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빈 반 페르시: '내 안의 작은 아이'와 무너진 서사

by DrLeeHC

로빈 반 페르시: '내 안의 작은 아이'와 무너진 서사


축구는 단순한 경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복잡한 욕망갈등, 그리고 정체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무대입니다. 공이 굴러가는 90분은 우리 삶의 축소판이며, 그 안에서 선수는 때로는 영웅으로 추앙받고, 때로는 비난받는 반역자로 낙인찍히기도 합니다. 로빈 반 페르시 (Robin van Persie, 1983년 8월 6일 출생)는 이 격정적인 무대의 중심에서 누구보다 빛나고, 동시에 누구보다 논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의 이름에 붙은 'van'은 네덜란드어로 '출신(出身)'을 뜻하는 전치사로, 특정 지역이나 가문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한국의 아스날 팬들, 즉 구너들은 그 이름의 'van'을 우리말의 '반(半)', 즉 '절반'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잦은 부상으로 인해 중요한 경기에서 자주 결장했고, 시즌의 절반만을 뛰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아쉬움 속에서도, 반 페르시는 아스날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쳤습니다. 2011년 10월 29일, 스탬포드 브리지 (Stamford Bridge)에서 열린 첼시 (Chelsea)와의 경기에서 그는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팀의 5-3 승리를 이끌었습니다. 이 경기는 그의 아스날 커리어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 중 하나로 회자됩니다.


또한, 2011-12 시즌에는 프리미어리그에서 30골을 기록하며 득점왕에 올랐고, 모든 대회를 통틀어 총 37골을 넣으며 팀의 명실상부한 주포로 활약했습니다. 이러한 폭발적인 활약은 그가 프리미어리그 최고의 골잡이 중 한 명임을 분명히 입증했습니다. 하지만 이처럼 빛나는 순간들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스날에서의 커리어 내내 잦은 부상으로 인해 많은 중요한 경기를 놓쳐야 했습니다. 팬들은 그의 부상만 아니었다면 아스날이 훨씬 더 많은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했습니다.


이러한 로빈 반 페르시는 2012년 여름, 8년간 머물렀던 아스날을 떠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Manchester United)로 이적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아스날의 주장 완장을 차지 않았고, 팬들은 갑작스러운 이별 앞에서 충격과 혼란, 그리고 깊은 상실감을 삼켜야 했습니다. 팬들의 마음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든 것은 그가 이적하며 남긴 단 한 마디였습니다.


"내 안의 작은 아이가 맨유를 원했습니다." (The little boy inside me was screaming for Manchester United.)


이 말은 단순한 이적의 이유를 설명하려는 차원을 넘어섰습니다. 그것은 마치 아스날과 함께 오랜 시간 쌓아온 모든 서사를 단번에 지워버리는 듯한 선언처럼 들렸습니다. '소년의 충동' 하나로 어른의 책임과 믿음을 부정하는 것처럼, 팬들에게는 뼈아픈 배신감으로 다가왔습니다. 그가 감당했던 수년간의 부상과 고통스러운 재활 과정, 그를 향한 팬들의 믿음과 기다림, 그리고 주장으로서의 무거운 책임감까지 모든 것이 '작은 아이'의 한마디에 묻혀버린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아스날 팬들은 질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토록 사랑했던 것은 누구였는가? 그라운드 위에서 투혼을 불태웠던 프로 선수인가, 아니면 그 속에 숨어 있던 한 아이인가?" 우리는 그의 헌신을 믿었고, 그의 리더십을 따랐으며, 함께했던 시간을 진심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어른으로서의 약속과 팬들과의 유대감보다 어린 시절의 꿈, 즉 '아이의 꿈'을 택했습니다. 그 순간, 마치 같은 이야기를 함께 써 내려가던 누군가가 갑자기 책장을 넘겨 전혀 다른 책을 펼쳐버린 것 같은 깊은 이질감이 들었습니다.


작은 아이와 다이몬, 그리고 철학적 선택


하지만 한 발짝 멀리서 다시 들여다보면, 반 페르시의 그 말은 비난받아야 할 변명이라기보다 인간 내면의 진실한 고백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마음 안에 '작은 아이(小童)'를 품고 살아갑니다. 어린 시절의 순수한 꿈, 조건 없는 열망, 세상의 조건과 무관한 감정들이 그 아이 안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되면, 우리는 점점 그 아이의 목소리를 무시하게 되고, 이성(理性)과 책임(責任)이라는 이름으로 그 아이를 억누르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아이는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장 중요하고 복잡한 순간, 우리가 선택해야 할 길의 갈림길에서 다시 우리에게 말을 걸어옵니다.


