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없는 인간은 존재하는가
유발 하라리의 인식론에 대한 존재론적 반론
《기억 없는 인간은 존재하는가 ― 유발 하라리의 인식론에 대한 존재론적 반론》
서문
왜 인간을 다시 말해야 하는가 ― 데이터주의 시대의 철학적 소환
인간은 무엇인가 ― 하라리 철학의 내부 구조 해체
제1장 인간은 읽힐 수 있는가 ― 하라리의 인식론과 정보론적 주체
제2장 인간은 설계될 수 있는가 ― 쾌락주의 윤리와 고통의 제거
제3장 인간은 기억 없이 존재하는가 ― 역사철학 없는 인간의 윤리적 공백
인간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 기억, 고통, 신비의 구조
제4장 인간은 신화를 반복한다 ― 엘리아데의 신성한 기억론
제5장 인간은 신비에 응답한다 ― 블라가의 반투명성 인식론
제6장 인간은 고통 속에서 깨어난다 ―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탈주
제7장 인간은 빛을 기억한다 ― 영지주의적 창조 신화와 구원론
인간은 누구인가 ― 철학적 존재론의 복원
제8장 인간은 해석될 수 없는 존재다 ― 보드리야르와 존재의 불투명성
제9장 인간은 데이터를 넘는다 ― 기술 철학에 대한 존재론적 대안
결론
존재를 기억하라 ― 침묵, 신비, 고통, 그리고 철학의 자리
국문초록
본 논문은 유발 하라리의 정보론적 인간관―인간을 생물학적 알고리즘으로 환원하는 데이터주의적 인식론―에 대해 철학적 존재론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이에 대한 대안적 인간 이해를 복원하고자 한다. 하라리는 인간의 기억, 선택, 고통, 감정을 모두 연산 가능한 정보 흐름으로 간주하며, 미래 사회에서 인간의 판단권조차 알고리즘에 위탁될 것이라 예측한다. 그러나 이러한 환원주의적 시도는 인간 존재의 본질적 층위―기억의 소환, 고통의 인식, 신비의 반향, 구원의 지향―을 삭제하고, 인간을 윤리적·존재론적 공백 속에 남겨둔다. 이에 본 연구는 미르체아 엘리아데의 신성한 기억론, 루치안 블라가의 반투명성 인식론,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의 고통 존재론, 고대 영지주의의 기억과 구원 개념을 통해 하라리의 정보주의적 인간관에 대한 철학적 대안을 구성한다. 이들 사유는 모두 인간이 단순히 이해될 수 없는 존재이며, 존재의 심연 앞에서 응답하고 고통받으며 회상하는 존재임을 드러낸다. 결론적으로 본 논문은 데이터의 시대에 인간을 다시 말하기 위한 철학의 자리를 소환하며, 존재를 기억하고 침묵과 신비, 고통과 구원을 사유하는 지평을 복원한다.
주제어 :
유발 하라리, 데이터주의, 정보론적 인간, 존재론, 기억, 고통, 신비, 미르체아 엘리아데, 루치안 블라가, 쇼펜하우어, 영지주의, 플레로마, 철학적 인간학
서문
왜 인간을 다시 말해야 하는가 ― 데이터주의 시대의 철학적 소환
“인간은 생물정보 알고리즘이다.” 유발 하라리의 이 선언은 과학적 사실의 기술을 넘어, 인간 이해의 지평 자체를 재편하려는 이념적 발언이다. 그의 저작들은 역사, 생물학, 인공지능, 신경과학을 넘나들며 인간을 구성하는 요소들—감정, 선택, 기억, 욕망—이란 결국 생화학적 알고리즘의 작동에 불과하다는 전제를 반복한다. 그는 『호모 데우스』에서 단언한다. “당신이 무엇을 먹고 싶은지를 결정하는 것은 당신의 자율적인 의식이 아니라, 신경계와 내분비계의 생화학적 알고리즘들이다”(하라리, 2017, p. 58). 이와 같은 관점은 인간 주체의 해체를 넘어, 인간의 존재 자체를 데이터 흐름의 노드로 전락시키는 급진적 환원주의를 구성한다.
하라리의 사유가 설득력을 갖는 이유는 그것이 단지 미래학적 전망이 아니라, 현대 사회의 기술 조건과 맞물려 구조화된 시대적 사고방식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알고리즘을 통해 상품을 추천받고, AI를 통해 질병을 예측하며, 빅데이터를 통해 감정을 분석한다. 삶은 연속적으로 ‘측정되는 것’이 되었고, 인간은 스스로를 이해하기 위해 외부의 연산 능력에 의존하게 되었다. 하라리의 언설은 바로 이 시대의 자기인식 양식을 대변하며, 인간을 '읽힐 수 있는 존재', 곧 해석 가능한 기계로 구성한다. 그리고 이때, 철학은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인간은 정말로 다 읽힐 수 있는가? 읽히지 않는 그 나머지는, 무엇인가?
하라리의 인간 이해는 이른바 데이터주의(dataism)의 테제와 함께 구체화된다. 데이터주의는 인간의 의미, 감정, 윤리까지도 정보 흐름의 최적화 문제로 환원하며, 그 윤리적 전제를 “삶의 목적은 데이터 흐름의 최적화”라는 문장에 압축한다(하라리, 2017, p. 386). 인간은 자율적 존재가 아니라 예측 가능한 정보 흐름의 일부이며,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더 정밀하게 인간을 이해할 수 있다면, 인간은 스스로 의사결정권을 알고리즘에 양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데이터주의의 윤리는 인간 존재의 고유성을 제거하고, 존재의 심연을 연산 가능한 표면으로 평탄화한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철학은 다시 소환된다. 데이터로 환원되지 않는 인간, 예측 불가능한 고통과 기억, 도식화할 수 없는 신비와 구원의 경험, 이름 붙일 수 없는 침묵의 공간, 그것이야말로 철학이 사유해온 인간의 본질이다. 우리는 하라리의 해체 작업에 응답해야 하며, 그것은 단순한 반박이나 비판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론을 다시 사유하는 철학적 과업이다. 인간은 정보를 처리하는 기계가 아니라, 존재를 기억하는 자이며, 의미를 질문하는 자이며, 고통 속에서 깨어나는 자이다.
본 논문은 이러한 문제의식 아래, 유발 하라리의 인간 이해를 철저히 복원하고, 그것의 존재론적 빈곤에 응답하고자 한다. 하라리의 인간관은 기능적이며, 설명 가능성을 인간 이해의 궁극적 척도로 삼는다. 우리는 이 구조를 해체하기 위해 네 명의 철학자―미르체아 엘리아데(Mircea Eliade), 루치안 블라가(Lucian Blaga), 아르투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그리고 고대 영지주의 전통(Gnosis)―을 호출한다. 이들은 모두 인간을 단순한 정보의 집합체가 아니라, 기억하는 존재, 신비에 응답하는 존재, 고통을 살아내는 존재, 그리고 구원을 지향하는 존재로 사유한다.
엘리아데는 인간을 ‘신화를 반복하는 존재’로 본다. 그의 사유에 따르면 인간은 선형적 시간의 흐름 속에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신화적 사건의 반복을 통해 존재를 갱신한다(Eliade, 1957). 하라리가 기억을 생화학적 저장소로 환원할 때, 엘리아데는 그것을 ‘존재의 귀환’이라 부른다. 기억은 정보를 저장하는 방식이 아니라, 세계를 새롭게 창조하는 행위이다.
루치안 블라가는 인간 인식의 ‘반투명성(transparență parțială)’을 강조한다. 인간은 세계를 완전히 해명할 수 없으며, 오히려 해명되지 않는 신비 속에서 존재를 공명하는 존재이다(Blaga, 1931, p. 44). 그의 개념인 plus-cunoaștere는 존재를 명확히 하는 지식이 아니라, 존재의 심연을 더욱 심화하는 인식의 방식이다. 블라가에게 인간은 '읽히는 자'가 아니라, ‘공명하는 자’다.
