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인간에게 가장 큰 수수께끼입니다. 우리는 살아있을 때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무수한 상상을 해봅니다. 그런데 히말라야 고원의 춥고 메마른 땅에서 탄생한 한 권의 책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의식의 여행이며, 심지어 가장 위대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기회라고 말합니다. 바로 『티벳 사자의 서』입니다.
이 책의 원래 이름은 '바르도 퇴돌 (Bardo Thödol)'입니다. 이를 우리말로 풀면 '중간 상태에서 듣는 것을 통해 얻는 위대한 해탈'이라는 뜻입니다. 이름만 들어도 이 책이 담고 있는 철학적 깊이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는 죽은 자가 직접 읽는 책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스승이나 가족이 죽은 자의 귀에 대고 49일 동안 읽어주는 음성 안내서입니다. 마치 GPS가 운전자에게 길을 알려주듯, 『바르도 퇴돌』은 죽음 이후의 미지 세계를 헤매는 영혼에게 방향을 제시해줍니다.
서구에서 이 책을 『티벳 사자의 서』라고 부른 이유는 고대 이집트의 『사자의 서』와 비교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두 책은 근본적으로 다른 세계관을 보여줍니다. 이집트의 『사자의 서』가 외부 세계의 구체적인 지리와 괴물들, 그리고 그들을 상대하는 마법 주문들을 다룬다면, 『바르도 퇴돌』은 죽음 이후 펼쳐지는 모든 경험이 망자 자신의 의식 내부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봅니다. 즉, 이집트의 책이 객관적인 사후세계의 지도책이라면, 티벳의 책은 주관적인 의식의 항해도입니다.
'바르도 (Bardo)'라는 말은 티벳어로 '사이' 또는 '중간'을 뜻합니다. 하지만 이 말이 가리키는 것은 단순히 삶과 죽음 사이의 공간만이 아닙니다. 티벳 불교의 관점에서 우리의 전체 존재는 무수한 바르도들의 연속입니다. 지금 이 순간도 하나의 바르도이고, 잠들어 꿈을 꾸는 순간도 바르도이며, 명상에 잠겨 있는 순간도 바르도입니다. 모든 변화와 전환의 순간이 바로 바르도인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죽음의 바르도들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다음 생에 태어나기 전까지, 영혼은 세 개의 서로 다른 바르도를 차례로 경험하게 됩니다. 각각의 바르도는 독특한 성격과 기회를 가지고 있으며, 『바르도 퇴돌』은 이 세 개의 여정을 통과하는 영혼을 위한 세심한 안내서입니다.
첫 번째 바르도는 '치카이 바르도 (Chikhai Bardo)'라고 불립니다. 이는 '죽음의 순간'의 바르도로, 말 그대로 숨이 멈추는 바로 그 순간에 일어나는 경험입니다. 의학적으로는 몇 분 또는 몇 시간에 불과할 수 있지만, 의식의 차원에서는 가장 깊고 강력한 경험이 펼쳐지는 시간입니다.
육체를 구성하던 네 가지 기본 요소인 지 (地), 수 (水), 화 (火), 풍 (風)이 차례로 해체되기 시작합니다. 먼저 땅의 기운이 물의 기운으로 녹아들면서 몸이 무거워지고 시야가 흐려집니다. 물의 기운이 불의 기운으로 흡수되면서 입과 코가 마르고 체온이 떨어집니다. 불의 기운이 바람의 기운으로 합쳐지면서 소화력이 사라지고 호흡이 거칠어집니다. 마지막으로 바람의 기운이 의식 속으로 녹아들면서 모든 외부 감각이 사라집니다.
이 해체 과정이 완료되면, 망자의 의식은 평생 동안 자신을 옭아매던 모든 감각적 속박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됩니다. 바로 이 순간, '근원의 정광명 (Primordial Clear Light)'이라고 불리는 눈부신 빛이 나타납니다. 이 빛은 어떤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순수하고 밝으며, 무한한 사랑과 지혜로 가득 차 있습니다.