반 페르시에게 그 순간은, 어쩌면 자신의 진짜 감정을 비로소 마주한 결정적인 순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화려한 경력과 팀 리더로서의 무거운 책임감 속에서도, 그는 여전히 축구 팬이었고, 어린 시절 우상에 대한 순수한 열망을 지니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아이는 성공이라는 이름의 외부 기준이 아니라, 내면의 깊은 열망에 충실하고 싶었을 터입니다. 그는 그 목소리를 따랐고, 팬들은 그 선택 속에서 자신들이 외면당했다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를 비난하며 다시 묻습니다. "도대체 그 '작은 아이'는 누구였단 말인가?"


그러나 정작 이 질문은 비단 그에게만 던져져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 자신에게 던져야 하는 묵직한 물음입니다. 우리는 왜 언제나 자기 편의 이야기만 들으려 하는가? 왜 타인의 복잡한 선택을 이해하기보다, 먼저 우리의 상처부터 감싸려 하는가? 왜 상대의 고백을 곡해하고, 그 안에 담긴 진심을 보려 하지 않는가? 혹은, 나 역시 내 안의 작은 아이가 무엇을 원했는지 오랫동안 외면하며 살아온 것은 아닐까?


한 사람의 선택이 우리를 이토록 혼란스럽게 만드는 이유는, 우리가 그 사람 안에 우리의 이야기와 꿈을 깊이 투영해왔기 때문입니다. 그가 아스날을 떠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더 깊은 상실은 우리의 내면에서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응원하며 나의 기억과 꿈, 그리고 희망을 그에게 건넵니다. 그래서 그의 결정은 나의 서사에 예상치 못한 틈을 만들고, 때론 서사 전체의 붕괴를 일으킵니다. 팬덤이란 단지 단순한 지지를 넘어서, 자신의 존재 일부를 타인에게 걸어놓는 행위와 같습니다. 그렇기에 이별은 단순한 ‘이적’이 아니라, 곧 정체성(正體性)의 균열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장면을 통해, 축구라는 경기를 넘어 더 큰 존재의 질문을 마주하게 됩니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왜 한 사람의 선택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가? 내가 굳게 붙잡고 있던 진심이란 정말 그의 것이었을까, 아니면 나만의 서사를 그 위에 덧씌우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러한 반 페르시의 말은 축구사에서 하나의 이적 멘트로 남았지만, 우리는 이 말을 통해 전혀 다른 철학적 질문에 다가설 수 있습니다. 인간은 언제나 선택의 순간에 두 개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하나는 이성(理性)의 목소리입니다. 이는 외부 세계의 조건, 책임, 사회적 맥락을 고려한 신중한 선택을 제안합니다. 다른 하나는 깊은 내면에서, 말없이 울리는 목소리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작은 아이'라고 부를 수도 있고, 고대 그리스인들은 그 존재를 ‘다이몬(δαίμων)’이라 불렀습니다.


플라톤 (Plato)은 그의 저서 『향연, Symposium』에서 사랑 (Eros)을 '다이몬'이라 칭하며, 인간과 신(神) 사이를 매개하는 존재라 설명했습니다. 다이몬은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강력한 충동이지만, 그것은 단순한 욕망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 안에 숨겨진 본연의 목적, 텔로스 (telos: 목적, 목표, 궁극적 완성)를 향한 움직임입니다.


소크라테스 (Socrates)는 자신의 삶을 이끌던 내면의 목소리를 '다이몬'이라 불렀습니다. 그는 재판정에서조차 "나는 다이몬이 말하지 않는 한, 어떤 것도 행하지 않는다"고 단언했습니다. 그 말은 그에게 다이몬이 단순한 환청이나 일시적인 감정이 아니라, 존재의 진실한 방향을 일러주는 깊은 안내자였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점점 다이몬의 목소리를 의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점점 더 논리적 설득과 냉철한 계산, 통계와 효율성을 삶의 기준으로 삼습니다. '작은 아이'의 말은 감정적이라고 무시당하고, 다이몬의 침묵은 비이성적이라며 배제됩니다. 하지만 진정 중요한 순간은 언제나 이 두 세계가 격렬하게 충돌하는 지점에서 벌어집니다. 반 페르시의 선택 또한 그러했습니다. 한편에는 아스날이라는 공동체와의 약속, 팬들과의 정, 그리고 지난 8년간 쌓아온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다른 한편에는 어린 시절부터 간직해온 어떤 꿈, 혹은 내면에서 강렬하게 소리쳤던 감정, 즉 다이몬의 목소리가 있었습니다. 그는 후자를 택했고, 사람들은 그를 배신자라 불렀습니다.


