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과학주의와 기술만능주의의 오만

진보라는 이름의 질주

by 이호창

제9장: 진보라는 이름의 질주 - 과학주의와 기술만능주의의 오만


9.1. 데카르트의 유령: 정신과 물질, 인간과 자연의 분리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Cogito, ergo sum).”


17세기 프랑스의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 (René Descartes)가 그의 저서 『성찰, Meditations on First Philosophy』에서 남긴 이 유명한 문장은, 근대 정신의 탄생을 알리는 위대한 선언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의심할 수 있어도, 의심하고 있는 ‘나’의 생각만큼은 의심할 수 없다는 확고한 토대 위에서, 인간 이성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하지만 이 위대한 선언 속에는,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수많은 문제들의 씨앗이 되는 하나의 거대한 유령이 숨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정신과 물질, 그리고 인간과 자연을 완전히 둘로 나누어 버린 ‘이원론 (Dualism)’이라는 이름의 유령입니다.


데카르트 이전의 세계에서, 인간은 자신을 자연의 일부로 여겼습니다. 숲과 강에는 정령이 깃들어 있었고, 인간의 몸과 마음은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통일체였습니다. 하지만 데카르트는 이 세계를 두 개의 완전히 다른 실체로 나누었습니다. 하나는 생각하고 느끼는 ‘정신 (res cogitans)’, 즉 의식과 영혼의 세계입니다. 다른 하나는 공간을 차지하고 움직이는 ‘물질 (res extensa)’, 즉 기계의 부품처럼 물리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모든 사물의 세계입니다.


이 거대한 분리의 결과는 무엇이었을까요?


첫째, ‘생각하는 나’야말로 존재의 중심이라는 믿음은, 인간을 자연의 일부가 아니라, 자연을 내려다보고 지배하는 ‘주인’의 자리에 올려놓았습니다. 인간의 이성은 특별하고 우월한 것이 되었고, 반대로 정신이 없다고 여겨지는 자연 세계 전체—동물, 식물, 강, 산—는 그저 인간이 마음대로 분석하고, 측정하고, 이용할 수 있는 거대한 ‘자원’이자 ‘기계’로 전락했습니다.


한때 생명으로 가득 찬 경외의 대상이었던 숲은 이제 얼마만큼의 목재를 생산할 수 있는지를 나타내는 숫자가 되었고, 강은 수력 발전을 위한 에너지원으로 계산되었습니다. 이처럼 인간과 자연을 분리시키고 대상화하는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우리가 본래 지닌 상호연결성의 감각과 자연과의 교감 능력은 마비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심각한 환경 위기의 가장 깊은 철학적 뿌리는, 바로 이처럼 자연의 내재적 가치를 지워버리고 오직 도구적 가치만을 남긴 데카르트의 유령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둘째, 이 분리는 인간 자신에게도 깊은 내면의 상처를 남겼습니다. 데카르트의 논리 속에서, 우리의 ‘몸’ 역시 정신이 없는 물질, 즉 영혼이 깃들어 있는 정교한 기계에 불과한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마치 자신의 몸을 운전하는 운전자처럼, 나의 진정한 자아(정신)와 나의 몸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데 익숙해졌습니다. 우리는 몸이 보내는 미세한 감각이나 직관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보다, 몸을 더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통제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정신과 육체의 분리는, 우리가 스스로를 온전한 하나로 느끼지 못하고, 항상 어딘가 분열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 현대인의 깊은 소외감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결국, 데카르트가 남긴 유령은 지난 400년간 서구 문명을 지배해 온 과학 기술 문명의 보이지 않는 운영체제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유령의 속삭임에 따라, 세상을 정복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고, 우리의 몸을 관리해야 할 기계로 다루며, 측정할 수 없는 모든 가치들을 미신으로 치부하는 데 익숙해졌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기술만능주의의 오만에서 벗어나, 우리 자신과 세계와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첫걸음은, 바로 이 데카르트의 유령을 직시하고 그가 만들어낸 거대한 분리의 벽을 허무는 데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나는 생각한다’는 고립된 자아의 선언을 넘어, ‘나는 자연과, 나의 몸과, 그리고 세상 모든 존재와 연결되어 있다’는 더 큰 진실을 회복할 때, 비로소 우리는 이 오래된 유령의 속박에서 벗어나 진정한 의미의 ‘주권적 자아’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9.2. 측정과 계량의 횡포: 데이터로 환원될 수 없는 가치들의 소멸


숫자는 강력합니다. 숫자는 세상을 명확하고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놀라운 도구입니다. 우리는 숫자를 통해 건물을 짓고, 병을 치료하며, 우주로 로켓을 쏘아 올립니다. 애매하고 주관적인 감상이나 편견 대신, 명백한 데이터에 기반한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게 된 것은 인류가 이룩한 위대한 진보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만약 이 유용한 ‘도구’가 어느 순간 우리의 ‘주인’이 되어버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데카르트의 유령이 세상을 ‘생각하는 나’와 ‘측정 가능한 물질’로 분리한 이래, 근대 문명은 점차 하나의 위험한 신앙에 빠져들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측정할 수 있는 것만이 존재하고, 데이터로 증명할 수 있는 것만이 진리’라는 이름의 ‘과학주의 (Scientism)’ 신앙입니다. 이 신앙은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입니다. “만약 당신이 그것을 숫자로 표현할 수 없다면, 그것은 중요하지 않거나 혹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측정과 계량의 횡포’는 우리 삶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어,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소중한 가치들을 서서히 소멸시키고 있습니다.


