숟가락은 없다

by 이호창

숟가락은 없다


삶의 무게가 어깨를 짓누르는 순간, 누구나 한 번쯤 느껴보았을 것입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불안, 예상치 못한 상실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 또는 세상의 부조리에 대한 분노가 마음을 뒤덮는 그 느낌. 이러한 고통은 때때로 우리를 무너뜨리려 하지만, 만약 이 모든 것이 실은 우리의 마음이 만들어낸 그림자에 불과하다면 어떨까요.


이 급진적인 질문은 단순히 고통을 피하려는 소극적인 몸부림이 아니라, 고통의 본질을 꿰뚫어 봄으로써 삶의 주도권을 되찾으려는 인간 영혼의 가장 위대한 탐구입니다. 동서고금의 수많은 현자들이 바로 이 탐구의 길 위에서 각자의 지혜를 밝혔습니다. 그중에서도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현자들이 닦아놓은 스토아 철학의 길은, 외부의 혼란이나 감정의 동요에 흔들리지 않는 평정의 상태, 즉 아파테이아(apatheia)를 추구하며 우리에게 강력한 나침반을 제공합니다.


아파테이아(apatheia, ἀπάθεια)는 스토아 철학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마음의 상태로, 보통 ‘부동심(不動心)’ 혹은 ‘평정심’으로 번역됩니다. 이 단어는 ‘없다(a-)’는 부정 접두사와 ‘고통’이나 ‘격정’을 의미하는 ‘파토스(pathos)’가 결합된 말로, 문자 그대로는 ‘격정이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스토아 철학이 추구하는 아파테이아(apatheia)에 이르는 길에서, 우리는 동서양의 지혜를 빌려 이 진리를 탐색할 수 있습니다. 불교 유식학의 아뢰야식(ālaya-vijñāna), 힌두교의 마야(māyā) 세계, 그리고 현대 문화의 상징인 영화 『매트릭스, The Matrix』 속 숟가락을 구부리는 아이의 비유를 통해, 모든 고통이 결국 나의 환영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 깨달음은 단순한 지적 유희가 아니라, 삶의 본질을 재구성하는 치유의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스토아 철학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현자들이 세운 삶의 지침으로, 에픽테토스나 세네카 같은 이들이 강조하듯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며 자신의 내면을 다스리는 것을 핵심으로 삼습니다.


여기서 그들이 추구한 아파테이아는 감정이 메말라버린 무감각의 상태가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분노, 두려움, 탐욕과 같은 우리를 병들게 하는 격정(파토스)으로부터의 자유이며, 오히려 그 자리에 깊은 기쁨과 이성적인 의지와 같은 건강한 감정(유파테이아)이 피어나는, 영혼의 가장 건강하고 충만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에서 선원이 파도를 탓하며 절망하는 대신, 바람의 방향을 읽고 돛을 조정하듯, 우리는 외부 사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되 그것에 대한 우리의 파괴적인 판단에 휘말리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평정을 어떻게 이룰 수 있을까요? 스토아인들은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에 대한 우리의 해석이 고통을 낳는다고 말하며, 그 해석의 뿌리를 파고들 것을 요청합니다. 이 지점에서 동양의 지혜가 빛을 발하며, 그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줍니다.


불교의 유식(唯識) 사상이 제시하는 아뢰야식은 ‘모든 경험의 뿌리가 되는 마음의 창고’입니다. 이는 마치 거대한 영화 필름 보관소와도 같습니다. 우리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그리고 과거의 수많은 생을 거치며 경험한 모든 행위와 생각, 감정들은 ‘종자(bīja, 비자)’라는 이름의 필름 조각이 되어 이 창고에 차곡차곡 쌓입니다. 이 아뢰야식이라는 보관소는 우리 의식의 가장 깊은 곳에 있어 평소에는 그 존재를 알지 못하지만, 그것은 끊임없이 작동하며 우리에게 현실이라는 영화를 상영합니다.


