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장: 언어라는 감옥 - 말이 어떻게 우리의 현실을

by 이호창

제14장: 언어라는 감옥 - 말이 어떻게 우리의 현실을 규정하는가


14.1. 이름 붙이기로서의 창조: 언어가 세계를 구분하고 정의하는 힘


갓 태어난 아기가 처음 세상을 마주하는 순간을 상상해 보십시오. 아기의 세계에는 아직 ‘책상’도, ‘의자’도, ‘엄마’도, 심지어는 ‘나’ 자신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경계가 없는 색깔과 소리, 감촉과 냄새의 거대한 혼돈의 강물이 흘러갈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 혼돈의 강물은 어떻게 우리가 아는 질서정연한 세계로 바뀌는 것일까요? 그 위대한 창조의 비밀은 바로, 우리가 매일같이 사용하는 ‘언어’ 속에 숨어 있습니다.


성경의 창세기에서, 신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합니다. “빛이 있으라”는 말씀이 떨어지자, 어둠과 빛이 나뉘고 세상이 시작됩니다. 이 신화는 언어가 가진 본질적인 힘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인간의 언어 역시, 이와 유사한 창조의 힘을 가집니다. 우리가 어떤 것에 ‘이름을 붙이는’ 행위는, 혼돈의 강물 속에서 그 대상을 건져 올려, 경계를 긋고, 독립적인 존재로서의 생명을 불어넣는 마술과도 같습니다. 이름이 없던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지만, 이름이 붙여지는 순간, 그것은 비로소 우리의 인식 세계 안으로 들어와 하나의 의미 있는 실체가 됩니다.


이처럼, 언어는 단순히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것들에 이름을 붙이는 중립적인 도구가 아닙니다. 오히려 언어는 우리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생각하며, 무엇을 느낄 수 있는지를 규정하는 거대한 ‘틀 (Framework)’ 그 자체입니다.


우리가 ‘무지개는 일곱 가지 색깔’이라고 배우는 순간을 생각해 봅시다. 사실 무지개는 무한한 스펙트럼으로 이어진 빛의 연속체입니다. 그 안에는 빨강과 주황 사이에도, 노랑과 초록 사이에도 이름 없는 무수한 색깔들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일곱 가지 색깔’이라는 언어의 틀은, 이 무한한 연속체를 일곱 개의 칸으로 인위적으로 나누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언어의 틀을 통해 세상을 보기 때문에, 실제로 무지개를 일곱 개의 뚜렷한 띠로 인식하게 됩니다. 언어가 우리의 지각을 창조한 것입니다.


이러한 언어의 창조적 힘은, 외부 세계뿐만 아니라 우리의 가장 깊숙한 내면, 즉 감정의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어떤 문화권에서는 우리가 가진 단어로는 정확히 표현할 수 없는 독특한 감정의 이름들이 존재하는데, 루마니아어의 ‘도르(dor)’라는 단어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도르’는 단순히 ‘그리움’이라고만 번역할 수 없는, 훨씬 더 깊고 복잡한 감정을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부재하는 사람이나 장소, 혹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의 한 시절을 향한 애틋한 갈망이면서, 동시에 그 대상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속에 퍼지는 아련한 슬픔과 달콤한 고통이 뒤섞인 감정입니다. 라틴어로 ‘고통(dolor)’을 의미하는 단어에서 유래했지만, 수백 년의 시간을 거치며 루마니아 사람들의 영혼 속에서 이처럼 특별한 의미의 옷을 입게 된 것입니다.


이 ‘도르’라는 단어의 존재는, 루마니아 사람들이 그 복잡 미묘한 감정의 파도를 하나의 뚜렷한 ‘감정의 집’으로 인식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마음을 섬세하게 들여다볼 수 있게 해줍니다. 만약 우리에게 이 단어가 없다면, 우리는 그저 막연한 슬픔이나 알 수 없는 그리움으로만 느낄 뿐, 그 감정의 독특한 결을 명확히 포착하고 타인과 공유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처럼 언어는 우리 내면의 풍경에 길을 내고, 이름 없는 감정의 땅에 깃발을 꽂는 탐험가와도 같습니다. 언어가 허락하는 만큼,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마음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창조의 힘에는 어두운 이면이 존재합니다. 우리가 어떤 것에 이름을 붙이는 순간, 우리는 그 무한한 가능성의 존재를 하나의 고정된 실체로 가두어 버립니다. ‘나무’라는 이름을 붙이는 순간, 우리는 바람과 교감하고 계절에 따라 변화하며 수많은 생명을 품고 있는 그 살아있는 존재의 신비로운 전체성 대신, ‘목재의 재료’ 혹은 ‘산소 공급원’이라는 인간 중심의 제한된 정의 속에 그것을 가두어 버립니다.