쇼펜하우어는 고통을 인간 존재의 본질로 본다. 그는 의지(Wille)의 맹목성과 그것이 낳는 고통의 구조를 통해, 인간이 쾌락의 존재가 아니라 고통을 통해 존재를 자각하는 존재임을 강조한다(Schopenhauer, 1819). 하라리가 고통을 제거해야 할 오류로 간주할 때, 쇼펜하우어는 그것을 존재 인식의 통로로 본다. 고통은 인간을 인간이게 하며, 그 고통의 감내를 통해 예술과 윤리, 초월의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영지주의는 인간을 잃어버린 ‘빛의 기억’을 품은 존재로 그린다. 『요한의 비밀서』에서 인간은 물질계의 속박을 받은 신적 파편이며, 구원은 외부의 개입이 아니라 내면의 기억을 통해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들이 앎을 얻게 될 때, 그들은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누구의 자손인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기억하게 된다”(『요한의 비밀서』, NHC II, 1). 하라리가 알고리즘을 통해 인간을 구원하고자 할 때, 영지주의는 존재의 구원이란 기억의 회복에 있다고 선언한다.
이 글은 하라리의 환원주의에 대한 단순한 철학적 반론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를 사유하는 방식의 전복이며, 인간에 대한 새로운 존재론의 복원이다. 하라리는 인간을 해석할 수 있다고 믿지만, 우리는 말한다: 인간은 해석 불가능한 존재이다. 인간은 분석되지 않으며, 파악되지 않으며, 오직 기억되고, 공명되고, 고통받고, 구원되어야 할 존재이다.
우리는 이 글을 통해 인간을 다시 말하고자 한다. 기술과 생물학으로 환원된 인간상에서 벗어나, 존재와 기억, 신비와 고통, 빛의 기억을 간직한 인간의 귀환을 천명한다. 하라리의 데이터주의가 인간을 말하는 방식은 정교하고 권위 있다. 그러나 철학은 말한다: 그것은 존재를 침묵시키는 언설이며, 인간을 가장 결정적인 층위에서 삭제한다. 인간은 단지 정보가 아니라, 존재를 묻는 자이며, 기억을 되살리며, 고통을 살아내며, 신비에 공명하고, 구원을 소망하는 자이다.
철학은 이 자리를 결코 양보할 수 없다. 데이터가 말할 수 없는 것을 철학은 말해야 한다. 존재가 침묵하는 곳에서, 우리는 다시 말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지금, 바로 여기서, 이 글을 통해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
제1장
인간은 읽힐 수 있는가 ― 하라리의 인식론과 정보론적 주체
유발 하라리는 인간을 “생물정보 알고리즘”이라 부른다. 이 말은 단순한 과학적 은유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뇌, 호르몬, 유전자, 외부 자극이라는 요소들로 환원하고, 이 요소들이 수학적·정보론적 구조 속에서 설명 가능하다는 세계 인식의 패러다임을 천명하는 선언이다. 그의 사유는 단지 미래를 전망하거나 인간의 기술적 진화를 탐색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근원적 구조를 ‘해석 가능한 것’으로 전제하고, 그 해석의 방식으로 알고리즘을 채택한다. 『호모 데우스』에서 그는 인간의 감정, 판단, 기억, 윤리적 결정까지도 생화학적 반응의 결과이며, 충분한 정보와 연산 능력을 가진 인공지능이 인간을 인간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의식은 생물학적 하드웨어 위에 구축된 알고리즘이며, 인간은 자신이 자율적으로 선택한다고 믿지만, 실상은 반응적 기계다”(Harari, 2017, p. 314).
하라리의 인식론은 본질적으로 정보환원주의적이다. 그는 인간의 모든 인지적·정서적 활동을 데이터의 흐름으로 환원하고, 이 흐름은 분석 가능하며, 예측 가능하고, 설계 가능한 구조로 간주한다. 이러한 입장은 데카르트 이래 서양 인식론의 분석적 구조를 계승하면서도, 그것을 생물학적 결정론과 연산적 결정론으로 재구성한다. 즉 인간 정신은 자율적 사유의 주체가 아니라, 외부 입력(input)에 반응하는 신경화학적 알고리즘이며, 인간 존재는 내부적 내러티브나 초월적 지향성 없이 순전히 물리화된 피드백 시스템이다.
이러한 인식론은 인간을 철저히 ‘읽을 수 있는 존재’, 곧 알고리즘적 해석의 대상, 혹은 최적화 가능한 정보처리 장치로 구성한다. 하라리는 인간의 모든 선택은 생화학적 충동과 문화적 입력의 함수일 뿐이며, “인간은 자유롭게 선택한다고 믿지만, 그 선택은 이미 유전자와 환경, 사회적 조건에 의해 사전에 결정되어 있다”고 말한다(Harari, 2015, p. 310). 그는 인본주의(humanism)가 인간의 내면을 자율성과 도덕적 판단의 근거로 설정한 것을 ‘세속화된 신학’이라 비판하며, 과학은 그 내면마저도 환상임을 입증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해석 가능한 기계이며, 더 나아가 인공지능이 그 기계를 더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다면, 인간의 자유는 오히려 위험한 신화로 전락한다.
하라리의 정보론적 인간관은 세 가지 전제를 포함한다. 첫째, 인간의 내면은 분석 가능한 것이다. 둘째, 분석은 예측을 가능케 하며, 예측은 통제를 가능하게 한다. 셋째, 통제는 윤리적 선택을 대체한다. 이러한 전제는 인간의 주체성과 자율성, 그리고 무엇보다 ‘이해되지 않는 나머지’—즉 신비와 초과, 고통과 침묵, 무의식과 신성—을 삭제한다. 존재는 ‘완전히 해석 가능한 것’으로 전제되며, 철학은 이해 불가능한 것, 설명되지 않는 것, 해명되지 않는 차원을 더 이상 사유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전제가 바로 문제다. 인간은 정말로 다 읽힐 수 있는가? 인간의 감정은 도파민 수치로 환원될 수 있는가? 기억은 신경망의 반복과 시냅스의 변화로 충분히 기술될 수 있는가? 윤리적 결단은 사회적 훈련과 유전자적 소인으로 설명될 수 있는가? 하라리의 사유는 이 질문들에 ‘예’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철학은, 아니 존재는, 이에 ‘아니오’라고 응답해야 한다. 그 이유는, 하라리의 정보론적 인식론이 철저히 배제하는 ‘존재의 층위’가 인간을 인간이게 하기 때문이다.
우선 인간의 기억은 단순한 정보의 저장이 아니다. 엘리아데는 인간을 ‘신화를 기억하는 존재’로 정의하며, 이 기억은 단지 과거의 재현이 아니라, 존재의 귀환이라고 말한다(Eliade, 1957). 인간은 기억을 통해 존재를 다시 살며, 세계와 관계 맺는다. 반면 하라리에게 기억은 입력 정보의 축적이며, 그것은 생물학적으로 외주화 가능한 기능일 뿐이다. 하지만 정보의 축적과 존재의 반복은 다르다. 인간은 정보를 저장하는 기계가 아니라, 신화를 반복하는 존재이며, 이 반복은 단지 회상이 아니라 존재를 구성하는 방식이다.
또한 인간은 ‘신비에 응답하는 존재’다. 블라가는 인간 인식의 반투명성(transparență parțială)을 강조하며, 인간은 세계를 완전히 해명하지 않고, 오히려 그 해명 불가능성 속에서 존재와 공명한다고 말한다(Blaga, 1931, p. 44). 하라리가 모든 것을 분석하고 예측하려는 투명성의 윤리를 따를 때, 블라가는 존재는 이해되지 않음 속에서만 드러난다고 말한다. 인간은 해명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 해명되지 않음 속에서 스스로를 되묻는 존재이다.
