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뵈메 사상과 현대 과학

by 이호창

제9장: 뵈메 사상과 현대 과학


9.1. 뵈메의 자연철학과 현대 물리학의 만남 (바사라브 니콜레스쿠 등의 해석)


17세기 신비사상가 야콥 뵈메의 자연철학이 수백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현대 물리학, 특히 양자물리학과 복잡계 이론의 첨단 논의와 만나는 지점이 있다는 주장은 매우 흥미롭고 도전적인 시도이다. 루마니아 출신의 프랑스 이론물리학자 바사라브 니콜레스쿠(Basarab Nicolescu)는 그의 저작 『과학, 의미, 그리고 진화: 야콥 뵈메의 우주론』을 통해 바로 이러한 대화를 적극적으로 모색한 대표적인 학자이다. 니콜레스쿠는 뵈메의 심오하고 상징적인 언어 속에 현대 과학이 다루는 우주의 근본적인 역동성과 구조에 대한 선구적 통찰이 담겨 있다고 본다. 그에 따르면, 뵈메는 물질과 정신, 부분과 전체, 단순성과 복잡성이 분리되지 않은, 살아있는 유기체로서의 우주를 직관했으며, 이는 현대 물리학이 도달한 세계 이해와 놀랍도록 유사한 측면을 지닌다는 것이다.


니콜레스쿠가 주목하는 뵈메 자연철학의 핵심은 그의 역동적인 우주 생성론, 특히 일곱 근원 영(Sieben Quellgeister) 또는 성질(Qualitäten)을 통한 설명이다. 뵈메는 우주 만물이 정체된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는 생성과 변화의 과정 속에 있으며, 이 과정은 근원적인 힘들의 상호작용과 투쟁을 통해 전개된다고 보았다. 첫 세 가지 성질, 즉 수축(Begierde, 욕망/혹독함), 확장(Sanftmut, 온유/움직임), 그리고 회전 또는 고뇌(Angst, 불안/감각)는 일종의 원초적 긴장 상태, 또는 니콜레스쿠가 암시하듯 현대 물리학의 양자 진공(quantum vacuum)이나 잠재적 에너지 장(potential energy field)과 유사한 ‘무저갱’(Ungrund)으로부터 현실태가 발현되기 직전의 역동적 가능성을 상징한다. 이 어둠의 삼자(dark trinity)는 서로를 자극하며 제4의 성질인 ‘섬광’ 또는 ‘불’(Blitz, Feuer)을 폭발적으로 일으키는데, 이는 마치 빅뱅 이론의 원초적 폭발이나 양자 도약처럼 새로운 상태로의 급격한 전이, 즉 에너지의 현현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 섬광을 통해 어둠은 빛으로 전환되며, 제5의 성질인 ‘사랑의 빛’(Liebeslicht)과 제6의 성질인 ‘소리’ 또는 ‘말씀’(Schall, Wort)이 드러난다. 빛은 명료성과 질서를, 소리는 정보와 의미의 전달을 상징하며, 이들이 상호작용하여 제7의 성질인 ‘형상’ 또는 ‘왕국’(Gestalt, Reich), 즉 구체적인 자연 만물의 세계를 형성한다고 뵈메는 설명한다. 니콜레스쿠는 이러한 뵈메의 일곱 성질의 전개 과정을 단순한 신화적 상상으로 치부하지 않고, 그 안에 질료, 에너지, 정보라는 현대 물리학의 핵심 개념들에 대한 심오한 통찰이 담겨 있다고 본다. 뵈메에게 질료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생성되고 소멸하는 에너지의 응결체이며, 그 과정은 정보, 즉 ‘말씀’ 또는 ‘서명’(Signatur)에 의해 안내된다. 뵈메가 말한 ‘살리터’(Salitter) 또는 ‘틴크투어’(Tinktur)와 같은 개념은 단순히 전근대적 연금술 용어가 아니라, 모든 성질들을 담지하고 매개하는 근원적 기질(matrix) 또는 장(field)으로서, 현대 물리학의 장 개념이나 통일장 이론의 가능성을 예감하게 한다고 니콜레스쿠는 시사한다. 특히 뵈메의 ‘모든 사물의 서명’(Signatur aller Dinge) 개념은 각 존재 안에 내재된 고유한 정보 패턴, 즉 그것의 본질과 발달 경로를 암시하는 것으로, 이는 현대 생물학의 유전 정보나 물리학의 정보 이론과 연결될 수 있는 지점이다.


