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6월 민주화 항쟁과 성공회 성당의 역할

by DrLeeHC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과 성공회 성당의 역할

1987년 6월, 대한민국 현대사의 물줄기를 바꾼 민주화 항쟁의 거센 파도가 나라를 뒤덮었다. 군부독재의 사슬을 끊고 민주주의로 나아가려는 열망이 폭발한 이 결정적인 순간, 서울 심장부 중구에 자리한 성공회 대성당은 단순한 종교적 공간을 넘어 민주화의 성지이자 항거하는 이들의 마지막 피난처로서 역사의 전면에 나섰다. 성공회 성당은 그렇게 민주주의를 향한 시대의 열망을 품은 상징으로 우뚝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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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항쟁, 그 배경과 불꽃

해는 1987년으로 접어들었지만, 민주주의의 새벽은 요원해 보였다. 전두환 정권은 헌법 개정 논의를 일방적으로 중단시키고, 기존의 간선제를 고수하겠다는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며 민주화를 향한 국민적 염원에 찬물을 끼얹었다. 깊은 좌절감 속에서 민주화 운동 세력은 더욱 거세게 저항의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던 1월, 스물두 살 서울대생 박종철이 경찰의 잔혹한 고문으로 숨지고, 정권이 이 사실을 은폐하려 했다는 충격적인 진실이 만천하에 드러나자, 눌려왔던 국민적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타올랐다.

그리고 운명의 6월 9일, 연세대학교 교정에서 '호헌철폐 및 민주헌법 쟁취 국민대회'가 열렸다. 이날 시위에 참여했던 연세대생 이한열이 경찰이 직격으로 발사한 최루탄에 머리를 맞고 쓰러져 사경을 헤매는 참혹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비극은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되었고, 민주화를 갈망하는 함성은 삽시간에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갔다.


성공회 성당, 역사의 숨결과 민주화의 동행

서울 중구 정동, 고즈넉한 풍경 속에 자리한 성공회 대성당은 1926년 그 모습을 드러낸 이래 한국 성공회의 중심 성당으로, 일제강점기의 암흑 속에서도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향한 염원을 품어온 상징적인 공간이었다. 영국 국교회에 뿌리를 둔 성공회는 한국 땅에서 사회 정의와 인권의 가치를 실현하고자 꾸준히 노력해왔다.

특히 한국 성공회는 1970년대부터 기독교 사회운동의 흐름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며 시대의 아픔과 함께했다. 많은 성직자들은 유신 독재와 군부 정권의 폭압에 맞서 민주화 운동의 길에 용감히 나섰다. 당시 성공회 지도부는 "교회는 사회 정의를 위해 마땅히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확고한 신학적 신념을 견지하고 있었으며, 이는 1987년 6월, 역사의 격랑 속에서 성공회 성당이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된 밑거름이 되었다.


6월 10일, 항쟁의 절정과 성공회 성당

1987년 6월 10일, 이날은 6월 민주항쟁의 역사가 가장 뜨겁게 타오른 날로 기록된다. 오후 6시를 기해 전국 22개 도시에서는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조작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가 일제히 시작되었다. 수도 서울에서는 성공회 성당을 중심으로 거대한 시위의 물결이 일렁였다.

그날 서울 시내 곳곳은 시위대를 원천 봉쇄하려는 경찰 병력으로 가득했지만, 성공회 성당만큼은 종교 시설이라는 특수성으로 인해 경찰이 함부로 넘볼 수 없는 공간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성공회 성당은 자연스럽게 민주화 운동 세력이 결집하는 핵심 거점으로 떠올랐다.

6월 10일 오후, 성공회 성당 앞 광장은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이하 국본) 지도부와 민주화를 염원하는 수많은 시민들로 가득 찼다. 국본은 오후 6시 정각, 모든 국민에게 자동차 경적을 울리고 거리로 나와달라고 뜨겁게 호소했다. 이윽고 서울 시내 곳곳에서는 약속이나 한 듯 경적 소리가 메아리쳤고, 시민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목 놓아 외쳤다.