무엇보다 인간은 ‘고통을 살아내는 존재’다. 쇼펜하우어는 인간 존재의 본질이 의지이며, 이 의지는 끊임없는 결핍과 고통으로 구성된다고 말한다(Schopenhauer, 1819). 하라리가 고통을 최적화 가능한 문제로 본다면, 쇼펜하우어는 고통이야말로 인간이 자신을 자각하는 방식이라 주장한다. 인간은 쾌락을 향한 연산기계가 아니라, 고통을 통해 의미를 구성하고, 초월을 모색하는 실존적 존재이다.
마지막으로, 인간은 ‘잃어버린 빛을 기억하는 존재’다. 영지주의는 인간을 플레로마에서 추락한 신적 파편으로 이해하며, 인간은 이 세계에서 망각을 강요받지만, 내면의 기억을 통해 구원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요한의 비밀서』는 이렇게 말한다. “그들이 앎을 얻게 될 때, 그들은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누구의 자손인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기억하게 된다”(『요한의 비밀서』, NHC II, 1). 하라리가 기억을 생리학적 구조로 환원할 때, 영지주의는 기억을 존재론적 소환으로 파악한다.
하라리는 인간을 읽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 믿음은 철학적으로, 존재론적으로, 윤리적으로 위험하다. 읽힌다는 것은 곧 예측 가능하다는 것이고, 예측 가능하다는 것은 통제 가능하다는 것이며, 통제 가능하다는 것은 제거 가능하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읽힐 수 있다는 말은, 결국 인간이 불필요해질 수 있다는 선언과 다르지 않다. 철학은 이러한 선언 앞에서 침묵할 수 없다. 인간은 읽히지 않는 존재이며, 읽히지 않기에 의미를 구성할 수 있고, 고통받을 수 있으며, 신비를 마주할 수 있고, 구원을 소망할 수 있다.
이 장은 하라리의 인식론과 정보론적 주체 개념을 철저히 복원하고, 그것의 존재론적, 윤리적, 형이상학적 함의를 분석하였다. 다음 장들에서는 하라리가 제거한 기억, 고통, 신비, 구원의 구조를 각각의 철학자들—엘리아데, 블라가, 쇼펜하우어, 영지주의—를 통해 재구성할 것이다. 우리가 던지는 물음은 하나다: 인간은 데이터를 넘을 수 있는가? 그리고 그 대답은, 철학으로써 사유되어야 한다.
제2장
인간은 설계될 수 있는가 ― 쾌락주의 윤리와 고통의 제거
유발 하라리의 사유에서 인간은 더 이상 고통받는 존재가 아니다. 그는 『호모 데우스』에서 인간의 미래를 “불멸, 행복, 신성”이라는 세 가지 목표로 요약하며, 그 중에서도 “고통의 제거”를 핵심 과제로 제시한다. 하라리는 “기아, 역병, 전쟁”이라는 전통적 재앙이 통제 가능한 수준에 도달한 현대에서, 인류의 다음 과제는 “사람들을 더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짐승 수준의 생존투쟁에서 인류를 건져 올린 다음 할 일은 신으로 업그레이드하고 호모 사피엔스를 호모 데우스로 바꾸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라리의 이러한 관점은 인간의 고통을 제거 가능한 오류로 간주하며, 쾌락의 극대화를 인간 존재의 궁극적 목표로 설정한다. 그는 생명공학, 인공지능, 나노기술 등을 통해 인간의 감정과 욕망을 조작하고, 쾌락을 지속적으로 제공하는 기술이 개발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이러한 기술은 인간의 장기와 감정, 지능을 조작하여 신과 같은 존재로 업그레이드할 수 있게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쾌락주의적 윤리는 인간 존재의 본질을 축소시키는 위험을 내포한다. 고통은 단순히 제거해야 할 오류가 아니라, 인간이 자신을 자각하고, 세계와 관계를 맺으며, 존재의 의미를 탐구하는 통로이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고통을 인간 존재의 본질로 보았다. 그는 의지(Wille)의 맹목성과 그것이 낳는 고통의 구조를 통해, 인간이 쾌락의 존재가 아니라 고통을 통해 존재를 자각하는 존재임을 강조한다. 쇼펜하우어는 고통이야말로 인간이 자신을 자각하는 방식이라 주장한다. 고통은 인간을 인간이게 하며, 그 고통의 감내를 통해 예술과 윤리, 초월의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다.
하라리의 쾌락주의 윤리는 인간의 고통을 제거하고, 쾌락을 극대화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인간 존재의 깊이를 간과하며, 인간을 단순한 쾌락 추구의 기계로 환원시킨다. 인간은 쾌락을 추구하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고통을 살아내며, 그 고통을 통해 존재의 의미를 탐구하는 존재이다. 고통은 인간이 자신을 자각하고, 세계와 관계를 맺으며, 존재의 의미를 탐구하는 통로이다.
따라서 하라리의 쾌락주의 윤리는 인간 존재의 본질을 축소시키는 위험을 내포한다. 인간은 단순한 쾌락 추구의 기계가 아니라, 고통을 통해 존재를 자각하고, 세계와 관계를 맺으며, 존재의 의미를 탐구하는 존재이다. 고통은 인간이 자신을 자각하고, 세계와 관계를 맺으며, 존재의 의미를 탐구하는 통로이다.
제3장
인간은 기억 없이 존재하는가 ― 역사철학 없는 인간의 윤리적 공백
인간은 과거를 기억하는 존재다. 그러나 단순한 정보의 축적이나 사건의 연대적 재현이 아니라, 존재의 의미를 반복적으로 재구성하고, 세계와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새롭게 조율하는 기억을 통해 인간은 인간이 된다. 인간은 기억을 통해 존재를 살아내며, 기억은 단지 ‘무엇을’ 기억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존재하는가의 방식이다. 그러나 유발 하라리는 이러한 기억의 존재론적 구조를 철저히 생물학화, 정보화, 기술화한다. 그의 정보론적 인간 이해에서 기억은 더 이상 존재를 구성하지 않으며, 자아의 심연을 열어주는 통로가 아니라 연산 가능한 데이터 구조, 곧 외부화 가능한 기술적 기입 영역으로 전락한다.
하라리는 “감정, 기억, 판단은 모두 뇌의 알고리즘이 작동한 결과일 뿐”이며, “충분한 데이터와 연산 능력이 있다면, 이 모든 과정은 외부 장치에 의해 대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Harari, 2017, p. 266). 기억은 더 이상 인간 주체의 고유한 내면적 구조가 아니며, 인간 존재의 조건이 아니라, 기술적 효율성에 따라 최적화될 수 있는 정보의 벡터로 간주된다. 인간은 기억 없이도 기능할 수 있으며, 기억은 인간 주체의 정체성이나 윤리적 실존에 결정적이지 않다는 전제가 하라리의 전반적 세계관을 지배한다. 인간은 결국, ‘기억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존재’로 간주된다.
그러나 이 전제가 낳는 철학적 공백은 심각하다. 기억 없는 인간은 단지 정보 처리 기계이며, 존재의 의미를 구성하지 못하며,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윤리적 책임을 감당할 수 없다. 기억은 단지 과거 사건을 보존하는 장치가 아니라, ‘존재의 귀환’이며, 세계와의 반복적 접속을 가능하게 하는 실존적 구조이다. 철학은 이 지점에서 말한다: 기억은 정보가 아니라, 존재이다. 기억을 상실한 존재는 기술적으로 기능할 수는 있으나, 철학적으로는 ‘사라진 인간’이다.