더 나아가 니콜레스쿠는 뵈메의 자연철학이 현대 과학의 복잡계 이론(complexity theory)과 자기조직화(self-organization) 개념을 선구적으로 암시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뵈메의 우주는 미리 결정된 설계도에 따라 움직이는 기계가 아니라, 내부의 역동적인 힘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스스로 질서를 창조하고 진화해 나가는 유기체적 시스템이다. 일곱 성질들의 끊임없는 투쟁과 조화, 특히 어둠의 원리(Finsternis)와 빛의 원리(Licht) 사이의 변증법적 상호작용은 혼돈 속에서 새로운 질서와 복잡성이 출현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는 복잡계 이론에서 말하는, 단순한 구성 요소들의 비선형적 상호작용을 통해 예측 불가능한 새로운 거시적 패턴이나 구조가 자발적으로 생성되는 현상, 즉 ‘창발’(emergence)과 매우 유사하다. 뵈메가 묘사한 ‘신의 분노’(Zorn Gottes)나 ‘어두운 불’은 단순한 악이나 파괴의 힘이 아니라, 오히려 기존의 정체된 상태를 깨뜨리고 새로운 생성과 발전을 추동하는 역설적인 창조의 동력이 되기도 한다. 이는 복잡계에서 시스템이 평형 상태에서 멀리 벗어나 불안정해질 때, 오히려 더 높은 수준의 조직화된 상태로 도약할 수 있다는 ‘혼돈의 가장자리’(edge of chaos) 개념이나 ‘소산 구조’(dissipative structure) 이론을 연상시킨다. 뵈메의 우주에서 각 부분은 전체와 연결되어 있으며, 전체는 부분 안에 반영되어 있는 홀로그램적 구조를 암시하는데, 이 역시 복잡계의 특징 중 하나인 상호연결성과 프랙탈(fractal) 구조와 통하는 면이 있다. 니콜레스쿠는 뵈메가 제시한 대립물의 역동적 통일, 즉 ‘예’와 ‘아니오’(Ja und Nein)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통한 생성 과정이야말로 현대 과학이 발견한 우주의 근본적인 작동 방식과 깊이 공명한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해석을 통해 볼 때, 야콥 뵈메의 자연철학은 전근대적 신비주의의 틀 안에 머무르지 않고, 현대 물리학이 탐구하는 우주의 근원적 신비에 대한 선구적 통찰을 제공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뵈메는 현대적 의미의 과학자는 아니었으며, 그의 언어는 상징과 직관에 의존한다. 그러나 니콜레스쿠와 같은 해석가들은 뵈메의 심오한 비전 속에서 현대 과학이 이제 막 도달하기 시작한, 물질과 에너지, 정보가 역동적으로 상호작용하며 스스로를 조직해 나가는 우주의 모습을 발견한다. 뵈메의 사유는 과학적 언어와 종교적, 철학적 언어 사이의 간극을 메우고, 인간과 자연, 그리고 궁극적 실재에 대한 통합적 이해를 모색하는 데 중요한 영감을 줄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결국 뵈메의 자연철학은 시대를 초월하여 현대인에게도 여전히 우주의 근본적인 질문들과 대면하게 만드는 깊이를 지니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9.2. 전체론적 우주관과 시스템 이론


야콥 뵈메의 사상 체계 전반을 관통하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그의 철저한 전체론적(holistic) 우주관이다. 뵈메는 우주를 개별적이고 분리된 부분들의 단순한 집합이 아니라, 모든 존재가 서로 깊이 연결되어 상호작용하는 살아있는 유기체적 총체로 인식했다. 이러한 그의 관점은 20세기에 본격적으로 발전한 시스템 이론(systems theory)의 핵심 원리들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한 측면을 보여주며, 시대를 초월한 그의 통찰력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다. 비록 뵈메가 현대 과학의 방법론이나 용어를 사용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직관적이고 상징적인 언어 속에는 복잡한 시스템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예지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뵈메의 전체론적 사유의 근간에는 만물의 궁극적 통일성에 대한 깊은 확신이 자리 잡고 있다. 그는 모든 존재가 ‘거대한 신비’(Mysterium Magnum)라고 불리는 하나의 근원으로부터 발현되었다고 보았다. 이 ‘거대한 신비’는 모든 다양성과 개별성을 포괄하는 동시에 초월하는 궁극적 일자(一者)로서, 우주 만물은 이 근원적 통일성의 다양한 표현 양태들이다. 이러한 관점은 시스템 이론에서 강조하는, 시스템 내의 모든 구성요소가 상호 연결되어 있으며 궁극적으로 하나의 전체 시스템을 이룬다는 기본 전제와 맞닿아 있다. 뵈메의 일곱 근원 영(Sieben Quellgeister) 또는 성질(Qualitäten)에 대한 설명 역시 이러한 전체론적, 시스템적 관점을 명확히 보여준다. 이 일곱 가지 성질들 – 수축, 확장, 회전(고뇌), 섬광(불), 사랑의 빛, 소리(말씀), 형상(왕국) – 은 각각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힘들이 아니라, 서로를 생성시키고 제약하며 역동적인 관계망을 이루는 하나의 통합된 시스템으로 작동한다. 첫 번째 성질에서부터 일곱 번째 성질에 이르기까지의 전개 과정은 마치 하나의 유기체가 발생하고 성장하는 과정처럼, 각 단계가 이전 단계에 의존하고 다음 단계를 가능하게 하는 상호의존적 연속체이다. 어떤 하나의 성질도 다른 성질들과의 관계 없이는 그 의미나 기능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이는 시스템 이론에서 말하는 구성 요소들 간의 상호의존성(interdependence)과 순환적 인과관계(circular causality)를 연상시킨다.