니체 (Friedrich Nietzsche)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Also sprach Zarathustra』에서 "너는 너 자신이 되어야 한다. 아이는 놀이하는 자이며, 새로운 시작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말한 '아이'는 단순히 유년기의 복귀가 아닙니다. 세상의 기존 가치들을 의심하고, 다시 ‘창조’하려는 자의 형상입니다. 니체에게 있어 아이는 가장 성숙한 인간의 상징이며, 새로운 도덕의 시작점입니다. 그렇다면 반 페르시가 따른 '작은 아이'는 단지 자기중심적인 충동이 아니라, 그의 존재가 가장 순수했던 지점을 향한 회귀였을 수도 있습니다.


융 (Carl Gustav Jung) 역시 '자기 (Self)' 개념 안에서 '내면 아이 (inner child)'를 중요한 요소로 보았습니다. 그 아이는 과거의 상처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본래 가지고 있던 생명력, 그리고 진정한 자기실현으로 이끄는 원형 (archetype)의 일부입니다. 융은 "당신이 가장 되고 싶지 않은 존재가 곧, 당신이 되어야 할 존재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은 우리가 오랫동안 억눌러온 작은 아이, 말없이 울고 있던 내면의 충동을 기꺼이 마주하라는 강력한 요청입니다.


이와 같은 사유는 고대 동양 사상에도 깊이 자리합니다. 장자 (莊子)는 『내편』에서 ‘진인(眞人)’을 말하며, 본래의 자기를 되찾는 것을 삶의 궁극적인 목표로 보았습니다. 그 진인은 세상의 법도나 시비(是非)를 넘어서, 자기 안의 순수한 소리를 따라 움직이는 자입니다. 그는 냉철한 계산이 아니라, 세계와의 순수한 감응(感應)으로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감응은 어린아이의 웃음처럼 순수하고 조건이 없습니다. 이때 '작은 아이'는 단지 나약한 존재가 아니라, 사회적 가면을 벗고 가장 진실한 자기로 돌아간 인간의 본연적인 모습입니다.


물론, 다이몬을 따른 모든 선택이 아름다운 결말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의 길을 따르는 선택은 종종 외로움과 오해를 낳습니다. 자기의 길을 걷는 자는 늘 타인의 시선과 주류의 가치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철학의 진정한 출발점입니다. 철학은 아파테이아 (ἀπάθεια), 즉 외부의 평가와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정신의 자유에서 비롯됩니다.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고통 받고, 그 고통을 넘어서 스스로 의미를 창조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선택이며 삶의 예술입니다.


우리는 로빈 반 페르시의 결정을 두고 옳고 그름을 단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선택은 한 인간의 내면에서, 이성과 충동, 책임과 욕망, 어른과 아이, 현실과 꿈 사이에서 일어난 깊은 갈등의 결과였다는 점만은 분명합니다. 그것이야말로 모든 인간이 겪는 보편적인 내면적 서사의 일부입니다. 그는 자신의 다이몬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를 '잃었다'고 느꼈습니다. 하지만 이 장면을 통해 우리 자신에게 되묻습니다. "나는 지금 어떤 목소리를 따라 살고 있는가? 내 안의 작은 아이는 여전히 나에게 말을 걸고 있는가? 그 소리를 들을 용기가 있는가? 그리고 그 소리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는가?" 철학이란 결국, 그 내면의 소리를 듣고도 외면하지 않는 용기에서 시작됩니다. 다이몬은 언제나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하지만 들을 귀가 없는 자는 결코 그 말을 온전히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이야기에서 지워진 마음: 로빈 반 페르시와 우리의 상실감


함께 써 내려가던 이야기에 갑자기 빈 페이지가 생긴다면 어떤 기분일까요? 그리고 그 빈 페이지가, 한때 내 삶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던 누군가 때문에 생겼다면요? 로빈 반 페르시 (Robin van Persie)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Manchester United)로 떠났을 때, 아스날 (Arsenal) 팬들이 느낀 감정은 단순히 화나거나 배신당한 느낌을 넘어섰습니다. 그것은 오랫동안 '우리'라고 믿었던 공동체에서 외톨이가 된 듯한 아픔이었습니다. 함께 만들어가던 이야기에 내 이름이 사라지고, 심지어 어디에도 언급조차 되지 않는 낯선 감정. 우리는 그의 모든 순간을 기억했습니다. 부상으로 쓰러져 고통받던 모습, 홀로 힘들게 재활하던 조용한 시간, 그리고 마침내 필드에 돌아와 첫 골을 넣던 환희에 찬 얼굴까지.


그런데도 그는 감히, 그렇게 말했습니다. "내 안의 작은 아이가 맨유를 원했습니다." 그 말 한마디는, 아스날 팬들의 마음속에서 우리가 함께 만들었던 모든 이야기를 지워버리는 듯했습니다.