이데올로기는 바로 이 언어의 창조적 힘이자 동시에 폭력적인 힘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활용합니다. 이데올로기는 세상의 모든 것에 자신만의 이름표를 붙입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자유의 투사’라는 이름을, 다른 사람들에게는 ‘테러리스트’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어떤 경제 활동에는 ‘혁신적인 투자’라는 이름을, 다른 활동에는 ‘탐욕스러운 투기’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우리가 이 이데올로기의 언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그들이 만들어 놓은 흑백의 세계 속에 갇히게 되며, 다른 방식의 현실을 상상할 힘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언어는 우리가 세상을 짓는 집의 벽돌과도 같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안정된 삶의 공간을 제공하지만, 동시에 우리의 시야를 가두는 감옥의 벽이 될 수도 있습니다. 진정한 ‘주권적 자아’로 나아가는 길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단어라는 이름의 감옥 너머에 있는, 이름 붙일 수 없는 광활한 현실의 풍경을 다시 한번 바라보려는 노력에서 시작될 것입니다.


14.2. 완곡어법의 폭력: ‘강화된 심문’과 ‘자유 수호 작전’의 이면


외과 의사가 수술을 시작하기 전에, 가장 먼저 하는 일은 환자에게 마취제를 투여하는 것입니다. 마취는 환자가 수술의 끔찍한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함으로써, 의사가 자신의 임무를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이데올로기가 사용하는 ‘완곡어법 (Euphemism)’은 바로 이 마취제와도 같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끔찍한 현실을 직시할 때 느끼게 될 도덕적 고통과 양심의 가책을 마비시키는 ‘언어적 마취제’입니다. 권력은 이 마취제를 통해, 대중이 비명을 지르지 않는 동안 자신들의 폭력적인 수술을 감행합니다.


이 언어적 마취가 가하는 첫 번째 폭력은, 바로 ‘현실 자체에 대한 공격’입니다. 완곡어법은 단순히 불쾌한 현실을 부드럽게 표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예 그 현실을 우리의 인식 세계에서 추방하고, 거짓된 이미지로 대체하려는 시도입니다. 국가가 한 개인을 고문할 때, 그것을 ‘고문’이라고 부르는 대신 ‘강화된 심문 기법’이라고 부르는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물고문, 잠 안 재우기, 구타와 같은 구체적이고 끔찍한 폭력의 이미지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마치 과학적이고 통제된 절차인 것처럼 보이는 중립적인 이미지가 들어섭니다. 마찬가지로, 침략 전쟁에 ‘자유 수호 작전’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폭격으로 파괴된 도시와 죽어가는 아이들의 비극을 지워버리고, 그 자리에 정의로운 영웅의 서사를 그려 넣는 행위입니다.


이러한 언어의 마술은 우리의 비판적 사고를 무디게 만들고, 끔찍한 현실조차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도록 만듭니다. 우리는 더 이상 고문의 비인간성에 대해 분노하는 대신, ‘강화된 심문 기법의 법적 허용 범위’에 대한 기술적인 토론을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두 번째 폭력은, 바로 ‘우리 자신의 양심을 향한 공격’입니다. 이 마취된 언어에 익숙해질수록, 우리의 공감 능력은 서서히 마비됩니다. 전쟁에서 희생된 민간인들은 더 이상 슬퍼해야 할 한 명 한 명의 소중한 생명이 아니라, ‘부수적 피해 (Collateral Damage)’라는 차가운 통계 수치로만 인식됩니다. 직장에서 동료를 해고하는 행위는, 그의 가족이 겪게 될 고통을 직시하는 대신, ‘인력 구조의 효율화’라는 냉정한 경영학적 용어 뒤에 숨어버립니다.


언어학자 노엄 촘스키(Noam Chomsky)와 미디어 학자 에드워드 허먼(Edward S. Herman)은 그들의 기념비적인 저서 『동의의 제조, Manufacturing Consent』에서, 이 언어의 마술이 어떻게 거대한 사회 시스템으로 작동하는지를 폭로했습니다. 그들의 핵심적인 주장은 충격적입니다. 언론의 자유가 보장된 민주주의 사회에서조차, 대중 매체는 진실을 보도하는 중립적인 창이 아니라, 사실상 지배 엘리트(거대 기업과 정부)의 이익에 봉사하는 ‘프로파간다 시스템’으로 기능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통제가 전체주의 국가처럼 비밀경찰의 협박이나 노골적인 검열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대신, 민주주의 사회의 통제는 훨씬 더 교묘하게, 대중이 마치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자발적으로’ 권력의 의도에 동의하도록 만드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촘스키와 허먼은 이 거대한 ‘동의 제조 공장’이 다섯 개의 체계적인 ‘필터(Filter)’를 통해 어떻게 불순한 진실들을 걸러내고, 엘리트에게 유리한 뉴스만을 상품으로 생산해 내는지를 보여줍니다.


