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날의 코너킥 : 하나의 골, 두 개의 진실

by DrLeeHC

아스날의 코너킥 : 하나의 골, 두 개의 진실



한 인간의 환희가 다른 인간의 절망이 되는 순간, 축구장은 거대한 철학의 무대가 됩니다.


2025년 8월 17일, 올드 트래포드에서 펼쳐진 아스날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맞대결에서 리카르도 칼라피오리의 골은 그런 순간이었습니다. 코너킥 상황, 데클란 라이스 (Declan Rice)의 공이 휘어지며 날아들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골키퍼 알타이 바인디르 (Altay Bayındır)가 이를 펀칭하려다 실패합니다. 그 사이 윌리엄 살리바 (William Saliba)가 골키퍼를 등지고 서 있으며, 칼라피오리가 헤더로 골망을 흔듭니다. 이 골이 골키퍼 차징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란이 불꽃처럼 타오른 이유는, 규칙의 경계가 모호한 그곳에서 인간의 판단이 어떻게 진실을 왜곡하거나 드러내는지에 있습니다. 이 문제를 철학적으로 탐구하는 것은, 단순한 스포츠 분석이 아니라 삶의 불확실성과 도덕적 딜레마를 직시하는 여정이 됩니다.


먼저, 당신의 일상에서 출발해 보겠습니다. 아침에 커피를 마시며 뉴스를 보다가, 친구와 의견이 엇갈리는 순간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건 명백한 실수야"라고 당신이 말할 때, 친구는 "아니, 의도적이지 않았어"라고 반박합니다. 이 작은 대화 속에 이미 철학의 씨앗이 싹트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같은 사건을 보고도 전혀 다른 해석을 내립니다. 각자의 경험, 가치관, 그리고 감정이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필터를 씌우기 때문입니다. 축구 경기장의 열광적인 분위기 속에서는 이 필터가 더욱 두꺼워집니다. 내가 응원하는 팀의 유니폼 색깔은 세상을 바라보는 창의 색깔이 됩니다. 칼라피오리의 골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됩니다. 그것은 단 하나의 물리적 사건이었지만, 수십만 개의 다른 진실로 쪼개졌습니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우리는 규칙의 책장을 넘어서,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조건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합니다.


첫 번째 여정은 ‘진실은 과연 존재하는가’라는 오래된 질문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 (Platon)은 우리가 사는 이 세계가 완벽한 진리의 세계인 ‘이데아 (Idea)’의 불완전한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저서 『국가 (Politeia)』에 나오는 ‘동굴의 비유’를 생각해 보십시오. 평생 동굴에 묶여 벽에 비친 그림자만 보고 살아온 죄수들은 그 그림자가 세상의 전부라고 믿습니다.


축구 규칙, 즉 국제축구평의회 (IFAB)의 법칙 12조에 명시된 골키퍼 보호 규정은 ‘공정한 경합’이라는 이데아를 현실에 구현하려는 시도입니다. 하지만 그라운드 위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와 같습니다. 심판, 선수, 관중은 각자의 자리에서 이데아의 불완전한 그림자를 볼 뿐입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감독 루벤 아모림 (Ruben Amorim)이 “명백한 파울”이라고 외칠 때, 그는 자신이 ‘공정’이라는 이데아의 진실을 보았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아스날 팬의 눈에는 그저 정당한 경합이라는 또 다른 그림자가 보일 뿐입니다.


VAR (비디오 판독 시스템)이라는 현대 기술은 우리를 동굴 밖으로 끌어내어 이데아의 태양을 직접 보게 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현실은 달랐습니다. 느린 화면 속에서 정지된 이미지는 오히려 새로운 그림자를 만들어냈고, 우리는 여전히 동굴 안에서 무엇이 진짜 실체인지 논쟁하고 있습니다.


이 논쟁은 우리를 두 번째 여정, 즉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라는 인식의 문제로 안내합니다.


근대 철학의 아버지 르네 데카르트 (René Descartes)는 모든 것을 의심한 끝에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cogito ergo sum)”라는 단 하나의 확실한 진실에 도달했습니다. 칼라피오리의 골 상황에서 우리가 확실히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공이 골라인을 넘었다는 사실뿐입니다. 윌리엄 살리바의 등이 알타이 바인디르의 움직임을 ‘방해’했는지 여부는 해석의 영역에 남습니다.


여기서 프리드리히 니체 (Friedrich Nietzsche)의 날카로운 통찰이 빛을 발합니다. 니체는 그의 저서 『선악의 저편 (Jenseits von Gut und Böse)』에서 객관적인 진실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해석만이 존재할 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모든 해석의 배후에는 ‘권력에의 의지 (Wille zur Macht)’, 즉 자신의 힘을 확장하고 관철하려는 욕망이 숨어 있습니다.