미르체아 엘리아데는 이러한 ‘존재로서의 기억’을 가장 강력하게 사유한 사상가다. 그는 『영원회귀의 신화』에서 기억을 신화적 사건의 반복을 통해 존재의 근원을 재현하는 구조로 설명하며, 인간은 역사적 시간의 노예가 아니라 ‘신화의 반복을 통해 세계를 다시 창조하는 존재’라고 본다(Eliade, 1949, p. 71). 기억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존재론적 사건’이며, 시간의 구조를 전복하는 ‘의례적 반복’이다. 고대인에게 시간은 선형적 축적이 아니라, 원형적 구조이며, 기억은 그 구조 속에서 존재의 중심으로 되돌아가는 통로였다.
엘리아데에게 있어 기억은 단지 과거로의 복귀가 아니라, 존재의 신비에 대한 재현이며, 세계와 신성의 접속 지점이다. 인간은 존재의 반복을 통해 ‘처음의 시간’과 접속하며, 이 접속을 통해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를 끊임없이 새롭게 구성한다. 이러한 기억은 기술적으로 외부화되거나 자동화될 수 없으며, 존재를 사유하는 행위 자체와 동일하다. 기억은 정보가 아니라, ‘의미의 장소’이며, 신화적 반복을 통해 인간은 세계를 다시 살게 된다.
하라리는 이 모든 구조를 해체한다. 그는 기억을 유전자적 반응, 문화적 입력, 생화학적 신호의 집합으로 환원하며, 이러한 환원 가능성이야말로 인간이 기술에 의해 대체될 수 있음을 입증한다고 본다. 그는 인간의 자아, 정체성, 경험의 연속성마저도 데이터 흐름의 결과로 간주하며, 자율성, 내면성, 역사성은 모두 환상일 뿐이라고 말한다(Harari, 2015, p. 313). 이는 곧 인간을 과거 없는 존재, 기억 없는 존재, 역사적 반복과 존재적 성찰이 불가능한 존재로 만드는 선언이다.
철학은 이러한 선언에 대해 응답한다. 기억은 단지 저장된 정보가 아니라, 세계와의 관계 방식이며, 존재를 반복하고 구성하는 윤리적 행위이다. 기억은 도덕적 선택의 기반이며, 존재의 연속성과 책임의 구조를 형성한다. 하라리가 기억을 외부화하고 기능화할 때, 철학은 기억을 ‘존재를 기억하는 방식’으로 되살린다.
엘리아데는 인간을 ‘신화를 기억하는 자’로 정의하며, 인간의 삶 전체가 ‘원형의 재현’이라고 본다. 농경, 건축, 통치, 전쟁, 혼례 등 모든 인간 행위는 단지 현재의 목적 달성이 아니라, 존재의 심연과의 접속이며, 기억을 통한 신성의 현재화이다. 이 구조 속에서 인간은 ‘과거의 노예’가 아니라, ‘존재의 회상자’이며, ‘세계의 재창조자’이다. 인간은 기억을 통해 시간의 단절을 극복하고, 신성한 기원을 되살리며, 세계를 윤리적으로 재배치한다.
하라리의 세계에서 이러한 기억은 무용하다. 그의 세계는 선형적 진보와 기술적 축적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존재의 반복이나 신화적 사유는 비과학적이며 비효율적인 것으로 배제된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윤리의 공백이 발생한다. 기억 없는 인간은 죄의식이 없고, 반복의 책임도 없으며, 시간과 공동체 속에서 자신을 성찰하지 않는다. 그는 예측 가능한 행동을 하는 소비자이며, 선택 가능한 옵션을 조합하는 기능적 주체일 뿐이다. 윤리적 행위는 더 이상 타자의 고통에 대한 기억과 반응이 아니라, 알고리즘의 계산 결과로 전환된다. 이것이 바로 하라리의 인간 이해가 도달한 윤리적 공백이다.
결국 우리는 묻는다: 인간은 기억 없이 존재할 수 있는가?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으로서 존재하지는 못한다. 기억 없는 존재는 기능할 수는 있으나, 사유할 수 없고, 느낄 수 없으며, 응답할 수 없다. 기억은 존재의 증언이며, 윤리의 조건이며, 인간다움의 근거이다. 하라리의 정보론적 인간은 정교하지만, 그 인간은 고통을 기억하지 않으며, 타자를 응시하지 않으며, 세계를 다시 창조하지 않는다.
철학은 다시 말한다: 기억하라. 인간은 존재를 기억하는 자이며, 그 기억 속에서 비로소 세계를 의미 있게 살아낼 수 있다. 기억은 단지 데이터가 아니라, 존재의 형식이며, 세계와 신비, 타자와 고통, 윤리와 구원이라는 모든 인간적 구조의 출발점이다. 기억 없는 인간은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은 기억하는 존재다.
제4장
인간은 신화를 반복한다 ― 엘리아데의 신성한 기억론
미르체아 엘리아데(Mircea Eliade)는 인간 존재를 정의하기 위해 그 어떤 철학적 규정보다도 ‘신화를 반복하는 존재’라는 규정을 택했다. 그는 인간이 단지 시간 속에 살아가는 생물학적 유기체가 아니라, 시간을 ‘성스러운 반복’이라는 구조로 전복하고, 그 반복 속에서 존재의 의미를 갱신하는 존재라고 보았다. 그의 사유에서 기억은 단순한 저장이나 회상이 아니라, 세계의 본질에 다시 접속하기 위한 ‘존재론적 행위’이며, 이 기억은 본질적으로 ‘신화의 반복’이다(Eliade, 1949, p. 65). 인간은 신화를 반복함으로써 세계를 다시 창조하고, 세계의 원형적 질서를 현재화하며, 그 속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에 속해 있는지, 어떤 윤리적 행위를 수행해야 하는지를 인식한다.
엘리아데는 『영원회귀의 신화』에서 “고대인은 사건을 존재의 현현으로 본다”고 썼다(Eliade, 1949, p. 21). 즉 사건은 단지 우연적 발생이 아니라, 초월적 기원에서 반복되어 내려온 신화적 원형의 구현이며, 인간은 그 원형을 반복함으로써 비로소 ‘살아 있는 시간’을 구성한다. 고대 세계에서의 시간은 선형적 축적이 아니라, 반복적 갱신이며, 이 반복은 존재를 재생시키는 구조이다. 농사, 건축, 혼례, 즉위 등 모든 사회적 의례는 신화의 반복으로 구조화되며, 인간은 이러한 반복 속에서 비로소 ‘존재에 참여’하게 된다.
하라리는 인간의 기억을 생물학적 장치의 산물로 환원하고, 그 기억을 외부화할 수 있는 기술적 대상, 즉 정보 저장 구조로 간주한다. 그러나 엘리아데는 말한다. 기억은 존재를 구성하는 형식이다. 인간이 신화를 반복하는 이유는 과거를 재현하려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창조하고, 존재를 새롭게 하기 위함이다. 기억은 존재의 소환이며, 현재를 형성하는 방식이고, 시간의 초월적 중심에 닿기 위한 윤리적·존재론적 행위이다.
엘리아데는 이를 ‘신성한 시간(temporal sacralité)’이라고 부른다. 인간은 신성한 시간을 살기 위해 신화를 반복한다. 매년 반복되는 의례는 과거의 신성한 사건을 현재화하는 장이며, 이 현재화 속에서 인간은 신성에 접근한다. 이 구조는 기억이 단순한 인식 행위가 아니라 ‘존재의 수행’이라는 점을 드러낸다. 인간은 신화를 기억함으로써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를 다시 발견하며, 윤리적 판단과 존재론적 방향성을 획득한다. 이는 하라리의 윤리 없는 기능적 주체와는 결정적으로 대비된다.