티벳 불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 빛은 외부에서 오는 어떤 신적 존재가 아닙니다. 이는 바로 우리 자신의 의식의 본래 모습이며, 동시에 우주의 궁극적 실재인 법신 (法身, Dharmakāya)의 현현입니다. 다시 말해, 이 순간 망자는 자신의 가장 깊은 본질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망자가 살아생전 깊은 수행을 통해 이 빛의 본질을 미리 체험하고 이해했다면, 그는 이 순간에 "아, 이것이 바로 나의 본래 마음이구나!"하고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치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품에 안기듯, 자연스럽게 그 빛 속으로 녹아들어 갑니다. 이것이야말로 윤회의 고통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순간이며, 가장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해탈의 길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엄청난 빛 앞에서 당황하거나 두려워합니다. 평생을 작고 제한된 자아와 동일시해서 살아온 의식에게, 이 무한하고 경계 없는 빛은 너무나 압도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마치 동굴에서 평생을 살아온 사람이 갑자기 한낮의 태양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영혼들은 이 빛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무의식 상태로 빠져버립니다.
바로 이들을 위해 두 번째 바르도가 시작됩니다. '초니드 바르도 (Chönyid Bardo)', 즉 '실재를 경험하는' 바르도입니다. 근원의 빛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기절했던 영혼이 며칠 뒤 다시 의식을 되찾으면서, 이제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경험이 펼쳐집니다. 이 바르도는 상징적으로 14일 동안 지속되며, 그 동안 망자는 자신이 평생 동안 마음속에 쌓아온 모든 카르마의 흔적들을 생생한 환영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처음 7일 동안은 '평화의 신들 (Peaceful Deities)'이 차례로 나타납니다. 이들은 자비와 지혜, 평화와 사랑의 화신들로, 각각 서로 다른 색깔의 찬란한 빛을 발하며 아름다운 모습으로 망자를 맞이하려 합니다. 첫째 날에는 푸른 빛을 발하는 비로자나 부처가 나타나 망자를 법계체성지 (法界體性智)의 세계로 이끌려 합니다. 둘째 날에는 흰 빛의 아촉 부처가 대원경지 (大圓鏡智)를 상징하며 다가옵니다. 셋째 날에는 노란 빛의 보생 부처가 평등성지 (平等性智)를 가져오고, 넷째 날에는 붉은 빛의 아미타 부처가 묘관찰지 (妙觀察智)를 선사하려 합니다. 다섯째 날에는 녹색 빛의 불공성취 부처가 성소작지 (成所作智)를 베풀려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각각의 찬란한 지혜의 빛과 함께 항상 여섯 개의 희미하고 부드러우며 유혹적인 빛들이 동시에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 희미한 빛들은 천도, 아수라도, 인간도, 축생도, 아귀도, 지옥도의 여섯 가지 윤회계를 상징합니다. 대부분의 영혼들은 눈부신 지혜의 빛보다는 이 익숙하고 편안해 보이는 어두운 빛에 이끌리게 됩니다.
『바르도 퇴돌』은 바로 이 순간 망자의 귓가에서 끊임없이 속삭입니다. "오, 고귀하게 태어난 자여! 저 눈부신 지혜의 빛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것은 그대 자신의 순수한 마음이 투영된 모습이니, 그들을 알아보고 그 빛 속으로 녹아들라! 저 희미하고 안락해 보이는 어둠의 빛에 현혹되지 말라! 그 빛은 그대를 다시 고통의 윤회 속으로 이끌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영혼은 자신의 카르마적 습성 때문에 진짜 해탈의 기회를 놓치고 익숙한 어둠을 선택하게 됩니다.
평화의 신들을 통한 해탈의 기회를 놓친 채 7일이 지나면, 이제 망자의 마음속에 억압되어 있던 모든 부정적 감정들이 형상화되기 시작합니다. 분노와 증오, 탐욕과 어리석음, 오만과 질투 같은 어두운 카르마들이 구체적인 모습을 갖추고 나타나는 것입니다. 다음 7일 동안 망자의 눈앞에는 무수히 많은 머리와 팔을 가지고, 불길에 휩싸인 채 피를 마시며 해골을 목에 걸고 있는 끔찍한 형상의 '진노의 신들 (Wrathful Deities)'이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과 번개와 함께 나타납니다.