성공회 성당 안에서는 국본 집행부가 긴박하게 향후 투쟁 방향을 논의하는 한편, 경찰이 무차별적으로 쏘아대는 최루탄의 매캐한 연기를 피해 온 시민들에게 안전한 숨을 곳을 제공했다. 당시 성공회 지도부는 주저 없이 성당의 문을 활짝 열어젖혀 피신하는 시위대를 맞이했고, 부상자들을 돌보며 물과 음식을 나누는 등 아낌없는 연대의 손길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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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 성당, 그날의 기억들

6월 10일 저녁, 서울 도심에서 격렬한 시위를 벌이던 시민들은 경찰의 살벌한 진압을 피해 하나둘 성공회 성당으로 모여들었다. 성당 주변은 자욱한 최루탄 연기로 뒤덮였지만, 성당 내부는 민주주의를 향한 뜨거운 열망으로 가득 찬 시민들에게 더없이 안전한 피난처가 되어주었다.

성당 안에서는 국본 지도부가 임시 상황실을 마련하고, 시시각각 변하는 전국의 시위 상황을 예의주시하며 앞으로의 대응 방안을 논의했다. 성공회 성직자들은 시위대 곁을 지키며 그들을 보호했고, 시민들은 성당 안에서 즉석 토론회와 집회를 열며 민주화에 대한 불타는 의지를 서로 확인하고 다졌다.

특히 잊을 수 없는 장면은 6월 10일 밤, 경찰이 최루탄을 난사하며 성당 주변을 완전히 포위했을 때 펼쳐졌다. 절체절명의 순간, 성공회 지도부는 "이곳은 신성한 종교 시설이며, 폭력을 피해 온 시민들을 보호하는 것은 우리의 마땅한 의무"라고 단호히 선언하며 경찰의 진입 시도를 막아섰다. 성공회의 이러한 결연한 태도는 위기의 순간에 희망을 찾던 많은 시민들에게 깊은 감동과 용기를 주었고, 성당은 민주화 운동의 흔들리지 않는 상징으로 더욱 굳건히 자리매김했다.

또한 성당 내부는 다양한 사회단체 구성원들과 학생, 노동자, 그리고 평범한 시민들이 한데 어우러져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을 나누고, 앞으로 나아갈 투쟁의 방향을 함께 고민하는 살아있는 토론의 장이 되었다. 이곳에서는 계층도, 직업도, 나이도 뛰어넘어 오직 '민주주의'라는 하나의 가치 아래 모든 이가 뜨겁게 공감하고 연대하는 소중한 경험을 공유했다.


성공회 성당의 역할, 그 깊은 울림

1987년 6월 항쟁의 도가니 속에서 성공회 성당이 감당했던 역할은 단순히 물리적인 공간을 내어준 것을 훨씬 뛰어넘는 깊은 의미를 지닌다. 성공회 성당은 다음과 같은 중차대한 역할을 수행하며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첫째, 성공회 성당은 민주화 운동 세력에게 없어서는 안 될 핵심 거점이었다. 국본 지도부는 이곳에 모여 전국적인 민주화 투쟁을 체계적으로 조직하고 지휘했으며, 흩어져 있던 여러 민주화 단체들이 하나의 목소리로 연대하여 활동할 수 있는 든든한 구심점 역할을 했다.

둘째, 성당은 쫓기는 시위대와 부상자들에게 더없이 안전한 피난처였다. 경찰의 무자비한 폭력적 진압을 피해 온 시민들에게 기꺼이 문을 열어 보호의 손길을 내밀었으며, 다친 이들을 정성껏 치료하고 필요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셋째, 성공회 성당은 살아있는 민주주의 교육과 열띤 토론의 장이었다. 성당 안에 모인 시민들은 민주주의의 참된 가치와 의미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하고, 앞으로 민주화 운동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며 집단 지성을 발휘했다.

넷째, 성공회 성당은 종교적 권위를 바탕으로 국가의 폭력에 당당히 맞서는 도덕적 저항의 생생한 상징이었다. 성공회 지도부는 "교회는 억압받는 이들의 편에 서야 한다"는 깊은 신학적 신념을 바탕으로, 국가 권력의 부당한 폭력에 정면으로 맞서 시민들을 보호하는 참된 용기를 몸소 보여주었다.

다섯째, 성공회 성당은 다양한 사회 계층과 집단을 하나로 아우르는 감동적인 연대의 공간이었다. 학생, 노동자, 지식인, 종교인, 평범한 시민 등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 '민주화'라는 공동의 목표를 향해 뜨겁게 연대하며 희망을 키웠다.


