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4장: 교육과 미래 - 깨어남의 공동체
5-24.1. 억압받는 자의 교육학: 의식화
교육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지식을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아왔습니다. 교실의 선생님은 정답을 알려주는 존재였고, 우리는 그 정답을 성실히 받아 적는 학생이었습니다. 시험 날이 되면 학생들은 그동안 ‘저축’해 두었던 지식을 답안지라는 인출기에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꺼내 놓아야 합니다. 누가 더 많이, 더 정확하게 암기했는가에 따라 등급이 매겨지는 이 시스템 속에서, 학생은 지식을 담는 ‘그릇’이자 비어 있는 ‘깡통’으로 취급됩니다.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교육 사상가 중 한 명인 브라질의 파울루 프레이리 (Paulo Freire, 1921-1997)는 그의 저서 『억압받는 자의 교육학, Pedagogy of the Oppressed』에서 이러한 익숙한 풍경을 ‘은행 저금식 교육 (Banking model of education)’이라 이름 붙였습니다. 이 비유 속에서 교사는 지식을 가진 예금주가 됩니다. 반면 학생은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은 텅 빈 통장과 같습니다. 교사는 학생의 머릿속에 지식이라는 돈을 일방적으로 입금하고, 학생은 그것을 비판 없이 수동적으로 저장할 뿐입니다. 이 과정에서 지식은 살아있는 생명력을 잃고 박제된 정보로 전락합니다. 학생은 세상을 스스로 탐구하는 주체가 아니라, 세상에 관한 설명을 그저 전달받는 객체로 머물게 됩니다. 프레이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교육이 인간을 억압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프레이리가 활동하던 당시의 브라질은 극심한 빈곤과 문맹, 그리고 독재 정권의 억압 아래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가난한 농민들은 자신들의 비참한 현실을 ‘운명’이나 ‘신의 뜻’으로 받아들이며 체념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프레이리는 이들이 글을 읽지 못하는 것 (문맹)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세상을 읽지 못하는 것, 즉 자신들이 처한 억압의 구조를 깨닫지 못하는 ‘침묵의 문화’에 갇혀 있다는 점이라고 보았습니다. 기득권층이 주도하는 은행 저금식 교육은 바로 이 침묵을 강요하고 유지하는 수단이었습니다. 교사는 ‘아는 자’로서 ‘모르는 자’인 학생에게 지식을 일방적으로 기탁합니다. 여기서 학생은 질문할 권리도, 현실을 비판할 능력도 거세당한 채, 그저 주어진 질서에 순응하는 ‘적응 잘하는 시민’으로 길러질 뿐입니다. 이는 인간을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라, 관리되고 통제되어야 할 ‘사물’로 만드는 비인간화의 과정입니다.
프레이리는 이러한 죽은 교육에 맞서 ‘문제 제기식 교육 (Problem-Posing Education)’을 제안합니다. 이는 교사와 학생 사이의 수직적인 위계를 허무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더 이상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의 구분은 없습니다. 오직 “세상을 매개로 하여 함께 배우는 교사-학생과 학생-교사”가 있을 뿐입니다. 교사는 정답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학생들과 함께 현실의 문제를 탐구하는 ‘동료 연구자’가 됩니다. 그들은 대화 (Dialogue)를 통해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우리가 당연하게 여겼던 현실에 물음표를 던집니다. “왜 우리는 가난한가?”, “왜 소수의 사람이 다수의 토지를 소유하는가?”, “이것은 정말 바꿀 수 없는 운명인가?” 이러한 질문들을 통해 학생들은 수동적인 구경꾼에서 역사의 주체로 깨어나기 시작합니다.
이 깨어남의 과정을 프레이리는 ‘의식화 (Conscientization)’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프레이리 교육 철학의 핵심이자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의식화란 단순히 글자를 깨우치는 것을 넘어, 글자 뒤에 숨겨진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모순을 꿰뚫어 보는 ‘비판적 의식’을 갖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프레이리는 인간의 의식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교육과 실천을 통해 끊임없이 성장하고 발전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는 수준을 크게 세 단계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이 단계들을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그리고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를 알려주는 중요한 이정표가 됩니다.
첫째는 ‘마술적 의식 (Magical Consciousness)’입니다. 이 단계에 머무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닥친 현실의 고통과 문제를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의 결과로 받아들입니다. 가난을 "신의 뜻"이나 "타고난 팔자", 혹은 "전생의 업보"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마술에 걸린 것처럼, 현실의 원인을 논리적으로 따지지 않고 초자연적인 힘이나 운명 탓으로 돌립니다. 따라서 이들은 현실에 저항하거나 변화시키려 하기보다는, 그저 순응하고 적응하려 합니다.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그냥 이렇게 살다 죽는 거지"라는 체념이 이 단계의 지배적인 정서입니다. 그들은 자신을 역사를 만드는 주체가 아니라, 외부의 힘에 이끌려 다니는 수동적인 객체로 인식합니다.