이들의 모습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무서운 악마들보다도 더 끔찍합니다. 헤루카 (Heruka)라고 불리는 주요 진노존들은 각각 서로 다른 색깔의 몸을 가지고 있으며, 세 개의 눈과 날카로운 송곳니, 곧게 선 머리카락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손에는 갖가지 무기들이 들려 있고, 발아래에는 각종 동물과 신들을 밟고 서 있습니다. 여기에 그들의 배우자인 다키니 (Dakini)들도 함께 나타나는데, 이들 역시 못지않게 무서운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르도 퇴돌』이 이 순간에도 망자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정말 놀랍습니다. "오, 고귀하게 태어난 자여! 두려워하지 말라! 도망치지 말라! 이 무서운 존재들은 지옥에서 온 악마가 아니다. 이들은 그대가 첫 번째 주간에 알아보지 못했던 바로 그 평화의 신들이, 그대의 공포심과 카르마적 장애 때문에 다른 얼굴로 나타난 것일 뿐이다. 마치 하나의 달이 물결치는 호수에는 일그러져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이 모든 것은 그대 자신의 마음이 만들어낸 환영이니, 그 본질이 공 (空)함을 꿰뚫어 보라!"
이것이야말로 『바르도 퇴돌』의 가장 혁명적인 통찰입니다. 천국과 지옥, 자비로운 부처와 무서운 악마는 모두 우리 마음 밖에 실재하는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의식이 만들어내는 투영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영화관에서 스크린에 비치는 영상이 실제로는 영사기에서 나오는 빛일 뿐인 것처럼, 죽음 이후에 경험하는 모든 환상들은 우리 자신의 카르마와 마음의 습성이 만들어내는 정신적 영사에 불과합니다.
만약 망자가 이 진실을 깨닫고 모든 환영 앞에서 두려움 없이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다면, 그는 바로 그 순간 해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무서운 진노존들을 보고도 "이것들은 모두 내 마음이 만들어낸 환상이구나. 그 본질은 비어있고 실체가 없구나."라고 인식할 수 있다면, 그 순간 모든 환영은 사라지고 의식은 본래의 청정한 상태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영혼들은 이런 무시무시한 광경에 압도되어 공포에 질려 도망치려 합니다. 그들은 이 끔찍한 악마들이 정말로 자신을 해치려 한다고 믿고, 어디든 피할 곳을 찾으려 합니다. 바로 이런 망자들이 세 번째이자 마지막 바르도로 넘어가게 됩니다.
세 번째 바르도는 '시드파 바르도 (Sidpa Bardo)'입니다. 이는 '다시 태어남을 구하는' 바르도로, 이전의 모든 해탈 기회를 놓친 영혼이 다시 육체를 얻고 싶어하는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히는 단계입니다. 이 바르도에서 망자는 미세한 의식체의 형태로 존재하며, 생각만으로도 어디든지 순식간에 갈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자유로운 이동 능력에도 불구하고 망자는 깊은 고독감을 느낍니다. 그는 살아있는 가족들과 친구들이 자신의 죽음을 슬퍼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지만, 그들과 소통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큰 소리로 외쳐도 그들은 들을 수 없고, 아무리 만지려 해도 손이 그냥 통과해 버립니다. 이런 상황에서 망자는 자신이 정말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고, 동시에 안정적인 육체에 대한 갈망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이때 망자의 앞에는 카르마의 심판이 펼쳐집니다. 염라대왕 야마 (Yama)가 나타나 거울을 들고 망자가 평생 지은 모든 선악의 행위를 비춰줍니다. 이 거울에는 망자가 한 번이라도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행동한 모든 것이 생생하게 드러납니다. 선한 행위는 흰 돌로, 악한 행위는 검은 돌로 세어지며, 이에 따라 다음 생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바르도 퇴돌』은 여기서도 놀라운 비밀을 알려줍니다. 이 무서운 염라대왕과 그의 심판 역시 실제로는 외부의 어떤 존재가 아니라, 망자 자신의 양심과 죄책감이 만들어낸 환상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카르마의 과보는 외부의 어떤 신이나 악마가 내리는 처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마음이 스스로에게 가하는 자기 처벌에 불과합니다.