첫째는 ‘소유 구조’ 필터입니다. 오늘날의 거대 언론사들은 진실을 탐사하는 독립적인 기관이기 이전에, 더 큰 대기업의 일부로서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의 모회사나 다른 대기업들의 이익에 반하는 뉴스를 보도하기를 꺼리게 됩니다.


둘째는 ‘광고’ 필터입니다. 대부분의 언론사는 구독료가 아닌 광고 수입에 의존합니다. 진짜 고객은 독자가 아니라, 광고주인 셈입니다. 따라서 언론사는 광고주인 대기업의 심기를 건드릴 수 있는 비판적인 보도를 피하고, 소비를 부추기는 사회 분위기에 영합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셋째는, 뉴스의 ‘주된 재료’를 누가 공급하는가를 결정하는 ‘정보원 (Sourcing)’ 필터입니다. 매일같이 마감 시간에 쫓기는 기자들의 입장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그들은 제한된 시간과 예산 안에서 가장 ‘믿을 만한’ 뉴스를 만들어내야 합니다. 이때, 그들 앞에는 두 종류의 정보 공급원이 있습니다. 하나는 정부 부처의 대변인실이나 대기업의 홍보팀처럼, 언제나 깔끔하게 정리된 보도자료와 공식 입장을 대량으로, 그리고 무료로 제공해 주는 ‘중앙의 거대한 우물’입니다. 이 우물물은 마시기에 안전하고 (공식 정보이므로 보도에 대한 책임 부담이 적고), 길어오기에도 매우 편리합니다. 다른 하나는, 내부 고발자나 소외된 시민 단체, 혹은 독립적인 연구자들처럼, 사회 곳곳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작은 시냇물’입니다. 이 시냇물을 찾기 위해서는 직접 발로 뛰며 오랜 시간 탐사 취재를 해야 하고, 어렵게 얻은 정보라 할지라도 그 진위 여부를 스스로 검증해야 하는 위험 부담이 따릅니다. 당신이 바쁜 기자라면, 어떤 물을 더 자주 길어오게 될까요? 답은 명백합니다. 언론은 경제적 효율성의 논리에 따라, 자연스럽게 중앙의 거대한 우물, 즉 권력 기관이 제공하는 정보에 크게 의존하게 됩니다. 그 결과, 우리가 매일 접하는 뉴스의 상당 부분은, 사실상 정부나 기업이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가공하여 제공한 이야기를 거의 그대로 옮겨 적은 것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과정에서 언론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회를 감시하는 ‘감시견 (Watchdog)’이 아니라, 권력의 목소리를 충실히 받아쓰는 ‘속기사 (Stenographer)’의 역할을 하게 될 위험에 처하는 것입니다.


넷째는 ‘비난과 압력(Flak)’ 필터입니다. 만약 어떤 언론사가 용기를 내어 권력에 불리한 보도를 하면, 그들은 정부 기관이나 기업, 혹은 강력한 이익 집단으로부터 소송, 비난 성명, 광고 중단과 같은 엄청난 압박에 시달리게 됩니다. 이러한 ‘비난’은 다른 언론사들에게 일종의 경고가 되어, 스스로를 검열하게 만듭니다.


마지막은 ‘공공의 적’ 필터입니다. 과거에는 ‘반공주의’가, 오늘날에는 ‘테러와의 전쟁’이나 ‘국익’과 같은 이데올로기가 이 필터 역할을 합니다. 어떤 사안이든 ‘국익에 반한다’거나 ‘적을 이롭게 한다’는 딱지를 붙이면, 더 이상의 합리적인 토론은 불가능해지고 비판적인 목소리는 ‘비애국적’이라는 이름 아래 침묵하게 됩니다.


이처럼 다섯 개의 필터를 거쳐 우리에게 전달되는 뉴스는, 이미 여러 번 걸러져 지배 엘리트의 입맛에 맞게 가공된 ‘프로파간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강화된 심문’이나 ‘부수적 피해’와 같은 완곡어법은 바로 이 필터 시스템이 만들어낸 언어적 산물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완곡어법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따라 사용하는 순간, 우리 역시 이 거대한 ‘동의 제조 공장’의 무급 노동자가 되어, 이 폭력적인 시스템의 공모자가 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손을 더럽히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우리의 침묵과 동조는 권력이 휘두르는 칼날을 더욱 날카롭게 만드는 숫돌이 됩니다.