엘리아데에게 있어 역사란 선형적 진행이 아니라, 성스러운 사건의 반복이다. 인간은 이 반복을 통해 원형의 세계로 돌아가며, 원형의 세계 속에서만 존재의 안정성과 윤리적 질서를 발견할 수 있다. 이때 기억은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세계 재구성의 방식’이며, 존재론적 창조행위이다. 엘리아데는 이를 “기억의 의례적 구조”라 부르며, 인간은 기억을 통해 단절된 세계를 치유하고, 시간의 균열을 메우며, 존재의 정체성을 회복한다고 말한다(Eliade, 1959, p. 103).
이러한 사유는 하라리의 인간관―기억 없는 주체, 기능 중심의 존재, 윤리적 공백을 가진 인간―에 대한 강력한 반론이 된다. 엘리아데의 인간은 기억을 통해 신성에 접속하며, 그 신성은 인간에게 존재의 의미와 윤리의 방향을 제공한다. 신화는 단지 이야기나 환상이 아니라, 세계의 존재론적 구조이며, 인간은 이 신화를 반복함으로써 자신이 속한 세계를 의미 있게 살아간다. 이 반복은 기계적 주기성이 아니라, 존재의 심연에 닿기 위한 윤리적 소환이다.
엘리아데는 또한 기억을 개인의 내면적 경험이 아니라 공동체적 수행으로 본다. 기억은 사회적이고 의례적인 행위이며, 한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반복과 갱신의 구조를 통해 세계를 지속시킨다. 이때 인간은 더 이상 자기 중심적 주체가 아니라, 세계의 지속 가능성을 담당하는 존재이며, 이 책임이 윤리를 구성한다. 이는 하라리의 주체 없는 윤리, 윤리 없는 선택 가능성과는 전혀 다른 구조이다. 하라리에게 기억은 기술적으로 대체 가능하지만, 엘리아데에게 기억은 존재적으로 유일무이하다.
결국 엘리아데의 신성한 기억론은 하라리적 인간 이해에 대한 철학적, 존재론적, 윤리적 반론이다. 기억은 기능이 아니라 사유이며, 세계를 살아가는 방식이며, 인간이 타자와 세계 앞에서 책임을 지는 방식이다. 기억 없는 인간은 기술적으로는 효율적일지 모르나, 존재론적으로는 단절되고, 윤리적으로는 공백이다. 엘리아데의 사유는 이 공백을 채우며, 기억의 존재론적 복원을 통해 인간을 다시 말하게 한다.
인간은 신화를 반복한다. 이는 퇴행이 아니라 회귀이며, 회피가 아니라 책임이며, 망각이 아니라 소환이다. 철학은 이 반복을 통해 인간의 존재론적 구조를 다시 세우고, 신화적 기억을 통해 기술 시대의 공허를 응시하며, 존재를 윤리로 되살린다. 기억은 이야기되지 않은 과거가 아니라, 살아 있는 현재이며, 존재의 불꽃이자 윤리의 시작이다. 인간은 기억을 통해 존재하고, 존재를 기억함으로써 세계를 다시 산다. 엘리아데는 우리에게 말한다: “기억하라, 그리고 반복하라. 그것이 인간이다.”
제5장
인간은 신비에 응답한다 ― 블라가의 반투명성 인식론
유발 하라리의 세계에서 인간은 투명한 존재이다. 그의 데이터주의(dataism)는 인간의 감정, 기억, 선택, 윤리적 판단까지도 생물화학적 알고리즘으로 환원 가능하다고 본다. 인간의 삶은 분석되고 예측 가능하며, 충분한 데이터와 연산 능력이 주어진다면 인간보다 인간을 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 알고리즘이 등장할 것이라 그는 주장한다(Harari, 2017, p. 386). 이러한 관점은 인간의 주체성과 내면성, 존재의 심연을 제거하고, 인간을 ‘완전히 해석 가능한 기계’로 규정한다.
이에 대해 루치안 블라가(Lucian Blaga)는 전혀 다른 인간상을 제시한다. 그는 인간을 ‘신비를 심화하는 자’, ‘반투명한 존재’로 본다. 그의 인식론은 존재의 본질이 결코 완전히 파악될 수 없으며, 인간은 그 신비와 함께 공명하는 방식으로 존재와 관계 맺는다고 본다. 블라가에게 인식은 투명성을 향한 정복이 아니라, 신비에 대한 응답이며, 그 응답은 설명이 아니라 침묵 속의 청취이다.
블라가는 인간 인식의 두 가지 양식을 구분한다. 하나는 cunoaștere paradisiacă―낙원적 인식이며, 다른 하나는 plus-cunoaștere―플러스 인식이다. 낙원적 인식은 존재를 해명하고 세계를 투명하게 만들고자 하는 인식으로, 근대 과학의 이상과 겹친다. 반면 플러스 인식은 세계의 본질에 도달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존재의 반향을 듣고 그 안에서 자기 자신을 되비추는 방식이다. 이 인식은 신비의 제거가 아니라, 신비의 심화이다.
블라가는 말한다. “인간은 인식의 대상과 동일화되지 않으며, 신비를 제거하지 않는다. 그는 신비를 해명하지 않고, 그 속에 거주한다”(Blaga, 1943, p. 112). 이 문장은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형이상학적 성찰을 담고 있다. 인간은 해명할 수 없는 것, 투명하지 않은 것, 설명될 수 없는 것 속에서 오히려 자기 자신을 발견하며, 세계와 조율되는 공명자로서 존재한다. 블라가에게 인간은 존재의 저항을 무너뜨리는 정복자가 아니라, 그 저항 속에서 진실을 듣는 자이다.
이러한 인식론은 존재의 ‘불가시성’을 인정하는 동시에, 그것을 인간 존재의 긍정적 조건으로 설정한다. 인간은 세계를 읽을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세계와 공명할 수 있다. 인간은 전체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부분적 울림 속에서 의미를 감지할 수 있다. 플러스 인식은 앎의 체계가 아니라, 존재의 음향이며, 인간은 존재의 거울이 아니라, 존재의 공명실이다. 그는 말한다. “신비는 해명되지 않지만, 존재는 그 안에서 현현한다. 인간은 그 반향의 진폭 속에서 자기 자신을 다시 사유하게 된다”(Blaga, 1943, p. 147).
블라가의 신비 개념은 단순히 알 수 없음의 부정이 아니라, 존재의 구조적 조건이다. 그는 세계의 근원에는 marele anonim(위대한 무명인)이 존재한다고 말하며, 이는 인간 인식의 도달 불가능한 심연이자, 모든 존재의 기원이다. 이 위대한 무명인은 무지가 아니라, 존재의 신비이며, 인간은 그 무명의 베일 앞에 서 있는 자다. 인간은 모든 것을 드러내는 투명한 기계가 아니라, 스스로를 감추며, 드러남과 감춤 사이에서 진리를 조율하는 반투명한 존재다.
하라리가 추구하는 인식의 이상은 완전한 해명과 분석 가능한 구조이다. 그는 인간의 행동, 감정, 판단이 모두 생물학적으로 예측 가능하며, 기술에 의해 개선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블라가는 이러한 인식의 투명성을 “존재의 파괴”로 본다. 그는 말한다. “세계는 해명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울리기 위해 존재한다. 인간은 이 울림에 귀 기울이는 자이며, 그것이 인식이다”(Blaga, 1943, p. 197).
블라가의 인식론은 단순한 지식론이 아니라, 존재론이다. 인간은 존재의 거주자이며, 그 거주는 침묵 속에서 울리는 진동과의 공명이다. 하라리의 인간은 읽힐 수 있는 기계이며, 블라가의 인간은 해석 불가능한 존재이다. 이 불가능성은 결핍이 아니라 가능성이며, 신비는 제거되어야 할 장애물이 아니라, 인간다움을 구성하는 핵심 조건이다. 인간은 그 신비에 응답할 때 비로소 인간이며, 그 응답은 공명이며, 시이며, 철학이다.