뵈메 사상의 또 다른 중요한 전체론적 특징은 대우주(macrocosm)와 소우주(microcosm)의 상응 관계에 대한 강조이다. 그는 인간을 우주의 모든 원리와 힘들이 축약되어 있는 작은 우주로 보았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내면을 깊이 성찰함으로써 우주 전체의 신비를 이해할 수 있으며, 반대로 우주의 질서와 법칙을 관찰함으로써 인간 존재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거시 세계와 미시 세계 간의 유비(analogy)와 상호 반영의 원리는 시스템 이론에서 말하는 시스템 내의 다른 수준들(levels) 간의 유사성 또는 프랙탈(fractal) 구조와도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 즉, 작은 규모의 시스템에서 나타나는 패턴과 원리가 더 큰 규모의 시스템에서도 반복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뵈메의 ‘모든 사물의 서명’(Signatur aller Dinge) 개념은 우주 만물이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그의 믿음을 잘 보여준다. 각 사물에 깃든 ‘서명’은 그것의 내적 본질을 드러내는 동시에 다른 사물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 의미가 결정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는 마치 생태계처럼, 모든 요소가 서로 그물망처럼 얽혀 영향을 주고받는 복잡한 관계의 네트워크를 연상시킨다.


이러한 뵈메의 전체론적 우주관은 현대 시스템 이론의 여러 핵심 원리들과 공명한다. 시스템 이론은 기본적으로 환원주의(reductionism)적 접근, 즉 복잡한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그것을 더 작은 부분들로 분해하여 분석하는 방식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했다. 대신 시스템 이론은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다’는 명제를 중심으로, 부분들 간의 상호작용과 관계 속에서 창발(emergence)하는 전체 시스템의 고유한 속성을 이해하고자 한다. 뵈메 역시 우주를 단순한 부품들의 조립품이 아닌, 살아있는 유기체적 전체로 파악함으로써 이러한 환원주의적 시각을 넘어서고 있다. 그의 우주에서는 각 요소들이 서로에게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으며 전체 시스템의 상태를 변화시키는 피드백 루프(feedback loop)가 작용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뵈메가 묘사한 신의 ‘분노’(Zorn)와 ‘사랑’(Liebe) 사이의 역동적인 긴장과 화해의 과정은, 시스템 내의 대립적인 힘들이 서로를 조절하며 전체적인 균형을 유지하거나 새로운 상태로 나아가게 하는 복잡한 피드백 관계를 암시한다. 또한, 뵈메의 우주는 닫힌 체계가 아니라 그 근원인 ‘웅그룬트’ 또는 ‘거대한 신비’와 끊임없이 교류하며 자신을 생성하고 변화시켜 나가는 열린 시스템(open system)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는 시스템이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물질, 에너지, 정보를 교환하며 스스로를 유지하고 발전시켜 나간다는 현대 시스템 이론의 관점과도 일치한다. 뵈메가 제시한 다양한 원리들(Prinzipien) 또는 세계들(Welten) – 예를 들어 어둠의 세계, 빛의 세계, 외적인 현상 세계 – 은 각기 다른 수준의 조직화 단계를 보여주며, 각 수준에서 새로운 질서와 속성이 창발하는 계층적 구조(hierarchy)를 이루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데, 이 또한 시스템 이론의 중요한 개념 중 하나이다.