완곡어법의 가장 큰 폭력성은 그것이 우리의 도덕적 세계관 전체를 파괴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진실과 거짓, 선과 악의 경계는 흐릿해지고, 우리는 더 이상 무엇에 분노하고 무엇을 슬퍼해야 할지를 알지 못하는, 도덕적 혼수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따라서 이 언어적 마취에서 깨어나기 위한 유일한 해독제는, 사물의 진짜 이름을 되찾아 주려는 용기 있는 노력뿐입니다. ‘강화된 심문’을 ‘고문’이라고, ‘구조 조정’을 ‘해고’라고, ‘부수적 피해’를 ‘무고한 사람들의 죽음’이라고, 있는 그대로 부르는 것입니다. 이처럼 진실을 담은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단순히 정확하게 말하는 행위를 넘어, 마비되었던 우리의 양심을 깨우고, 왜곡된 세계를 바로잡으려는 가장 근본적인 저항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14.3. 프레임 전쟁: 현실에 대한 해석을 독점하려는 보이지 않는 전투


물이 절반쯤 담겨 있는 컵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이것을 보고 “물이 반이나 차 있네”라고 말하고, 다른 사람은 “물이 반밖에 없네”라고 말합니다. 컵 안에 담긴 물의 양이라는 객관적인 사실은 동일하지만, 어떤 ‘틀(Frame)’을 통해 그 사실을 바라보는가에 따라, 그것은 풍요의 상징이 되기도 하고 결핍의 상징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 사회, 특히 정치와 미디어의 세계는 바로 이 ‘틀’을 둘러싼 보이지 않는 전쟁터입니다. ‘프레임 전쟁’이란, 어떤 사건이나 현상에 대해 자신들에게 유리한 특정한 해석의 틀을 씌워, 대중의 인식을 지배하려는 이데올로기적 전투를 의미합니다. 이 전쟁의 승자는 총이나 칼이 아니라, 현실을 정의하는 ‘언어’를 손에 쥐게 됩니다.


이 보이지 않는 전투의 작동 원리를 가장 날카롭게 파헤친 인물은 인지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 (George Lakoff)입니다. 그는 그의 유명한 저서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Don't Think of an Elephant!』에서, 프레임이 단순한 말싸움이 아니라 우리의 뇌 신경회로 수준에서 작동하는 강력한 인식의 틀이라고 통찰했습니다.


레이코프가 책의 제목으로 던지는 이 유명한 화두를 생각해 보십시오. 제가 당신에게 “지금부터 절대로 코끼리를 생각하지 마세요”라고 말하면, 당신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무엇입니까?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코끼리’입니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않으려면, 먼저 코끼리가 무엇인지를 떠올려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프레임이 가진 무서운 힘입니다. 어떤 프레임을 부정하려고 시도하는 것 자체가, 오히려 그 프레임을 더욱 강력하게 활성화시키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입니다.


레이코프에 따르면, 프레임은 단순히 몇 개의 단어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사용하는, 무의식 속에 깊이 자리 잡은 정신적 구조물입니다. 이 구조물은 수많은 이야기와 은유, 그리고 감정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일단 어떤 프레임이 우리의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되면, 우리는 그 이후에 들어오는 모든 정보를 그 프레임에 맞춰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프레임과 맞지 않는 사실들은 무시되거나, 심지어는 보이지 않게 됩니다.


따라서 이 전쟁의 진짜 목표는 상대방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하나하나 반박하는 것이 아닙니다. 레이코프가 강조하듯, 상대방의 언어로 상대방의 주장을 반박하는 것은 이미 그 싸움에서 진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왜냐하면 상대방의 프레임 안에서 싸우는 한, 당신은 계속해서 ‘코끼리’를 떠올리게 만들 뿐이기 때문입니다. 진짜 승리는 아예 싸움의 규칙 자체, 즉 세상을 바라보는 ‘틀’ 자체를 우리에게 유리한 것으로 선점하는 데 있습니다.


이 보이지 않는 전투는 우리 일상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세금 정책을 생각해 봅시다. 정부가 부유층에 대한 세금을 깎아주려 할 때, 그들은 이 정책을 ‘부자 감세’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대신, 그들은 ‘투자를 활성화하고 모든 사람에게 혜택이 돌아가게 할 성장 동력’이라는 긍정적인 프레임을 씌웁니다. 반면, 반대편에서는 이 동일한 정책을 ‘부익부 빈익빈을 심화시키는 가진 자들을 위한 특혜’라는 부정적인 프레임으로 규정합니다. 어느 쪽의 프레임을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우리의 찬성과 반대는 거의 자동적으로 결정됩니다.


노동 문제는 어떻습니까? 기업이 직원을 더 쉽게 해고할 수 있도록 법을 바꾸려 할 때, 그들은 ‘해고의 자유’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기업의 경쟁력을 높이고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한 노동 유연화’라는 프레임을 사용합니다. 이 프레임 속에서, 노동자의 고용 불안이라는 고통은 가려지고, ‘유연성’이라는 긍정적인 가치만이 부각됩니다.