심판이 끝나면 육도 윤회의 여섯 세계가 각각 다른 색깔의 빛으로 망자 앞에 펼쳐집니다. 하얀 빛의 천상계는 자만심이 강한 영혼을 유혹하고, 붉은 빛의 아수라계는 질투심이 많은 영혼을 끌어당깁니다. 파란 빛의 인간계는 욕망이 강한 영혼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고, 노란 빛의 축생계는 어리석은 영혼을 유혹합니다. 연기가 자욱한 아귀계는 탐욕스러운 영혼을, 검은 빛의 지옥계는 분노가 많은 영혼을 각각 자신의 세계로 끌어들이려 합니다.
망자는 자신의 가장 강력한 카르마적 성향에 따라 특정한 세계의 빛에 이끌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 세계에서 미래의 부모가 될 남녀의 결합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만약 남성으로 태어날 예정이라면 어머니에게 애착을 느끼고 아버지에게 질투를 느끼며, 여성으로 태어날 예정이라면 그 반대의 감정을 경험합니다. 이런 강렬한 감정에 이끌려 자신도 모르게 자궁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다시 한번 기나긴 윤회의 여정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르도 퇴돌』은 이 마지막 순간까지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더 좋은 환경의 자궁을 선택할 수 있는지, 나아가 자궁에 들어가는 것 자체를 거부하고 해탈을 이룰 수 있는지에 대한 마지막 가르침을 제공합니다. "만약 정말로 자궁에 들어가야만 한다면, 적어도 법을 들을 수 있고 수행할 수 있는 환경을 선택하라. 부모의 얼굴이 자비롭고 지혜로워 보이는 곳을 택하라. 그러나 가능하다면 이 모든 환상이 마야 (Maya)임을 기억하고, 더 이상 윤회에 빠지지 말라."
이처럼 『바르도 퇴돌』은 죽음의 순간부터 다음 생으로 이어지는 49일간의 전체 여정을 통해, 영혼에게 수없이 많은 해탈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첫 번째 바르도에서 근원의 빛을 알아차리면 즉시 해탈할 수 있고, 두 번째 바르도에서 평화의 신들이나 진노의 신들을 자신의 마음의 투영임을 깨달으면 그때도 해탈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바르도에서도 모든 심판과 환상이 자기 마음이 만들어낸 것임을 인식하면 여전히 해탈의 길이 열려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바르도 퇴돌』은 단순한 사후세계 안내서를 넘어, 의식과 현실의 본질에 대한 가장 깊이 있는 심리학적 탐구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이 제시하는 핵심 통찰은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현실이 우리 자신의 마음이 만들어내는 투영이라는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 신과 악마, 심지어 우리가 '객관적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조차도 결국 의식이 만들어내는 꿈과 같은 환상에 불과합니다.
이런 이해는 현대 과학의 발견들과도 놀라운 유사성을 보입니다. 양자물리학은 관찰자와 관찰되는 대상이 분리될 수 없으며,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이 의식의 개입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신경과학은 뇌가 감각 정보를 받아들여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현실'이라고 느끼는 경험이 만들어진다고 설명합니다. 『바르도 퇴돌』이 1,200년 전에 직관적으로 파악했던 진실을, 현대 과학이 실험과 이론을 통해 확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르도 퇴돌』의 가치는 단순히 현대 과학과 유사한 통찰을 제공한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이 책의 진정한 의미는 죽음을 인생 최대의 두려움이 아니라 최대의 기회로 바라보는 혁명적인 관점 전환에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죽음은 모든 것을 잃는 순간이지만, 『바르도 퇴돌』에서 죽음은 평생의 제약에서 벗어나 자신의 본래 본성을 만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입니다.