교육 현장을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한 학생의 진정한 성장은 점수로 측정할 수 없는 호기심과 창의성, 그리고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우리의 교육 시스템은 오직 ‘시험 점수’라는 단 하나의 데이터만을 가지고 학생의 가치를 평가하고 서열을 매깁니다. 학생들은 내면의 성숙보다 등수를 올리는 기술을 배우는 데 몰두하고, 교육의 본질은 사라진 채 숫자 놀음만 남게 됩니다.


기업의 세계는 어떻습니까? 한 기업의 성공은 오직 ‘분기별 수익’과 ‘주가’라는 데이터로만 평가됩니다. 그 기업이 노동자들을 얼마나 인간적으로 대우하는지, 지역 사회에 얼마나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지, 혹은 환경을 얼마나 파괴하고 있는지와 같은 가치들은 재무제표에 숫자로 기록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너무나 쉽게 부차적인 것으로 밀려나 버립니다.


국가의 성공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한 국가의 발전 수준을 판단할 때, 국내총생산(GDP)이라는 단 하나의 지표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합니다. 하지만 일찍이 로버트 F. 케네디가 연설에서 지적했듯, GDP는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들을 제외한 모든 것을 측정합니다.” GDP에는 대기 오염을 정화하는 비용, 교도소 건설 비용, 무기 생산 비용은 포함되지만, 우리 아이들의 건강과 교육의 질, 우리 시의 아름다움, 그리고 우리 공동체의 연대감과 같은 가치들은 포함되지 않습니다.


결국, 측정할 수 없는 것들을 무시하는 이 세계관은, 우리를 영적으로 황폐하게 만듭니다. 손에 잡히는 것들만이 전부라는 믿음 속에서, 보이지 않는 가치들, 특히 모든 존재를 하나로 묶는 사랑과 연민, 그리고 영적인 연결감과 같은 가치들은 점점 더 빛을 잃어갑니다. 우리는 사랑의 깊이를 연인에게 사준 선물의 가격으로 측정하려 하고, 우정의 가치를 SNS의 ‘좋아요’ 숫자로 확인받으려 합니다. 모든 것을 경쟁과 효율성의 언어로만 환원시키는 이러한 태도는, 우리가 본래 지닌 상호연결성의 감각과 자연과의 교감 능력을 마비시킵니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의 진보는, 더 많은 것을 측정하고 계량하는 능력에만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측정할 수 없는 것들의 소중함을 다시 깨닫는 지혜에 있습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시 한 편을 단어의 개수나 문장의 길이로 분석할 수 없음을 압니다. 시의 진정한 가치는 그것이 우리 마음에 일으키는 보이지 않는 울림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진정한 ‘주권적 자아’로 나아가는 길은, 숫자의 횡포에 저항하고, 데이터로 환원될 수 없는 우리 삶의 신비롭고 성스러운 영역을 지켜내려는 용기 있는 노력에서 시작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들은, 언제나 셀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9.3. 기술적 해결주의: 모든 문제를 ‘공학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착각


외롭고 우울하십니까? 당신의 마음을 분석하고 위로해 줄 인공지능 상담 앱이 있습니다. 밤에 잠이 오지 않으십니까? 당신의 수면 패턴을 데이터로 관리해 줄 스마트 워치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덧 삶의 모든 문제에 대해 깔끔하고 편리한 ‘기술적 해결책’이 존재한다고 믿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마치 스마트폰 앱을 다운로드하듯, 우리는 인간의 모든 고통과 사회의 모든 모순 역시 적절한 기술만 있다면 ‘해결(fix)’될 수 있다고 기대합니다.


이러한 믿음, 즉 기술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낙관적인 태도를, IT 비평가 예브게니 모로조프(Evgeny Morozov)는 그의 저서 『클릭 몇 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위험한 생각, To Save Everything, Click Here』에서 ‘기술적 해결주의 (Technological Solutionism)’라고 명명하며 그 위험성을 날카롭게 파헤쳤습니다. 모로조프에 따르면, 오늘날 실리콘 밸리가 전파하는 이 새로운 이데올로기는 세상의 모든 복잡한 문제들을, 마치 버그를 수정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처럼, 명확한 정답이 존재하는 단순한 ‘공학적 문제’로 재정의하려는 오만한 경향을 보입니다.


그들의 눈에, 인류가 수천 년간 씨름해 온 가난, 불평등, 비만, 외로움, 정치적 부패와 같은 고질적인 문제들은, 더 이상 깊은 역사적, 사회적, 심리적 원인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그저 데이터가 부족하거나, 알고리즘이 비효율적이거나, 사람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유도할 ‘똑똑한’ 앱이 없기 때문에 발생하는 ‘오류’일 뿐입니다.


모로조프는 기술적 해결주의가 문제 자체를 해결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고 비판합니다. 대신, 그들은 문제를 자신들이 해결할 수 있는 형태로 ‘단순화’하고 ‘재정의’하는 데에만 몰두합니다.


예를 들어, 그들은 ‘정치적 무관심’이라는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투표를 독려하는 소셜 미디어 앱을 만듭니다. 하지만 이 앱은 젊은이들이 왜 정치에 무관심하게 되었는지, 즉 정치 시스템에 대한 깊은 불신이나 먹고살기 힘든 경제적 현실과 같은 근본적인 원인에 대해서는 전혀 질문하지 않습니다. 그저 ‘클릭 몇 번’으로 시민의 의무를 다했다는 가벼운 만족감을 줄 뿐입니다.