야콥 뵈메의 우주관은 그 심오한 전체론적 통찰을 통해 현대 시스템 이론이 추구하는 세계 이해 방식과 놀라운 유사성을 보여준다. 그의 사상은 우주 만물이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거대한 관계망 속에서 상호 의존하며 역동적으로 생성하고 변화한다는 점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비록 뵈메가 사용한 언어는 신학적이고 상징적이지만, 그 기저에 흐르는 사유의 패턴, 즉 상호연결성, 역동적 과정, 유기체적 통일성에 대한 강조는 시스템적 관점의 핵심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 따라서 뵈메의 사상은 현대인에게 세계를 보다 통합적이고 관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지혜를 제공하며, 복잡하게 얽힌 현대 사회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있어서도 중요한 영감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목소리는 시대를 넘어, 우리에게 모든 존재가 하나의 거대한 생명의 춤에 참여하고 있음을 일깨워주는 듯하다.


9.3. 의식 연구와 뵈메의 영혼론: 주관성과 객관성의 통합 시도


현대 의식 연구의 가장 큰 난제 중 하나는 소위 ‘어려운 문제’(hard problem of consciousness), 즉 뇌라는 객관적 물리 시스템에서 어떻게 주관적 체험(qualia) 또는 일인칭적 의식이 발생하는가 하는 간극을 해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관성과 객관성의 통합이라는 과제 앞에서, 17세기 신비사상가 야콥 뵈메의 복잡하고 심층적인 영혼론은 그 자체로 현대 과학적 담론은 아니지만, 이 문제를 사유하는 데 있어 풍부하고 도전적인 관점을 제공한다. 뵈메는 인간 영혼을 우주적 실재와 분리된 것이 아니라 그것과 깊이 연루된 다층적 실체로 보았으며, 그의 영혼론은 주관적 내면세계와 객관적 우주 질서 사이의 역동적 상호작용을 탐구하는 독창적인 시도로 이해될 수 있다.


뵈메의 영혼론의 핵심에는 인간 영혼을 우주 전체의 축소판, 즉 소우주(microcosm)로 보는 관점이 자리한다. 그는 인간 영혼 안에 우주를 구성하는 일곱 근원 영(Sieben Quellgeister)과 세 가지 원리(drei Principien) – 어둠의 세계(제1원리), 빛의 세계(제2원리), 그리고 이 둘로부터 발현된 외적 현상의 세계(제3원리) – 가 모두 잠재해 있다고 보았다. 뵈메의 주요 저작 중 하나인 『인간의 세 가지 생명, Von dem dreifachen Leben des Menschen』은 바로 이러한 인간 존재의 다층적 구조를 상세히 다룬다. 뵈메에 따르면 인간의 영혼은 크게 세 가지 차원 또는 ‘생명’으로 구성된다. 첫째는 ‘원소적 생명’(elemental life)으로, 이는 육체와 감각을 통해 외적, 물리적 세계와 관계하는 생명이다. 둘째는 ‘항성적 또는 아스트랄적 생명’(sidereal or astral life)으로, 이는 별들의 기운, 즉 우주적 힘들의 영향을 받으며 인간의 기질, 욕망, 정념 등을 주관하는 중간적 영혼의 차원이다. 셋째는 ‘신적 생명’(divine life)의 씨앗 또는 ‘고귀한 마음’(Gemüt)으로, 이는 영혼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신적 불꽃이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본래적 영혼의 핵이다. 이 세 가지 생명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 안에서 서로 침투하며 영향을 주고받는다. 이러한 다층적 영혼 구조는 그 자체로 객관적인 우주 질서(세 가지 원리, 별들의 영향)와 주관적인 내적 체험(욕망, 고뇌, 신적 갈망)이 만나는 장(場)을 제공한다.