당신이 아침에 커피를 마시며 창밖을 바라볼 때, 그 풍경은 단순한 시각적 자극이 아닙니다. 과거의 추억, 미래의 걱정, 그리고 무의식적인 편견이라는 오래된 필름 조각들이 현재의 빛과 만나 하나의 ‘현실’이라는 영상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비판적인 말 한마디가 유독 당신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내는 이유는, 그 말 자체에 칼이 들어있어서가 아니라, 당신의 아뢰야식 창고에 이미 ‘나는 부족하다’거나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는 슬픈 영화 필름(열등감의 종자)이 보관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비판은 단지 영사기의 스위치를 켰을 뿐, 영화를 상영한 것은 결국 당신 자신의 마음입니다. 이처럼 고통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창고에서 상영되는 오래된 영화입니다.


이 통찰은 힌두교의 마야(māyā) 세계라는 개념과 깊이 공명합니다. 마야는 베다 철학에서 우주를 덮고 있는 거대한 ‘환상의 장막’을 뜻합니다. 세상의 모든 다채로운 현상들은 마야의 춤처럼 아름답고 생생하게 보이지만, 그것은 궁극적인 실재가 아닌 일시적인 환영이라는 것입니다.


힌두교의 현자들은 이 우주에 존재하는 유일한 실재는 ‘브라만(Brahman)’, 즉 무한하고 영원한 우주적 의식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 각자의 내면에 있는 진정한 자아, 즉 ‘아트만(Ātman)’이 바로 그 브라만과 다르지 않다고 가르칩니다.


우리는 마치 거대한 바다(브라만)의 일부인 하나의 파도(아트만)와 같습니다. 파도는 잠시 자신을 독립된 개체로 착각하지만, 그 본질은 바다 그 자체입니다. 마야는 바로 이 파도가 자신이 바다라는 사실을 잊게 만드는 환상의 물안개입니다.


철학자 상카라의 유명한 비유에서는 어둠 속에서 땅에 놓인 밧줄을 뱀으로 착각하여 공포에 질리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의 심장은 실제로 뛰고, 식은땀도 흘리지만, 그 공포의 원인인 뱀은 실재하지 않습니다. 지혜의 빛을 비추어 그것이 밧줄임을 깨닫는 순간, 공포는 눈 녹듯 사라집니다.


스토아의 관점에서 보자면, 아파테이아는 바로 이 마야의 장막을 걷어내고 모든 사건을 밧줄로 바로 보는 과정입니다. 재정적 손실이나 관계의 단절과 같은 외부 사건들은 나를 위협하는 독사가 아니라, 그저 내 삶에 놓여있는 하나의 밧줄, 즉 나의 본질을 해치지 못하는 중립적인 사실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 고대의 지혜들은 현대 문화의 상징인 영화 『매트릭스』 속 숟가락을 구부리는 아이의 장면에서 가장 명쾌한 모습으로 되살아납니다. 주인공 네오가 자신의 정신을 집중하여 숟가락을 구부리려 애쓰는 동안, 한 어린 동자승은 조용히 말합니다.


“숟가락을 구부리려 하지 마세요. 그건 불가능해요. 대신 진실을 깨달으려고 노력하세요.”


네오가 묻습니다.


“어떤 진실?”


아이는 답합니다.


“숟가락은 없다는 것. 그러면 구부러지는 것은 숟가락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라는 걸 알게 될 거예요.”


이 말은 매트릭스가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만든 가상 세계라는 설정 속에서, 모든 물질적 실재가 코드의 환영임을 드러냅니다. 숟가락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단단한 실체가 아니며, 그것을 구부리는 행위는 마음의 인식을 바꾸는 것입니다. 이는 아뢰야식의 종자가 만들어내는 인식의 환영, 마야의 장막이 드리운 우주의 착각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고통 역시 이 환영의 일부입니다. 매트릭스에서 네오가 날아오는 총알을 멈추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총알보다 빨라져서가 아니라 총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스토아의 아파테이아는 바로 이 깨달음의 실천입니다. 스토아 학파의 한 철학자 에픽테토스가 노예의 몸으로 완전한 자유를 누렸듯이, 우리는 이 환영의 세계 속에서 진정한 평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지혜를 엮어, 우리는 외부의 폭풍 속에서 내면의 평화를 지키는 구체적인 삶의 기술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지적 유희가 아니라, 매일 실천할 수 있는 영혼의 훈련법입니다.