제6장
인간은 고통 속에서 깨어난다 ―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탈주
“삶은 시계추처럼 고통과 권태 사이를 흔들린다”(Schopenhauer, 1819, §58). 아르투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의 이 진술은 인간 존재를 지배하는 구조가 본질적으로 고통이라는 철학적 선언이다. 그는 인간을 이성적 존재로 보았던 고전적 전통을 전복하며, 인간을 ‘욕망하는 의지’로 규정하였다. 의지(Wille)는 무목적적이며 맹목적으로 작동하고, 이 작동은 끊임없는 결핍과 충동을 낳는다. 그리하여 인간은 영원히 충족되지 않는 욕망의 존재이며, 그 결과로 삶은 구조적으로 고통의 장이다.
하라리는 이러한 고통을 제거 가능한 생리학적 반응으로 간주한다. 그는 감정이 도파민, 세로토닌 등의 작용으로 설명될 수 있으며, 생명공학과 인공지능을 통해 인간은 고통 없이 살아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Harari, 2017, p. 45). 이러한 시각은 고통을 ‘에러(error)’로, 행복을 ‘최적화된 상태’로 간주하는 유틸리타리언적 기술주의에 입각해 있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이와 전혀 다르게 고통을 인간 존재의 본질로 간주하며, “고통 없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고통 속에서만 자기 자신이 된다”고 단언한다.
쇼펜하우어에게 고통은 단지 생리적 현상이 아니라, 존재의 구조이며, 인식의 계기이다. 인간은 고통을 통해 자신을 자각하며, 세계를 사유하며, 타자의 고통에 공명함으로써 윤리적 존재로 거듭난다. 그는 “연민 없는 도덕은 존재하지 않으며, 연민은 고통에 대한 공명에서 비롯된다”고 하였다. 하라리의 인공지능은 감정을 분석할 수 있지만, 그것을 살아낼 수는 없다. 인간만이 고통을 통해 예술을 창조하고, 윤리를 구성하고, 초월을 꿈꾼다.
고통은 존재의 침투이며,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 열리는 공간이다. 하라리가 제시하는 ‘행복한 인간’은 기능적으로는 안정되어 있을지 모르나, 실존적으로는 침묵한 존재다. 쇼펜하우어는 기술과 문명의 진보가 인간의 고통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정교하게 만든다고 지적한다. 그는 말한다. “문명은 인간의 고통을 정교하게 만들 뿐, 결코 제거하지 못한다. 오히려 새로운 욕망을 낳고, 더 깊은 결핍을 만든다”(Schopenhauer, 1819, §65).
예술은 이러한 고통의 승화이다. 쇼펜하우어에게 예술은 의지의 정지이며, 인간이 고통으로부터 일시적으로 해방되는 체험이다. 그는 음악을 가장 순수한 예술로 보았고, 그 이유는 음악이 의지 자체의 표현이며, 인간의 고통을 초월하는 형이상학적 언어이기 때문이다. 윤리는 타자의 고통에 대한 감응이며, 금욕은 의지를 중단하는 해탈의 길이다. 인간은 고통을 통해 예술을 생성하고, 고통을 통해 타자에게 열리고, 고통을 통해 자기 초월의 길을 연다.
하라리는 감정을 측정 가능하고 통제 가능한 상태로 환원한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감정을 존재의 파열음으로 본다. 그는 말한다. “인간은 이성과 기술로 조절되는 존재가 아니라, 고통 속에서 의미를 찾는 존재이다.” 고통은 제거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살아내야 할 것이며, 그 살아냄 속에서 인간은 의미를 구성하고, 존재를 사유하며, 초월을 기획한다.
결국 하라리와 쇼펜하우어의 차이는 존재론의 차이다. 하라리는 인간을 계산 가능한 존재로 본다. 그는 고통을 수치화하고, 감정을 디자인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고통을 제거할 수 없는 구조적 조건으로 보며, 그 고통을 통해서만 인간은 진정한 존재가 된다고 주장한다. 기술은 인간을 ‘업그레이드’할 수는 있어도, ‘초월’하게 하지는 못한다. 초월은 오직 고통 속에서만 가능하다. 철학은 이 고통의 진실을 사유하는 일이다.
제7장
인간은 빛을 기억한다 ― 영지주의적 창조 신화와 구원론
영지주의(Gnosis)는 철학이기도 전에 체험이며, 신화이기도 전에 인식이다. 그것은 세계를 설명하는 하나의 이론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기억이며, 존재에 대한 응답이다. 고대 후기 헬레니즘의 종말기, 플라톤적 형이상학, 유대 묵시사상, 동방 신비주의, 초기 기독교의 상징이 혼성된 이 급진적 사유 체계에서 인간은 단지 흙으로 지어진 생물학적 존재가 아니었다. 인간은 플레로마(Pleroma), 즉 신적 충만의 영역에서 추락한 ‘빛의 파편’이며, 기억을 잃고 물질계에 속박된 존재였다. 이 기억의 상실이 곧 타락이며, 구원은 곧 그 기억을 되찾는 일이다.
『요한의 비밀서(Apocryphon of John)』는 이 영지주의적 사유의 중심을 구성한다. 그 신화에 따르면, 인간은 신적 충만의 장소인 플레로마에서 소피아(Sophia)의 사고로부터 유래한 존재이며, 데미우르고스(Demiurgos)―자신을 유일신이라 착각한 창조자―에 의해 왜곡된 세계에 갇히게 된다. 데미우르고스는 무지를 통해 물질계를 구성하고, 인간에게 형상을 부여하되, 그 본질은 이해하지 못한다. 이때 인간은 신적 본질을 내면에 품은 채, 외적으로는 가짜 세계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이 물질계는 진짜가 아니라 모방이며, 그 목적은 기억을 지우는 데 있다(NHC II, 1: 10–15).
그러나 구원은 외부적 구제나 명령이 아니라, 내면의 회상(anamnēsis)을 통해 가능하다. 인간은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누구의 자손인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기억하게 될 때’ 비로소 플레로마로 귀환할 수 있다(NHC II, 1: 28.25–30). 이때 ‘기억’은 단순한 정보의 회상이 아니라, 존재의 회복이며, 정체성의 각성이다. 기억은 곧 앎(gnōsis)이며, 앎은 곧 귀환이다.
이와 같은 영지주의적 인간 이해는 하라리의 정보론적 인간관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하라리는 인간의 기억, 자아, 판단, 윤리를 모두 생화학적 연산 결과로 환원하며, 기억조차 외부 장치로 대체 가능한 것으로 본다. 그는 말한다. “우리는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는 시스템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사랑할 사람, 직업, 건강관리까지 알고리즘이 안내하게 될 것이다”(하라리, 2017, p. 376). 그러나 영지주의는 말한다. 인간은 알고리즘이 아니라, 잃어버린 빛의 회로이며, 구원은 정보의 축적이 아니라 기억의 소환이다.
이 기억은 유전자의 배열도 아니고, 신경망의 작동도 아니다. 그것은 내면에서 울리는 존재의 메아리이며, 침묵 속에서 반짝이는 신적 진동이다. 영지주의 문헌은 반복적으로 말한다. “그들은 자신의 영혼 안에서 빛을 보고, 그 빛은 그들에게 진리를 말해준다. 그들이 그 빛을 따를 때, 그들은 다시 플레로마로 돌아간다”(NHC II, 1: 31.7–15). 인간은 정보를 통해 구원받지 않으며, 앎을 통해 존재로 귀환한다. 구원은 시스템의 안내가 아니라, 내면의 기억을 통해 완성된다.