기술적 해결주의가 가진 가장 큰 위험은, 그것이 제시하는 해결책이 틀렸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진짜 문제는, 그것이 문제 자체를 완전히 ‘잘못 진단’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현대 사회의 비만 문제를 들 수 있습니다. 기술적 해결주의는 이 문제를 ‘개인의 칼로리 계산 실패’라는 정보의 문제로 진단하고, 매일 섭취하는 칼로리를 정확히 추적하는 앱을 해결책으로 제시합니다. 하지만 이 접근은 문제의 진짜 원인을 완전히 외면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신선한 채소 대신 값싼 가공식품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경제적 불평등, 스트레스가 폭식으로 이어지는 심리적 문제, 그리고 설탕과 지방이 가득한 음식을 팔아야만 이윤을 남길 수 있는 거대한 식품 산업의 구조, 등, 이 모든 복잡한 사회적 뿌리는 무시한 채, 개인의 의지박약과 계산 착오만을 문제 삼는 것입니다.


이러한 논리는 외로움의 문제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기술적 해결주의는 이를 ‘연결의 부족’이라는 기술적 문제로 보고, 수천 명의 ‘친구’를 맺게 해주는 소셜 미디어 플랫폼을 해결책으로 내놓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연구들이 보여주듯, 피상적인 온라인 관계의 증가는 오히려 사람들의 깊은 고립감을 심화시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술은 우리를 ‘연결’시켜 주었을지는 모르나, 진정한 ‘유대감’을 만들어주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기술적 해결주의가 저지르는 가장 큰 잘못은, 인간 삶의 가장 중요하고도 복잡한 문제들을 탈정치화하고, 탈역사화하며, 탈인간화한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기술적 해결주의는 이 모든 시끄럽고 비효율적인 토론을 생략하고 싶어 합니다. 그들은 결함투성이의 민주주의적 절차 대신, 데이터에 기반한 현명한 알고리즘이 우리를 위해 최적의 결정을 내려주는 효율적인 사회를 꿈꿉니다. 이러한 유혹 앞에서, 우리는 점차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주체적인 시민이기를 포기하고, 전문가와 기술이 제시하는 해결책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안일함에 빠져들 수 있습니다. 시스템은 우리를 파편화된 데이터의 집합으로 바라봄으로써, 우리의 힘을 약화시키려 합니다.


궁극적으로, 인간의 가장 위대한 문제들—사랑, 죽음, 정의, 삶의 의미—은 결코 ‘해결’될 수 있는 종류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들은 우리가 평생을 바쳐 씨름하고, 고뇌하며, 그 속에서 스스로의 답을 찾아가야 할 우리 존재의 본질 그 자체입니다.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겠다는 기술의 달콤한 약속은, 우리에게서 바로 이 고통스럽지만 의미 있는 성장의 과정을 빼앗아가는 아편일 수 있습니다. 진정한 지혜는 모든 문제에 대한 앱을 갖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기술로도 해결할 수 없는 우리 삶의 근본적인 질문들을 끌어안고 살아갈 용기를 갖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9.4. 유발 하라리의 예언: ‘데이터교’의 도래와 신이 된 인간


우리 시대에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만큼 거대하고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는 사상가는 없을 것입니다. 그는 『사피엔스, Sapiens』를 통해 인류의 과거를, 그리고 『호모 데우스, Homo Deus』를 통해 인류의 미래를 종횡무진하며, 우리가 지금 어떤 문명사적 대전환의 문턱에 서 있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단순한 미래 예측이 아니라, 과학 기술이 인류의 오랜 믿음들을 어떻게 해체하고 있으며, 그 폐허 위에서 어떤 새로운 신과 종교가 탄생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거대한 ‘예언’과도 같습니다.


하라리에 따르면, 지난 수백 년간 인류를 지배해 온 종교는 바로 ‘인본주의(Humanism)’였습니다. 인본주의는 인간의 감정과 경험, 그리고 ‘자유 의지’를 모든 가치와 의미의 원천으로 삼는 믿음입니다.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라”는 말은 인본주의 시대의 가장 강력한 계명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라리는 21세기의 과학, 특히 생명공학과 컴퓨터 과학이 이 인본주의의 근간을 뿌리째 흔들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과학은 인간의 영혼이나 자유 의지와 같은 신비로운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은 결국 복잡한 생화학적 알고리즘의 집합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증명해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학적 세계관 위에서, 인류는 이제 질병과 기아, 전쟁이라는 낡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넘어, 새로운 목표를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불멸(immortality)’, ‘행복(happiness)’, 그리고 ‘신성(divinity)’을 획득하여, 스스로를 ‘신이 된 인간’, 즉 ‘호모 데우스(Homo Deus)’로 업그레이드하려는 욕망입니다.


그렇다면 이 거대한 인간 개조 프로젝트를 이끌어갈 새로운 시대정신, 즉 새로운 종교는 무엇일까요? 하라리는 그것을 ‘데이터교(Dataism)’라고 명명합니다. 데이터교의 핵심 교리는 놀라울 정도로 단순합니다.


“우주는 데이터의 흐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모든 존재의 가치는 데이터 처리에 기여하는 정도에 따라 결정된다.”


이 새로운 종교에서 최고의 선(善)은 더 이상 신의 영광이나 인간의 행복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정보의 자유로운 흐름’ 그 자체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결국 지구라는 행성에 국한된 작은 데이터 처리 시스템에서, 우주 전체를 아우르는 궁극의 ‘만물 인터넷(Internet-of-All-Things)’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계관 속에서 인간은 더 이상 만물의 영장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주적 데이터 흐름의 일부로서, 데이터를 생산하고 처리하는 하나의 칩(chip)에 불과한 존재가 됩니다. 그리고 인공지능과 같은 더 효율적인 데이터 처리 시스템이 등장하면서, 인간이라는 낡은 칩은 점차 그 가치를 잃고 도태될 운명에 처하게 됩니다.