아스날 팬이 그 골을 정당하다고 해석하는 것은 단순히 경기를 이기고 싶은 마음을 넘어, 자신의 관점, 즉 자신의 ‘진실’을 세상에 관철시키려는 권력 의지의 표현입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팬이 불공정함을 주장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심판의 판정에 의해 빼앗긴 권력을 되찾기 위해 ‘파울’이라는 해석을 무기로 삼습니다.


이처럼 그라운드는 진실을 찾는 장소가 아니라, 각자의 진실을 내세워 싸우는 거대한 투기장으로 변모합니다.


그렇다면 이 싸움에서 우리는 어떻게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은 우리를 세 번째 여정, 도덕과 윤리의 세계로 이끕니다.


이마누엘 칸트 (Immanuel Kant)는 우리에게 ‘정언명법 (kategorischer Imperativ)’이라는 엄격한 도덕 법칙을 제시했습니다. “네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법칙 수립의 원리가 될 수 있도록 행위하라.”


이 원칙을 살리바의 행동에 적용해 봅시다. 만약 ‘코너킥 상황에서 공격수는 골키퍼의 바로 앞에 등을 지고 서도 좋다’는 것이 보편적 법칙이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도 모든 코너킥은 골키퍼를 무력화시키려는 시도로 가득 찰 것이고, 이는 축구의 근본을 흔들 수 있습니다. 반대로 ‘골키퍼 근처에서의 모든 신체 접촉은 파울이다’를 보편적 법칙으로 삼는다면, 축구는 역동성을 잃고 생명력 없는 체스 게임이 될 것입니다.


칸트의 엄격한 법칙은 이 딜레마를 해결해주지 못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eles)의 지혜를 빌려야 합니다. 그의 저서 『니코마코스 윤리학 (Ethika Nikomacheia)』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덕(德)이란 과도함과 부족함 사이의 ‘중용 (mesotēs)’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용기는 만용과 비겁함 사이의 중용이고, 절제는 방종과 무감각 사이의 중용입니다. 심판의 역할은 바로 이 중용을 찾는 것입니다.


살리바의 행위가 정당한 위치 선점이라는 ‘부족함’과 부당한 방해라는 ‘과도함’ 사이의 어디에 위치하는지를 찰나의 순간에 판단해야 합니다. 심판의 휘슬은 단순한 규칙 적용이 아니라, 혼돈 속에서 균형을 찾아내려는 고독한 윤리적 결단입니다.


결국 우리는 마지막 질문에 도달합니다. 이 모든 혼돈과 불확실성, 그리고 끝없는 논쟁이야말로 축구의 본질이 아닐까요? 만약 모든 판정이 컴퓨터처럼 완벽하고, 모든 규칙이 수학 공식처럼 명확하며, 어떤 논란의 여지도 없는 스포츠가 있다면 우리는 과연 그것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아마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축구의 불완전함을 사랑합니다. 심판의 오심에 분노하고, 행운의 골에 환호하며, 예측 불가능한 드라마에 가슴 졸이는 그 모든 과정이 축구를 살아있는 생명체로 만듭니다.


이는 장 폴 사르트르 (Jean-Paul Sartre)가 『존재와 무 (L'Être et le Néant)』에서 말한 인간의 실존적 조건과 닮아있습니다. 인간은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이며, 정해진 본질 없이 자신의 선택을 통해 스스로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우리는 “자유라는 형벌”을 선고받았고, 그 자유는 불안과 책임을 동반합니다. 그라운드의 선수들 역시 규칙이라는 틀 안에서 무한한 선택의 자유를 가집니다.


살리바는 그 자유를 이용해 자신의 위치를 선택했고, 그 선택이 논란이라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칼라피오리의 골은 바로 이 실존적 드라마의 정점입니다. 그것은 규칙의 허점을 파고든 교활한 행위가 아니라, 불확실한 세계 속에서 결과를 만들어내려는 인간 의지의 필사적인 표현입니다.


소크라테스 (Sokratēs)는 “너 자신을 알라”고 말하며, 모든 지혜의 시작이 자신의 무지를 아는 데 있음을 역설했습니다.


칼라피오리의 골을 둘러싼 논란의 끝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지혜는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완벽한 진실을 알 수 없으며, 우리의 판단은 언제나 불완전하다는 겸허한 깨달음입니다.


당신이 아스날의 팬으로서 느낀 그날의 환희는 분명 진실된 감정입니다. 동시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팬이 느꼈을 분노와 좌절 또한 그들의 진실입니다. 이 사건은 어느 한쪽의 잘못을 가려내기 위한 문제가 아니라, 서로 다른 진실이 어떻게 공존하며 충돌하는지를 보여주는 삶의 축소판입니다. 규정의 잘못도, 심판의 잘못도 아닌, 이것이야말로 ‘축구’ 그 자체이며, 예측 불가능하고 때로는 불공정하기에 더욱 아름다운 우리 삶의 모습입니다. 그 골은 단순한 1점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던져진 하나의 거대한 철학적 질문이며,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더 깊은 인간이 되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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