6월 항쟁 그 후, 성공회 성당의 길

6월 민주항쟁의 거대한 함성은 마침내 6월 29일, 당시 민정당 대표였던 노태우의 '6.29 선언'이라는 결실을 맺었다. 이 선언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 약속과 김대중의 사면복권 등 국민의 뜨거운 민주화 요구를 상당 부분 수용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로써 대한민국 사회는 길고 어두웠던 군부독재의 시대를 마감하고 민주주의로 전환하는 역사적인 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6월 항쟁 이후에도 성공회 성당은 민주화와 인권, 그리고 사회 정의를 향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성공회는 노동자들의 권리 신장, 환경 보전, 한반도 평화 통일 등 우리 사회의 다양한 문제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며 꾸준히 활동했으며, 성당은 계속해서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열린 공간으로 그 역할을 다해왔다.

특히 성공회 성당은 민주화 운동의 생생한 역사 현장으로서 그날의 의미를 끊임없이 되새기고 있다. 해마다 6월이 오면 이곳에서는 6월 민주항쟁을 기리는 뜻깊은 행사가 열리며, 불의에 항거했던 당시의 숭고한 정신을 오늘에 되살려 계승하고 있다.


성공회 성당의 역사적 의의를 돌아보며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 과정에서 성공회 성당이 보여준 헌신적인 역할은 한국 민주화 운동사에서 종교 단체의 적극적인 참여와 기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받는다. 성공회 성당은 단순한 종교 시설이라는 테두리를 넘어 민주주의와 인권, 그리고 사회 정의라는 인류 보편의 가치를 굳건히 수호하는 살아있는 공간으로서 그 소임을 다했다.

성공회 성당의 이러한 발자취는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종교가 감당했던 특별하고도 중요한 역할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암울했던 군부독재 시절, 종교 단체들은 국가 권력의 감시와 통제가 상대적으로 덜 미쳤기에 민주화 운동의 소중한 거점으로 기능할 수 있었다. 성공회뿐만 아니라 천주교, 개신교 등 여러 종교 단체들이 민주화 운동에 기꺼이 동참했으며, 이들의 연대는 한국 민주화를 이끌어낸 강력한 추동력이 되었다.

나아가 성공회 성당의 역할은 종교가 지녀야 할 사회적 책임과 공적인 역할에 대한 중요한 성찰을 우리에게 던져준다. 성공회는 "교회는 세상 속에서 정의와 평화를 실현하는 데 적극적으로 기여해야 한다"는 신학적 입장을 굳건히 견지하며, 우리 사회가 당면한 여러 문제에 능동적으로 참여했다. 이는 종교가 단순히 개인의 신앙생활 영역에만 머무르지 않고, 사회의 긍정적인 변화와 발전에 실질적으로 기여할 수 있음을 보여준 매우 의미 있는 선례로 기록될 것이다.


역사의 메아리, 그 울림을 따라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과 성공회 성당의 깊은 인연은 한국 현대사에서 민주주의의 값진 발전과 종교의 사회적 역할이 어떻게 아름답게 조응할 수 있는지를 웅변으로 보여주는 역사적 증표이다. 성공회 성당은 단순한 예배의 공간을 넘어, 민주화를 열망했던 국민들의 간절한 피난처이자 뜨거운 연대의 마당으로서 잊을 수 없는 역사적 소명을 다했다.

6월 10일을 정점으로 하여 전국적으로 타올랐던 민주화 항쟁의 불길 속에서, 성공회 성당은 민주화 운동 세력의 굳건한 보루이자, 국가 폭력에 맞선 도덕적 저항의 빛나는 상징이었다. 성당은 온몸으로 시위대와 부상자들을 끌어안아 보호했으며, 다양한 사회 계층과 집단이 하나 되어 연대할 수 있는 열린 광장을 제공함으로써 한국 민주화의 결정적인 전환점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성공회 성당의 이러한 헌신적인 역할은 종교가 사회 정의와 인권, 그리고 민주주의라는 인류 보편의 숭고한 가치를 지키고 드높이는 데 얼마나 큰 기여를 할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소중한 역사적 교훈이다. 오늘날에도 성공회 성당은 6월 민주항쟁의 불멸의 정신을 가슴에 새기고 다음 세대로 계승하는 역사의 상징적 공간으로서 그 깊은 의미를 묵묵히 이어가고 있다.


2000년 5월 13일에 이곳에서 결혼식을 올린 한 부부가 있는데... 아직까지는 그럭저럭 잘 살고 있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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