이 데이터교의 도래는 우리의 삶을 어떻게 바꿀까요? 하라리의 예언에 따르면, 우리는 기꺼이 우리의 자유 의지를 전능한 알고리즘에게 위임하게 될 것입니다. 나의 모든 생체 정보와 온라인 활동, 그리고 유전 정보까지 파악하고 있는 구글이나 아마존의 인공지능은, 나 자신보다 나를 더 잘 알게 될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무엇을 공부하고, 누구와 결혼하며, 누구에게 투표해야 하는지와 같은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결정들을 더 이상 나의 ‘감정’에 묻지 않고, 알고리즘의 ‘데이터 기반 추천’에 의존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스스로 판단하고 책임지는 능력을 외부의 ‘권위자’에게 슬그머니 위임해 버리게 됩니다. 우리는 스스로 생각하는 주인이 아니라, 외부의 권위가 주는 지침 없이는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하는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그 새로운 주인은 바로 차갑고 지적인 알고리즘입니다. 시스템은 개인을 더 이상 통합된 인격체로 보지 않고, 관리 가능한 데이터의 집합으로 파편화함으로써 그 힘을 약화시키려 합니다.


결국 하라리의 예언은 우리에게 하나의 경고로서 다가옵니다. 그가 묘사하는 미래는 정해진 운명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 중 하나입니다. 데이터교의 도래는,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데카르트적 분리, 측정과 계량의 횡포, 그리고 기술적 해결주의가 도달할 수 있는 논리적 귀결입니다. 우리는 이 거대한 데이터의 흐름에 우리 자신을 내맡기고 하나의 부품이 될 것인가? 아니면 데이터로 환원될 수 없는 인간 의식의 고유한 가치와 ‘주권적 자아’를 지키기 위해 저항할 것인가? 그 선택은 지금 우리 손에 달려 있습니다.


데이터교에 대한 저항: 의식이라는 최후의 보루


유발 하라리가 예언하는 데이터교의 미래는 너무나 거대하고 필연적인 흐름처럼 보여, 우리를 깊은 무력감에 빠뜨립니다. 나의 모든 것을 나보다 더 잘 아는 전능한 알고리즘 앞에서, 한낱 개인이 저항하는 것이 과연 가능하기는 할까? 이 거대한 기술의 파도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모든 것을 내어주고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뿐일지도 모른다는 체념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새로운 신, ‘데이터교’에게는 결코 가질 수 없는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의식(Consciousness)’의 내밀한 경험입니다. 알고리즘은 우리의 심박수와 혈압, 뇌의 화학 작용을 분석하여 우리가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을 99%의 정확도로 알아맞힐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알고리즘은 결코 사랑에 빠진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알고리즘은 세상의 모든 정보를 처리할 수는 있지만, 단 한 순간의 주관적인 경험도 할 수 없습니다. 데이터는 정보이지만, 의식은 체험입니다. 이 둘 사이에는 결코 건널 수 없는 깊은 강이 흐릅니다.


데이터교에 맞서는 우리의 가장 강력한 대안은, 바로 이 데이터로 환원될 수 없는 우리 내면의 우주, 즉 ‘의식’의 가치와 힘을 재발견하고 그것을 의식적으로 계발하는 데 있습니다. 외부의 알고리즘에 우리 삶의 결정권을 위임하는 대신, 우리 안에 잠들어 있는 ‘내적 권위’를 확립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한 가장 구체적이고 강력한 방법이 바로 ‘명상’을 통한 의식의 해방입니다. 여기서 명상이란, 단순히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기술이 아닙니다. 그것은 데이터교의 논리에 정면으로 맞서는 가장 급진적인 저항 행위입니다.


데이터교가 우리에게 ‘너의 모든 생각과 감정을 데이터로 기록하고 외부의 알고리즘에 연결하라’고 명령한다면, 명상은 정반대로 ‘너의 모든 생각과 감정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 그것을 그저 조용히 바라보는 관찰자가 되라’고 가르칩니다. 우리는 명상을 통해, 끊임없이 떠오르는 생각과 감정들이 나의 본질이 아니라, 그저 내 의식의 스크린 위를 지나가는 구름과도 같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 깨달음은 우리를 생각의 감옥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외부에서 주입된 이데올로기나 내면의 충동에 자동적으로 반응하는 로봇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알아차리고 스스로 행동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로운 주체로 만들어 줍니다.


데이터교가 우리의 가치를 외부 데이터와의 연결에서 찾는다면, 명상은 우리를 고요함 속에서 발견하는 진정한 자아로 이끕니다. 모든 생각과 감정의 소음이 잦아든 그 고요함 속에서, 우리는 외부의 어떤 권위나 데이터도 알려줄 수 없는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목소리, 즉 직관과 내적 지혜를 신뢰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이것은 불교의 위빠사나 명상이나, 수많은 신비주의 전통에서 이야기하는 ‘내면의 신성’을 발견하려는 시도와 그 맥을 같이합니다.


결국, 데이터교가 제시하는 미래는 하나의 선택지일 뿐, 정해진 운명이 아닙니다. 우리는 알고리즘의 완벽한 추천을 받아 안락한 삶을 사는 ‘디지털 애완동물’이 될 것인지, 아니면 내면의 불완전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때로는 실수하고 방황하더라도 스스로의 삶을 책임지는 ‘주권적 자아’로 남을 것인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인공지능 시대에 가장 급진적인 정치적 행위는, 어쩌면 광장에서 피켓을 드는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바로 매일 잠시라도 모든 외부 연결을 끊고, 조용히 앉아 내면의 침묵 속으로 들어가는 행위일 수 있습니다. 그 침묵이야말로 알고리즘이 결코 해독할 수 없는, 인간 고유의 마지막 신성한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최적화되어야 할 알고리즘이 아니라, 살아가야 할 하나의 신비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 그것이 데이터교의 거대한 예언에 맞서는 우리 모두의 과제입니다.