아스날 팬들에게 반 페르시의 이적은, 오랫동안 자신들이 '팬'이라는 이름으로 믿고 응원했던 소속감의 자리에서, 다른 사람의 선택 때문에 밀려난 사건이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제 다른 유니폼을 입고, 다른 관중들을 향해 손을 흔듭니다. 우리가 그토록 열광하던 그의 몸짓은 더 이상 우리를 향하지 않습니다. 그 순간, 우리의 정체성은 허공에 붕 뜬 채 흔들리는 듯했습니다. 마치 내가 서 있던 땅이 갑자기 흔들릴 때 느끼는 혼란스러운 감정과 같았습니다.


아스날 팬들은 오랜 시간 반 페르시에게 소중한 시간과 감정, 그리고 좋은 기억들을 아낌없이 주었습니다. 단지 그가 멋진 골을 넣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의 이야기에 나도 함께하고 있다는 깊은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떠나면서 우리의 존재에 대해 묻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 이야기에서 조용히 사라졌고, 이제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그저 지켜보는 구경꾼이 되었습니다. 사랑은 기꺼이 상대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는 일이지만, 떠나는 사람이 그 내어줌을 소중히 여기지 않을 때, 남겨진 사람은 자신의 마음조차 의심하게 됩니다.


우리는 반 페르시를 통해 우리 자신을 보았습니다. 그의 눈빛, 그의 플레이, 그의 골 세리머니 속에서 나는 내 열정과 기쁨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는 그 모든 몸짓을 다른 사람들에게, 다른 팀에게 건넵니다. 그는 변한 것이 아니라, 단지 방향을 바꿨을 뿐이지만, 우리는 그 순간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믿고 있었는지를 완전히 잃어버리는 듯한 상실감을 느낍니다. '나'라는 존재는 결국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기에, 그 관계가 부정되는 순간 나는 나를 잃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입니다.


이러한 감정은 비단 축구 팬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연인에게, 존경하는 스승에게, 혹은 내가 믿는 어떤 생각이나 신념에게도 똑같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늘 이야기 속에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함께 쓰는 이야기, 함께 걷는 길, 함께 기억하는 순간들. 그런데 그 이야기가 나를 빼고 계속될 때, 우리는 존재의 뿌리부터 흔들리는 듯한 깊은 아픔을 겪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야기에서 지워진 사람이 느끼는 복잡한 마음입니다.


우리는 반 페르시의 이적 인터뷰 어디에서도, 아스날 팬들에 대한 진심 어린 고백이나 따뜻한 위로를 듣지 못했습니다. 그가 말한 것은 오직 '작은 아이'와 '꿈'뿐이었습니다. 그 꿈을 이루는 데 지난 8년간 함께했던 수천 명의 팬들은, 그의 말 속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 우리는 잊혀진 존재가 되었고, 우리의 감정은 그의 이야기에서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마치 우리의 존재가 현실이 아니라 '기억 속의 그림자'로만 남게 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이런 아픔과 상실감은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다른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왜 이렇게까지 아팠을까? 나는 왜 그 이야기에 그렇게 깊이 빠져 있었을까?" 그가 떠났다는 사실이 내 존재를 흔들 정도였다면,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 이야기 속에 나 자신을 깊이 기대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 상실은, '밖에서 온 상처'가 아니라, '내 안의 의존성'이 드러난 순간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야기에서 지워졌지만, 그 아픈 감정은 여전히 우리 안에 살아 있습니다. 그 감정은 우리를 다시 묻게 합니다.


"나는 지금 누구와 함께 이야기를 쓰고 있는가?

나는 무엇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는가?

그리고 내가 믿는 그 세상은, 나를 이야기 안에 계속 남겨줄 수 있는가?"


이 질문은 단지 반 페르시라는 한 선수 때문에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가 누구든, 무엇이든, 사랑하고 잃어가며 살아가는 모든 순간에 반복되는 보편적인 질문입니다. 이야기에서 지워졌을 때, 그 침묵의 빈자리를 통해 우리는 비로소 우리 자신을 다시 돌아보게 됩니다.


이야기는 그 순간부터 다시 시작됩니다. 이제는 오직 나 자신의 문장으로.


결국, 우리는 로빈 반 페르시라는 사람을 미워한 것이 아니라, 그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이끌었던,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웠던 '그 안의 작은 아이'를 아쉬워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북런던은 칙칙한 하늘 아래에서도 언제나 붉게 타오릅니다.


아스날의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https://youtube.com/shorts/NxGvx2a58qw?si=gyV7zoadcBfrpnR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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