이처럼 프레임 전쟁의 핵심은, 자신들이 원하는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도록 현실의 어떤 측면은 밝게 조명하고, 어떤 측면은 어둠 속에 감추는 것입니다. 권력은 이처럼 교묘한 언어와 프레임을 통해 대중이 자발적으로 자신들의 의도에 동의하도록 만드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우리 편’과 ‘저쪽 편’이라는 이분법적 구도 속에서, 각 진영은 상대방의 프레임을 ‘선동’으로, 자신들의 프레임만을 ‘진실’이라고 주장하며 서로를 악마화합니다.


결국 이 프레임 전쟁의 시대에, ‘주권적 자아’로 살아가기 위한 가장 중요한 능력은 바로 ‘프레임 읽기’ 능력입니다. 어떤 뉴스를 접하거나 주장을 들을 때, 그 내용 자체에 빠져들기 전에 한 걸음 물러서서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지금 이 이야기는 어떤 틀 안에서 말해지고 있는가?”

“이 틀이 의도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고, 동시에 교묘하게 감추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 틀을 통해 가장 큰 이익을 얻는 사람은 누구인가?”


이 질문을 던지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프레임이라는 보이지 않는 감옥에 갇힌 수동적인 관객이 아닙니다. 우리는 프레임의 마법을 간파하고, 그 너머의 현실을 보려는 능동적인 사상가가 됩니다. 진정한 사유의 자유는, 주어진 두 개의 프레임 중 하나를 선택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프레임 자체를 벗어나 세상을 나 자신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힘에 있기 때문입니다.


14.4. 이분법적 언어: ‘우리 편’과 ‘악마’를 나누는 손쉬운 딱지 붙이기


어린 시절 우리가 즐겨보던 동화나 만화 영화의 세계를 떠올려 보십시오. 그 세계는 언제나 선명하게 둘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착하고 용감한 주인공 편과, 사악하고 비열한 악당 편. 우리는 주인공을 응원하고 악당을 미워하며, 그 명확한 흑백의 구도 속에서 안정감과 재미를 느꼈습니다. 이처럼 세상을 ‘선’과 ‘악’, ‘우리’와 ‘그들’이라는 두 개의 극단으로 나누어 이해하려는 것은, 어쩌면 복잡한 세상을 단순하게 파악하려는 우리의 가장 원초적인 정신적 습관일지도 모릅니다.


이데올로기와 프로파간다는 바로 이 우리의 어린아이와도 같은 정신적 습관을 교묘하게 파고들어, 대중을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로 사용합니다. 그것이 바로 ‘이분법적 언어 (Dichotomous Language)’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모든 복잡하고 미묘한 회색 지대를 지워버리고, 오직 흑과 백, 즉 ‘성스러운 우리 편’과 ‘악마 같은 저쪽 편’이라는 두 개의 선택지만을 남겨두는 언어의 마술입니다.


이 마술이 작동하는 방식은 지독하게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입니다. 바로 ‘손쉬운 딱지 붙이기 (Labeling)’입니다. 이데올로기는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복잡한 주장이나 인간적인 면모를 설명하려 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들의 이마에 단 하나의 단어로 이루어진, 지울 수 없는 낙인을 찍어버립니다.


한국의 정치 지형을 생각해 보십시오. 보수 진영은 종종 자신들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그들의 정책이나 철학을 비판하는 대신, ‘종북’ 혹은 ‘빨갱이’라는 단 하나의 딱지로 규정해 버립니다. 이 딱지가 붙는 순간, 그 사람은 더 이상 토론의 상대가 아니라, 국가의 안보를 위협하는 ‘절대 악’이 됩니다.


반대로, 진보 진영 역시 자신들의 반대편을 향해 ‘친일파’, ‘토착왜구’, 혹은 ‘독재의 후예’라는 딱지를 붙입니다. 이 딱지는 상대방을 합리적인 대화가 불가능한, 청산되어야 할 ‘역사적 죄인’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 ‘딱지 붙이기’가 가진 가장 깊고도 교활한 폭력의 메커니즘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20세기 프랑스의 위대한 철학자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가 그녀의 기념비적인 저서 『제2의 성, Le Deuxième Sexe』에서 던졌던 통찰 속으로 들어가 보아야 합니다. 그녀는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되고 근본적인 이분법, 즉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분석하며,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어떻게 지배하는지에 대한 보편적인 원리를 발견했습니다.