9.5. 알고리즘의 감옥: 인공지능 시대의 새로운 예속


인공지능(AI) 알고리즘은 우리 시대의 가장 유능하고 친절한 집사처럼 보입니다. 넷플릭스 알고리즘은 나의 취향에 맞는 영화를 귀신같이 추천해주고, 유투브 뮤직 알고리즘은 나의 기분에 딱 맞는 완벽한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어줍니다. 내비게이션 앱은 막히는 길을 피해 가장 빠른 길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이처럼 알고리즘은 우리의 삶을 더 편리하고, 더 효율적이며, 더 즐겁게 만들어주는 고마운 도구처럼 느껴집니다. 우리는 이 똑똑한 도구를 우리가 ‘사용’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만약, 이 관계가 우리의 생각과는 정반대라면 어떨까요? 우리가 알고리즘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알고리즘이 우리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라면 말입니다. 인공지능 시대가 우리에게 드리우는 가장 큰 위험은, 바로 이 질문 속에 숨어 있습니다.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예속은, 과거처럼 쇠사슬과 채찍으로 우리를 억압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개인 맞춤형 추천과 편리함이라는 달콤한 꿀을 발라 만든, 안락하고도 빠져나가기 힘든 ‘알고리즘의 감옥’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 감옥의 보이지 않는 창살들은 어떻게 만들어질까요?


첫 번째 창살은 ‘필터 버블(Filter Bubble)’, 즉 확증 편향의 자동화입니다. 알고리즘의 기본적인 설계 목표는 ‘사용자의 만족도와 참여를 극대화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알고리즘은 당신이 좋아할 만한 것들을 더 많이 보여줍니다. 당신이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성향의 유튜브 영상을 하나 시청하면, 알고리즘은 비슷한 영상들을 당신의 추천 목록에 가득 채워 넣을 것입니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 당신의 세계는 점차 당신의 기존 믿음을 확인하고 강화해 주는 정보들로만 가득 찬 ‘닫힌 방(Echo Chamber)’이 되어버립니다. 다른 관점이나 비판적인 목소리는 자연스럽게 차단되고, 당신은 점차 자신의 생각이 세상의 유일한 진실이라고 믿게 되는 극단화의 길을 걷게 됩니다.


두 번째 창살은 ‘감정의 조작’입니다. 알고리즘이 극대화하려는 ‘참여’는, 종종 이성적인 숙고가 아니라 강렬한 감정적 반응을 통해 가장 쉽게 얻어집니다. 특히 분노와 혐오, 공포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은 ‘좋아요’나 ‘공유’를 폭발적으로 유발하는 가장 효과적인 자극제입니다. 소셜 미디어의 알고리즘은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 결과, 우리의 뉴스피드는 종종 사회의 갈등을 부추기고,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를 조장하며, 우리를 끊임없이 분노하게 만드는 자극적인 콘텐츠들로 채워집니다. 우리는 스스로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알고리즘에 의해 ‘분노하도록’ 길들여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세 번째 창살은 ‘편견의 자동화’입니다. 캐시 오닐이 그녀의 저서 『대량살상 수학무기, Weapons of Math Destruction』에서 경고했듯, 이 알고리즘들은 결코 중립적이거나 객관적이지 않습니다. 인공지능은 과거의 데이터를 학습하여 미래를 예측합니다. 만약 과거의 데이터 자체가 인간 사회의 뿌리 깊은 편견과 차별을 담고 있다면, 인공지능은 그 편견을 그대로 학습하고 심지어는 더욱 강화시켜 버립니다. 예를 들어, 과거 남성 임원들의 데이터만을 학습한 채용 심사 AI는, 뛰어난 능력의 여성 지원자를 ‘패턴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탈락시킬 수 있습니다. 이 결정 과정은 복잡한 수학적 ‘블랙박스’ 안에 숨겨져 있어, 우리는 왜 그런 차별적인 결과가 나왔는지조차 알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과정은 우리를 ‘스스로를 감시하는 죄수’로 만듭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온라인 활동—무엇을 검색하고, 무엇을 구매하며, 누구의 사진에 ‘좋아요’를 누르는지—이 거대한 알고리즘에 의해 기록되고 분석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마치 판옵티콘 감옥의 죄수처럼, 우리는 이 보이지 않는 감시자의 시선을 내면화하여 스스로를 통제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정한 자신을 표현하기보다, 알고리즘에게 ‘더 나은 나’로 보이기 위해 자신의 행동과 취향을 스스로 검열하고 관리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알고리즘의 감옥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예속은, 우리가 스스로 판단하고 책임지는 능력을 외부의 ‘권위자’, 즉 전능해 보이는 알고리즘에게 슬그머니 위임해 버리는 데서 완성됩니다.


이는 훨씬 더 일상적이고 미묘한 방식으로 우리의 생각과 감정에 영향을 미칩니다. 이 안락한 감옥에 저항하는 유일한 길은, 알고리즘의 추천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때로는 의식적으로 그 추천을 거부하며, 나 자신의 불완전한 직관과 도덕적 판단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노력뿐입니다. 우리는 알고리즘의 예측 가능한 데이터가 아니라, 그 예측을 뛰어넘는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주권적 자아’임을 스스로 증명해야 합니다.