첫째, ‘마음의 창고 정리하기’입니다. 이는 스토아의 저녁 일지 쓰기와 불교의 명상을 결합한 것입니다. 매일 잠자리에 들기 전, 잠시 고요히 앉아 그날 하루 동안 당신의 마음을 흔들었던 감정들을 되짚어보십시오. 분노나 슬픔이 일어났다면, 그 감정을 일으킨 외부의 사건(A)과, 그 사건에 대한 당신의 자동적인 생각(B), 그리고 그 결과로 나타난 감정(C)을 분리해보십시오. 그리고 자문해보십시오.


“이 감정을 일으킨 진짜 원인은 무엇인가? 내 마음의 창고, 아뢰야식에 어떤 오래된 필름(종자)이 이 영화를 상영했을까?”


이처럼 자신의 감정 패턴과 그 뿌리를 자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과거의 습기가 현재를 지배하는 힘을 약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는 아뢰야식이라는 창고를 매일 청소하여, 낡고 해로운 씨앗들이 싹트지 못하도록 관리하는 것과 같습니다.


둘째, ‘세상을 밧줄에 불과하다고 보기’입니다. 이는 힌두교의 마야 사상을 일상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하루를 살아가면서 당신을 괴롭히는 사건들을 만날 때마다, 마음속으로 그것을 ‘뱀이 아닌 밧줄’로 여기는 연습을 하십시오. 예를 들어, 직장에서의 혹독한 비판이나 경쟁에서의 실패를 만났을 때, 그것이 당신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독사라고 여기는 대신 이렇게 말해 보십시오,


“이것은 독사가 아니라 그저 내 앞에 놓인 하나의 밧줄일 뿐이다. 이것은 마야의 춤 속 한 장면이며, 나의 진정한 자아(아트만)를 해칠 수 없다”


이 연습은 사건과 나 사이에 안전한 거리를 만들어주며, 감정의 폭풍이 일어나기 전에 그것을 잔잔한 파문으로 가라앉히는 힘을 길러줍니다.


셋째, ‘숟가락은 없다고 깨닫기’입니다. 이는 매트릭스의 비유를 삶의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사용하는 것입니다. 피할 수 없는 고통, 예를 들어 극심한 슬픔이나 불안이 당신을 덮칠 때, 그것과 싸우거나 그것을 ‘구부리려’ 애쓰지 마십시오. 대신, 아이의 지혜를 빌려 당신의 인식을 전환하십시오. 그리고 마음속으로 조용히 선언하십시오.


“이 고통은 없다. 이것은 실체가 아니라, 나의 마음이 만들어낸 하나의 강렬한 인식일 뿐이다.”


이는 고통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나의 것’으로 동일시하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고통을 관찰하되 그것에 빠져들지 않을 때, 우리는 고통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훈련은 결국 ‘고통은 객관적인 실재가 아니라 나의 주관적인 환영’이라는 하나의 진리로 모아집니다. 이 깨달음은 결코 쉽지 않으며, 때때로 우리는 환영의 강력한 힘에 다시 사로잡히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뢰야식을 청소하고, 마야의 장막을 걷어내며, 숟가락은 없다고 깨닫는 모든 순간마다, 우리는 더 자유로워지고 더 강해집니다. 결국 모든 것이 마음의 그림자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절망이 아닌 무한한 희망을 줍니다. 내 마음이 고통을 만들어냈다면, 내 마음은 또한 평화를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여정 속에서 우리는 스토아의 현자처럼 자연의 일부가 되어, 고요한 평정 속에서 존재의 깊이를 온전히 만끽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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