보부아르에 따르면, 역사의 무대 위에서 남성은 언제나 자기 자신을 ‘주체(The Subject)’이자 ‘절대자(The Absolute)’로 설정해 왔습니다. 즉, ‘인간’이라고 말할 때, 그 기준이 되는 것은 언제나 남성이었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정의하는 완전하고 독립적인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이 무대 위에서 여성은 어떤 존재가 될까요? 여성은 남성과 동등한 또 다른 주체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오직 남성과의 관계 속에서만 정의되는 존재, 즉 ‘타자(The Other)’가 되었습니다. ‘타자’란, 주체가 아니면서 주체에 의해 규정되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여성은 ‘남성이 아닌 존재’, ‘남성에게 결핍된 존재’, ‘남성의 필요를 위해 존재하는 부차적인 존재’로 정의되었습니다. 마치 이야기 속의 주인공(주체)이 자신의 위대함을 드러내기 위해 필요한, 배경이나 조력자, 혹은 장애물(타자)처럼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분법적 언어가 작동하는 가장 근본적인 방식입니다. 그것은 상대를 나와 동등한 주체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정체성을 정의하고 나의 우월함을 확인하기 위한 부정적인 거울로 만들어 버립니다.


바로 이와 똑같은 어두운 마법이, 우리가 ‘종북’이나 ‘친일파’와 같은 딱지를 붙일 때 작동합니다. 그 딱지를 붙이는 순간, ‘우리’는 애국적이고 정상적인 ‘주체’가 됩니다. 그리고 그 딱지가 붙은 상대방은,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시켜주기 위해 존재하는 비정상적이고 위험한 ‘타자’가 되어버립니다.


이 딱지들은 상대방의 입을 막고, 그의 존재 자체를 악마화하는 ‘사고를 멈추게 하는 주문’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에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더 이상 복잡한 생각과 감정을 가진 한 명의 인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단지 ‘종북’이라는, 혹은 ‘친일파’라는 이름의, 우리가 경멸하고 배척해야 할 하나의 ‘대상’일 뿐입니다. 우리는 단지 그에게 붙은 딱지를 보고, 그를 미워하고 경멸해야 할 ‘적’으로 인식할 뿐입니다.


이처럼 ‘우리 편’과 ‘저쪽 편’이라는 이분법적 구도 속에서 우리는 상대방을 악마화하고, 진솔한 대화와 이해 대신 혐오와 배척의 감정을 키워나갑니다. 이 이분법적 언어가 가진 진짜 폭력성은, 그것이 우리 사회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내전 상태로 몰아넣는다는 점에 있습니다.


정치적 이념, 경제적 계층, 성별, 세대, 지역 등 온갖 종류의 잣대로 사람들을 나누고 서로 반목하게 만듦으로써, 정작 이 모든 분열을 조장하고 이득을 취하는 권력의 실체로부터 우리의 시선을 돌리게 합니다. 우리는 우리와 아주 약간 다른 이웃을 ‘악마’라고 비난하며 싸우는 데 모든 에너지를 소모하는 동안, 정작 우리 모두를 고통스럽게 하는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불평등, 부패 등)를 해결하기 위한 공동의 노력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이러한 분열은 우리 모두가 본질적으로 하나의 인간 가족임을 망각하게 만들고, 공동의 문제 해결을 위한 연대의 가능성을 차단함으로써 결국 우리 모두를 약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결국 이분법적 언어는, 우리를 생각의 게으름 속에 머물게 하고, 가장 원초적인 증오의 감정을 자극하여, 우리를 조종하기 쉬운 존재로 만드는 가장 값싼 마약입니다. 진정한 ‘주권적 자아’로 나아가는 길은, 이 흑백의 세계가 사실은 수많은 색깔의 회색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복잡한 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데 있습니다. 그것은 상대방에게 붙은 편리한 딱지 뒤에 숨겨진, 나와 똑같이 고뇌하고 희망하는 한 명의 인간을 보려는 용기 있는 노력입니다.


14.5. 경전 해석의 독점권과 신성 모독이라는 낙인


모든 위대한 종교와 이데올로기의 중심에는 한 권의 신성한 ‘책’이 놓여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일 수도, 쿠란일 수도, 혹은 『자본론』이나 지도자의 어록일 수도 있습니다. 이 책들은 세상의 모든 진리와 구원의 길을 담고 있다고 약속됩니다. 하지만 책은 스스로 말하지 않습니다. 책은 누군가에 의해 읽히고, 해석되고, 선포될 때 비로소 살아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언어의 감옥을 지키는 가장 강력한 권력이 탄생합니다. 그것은 바로 ‘경전 해석의 독점권’입니다.