9.6. 전문가 숭배와 민주주의의 위기: ‘권위의 휴리스틱’의 심화


우리는 다리가 무너질까 봐 걱정하지 않고, 비행기가 추락할까 봐 두려워하지 않으며 살아갑니다. 그것은 우리가 교량 공학이나 항공 역학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 분야의 ‘전문가’들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복잡한 현대 사회는 각 분야의 전문화된 지식과 그 전문가들에 대한 사회적 신뢰 없이는 단 하루도 유지될 수 없습니다. 전문가의 의견에 귀 기울이는 것은 합리적이고 현명한 태도입니다.


하지만 만약 이 합리적인 ‘신뢰’가, 비판적 사고를 마비시키는 맹목적인 ‘숭배’로 변질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특히 정보가 넘쳐나고 무엇이 진실인지 판단하기 어려운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신뢰할 만한 전문가나 권위 있는 기관의 의견에 의존하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전에 살펴보았던 ‘권위의 휴리스틱’, 즉 전문가의 말을 의심 없이 진리로 받아들이려는 정신적 지름길입니다. 과학주의와 기술만능주의는 바로 이 ‘권위의 휴리스틱’을 극단적으로 심화시켜,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새로운 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그 위기의 핵심에는 ‘테크노크라시(Technocracy)’, 즉 전문가가 통치하는 사회라는 유혹적인 꿈이 있습니다. 이 꿈은 이렇게 속삭입니다.


“정치나 경제, 사회와 같은 복잡한 문제들을, 감정적이고 무지한 대중이나 이기적인 정치인들에게 맡겨두는 것은 너무나 비효율적이고 위험하다. 차라리 모든 것을 데이터에 기반하여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최고의 전문가 집단에게 맡기는 것이 모두를 위해 더 좋지 않을까?”


20세기 초 언론인 월터 리프만은 『여론, Public Opinion』에서, 복잡한 현대 사회를 평범한 대중이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전문가 엘리트 집단이 ‘혼란스러운 대중(bewildered herd)’을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오늘날 ‘데이터를 따르라’거나 ‘과학에 귀 기울이라’는 구호는, 바로 이 전문가 숭배의 현대적인 표현입니다. 물론 과학적 데이터는 중요한 판단 근거입니다. 하지만 이 구호는 종종 복잡한 사회적 문제를 오직 하나의 정답만이 존재하는 과학 문제인 것처럼 위장하는 프로파간다로 사용됩니다. 예를 들어, 새로운 전염병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단순히 바이러스의 전파 경로를 계산하는 과학 문제만이 아닙니다. 그 안에는 개인의 자유와 공공의 안전 사이의 균형, 경제적 피해를 감수할 수 있는 수준, 그리고 사회적 약자를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와 같은 수많은 ‘가치 판단’의 문제가 얽혀 있습니다. 이러한 가치 판단의 문제는 과학 실험실이 아니라, 바로 우리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참여하는 민주적인 토론의 광장에서 결정되어야 할 문제입니다.


하지만 전문가 숭배는 이러한 민주적 토론의 가능성 자체를 묵살합니다. “전문가가 그렇다고 하니, 당신들은 그저 따르기만 하면 된다”는 태도는, 평범한 시민들을 국가의 주인이 아니라, 전문가의 지도를 받아야 하는 미성숙한 어린아이의 위치로 전락시킵니다. 우리는 점차 비판적 사고의 날을 무디게 만들고, 스스로 판단하고 책임지는 능력을 외부의 ‘권위자’에게 슬그머니 위임해 버리곤 합니다. ‘전문가가 그렇다고 하니까’, ‘텔레비전에서 봤으니까’라는 말로 자신의 판단을 유보해 버리는 순간, 우리는 생각하는 갈대가 되기를 포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 전문가 숭배와 기술만능주의가 초래하는 민주주의의 위기는, 시민들의 정치적 무관심과 무력감을 심화시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결정들이,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전문 용어와 복잡한 데이터 뒤에서, 소수의 전문가 엘리트들에 의해 내려진다고 느낄 때, 우리는 점차 정치로부터 소외되고 냉소적으로 변해갑니다.


따라서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를 지키기 위한 길은, 전문가를 무시하는 반지성주의에 빠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전문가의 전문 지식을 존중하되, 그들의 판단이 결코 가치중립적일 수 없음을 인식하고, 최종적인 가치 판단과 정치적 결정의 권한은 오직 시민에게 있음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전문가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지도’를 제공해 줄 수 있지만, 그 지도를 보고 최종적으로 어느 길로 갈지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 즉 사회의 ‘주권적 자아’여야만 합니다.



9.7. 트랜스휴머니즘의 꿈: 죽음을 극복하려는 기술적 오만의 정점


인류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깊은 꿈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죽음을 극복하는 것’일 겁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길가메시 왕은 영생의 풀을 찾아 세상을 헤맸고, 중세의 연금술사들은 불멸을 가져다준다는 ‘현자의 돌’을 만들기 위해 평생을 바쳤습니다. 이 영원한 생명을 향한 인류의 오랜 갈망은, 21세기에 들어 과학 기술이라는 새로운 옷을 입고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것이 바로 ‘트랜스휴머니즘 (Transhumanism)’이라는 이름의, 우리 시대 가장 대담하고도 오만한 꿈입니다.


트랜스휴머니즘은 유전 공학, 인공지능, 나노 기술과 같은 최첨단 과학 기술을 이용하여 노화와 질병, 죽음과 같은 인간의 근본적인 생물학적 한계를 극복하고, 궁극적으로는 인류를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더 우월한 존재인 ‘포스트휴먼(Post-human)’으로 진화시켜야 한다는 사상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앞서 살펴본 데카르트적 세계관과 기술적 해결주의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논리적 귀결입니다.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보고, 인간의 몸마저 하나의 기계로 여겼던 그 시선이, 이제 마침내 인간 존재의 마지막 미개척지인 ‘죽음’마저 정복하려 하는 것입니다.