뵈메 사상에서 영혼의 역동성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개념은 ‘의지’(Wille)와 ‘상상력’(Imagination 또는 Einbildung)이다. 뵈메에게 의지는 모든 존재의 근저에 있는 원초적 힘이며, 심지어 신성의 가장 깊은 곳인 ‘웅그룬트’(Ungrund)에서부터 발현하는 자유로운 동력이다. 인간 영혼의 의지는 이 자유를 바탕으로 어둠의 원리(자기 중심성, 분노, 탐욕)를 향하거나 빛의 원리(사랑, 겸손, 신적 합일)를 향할 수 있는 결정권을 지닌다. 상상력은 이러한 의지의 방향에 따라 특정한 ‘형상’(Gestalt)을 만들어내는 영혼의 창조적 능력이다. 영혼이 무엇을 갈망하고 상상하느냐에 따라 그 내적 상태와 외적 현실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이는 주관적 의지와 상상력이 객관적 현실을 구성하는 데 능동적으로 참여함을 의미하며, 단순한 수동적 반영자로서의 영혼 개념을 넘어선다. 뵈메 자신의 수많은 신비 체험에 대한 기록(예: 『고백록』)은 이러한 내적 투쟁, 의지의 전환, 그리고 상상력을 통한 신적 실재의 파악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뵈메의 영혼론은 주관성과 객관성을 통합하려는 시도로 해석될 수 있는 여러 지점을 제공한다. 첫째, 그의 사상은 주관적 체험의 실재성을 깊이 인정한다. 영혼의 고뇌, 죄의식, 신을 향한 갈망, 조명(illumination)의 기쁨 등은 뵈메에게 단순한 심리 현상이 아니라 영적 실재와의 만남에서 비롯되는 진실한 체험이다. 둘째, 이러한 주관적 체험은 결코 자의적이거나 고립된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우주적 질서 및 신적 실재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영혼의 어두운 상태는 제1원리의 객관적 힘에 사로잡힌 결과이며, 영적 각성은 제2원리인 신적 빛과의 객관적 만남을 통해 이루어진다. 셋째, ‘의지의 전향’(Umwendung des Willens)이라는 개념은 주관적 결단과 객관적 구원의 조화를 보여준다. 인간 영혼이 자신의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자기 중심성에서 벗어나 신을 향해 돌아설 때(주관적 행위), 신적인 은총과 빛이 영혼 안으로 들어와 영혼을 새롭게 하고 신적 질서에 참여하게 한다(객관적 변화). 즉, 구원은 주관적 응답과 객관적 신적 작용의 합작품이다. 넷째, ‘모든 사물의 서명’(Signatur aller Dinge)이라는 그의 독특한 교리는 외부 세계(객관적 실재)가 그 자체로 내부의 영적 본질을 드러내는 ‘서명’ 또는 상징으로 가득 차 있으며, 정화되고 각성된 영혼(주관적 상태)만이 이러한 서명을 올바로 해독하고 세계의 참된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고 본다. 이는 지식의 과정 자체가 주관과 객관의 만남이며 상호 조응임을 시사한다.


뵈메의 이러한 영혼론은 현대 의식 연구에 몇 가지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첫째, 그의 다층적이고 역동적인 영혼 모델은 데카르트적 심신 이원론을 넘어서 주관적 의식과 객관적 세계 사이의 연속성과 상호 침투를 사유할 수 있는 틀을 제공한다. 영혼은 단순한 ‘생각하는 실체’가 아니라, 우주적 힘들과 교감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복합적인 실존이다. 둘째, 의지와 상상력의 창조적 역할을 강조한 점은 의식을 단순한 정보 처리 과정이나 뇌 활동의 부산물로 보는 환원주의적 견해에 도전하며, 의식의 능동적이고 현실 구성적인 측면을 부각시킨다. 이는 양자물리학의 관찰자 문제나 의식의 인과력에 대한 현대적 논의와도 간접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지점이다. 셋째, 뵈메가 참된 지혜와 영적 각성을 위해 영혼의 정화와 변형이 필수적이라고 본 점은, 지식 탐구에서 인식 주체의 내적 상태와 윤리적 차원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현대 과학의 객관성 개념에 대한 성찰을 요구한다. 넷째, 그의 전체론적 접근, 즉 영혼을 고립된 실체가 아니라 우주적 생명 시스템의 일부로 보는 관점은 의식 연구에서도 보다 통합적이고 생태학적인 접근법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야콥 뵈메의 영혼론은 그 자체로 현대 과학의 언어로 직접 번역될 수는 없지만, 그의 사상 속에 담긴 주관적 체험의 깊이에 대한 천착, 객관적 실재와의 역동적 관계 설정, 그리고 영혼의 다층적 구조와 변형 가능성에 대한 통찰은 현대 의식 연구가 직면한 주관-객관의 통합이라는 과제에 풍부한 철학적, 영성적 자원을 제공한다. 뵈메의 사유는 우리에게 의식이란 단지 개인의 머릿속에 갇힌 현상이 아니라, 우주적 깊이와 연결되어 있으며 끊임없이 생성하고 참여하는 과정임을 상기시킨다. 그의 심오한 영혼 탐구는 시대를 넘어 여전히 우리에게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신비를 묻고 답을 찾도록 이끌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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