이 권력을 손에 쥔 소수의 사제 계급이나 당의 중앙위원회는, 자신들만이 이 신성한 텍스트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고 전달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고 선언합니다. 그들은 진리의 수호자이자, 평범한 대중과 신성한 말씀 사이를 연결하는 유일한 다리가 됩니다. 중세 가톨릭교회가 라틴어로 된 성경을 평신도들이 직접 읽는 것을 금지했던 역사는, 이 해석의 독점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가장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언어를 독점하는 것은 곧 의미를 독점하는 것이고, 의미를 독점하는 것은 곧 영혼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이 견고한 ‘언어의 성채’를 지키기 위해, 권력이 사용하는 가장 무서운 무기가 바로 ‘신성 모독 (Blasphemy)’이라는 이름의 낙인입니다. 만약 당신이 이 성채 안에서, 감히 경전의 공식적인 해석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전혀 다른 의미를 발견했다고 주장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당신은 더 이상 토론의 상대가 아닙니다. 당신은 신의 말씀을 더럽히고, 공동체의 신성한 질서를 파괴하려는 사악한 의도를 가진 ‘이단자 (Heretic)’이자 ‘반역자’가 됩니다.


이 ‘신성 모독’이라는 낙인은 단순한 비판과는 차원이 다른 폭력을 행사합니다.


첫째, 그것은 모든 합리적인 토론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합니다. 당신의 주장은 더 이상 논리적으로 검토될 가치가 없는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주장은 ‘틀린’ 것이 아니라, ‘사악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17세기, 지동설을 주장했던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종교재판소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이유는 그의 과학적 증거가 부족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주장이 성경의 문자적 해석이라는 절대적인 진리를 거스르는 ‘신성 모독’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신성 모독이라는 딱지는, 상대방의 입에 재갈을 물리는 가장 효과적인 주문입니다.


둘째, 그것은 당사자를 공동체로부터 완전히 고립시키는 ‘사회적 사형 선고’와도 같습니다. 이단자로 낙인찍힌 사람은 더 이상 공동체의 일원이 아닙니다. 그는 모두가 피하고 경계해야 할 위험한 ‘오염원’이 됩니다. 친구와 이웃은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그는 사회적으로 완전히 고립됩니다.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듯, 인간에게 ‘추방에 대한 공포’가 얼마나 근원적인지를 생각해 볼 때, 이 사회적 죽음의 위협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감히 다른 생각을 품지 못하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억제책이 됩니다.


마지막으로, 이 낙인은 당사자의 내면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어 스스로를 파괴하게 만듭니다. 오랜 시간 공동체의 믿음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며 살아온 사람에게, 자신이 신성 모독을 저질렀다는 비난은 견디기 힘든 죄책감과 자기 의심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는 정말로 자신이 악마의 유혹에 빠진 것은 아닌지, 자신의 이성이 타락한 것은 아닌지를 고뇌하며, 결국에는 스스로의 생각을 철회하고 권위 앞에 무릎 꿇게 될지도 모릅니다.


위와 같이, 경전 해석의 독점권과 신성 모독이라는 낙인은, 하나의 ‘정답’만을 강요하고 모든 ‘질문’을 금지함으로써, 인간의 영혼을 획일화하고 길들이는 가장 정교한 통제 시스템입니다. 이 시스템 안에서, 우리는 스스로 경전을 읽고 그 의미를 찾아가는 용감한 순례자가 아니라, 사제가 들려주는 해석만을 수동적으로 받아 적는 순종적인 학생으로 남도록 요구받습니다. 진정한 ‘주권적 자아’로 나아가는 길은, 바로 이 독점된 해석의 권위에 도전하고, 신성 모독이라는 낙인의 공포를 넘어, 기꺼이 나 자신의 이성과 양심으로 신성한 텍스트와 직접 대면하려는 용기 있는 이단자가 되는 데서 시작될 것입니다.


14.6. 침묵의 강요: 말해질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하는 이유


가족들이 모인 명절 저녁 식사 자리를 떠올려 보십시오. 모두가 알고 있지만, 아무도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그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가족의 오랜 상처일 수도 있고, 누구도 동의하지 않는 정치적 신념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 이야기 주변을 아슬아슬하게 맴돌며, 마치 그곳에 거대한 구멍이라도 파인 것처럼 조심스럽게 피해 갑니다. 이 어색하고 무거운 침묵. 그것은 단순히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어떤 말들은 평화로운 식사를 망치고, 관계를 파괴하며, 이 공동체의 안정을 위협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암묵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만들어지는 ‘전략적인 침묵’입니다.