이 거대한 꿈의 가장 깊은 곳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나’라고 여기는 이 육체와 자아가 언젠가는 소멸할 것이라는 생각에서 오는, 견딜 수 없는 공포감입니다. 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영원한 생명이나 불멸을 약속하는 듯한 환상에 집착하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동인입니다. 트랜스휴머니즘은 바로 이 실존적 공포에 대해, 과학 기술이라는 이름의 가장 확실한 구원을 약속하는 현대판 불멸의 종교인 셈입니다.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이 꿈꾸는 미래는 공상 과학 영화의 한 장면과도 같습니다. 유전자를 편집하여 질병과 노화의 유전자를 원천적으로 제거하고, 나노 로봇을 혈관에 투입하여 손상된 세포를 실시간으로 수리하며, 최종적으로는 우리의 의식과 기억 전체를 낡고 연약한 육체라는 ‘생물학적 하드웨어’에서 벗어나, 영원히 지속될 수 있는 ‘디지털 슈퍼컴퓨터’로 업로드하는 ‘마인드 업로딩 (Mind-uploading)’을 꿈꿉니다.


하지만 이 눈부신 기술적 유토피아의 약속 이면에는, 우리가 반드시 질문해야 할 위험하고 불편한 진실들이 숨어 있습니다.


첫째, 누가 ‘신이 된 인간’이 될 것인가 하는 불평등의 문제입니다. 이 값비싼 불멸의 기술은 과연 모든 인류에게 공평하게 주어질까요? 아마도 처음에는 이 기술을 구매할 수 있는 극소수의 부유층만이 그 혜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는 인류가 역사상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부와 권력의 격차를 넘어선 ‘생물학적 계급’의 탄생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영원히 사는 ‘호모 데우스’와, 늙고 병들어 죽을 수밖에 없는 구인류 ‘호모 사피엔스’로 말입니다.


둘째, 영원히 사는 삶은 과연 의미가 있는가 하는 철학적 문제입니다. 고대 그리스 신화 속 티토노스는 불멸을 얻었지만 영원한 젊음은 얻지 못해, 끝없이 늙어가며 고통받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는 죽음이야말로 우리 삶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유한성의 조건임을 역설적으로 보여줍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죽어 사라진 세상에 홀로 남아 영원을 살아가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가장 끔찍한 저주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트랜스휴머니즘이 보존하려는 ‘나’는 과연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나’의 기억과 의식을 데이터로 보존하면 나의 존재가 영원히 이어진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나’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이 육체와 에고(Ego) 또한, 본래부터 고정된 실체가 없는 것일 수 있습니다. 트랜스휴머니즘은 이 작은 ‘나’의 지속에 집착한 나머지, 더 깊은 차원의 불멸의 가능성을 놓치고 있습니다.


진정한 불멸은 이 작은 ‘나’의 지속이 아니라, 모든 존재와 연결된 영원한 생명과의 합일을 통해 발견될 수 있다는 가능성 말입니다.


결국 트랜스휴머니즘의 꿈은, 인간의 유한성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기술적 오만의 정점입니다. 그것은 죽음이라는 삶의 근본적인 조건으로부터 도망치려는 필사적인 시도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 (Friedrich Nietzsche)가 『즐거운 학문, Die fröhliche Wissenschaft』에서 던졌던 가장 무서운 질문과 마주하게 됩니다. 바로 ‘영원회귀 (Eternal Recurrence)’ 사상입니다.


니체는 우리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만약 어느 날 밤, 악마가 너에게 다가와 이렇게 속삭인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네가 지금 살고 있고, 살아왔던 이 삶을 너는 또다시, 그리고 무수히 반복해서 살아야만 한다. 거기에는 어떤 새로운 것도 없을 것이며, 모든 고통과 모든 쾌락, 모든 생각과 모든 한숨이 똑같은 순서로 너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너는 이 말을 듣고 절망하며 땅에 쓰러져 이를 갈겠는가? 아니면 ‘너는 신이다. 나는 이보다 더 신적인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대답하겠는가?”


이 영원회귀라는 생각은, 우리 삶의 가치를 측정하는 가장 궁극적인 저울입니다. 트랜스휴머니즘은 삶의 ‘양 (quantity)’, 즉 시간을 무한히 늘리려는 시도입니다. 그들은 고통과 죽음이 없는 영원한 삶을 꿈꾸지만, 그 영원한 삶이 과연 반복해서 살고 싶을 만큼 가치 있는 삶인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습니다.


반면, 니체의 질문은 삶의 ‘질 (quality)’을 향합니다. 그는 우리에게, 단 한 번뿐인 이 유한한 삶을, 기꺼이 영원히 반복하고 싶을 만큼 충만하고 의미 있게 살아내라고 명령합니다. 고통과 슬픔마저도 내 삶의 일부로서 긍정하고 사랑하며 (Amor fati, 운명애), 매 순간을 영원의 무게로 선택하고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비극과 아름다움은, 어쩌면 우리가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이기에, 매 순간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며 의미를 창조해 나가는 데 있는지도 모릅니다. 신이 되려는 트랜스휴머니즘의 오만한 꿈속에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가장 인간적인 것들을 잃어버리게 될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려는 자는 결국 공허한 영원 속을 헤매게 될 것이고, 자신의 유한한 운명을 사랑하는 자는 찰나의 순간 속에서 영원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9.8. 잃어버린 경이감: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만 보는 시선의 황폐함


어린 시절,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을 보며 그 끝없는 깊이에 압도당했던 순간을 기억하십니까? 작은 개미 한 마리가 낑낑대며 자기 몸보다 큰 과자 부스러기를 옮기는 모습을 몇 시간이고 넋을 잃고 바라보았던 기억은 어떻습니까? 그때, 세상은 우리에게 분석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의 집합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온통 신비와 놀라움으로 가득 찬, 거대하고 살아있는 마법과도 같았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대해 ‘경이감(Sense of Wonder)’을 느꼈습니다.


