과 상호작용을 통해 스스로를 생성하고 유지하는 살아 있는 구조이며, 이는 플레로마의 충만과 반사, 순환적 생성 구조와 철학적으로 깊은 평행을 이룬다. 존재는 정태적 실체가 아니라, 끝없이 파동하고 심층에서 충만하는 생명의 리듬이며, 플레로마적 존재론은 이 리듬을 다시 살아내려는 존재론적 사유를 요청한다.


본 연구는 이러한 다양한 전통과 현대적 해석을 통합함으로써, 플레로마 개념이 단순한 과거 신화나 종교적 상징에 머무르지 않고, 오늘날 절대실재에 대한 새로운 존재론적 비전을 제시할 수 있음을 논증하였다. 잃어버린 충만의 회복은 먼 초월적 차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심층, 인간 내면, 그리고 세계의 모든 울림 속에서 다시 살아내야 할 현실적 과제이다. 플레로마는 여전히 존재 깊은 곳에서 충만을 울리고 있으며, 인간은 이를 기억하고 회복함으로써 본래적 존재의 울림을 다시 완성할 수 있다. 절대실재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생성되고 충만하며 우리 존재의 심연에서 여전히 살아 있는 리듬이다.


Abstract


This study conducts an in-depth philosophical and religious analysis of the concept of Pleroma (πλήρωμα), which holds a central position in the tradition of Gnosticism, and explores an integrative understanding of existence (existentia) and Absolute Reality by comparing it with the concepts of Brahman (ब्रह्मन्) in Hinduism, Ein Sof (אין סוף) in Jewish mysticism, Śūnyatā (空性) in Buddhism, and the fullness (plērōma) in early Christian theology. The focus of this research lies in interpreting Pleroma not as a mere theological doctrine but as the deep existential fullness, and analyzing the structure of Aeon (αἰών) emanations appearing in the Nag Hammadi Library and the teachings of the Valentinian school to elucidate the ontological tension between differentiation and unity.


In particular, by exploring the 삼극 (Threefold Structure: Heaven–Earth–Human), 대삼합육 (Great Three Unite into Six), 운삼사 성환오칠 (Circulation of Three and Four, Completion into Five and Seven), and 용변부동본 (Constant Origin Despite Change) in the Cheonbu-gyeong (천부경), the study seeks ontological parallels between the East Asian tradition and the structure of Pleroma. The worldview that integrates cosmic consciousness (宇宙意識, Heaven), energetic field (地, Earth), and life activity (人, Human) aligns profoundly with the structure where diverse Aeons embody distinctive characters while maintaining fundamental fullness within Pleroma.


Furthermore, the study reinterprets the Pleromaic ontology through modern psychology and philosophy. Carl Gustav Jung’s theory of the Self and the Collective Unconscious served as a crucial framework to interpret the Pleromaic memory latent within the human psyche, while Friedrich Nietzsche’s concept of the Übermensch and Geheimnis Gott highlighted the existential task of humanity to recover fullness not through external transcendence but through self-creation. Lucian Blaga’s deepening of mystery (Misterium) and Mircea Eliade’s notion of sacred space (sacralitatea) both contributed to the contemporary reinterpretation of the fullness and ontological depth represented by Pleroma.


Moreover, by comparing with contemporary quantum field theory, the study investigates how the concept of Pleroma resonates with the idea of the world as a Field of Existence. In modern physics, the field is not a mere collection of particles but a dynamic structure of waves and interactions that continuously generate and maintain existence, which parallels the Pleromaic structure of fullness, reflection, and generative circulation. Existence is not a static substance but a rhythm of life endlessly resonating and self-renewing from the depths, and Pleromaic ontology calls for a rediscovery and living experience of this existential rhythm.


By integrating these various traditions and contemporary interpretations, this study argues that the concept of Pleroma transcends ancient mythological or religious symbolism and can propose a new ontological vision of Absolute Reality for today. The recovery of the lost fullness is not a distant transcendental aspiration but a realistic task to be re-lived through the depth of existence, the inner human being, and the resonance of all things in the world. Pleroma still resounds deep within existence, and humanity can restore the primordial resonance of being by remembering and reviving it. Absolute Reality is not a fixed entity but a rhythm of ceaseless generation and fullness, still alive at the heart of our exist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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