이처럼 우리 일상의 작은 관계 속에서도 ‘말해질 수 없는 것들’은 존재합니다. 그런데 이 침묵의 규칙이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거대한 이데올로기의 영역으로 확장될 때, 그것은 더 이상 어색한 분위기의 문제가 아니라, 영혼을 억압하는 가장 교묘하고도 강력한 통제의 기술이 됩니다. 권력의 진짜 힘은, 사람들이 무엇을 말하게 만드는가보다, 사람들이 무엇을 ‘말하지 못하게’ 만드는가에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20세기의 위대한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초기 저서 『논리-철학 논고,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의 마지막 문장을 이렇게 썼습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이 문장은 종종 오해받곤 하지만, 그의 본래 의도는 결코 특정 주제에 대한 발언을 금지하려는 정치적인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언어라는 지도가 가진 명백한 한계를 인정하라는, 지극히 겸손하고도 심오한 철학적 명제였습니다.


비트겐슈타인에게 언어는 세상의 ‘사실들’을 그려낼 수 있는 논리적인 그림과도 같았습니다. “책상이 갈색이다” 혹은 “비가 내린다”와 같이, 우리가 명확하게 말하고 증명할 수 있는 세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 언어라는 지도가 결코 그려낼 수 없는, 훨씬 더 광활한 영역이 존재함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윤리, 미학, 그리고 신비와 같은 ‘말할 수 없는 것들’의 영역입니다. 우리는 한 편의 위대한 음악이 주는 감동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는 행위의 숭고함에 대해 말하려 애쓸 수는 있지만, 언어는 결코 그 체험의 본질 자체를 온전히 담아내지 못합니다. 그것은 마치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킬 수는 있지만, 손가락이 결코 달이 될 수는 없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비트겐슈타인의 침묵에 대한 요구는, 언어의 한계 너머에 있는 이 신성하고 말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해서는, 섣부른 말로 그것을 왜곡하기보다 경건한 침묵으로 존중해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데올로기는 이 심오한 철학적 명제를 가장 교활한 방식으로 뒤집어, 권력의 무기로 사용합니다. 이데올로기는 ‘말할 수 없는 신비’의 영역을 존중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에 불편한 ‘말해서는 안 되는 금기’의 영역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훔쳐 와, 그들의 세계에서는 다음과 같은 준엄한 명령이 울려 퍼지게 합니다. “권력이 말하지 말라고 명한 것에 관해서는, 반드시 침묵해야만 한다.”


이 왜곡된 명령 아래에서, 침묵은 더 이상 경건한 존중의 표현이 아닙니다. 그것은 공포에 기반한 복종의 증거가 됩니다.


그렇다면 이데올로기는 왜 특정 주제에 대해 이토록 필사적으로 침묵을 강요하는 것일까요?


첫째, 모든 견고한 성벽에는 결코 건드려서는 안 되는 단 하나의 주춧돌이 있습니다. 이데올로기의 세계에서, 그 주춧돌은 바로 의심이 허용되지 않는 ‘신성한 전제’입니다. 예를 들어, 한 국가의 정당성은 ‘우리 민족은 단일하고 위대하다’는 신화 위에 세워져 있을 수 있습니다. 이때, 이 민족이 사실은 역사적으로 수많은 다른 민족과 피가 섞였다는 역사적 진실을 말하는 것은, 단순히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국가라는 성벽의 주춧돌을 뽑아내려는, 체제 전체를 위협하는 ‘위험한 발언’이 됩니다. 따라서 권력은 이러한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금기시하고, 그 주변에 거대한 침묵의 벽을 쌓아 올립니다.


둘째, 침묵은 집단의 통일성을 유지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만약 모든 사람이 자신의 솔직한 생각을 자유롭게 말하게 된다면, 공동체 안의 수많은 균열과 갈등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권력은 이러한 ‘잡음’을 원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들은 모두가 한목소리로 노래하는 조화로운 합창을 원합니다. 따라서 합창의 멜로디와 어울리지 않는 불협화음을 낼 수 있는 모든 주제는 아예 연주되지 않도록 처음부터 악보에서 지워버립니다. 이러한 주제로는 소수자의 인권 문제, 과거사에 대한 다른 해석, 지도자의 실수 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침묵은 권력의 부조리함을 은폐하는 가장 편리한 장막입니다. 권력은 언제나 빛나는 성공만을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만, 그 이면에는 언제나 어두운 실패와 부끄러운 비밀이 존재합니다. 침묵의 강요는, 바로 이 어둠의 영역으로 빛이 들어오는 것을 막는 두꺼운 커튼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말해야 하고 무엇을 말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생각조차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배우게 됩니다.


언어라는 감옥의 마지막 벽은, 외부에서 강요된 침묵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자신의 입을 막는 내면의 침묵입니다. 우리는 무엇이 금기시된 주제인지를 학습하고, 그 선을 넘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검열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해방은, 바로 그 금기시된 단어를, 그 말해질 수 없었던 진실을, 마침내 용기 내어 내뱉는 바로 그 순간에 시작됩니다. 한 아이가 “임금님은 벌거벗었다!”고 외쳤을 때, 거대한 환상의 성이 무너져 내렸던 것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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