그 경이로운 세상을 보던 아이는 어디로 사라졌을까요? 우리는 언제부터 세상을 더 이상 놀라움의 대상이 아닌, 분석하고 통제해야 할 자원의 총합으로만 보게 되었을까요? 이 장에서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진보라는 이름의 질주’가 우리에게서 앗아간 가장 소중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경이감입니다.


데카르트의 유령은 우리에게 인간과 자연을 분리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측정과 계량의 횡포는 우리에게 숫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속삭였습니다. 기술적 해결주의는 세상의 모든 신비를 해결 가능한 공학적 문제로 축소시켜 버렸습니다.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시선, 그것은 바로 ‘정복자의 시선’입니다. 이 시선은 자연을 더불어 살아가야 할 동반자로 보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직 인간의 욕망을 위해 이용하고, 개발하고, 통제해야 할 대상으로만 여길 뿐입니다.


20세기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그의 저서 『기술에 대한 물음, Die Frage nach der Technik』에서, 현대 기술의 본질이 자연을 특정한 방식으로 보도록 강요하는 하나의 ‘틀짓기(Ge-stell, Enframing)’라고 통찰했습니다.


여기서 하이데거가 말하는 ‘틀’은, 우리가 미술관에서 그림을 감상하는 평화로운 ‘액자(frame)’가 아닙니다. 그가 말하는 ‘틀’은, 자연을 취조실의 용의자처럼 의자에 묶어놓고, “너에게서 우리가 빼낼 수 있는 유용한 에너지는 무엇인가?”라고 윽박지르는 폭력적인 ‘구속틀’에 가깝습니다.


이 폭력적인 틀 안에 갇힌 자연은, 더 이상 스스로의 목적을 가진 신비로운 존재가 아니라 오직 인간의 필요를 위해 대기하고 있는 자원의 총합, 즉 ‘부품 창고 (Bestand, Standing-reserve)’가 되어버립니다. 강은 더 이상 아름다운 풍경이 아니라 오직 수력 발전을 위해 에너지를 공급해야 하는 부품일 뿐이며, 숲은 목재라는 이름의 부품, 땅은 석탄이라는 이름의 부품으로 전락합니다. 현대 기술은 이처럼 세상의 모든 존재를 인간의 욕망을 위해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는 부품으로 재배치하고 명령하는 거대한 ‘틀’인 것입니다.


하이데거의 경고처럼, 자연을 단지 인간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자원의 총합으로만 보는 시선은 결국 우리 자신을 파괴하는 생태적 재앙으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그 외부적 파괴 이전에, 우리의 내면에서 먼저 황폐화가 일어납니다.


정복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우리는 더 이상 자연과의 깊은 교감을 나눌 수 없게 됩니다. 인간과 자연을 분리시키고 대상화하는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우리가 본래 지닌 상호연결성의 감각과 자연과의 교감 능력은 마비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숲의 생태계를 데이터로 분석할 수는 있지만, 더 이상 그 숲이 가진 고유한 영혼이나 신성함을 느끼지는 못합니다. 세상은 의미 없는 물질 덩어리로 전락해 버리고, 우리는 자연과 우주가 건네는 신성한 속삭임을 듣지 못하게 됩니다.


이 경이감의 상실은 우리의 영혼을 고립시키고, 삶을 더욱 건조하고 평평하게 만듭니다. 한 송이 들꽃의 아름다움에 대한 경이감, 깊은 침묵 속에서 느껴지는 우주적 평화, 즉 내가 세상과 분리되지 않았다는 충만감과 같은 체험들은, 효율성과 생산성의 논리 앞에서는 한가하고 비생산적인 감상으로 치부됩니다. 손에 잡히는 것들만이 전부라는 믿음 속에서, 보이지 않는 가치들, 특히 모든 존재를 하나로 묶는 사랑과 연민, 그리고 영적인 연결감과 같은 가치들은 점점 더 빛을 잃어갑니다.


결국, 진보라는 이름 아래 우리가 달려온 길의 끝에서 마주한 것은,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워졌을지 모르나, 영적으로는 극도로 빈곤해진 우리 자신의 모습입니다. 기술은 우리에게 전례 없는 힘을 주었지만, 그 힘을 현명하게 사용할 지혜의 원천인 경이감을 앗아갔습니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의 진보는, 더 빠르고 더 효율적인 기술을 개발하는 데에만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잃어버렸던 경이감을 되찾는 데 있습니다. 과학적 분석의 눈과 함께, 시인의 감성적인 눈으로 세상을 다시 바라보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잠시 멈춰 서서 밤하늘의 별을 보고, 이름 모를 들꽃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며, 이 거대한 우주 속에서 나의 존재가 얼마나 작고도 경이로운 기적인지를 다시 한번 느껴보는 것입니다.


이 경이감을 회복하는 행위야말로, 우리를 기술의 주인이자 노예로 만드는 기술만능주의의 오만한 질주를 멈추게 할 유일한 브레이크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분리와 정복의 논리에서 벗어나, 다시 한번 세상 모든 존재와 연결된 ‘주권적 자아’로 거듭나게 하는 치유의 시작이 될 것입니다.

이전 08화제8장: 평등이라는 이름의 유토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