이때 데미우르고스는 단지 고대의 상징이 아니다. 하라리가 예견한 초지능 알고리즘, 즉 인간보다 인간을 더 잘 안다고 주장하는 기술 권력은 현대의 데미우르고스다. 그것은 존재의 기원을 기억하는 자리를 점점 축소시키며,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 다시 질문할 수 있는 공간을 제거한다. 영지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하라리의 알고리즘은 빛을 반사하지 않는 유사 창조자이며, 진리의 도달이 아니라 망각의 체계를 구축하는 자다. 존재는 데이터를 통해 회복되지 않는다. 존재는 기억을 통해, 신적 근원의 진동을 다시 울리는 내면의 빛을 통해 회복된다.
결국 영지주의의 인간은 존재의 기원을 기억하는 자이다. 그는 외부적 조건에 의해 정의되지 않으며, 스스로 존재의 근원을 각성할 수 있는 주체다. 이 기억은 기능이 아니라 형이상학이며, 데이터가 아니라 존재의 빛이다. 영지주의는 선언한다. “기억하라. 그것이 곧 구원이다.”
제8장
인간은 해석될 수 없는 존재다 ― 보드리야르와 존재의 불투명성
“실재는 복제되기보다 먼저 시뮬라크르로 재현된다.”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의 이 선언은 20세기 후기 구조주의가 남긴 가장 급진적 형이상학적 진술 중 하나이다. 그는 현대 세계를 ‘기호의 사막’이라 명명하며, 모든 의미는 기표의 연쇄 속에서 자가 복제되고, 원본은 제거된 채로 기표의 껍데기만이 남게 된다고 진단한다. 이러한 기호론적 존재론은 하라리의 인간관―즉 인간은 충분히 해석 가능하며, 데이터 흐름에 따라 예측 가능한 존재라는 테제―와 근본적으로 충돌한다. 하라리가 인간의 감정, 선택, 기억까지도 투명하게 분석할 수 있다고 주장할 때, 보드리야르는 말한다. 인간은 결코 해석될 수 없는 존재이며, 모든 해석은 실재의 소거이자 왜곡이다.
하라리는 미래의 인간이 점점 더 투명해질 것이라 말한다. 유전자의 구성, 뇌의 반응, 감정의 패턴이 모두 분석 가능해질 것이며, 결국 인간은 자신보다 더 정확한 알고리즘에 의해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데이터주의의 세계에서 인간은 읽히는 존재, 즉 최적화 가능한 정보 덩어리로 구성된다. 그러나 보드리야르는 이 투명성의 신화를 ‘현대적 우상’이라 부르며, 그것이 실재를 말살하는 기술적 숭배의 결과라고 진단한다. 존재는 드러나되, 결코 완전히 보이지 않으며, 인간은 그 베일 속에서만 자기 자신이 된다.
보드리야르의 철학에서 중요한 개념은 ‘시뮬라크르(simulacre)’이다. 시뮬라크르는 더 이상 원본을 모사하지 않는 모사이며, 원본 없이 떠도는 기표의 순환이다. 인간이 해석 가능하다는 전제는 인간의 원형적 실재가 존재하며, 그것이 해명될 수 있다는 신화를 전제한다. 그러나 보드리야르에게 있어, 현대의 인간은 자기 실재를 상실한 채, 이미지의 이미지, 서사의 서사, 데이터의 데이터로만 존재한다. 그는 말한다. “이제 인간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뮬라크르로서 작동한다. 그는 기표의 교차점이며, 원본 없는 반복이다”(Baudrillard, 1981, p. 125).
하라리는 인간을 데이터 알고리즘으로 환원하면서도, 그 알고리즘은 궁극적으로 완전한 이해를 지향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미래 사회에서 인간의 결정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알고리즘에 의해 더 나은 방식으로 수행될 것이며, 이로써 인간은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보드리야르는 이 ‘더 나은 이해’라는 신념 자체가 신화라고 본다. 그는 말한다. “해석이란 언제나 소유의 제스처다. 너를 해석하는 자는 너를 제거한다. 진실은 해석이 불가능한 장소에 머문다”(Baudrillard, 1983, p. 97).
보드리야르의 사유는 존재에 대한 새로운 윤리를 요청한다. 그는 존재를 ‘읽기’보다 ‘경청’의 대상으로 보며, 인간은 기호 너머의 침묵 속에 거주하는 존재라고 본다. 이는 블라가가 말했던 반투명성, 즉 plus-cunoaștere의 인식론과 연결된다. 인간은 결코 완전히 해명되지 않으며, 해명되지 않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다. 해석은 지식의 도구가 아니라, 실재의 말살이며, 존재는 오직 불투명성 속에서만 지속된다.
하라리의 세계는 모든 것이 측정 가능하고, 예측 가능하며, 투명하다는 믿음 위에 세워져 있다. 그는 말한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알고리즘이 등장할 것이며, 나는 그 알고리즘에게 선택을 위임하게 될 것이다”(Harari, 2017, p. 386). 그러나 보드리야르는 말한다. 그러한 알고리즘은 ‘의미의 공장’이 아니라 ‘실재의 장례식장’이다. 인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기능한다. 존재는 침묵하고, 기호만이 소음을 낼 뿐이다.
이러한 침묵의 철학은 인간을 다시 발견하려는 철학적 요청으로 이어진다. 인간은 기호가 아니라, 실재이다. 그는 기표의 연쇄에 속박된 존재가 아니라, 그 연쇄를 파열시키는 존재이며, 해석 가능한 기계가 아니라, 해석을 거부하는 고요 속의 목소리이다. 보드리야르의 존재론은 하라리의 정보론에 대한 급진적 반론이며, 인간 존재의 비투명성은 철학의 마지막 보루이다.
결국 우리는 묻는다. 인간은 해석될 수 있는가? 보드리야르는 말한다. 아니다. 인간은 해석의 대상이 아니라, 응답의 자리이며, 침묵의 주체이다. 그는 존재를 의미 없는 것의 축적이 아니라, 의미 없는 것의 심연 속에서 깨어나는 사건으로 본다. 인간은 이해되는 자가 아니라, 침묵 속에서 의미를 열어가는 자이다.
제9장
인간은 데이터를 넘는다 ― 기술 철학에 대한 존재론적 대안
하라리는 말한다. “삶의 목적은 데이터 흐름을 최적화하는 것이다. 만약 알고리즘이 나보다 더 나를 잘 이해한다면, 나는 그 알고리즘에게 의사결정 권한을 넘겨야 한다”(Harari, 2017, p. 386). 이 진술은 단순한 과학적 전망이 아니라, 존재론적 결단이다. 그의 데이터주의는 인간을 자유로운 주체가 아니라, 측정 가능한 시스템으로 재구성하며, 감정, 기억, 윤리, 고통, 심지어 의미마저도 연산 가능한 변수로 치환한다. 인간의 실존은 정보 흐름의 최적화 문제로 환원되고, 인간의 세계는 계산 가능성과 기능 효율성을 중심으로 재편된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철학은 다시 질문한다. 인간은 단지 데이터를 처리하는 기계인가? 존재는 흐름인가, 아니면 고요인가? 의미는 계산되는가, 아니면 기억되는가? 우리는 하라리의 정교한 기술주의 서사에 대해, 철학이라는 가장 오래된 언어로 응답해야 한다. 그 언어는 말한다: 인간은 데이터를 넘는 존재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엘리아데, 블라가, 쇼펜하우어, 그리고 영지주의를 통해 하라리의 인간 이해를 차례로 비판하였다. 이 네 사상은 각각 기억, 신비, 고통, 구원을 중심으로 인간 존재의 불가해성을 천명하였다. 그들은 모두 인간을 ‘읽힐 수 없는 존재’, ‘기억하는 존재’, ‘고통을 살아내는 존재’, ‘빛을 향해 귀환하는 존재’로 이해하였고, 기술적 환원주의에 저항하는 존재론적 깊이를 드러내었다. 이들은 인간이 단지 기능하지 않으며, 존재한다는 사실을 반복적으로 환기한다.