더 나아가 이 책은 우리가 살아있는 지금 이 순간도 하나의 바르도임을 일깨워줍니다. 우리가 깨어있을 때 경험하는 현실과 꿈속에서 경험하는 환상, 그리고 죽음 이후에 경험하는 바르도의 환영들은 모두 같은 의식의 다른 상태일 뿐입니다. 따라서 죽음 이후의 바르도를 잘 통과하려면, 지금 살아있는 이 순간부터 모든 경험이 마음이 만들어내는 환상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런 이해는 우리의 일상생활에도 깊은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겪는 괴로움과 즐거움, 성공과 실패, 사랑과 미움이 모두 마음이 만들어내는 상대적인 경험이라는 것을 안다면, 그 어떤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게 됩니다. 외부 상황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마음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바르도 퇴돌』은 죽음에 대한 우리의 두려움을 근본적으로 치유해줍니다. 죽음을 완전한 소멸이 아니라 의식의 변화 과정으로 이해하게 되면, 죽음에 대한 공포가 크게 줄어듭니다. 물론 육체적 고통이나 사별의 슬픔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죽음 자체에 대한 존재론적 공포는 많이 완화됩니다.
현대인들이 『바르도 퇴돌』에서 배울 수 있는 또 다른 지혜는 마음챙김의 중요성입니다. 이 책은 바르도에서 해탈하는 핵심이 자신이 경험하는 모든 현상을 명확히 알아차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평화의 신이든 진노의 신이든, 그것이 자기 마음의 투영임을 알아차리는 순간 해탈이 가능합니다. 이는 현재 서구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마음챙김 명상의 핵심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바르도 퇴돌』의 또 다른 현대적 의의는 죽음을 개인의 고립된 경험이 아니라 공동체가 함께 돌보아야 할 과정으로 본다는 점입니다. 이 책은 죽어가는 사람의 곁에서 가족과 스승이 49일 동안 끊임없이 읽어주어야 하는 텍스트입니다. 즉, 죽음을 혼자 맞이하는 고독한 여행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의 보살핌 속에서 함께 완성해나가는 영적 여정으로 봅니다.
현대 사회에서 죽음은 점점 더 의료진에게 맡겨지고 가족들은 병실 밖으로 내몰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바르도 퇴돌』의 관점에서 보면, 죽어가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첨단 의료기기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의 따뜻한 목소리와 지혜로운 안내입니다. 물론 의료적 처치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영적 차원의 돌봄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바르도 퇴돌』은 현대의 호스피스나 완화의료 분야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합니다. 죽음을 단순히 생물학적 기능의 정지가 아니라 의식의 전환 과정으로 이해한다면, 죽어가는 사람을 돌보는 방식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육체적 고통을 완화하는 것과 함께 정신적, 영적 차원의 평안도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바르도 퇴돌』이 현대인에게 주는 마지막 메시지는 삶과 죽음을 분리해서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삶은 좋은 것이고 죽음은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책의 관점에서 보면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삶이 있기에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기에 새로운 삶이 가능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삶이든 죽음이든 그 어떤 상황에서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입니다.
『티벳 사자의 서』가 수세기 동안 사람들에게 전해져 온 이유는 단순히 죽음에 대한 호기심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이 책이 담고 있는 근본적인 지혜, 즉 모든 현실이 마음이 만들어내는 투영이라는 통찰과, 그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해탈의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가 인간의 가장 깊은 갈망에 응답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이라는 인간 존재의 가장 큰 수수께끼 앞에서, 이 책은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그것을 가장 위대한 기회로 받아들이라고 말합니다. 바르도의 빛과 환영들 속에서 길을 잃지 않고 자신의 본래 본성을 찾을 수 있다면, 죽음은 끝이 아니라 진정한 자유의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