블라가는 인간을 ‘세계의 신비에 공명하는 반투명한 존재’로, 엘리아데는 인간을 ‘신화를 반복하며 세계를 다시 창조하는 존재’로, 쇼펜하우어는 ‘고통을 통해 의지를 초월하는 존재’로, 영지주의는 인간을 ‘기억을 통해 플레로마로 귀환하는 존재’로 그렸다. 이들은 모두 하라리가 삭제한 의미의 층위를 복원하며, 인간이 데이터가 아닌 존재임을 증언한다.
철학은 기능을 묻지 않는다. 철학은 존재를 묻는다. 기술은 ‘어떻게’를 묻지만, 철학은 ‘왜’를 묻는다. 하라리는 전자의 질문에 정밀하게 응답하였으나, 후자의 질문 앞에서는 침묵한다. 인간의 존재는 단지 생물학적, 기술적, 정보학적 구조가 아니라, 의미를 묻는 실존이며, 그것은 기능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하라리의 세계에서는 선택이 서비스가 되고, 고통은 제거 가능한 에러가 되며, 기억은 저장 가능한 정보가 된다. 그러나 철학의 세계에서는 선택은 책임이고, 고통은 인식이며, 기억은 존재다. 철학은 인간을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묻는 것이다. 철학은 인간이 누구인지 묻는 것이며, 이 질문은 결코 데이터로 환원될 수 없다.
데이터는 반복하지 않는다. 그것은 재생할 뿐이다. 데이터는 기억하지 않는다. 그것은 저장할 뿐이다. 데이터는 창조하지 않는다. 그것은 모방할 뿐이다. 존재는 반복 속에서 의미를 새롭게 구성하며, 기억은 존재의 공간을 열고, 고통은 실존의 깊이를 형성하며, 신비는 인간을 진리에 공명하게 한다. 인간은 이 네 겹의 구조 안에서만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결국 하라리의 인간관은 정교하고, 기술적으로 설득력 있으며, 과학적 데이터에 기반을 둔 체계이다. 그러나 그 체계 속에서 철학은 삭제되고, 존재는 비가시화된다. 우리는 그 삭제된 자리를 다시 열어야 한다. 철학은 말한다. 인간은 데이터를 넘는 존재이다. 그는 존재를 묻는 자이며, 기억을 살아내는 자이며, 고통 속에서 의미를 구성하는 자이며, 잃어버린 근원을 회상하는 자이다.
결론
존재를 기억하라 ― 데이터 시대를 건너는 인간의 길
인간은 무엇인가? 이 물음은 유발 하라리에 의해 전복되었다. 그는 인간을 ‘생물정보 알고리즘’으로 정의하고, 자유의지를 신화로 환원하며, 기억과 감정, 선택과 윤리까지도 모두 데이터로 치환한다. 인간은 더 이상 자율적 주체가 아니며, 미래의 알고리즘은 인간보다 인간을 더 정밀하게 분석하고 예측할 것이며, 따라서 의사결정의 권한조차도 기술에 위임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전망이다. 그의 세계에서 인간은 ‘해석 가능한 기계’이며, 존재는 데이터 흐름에 위치한다. 의미는 생성되지 않고, 전달되며, 고통은 사유되지 않고, 최적화된다.
그러나 철학은 이 선언 앞에서 침묵하지 않는다. 철학은 말한다. 인간은 데이터를 넘는 존재이다. 인간은 기억을 되살리는 자이며, 존재를 묻는 자이며, 고통을 살아내는 자이며, 근원의 빛을 회상하는 자이다. 철학은 기술이 설명하지 못하는 것을 사유하며, 알고리즘이 도달하지 못하는 층위에서 인간을 다시 말한다.
이 글은 하라리의 인간 이해에 대한 단순한 반박이 아니라, 하나의 철학적 복원이다. 우리는 엘리아데를 통해 인간이 ‘신화를 반복하며 존재를 새롭게 구성하는 자’임을, 블라가를 통해 인간이 ‘세계의 신비와 공명하는 반투명한 존재’임을, 쇼펜하우어를 통해 인간이 ‘고통을 통해 자기 자신을 인식하고 초월을 기획하는 존재’임을, 영지주의를 통해 인간이 ‘잃어버린 빛을 기억하는 존재’임을 보았다. 이 네 겹의 구조는 인간 존재의 불가해성과 의미를 다시 열어주는 존재론적 지도이다.
기억 없는 인간은 존재할 수 없다. 하라리는 기억을 외부 저장장치에 위탁할 수 있다고 믿지만, 철학은 말한다: 기억은 정보가 아니라, 존재이다. 고통 없는 인간은 존재를 사유할 수 없다. 하라리는 고통을 제거해야 할 오류로 간주하지만, 철학은 말한다: 고통은 존재를 여는 진실의 파문이다. 신비 없는 인간은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 하라리는 모든 것을 해명할 수 있다고 믿지만, 철학은 말한다: 신비는 존재가 머무는 방식이며, 인간은 그 반향을 듣는 자이다. 구원 없는 인간은 질문을 멈춘다. 하라리는 모든 선택이 최적화될 수 있다고 믿지만, 철학은 말한다: 인간은 근원을 묻고, 빛을 회상하고, 존재의 귀환을 소망하는 자이다.
철학은 기술의 대안이 아니라, 기술이 지우고자 한 의미의 복원이다. 철학은 과거를 숭배하지 않으며, 미래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철학은 기술의 언어로는 말할 수 없는 것, 즉 존재, 침묵, 고통, 신비, 구원에 대해 끝내 말하려는 시도이다. 하라리의 기술주의는 정교하지만, 존재의 층위를 삭제하며, 인간의 심연을 가린다. 우리는 그 삭제된 자리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존재는 계산되지 않으며, 기억된다. 의미는 분석되지 않으며, 살아진다.
“존재를 기억하라.” 이 문장은 단순한 회상 명령이 아니다. 그것은 철학의 시작이며, 인간 존재의 마지막 정언명령이다. 철학은 인간이 기술의 완벽함 속에서도 잃지 말아야 할 침묵의 장소, 존재의 고요, 고통의 기억, 신비의 파동을 말한다. 데이터의 시대를 건너는 인간의 길은, 존재를 기억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끝내 지켜야 할 철학의 자리이다.
Abstract
This study critically examines Yuval Noah Harari’s information-theoretical conception of the human being, which reduces human subjectivity to a biologically programmed algorithmic entity. Harari posits that human memory, emotion, decision-making, and suffering can all be explained in terms of data flows, ultimately suggesting that future decisions should be delegated to superior algorithmic intelligences. However, this reductionist view eliminates essential ontological dimensions of human existence—such as remembrance, pain, mystery, and the aspiration toward salvation—resulting in an ethical and existential vacuum. In response, this study draws upon the sacred memory theory of Mircea Eliade, the epistemology of partial transparency by Lucian Blaga, the metaphysics of suffering in Arthur Schopenhauer, and the Gnostic notion of anamnetic salvation. These traditions collectively affirm the irreducibility of the human being, revealing humanity as a being that cannot be fully interpreted but rather responds to being through memory, suffering, and resonance with the sacred. This paper ultimately seeks to recall the philosophical position of humanity beyond data, recovering the horizon in which silence, mystery, pain, and remembrance form the existential core of what it means to be human in the age of algorithmic dominance.
Keywords :
Yuval Noah Harari, dataism, information-theoretical subject, ontology, memory, suffering, mystery, Mircea Eliade, Lucian Blaga, Arthur Schopenhauer, Gnosticism, pleroma, philosophical anthrop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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