둘째는 ‘순진한 (Naive) 의식’입니다. 이 단계로 넘어가면 사람들은 문제의 원인을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 인식은 피상적이고 단순합니다. 그들은 사회적 모순이나 구조적인 불평등을 보지 못하고, 모든 원인을 ‘개인’에게서 찾습니다. 예를 들어, 가난의 원인을 사회 시스템의 부조리가 아니라, "내가 게을러서", "내가 무능해서", 혹은 "저 사람이 나빠서"라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억압적인 시스템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기보다는, 그 시스템 안에서 성공한 사람들을 동경하고 그들처럼 되려고 노력합니다. 억압받는 자가 억압자를 닮아가려 하는 (내면화) 단계가 바로 이곳입니다. 이들은 "사회가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타락한 게 문제야"라며 과거를 미화하거나, 개과천선과 같은 개인적인 변화만이 해답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인 ‘비판적 의식 (Critical Consciousness)’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진정한 변혁이 시작됩니다. 이 단계에서 우리는 내 삶을 옥죄는 고통이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구조가 얽혀 만들어낸 ‘구조적 모순’임을 꿰뚫어 보게 됩니다. 나의 빈곤이 게으름 때문이 아니라 불공정한 분배 구조 때문임을, 나의 무지가 지능 부족 때문이 아니라 교육 기회의 박탈 때문임을 직시합니다. 비판적 의식을 가진 사람은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끊임없이 "왜?"라고 묻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이 모순된 현실을 바꿀 수 있는 ‘주체 (Subject)’임을 자각한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의식화는 필연적으로 ‘프락시스 (Praxis)’, 즉 ‘실천’으로 이어집니다. 프레이리에게 있어 참된 앎은 머릿속 관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변화시키는 구체적인 행동과 결합된 것입니다. 그는 “실천이 없는 말은 공허한 헛소리 (Verbalism)이고, 성찰이 없는 행동은 맹목적인 활동주의 (Activism)일 뿐”이라고 경계했습니다. 진정한 변혁은 이론과 실천, 성찰과 행동이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과정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세상을 비판적으로 ‘읽는’ (성찰) 이유는, 세상을 새롭게 ‘쓰기’ (실천) 위해서입니다. 이 프락시스를 통해 억압받는 자들은 자신을 억누르던 객체의 자리에서 벗어나, 역사를 창조하는 주인의 자리로 올라섭니다.
프레이리의 교육학이 위대한 점은, 그것이 단순히 억압받는 자들의 권력 쟁취만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그의 목표는 ‘인간화 (Humanization)’입니다. 억압적인 구조 속에서는 억압받는 자뿐만 아니라 억압하는 자 또한 인간성을 상실합니다. 억압자는 타인을 도구화함으로써 자신의 인간됨을 잃어버리고, 피억압자는 침묵을 강요당함으로써 인간됨을 박탈당합니다. 피억압자가 단순히 억압자를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여 새로운 억압자가 된다면, 그것은 진정한 해방이 아닙니다. 프레이리는 억압받는 자들이 스스로를 해방시킴으로써, 결과적으로 억압자들까지도 그 비인간적인 권력의 굴레에서 해방시켜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이것은 증오가 아닌 ‘사랑’에 기초한 혁명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프레이리가 살았던 시대와는 다른 환경에 살고 있습니다. 문맹률은 낮아졌고, 정보는 넘쳐납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더 교묘하고 세련된 형태의 ‘은행 저금식 교육’ 속에 갇혀 있습니다. 학교는 입시와 취업을 위한 지식 주입소가 되었고, 미디어와 알고리즘은 우리가 무엇을 욕망하고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를 끊임없이 주입합니다. 우리는 스마트폰을 통해 수많은 정보를 소비하지만, 정작 그 정보들이 누구의 이익을 위해 생산되었는지, 이 사회의 구조적 부조리가 무엇인지를 비판적으로 사유할 능력은 점점 퇴화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글은 읽을 줄 알지만 세상은 읽지 못하는 ‘신종 문맹’ 상태에 빠져 있는지도 모릅니다.
프레이리의 ‘의식화’는 21세기의 우리에게 더욱 절실한 가르침을 줍니다. 그것은 쏟아지는 가짜 뉴스와 자극적인 선동 속에서 ‘진실’을 가려내는 눈을 뜨라는 요구입니다. 경쟁과 소비가 미덕이라고 가르치는 자본주의의 커리큘럼에 대해 “정말 그러한가?”라고 질문을 던지는 용기입니다. 교육은 단순히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한 투자 상품이 아닙니다. 교육은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될 것인가’, ‘어떤 세상을 만들 것인가’를 결정하는 실존적이고 정치적인 행위입니다.
우리는 교실에서, 그리고 일상의 배움터에서 ‘침묵의 문화’를 깨뜨려야 합니다. 정해진 정답을 암기하는 대신, 서로의 눈을 보고 대화해야 합니다. 나의 고통과 불안이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와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는 것, 이것이 의식화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을 바탕으로, 작게나마 내 주변의 부조리를 개선하기 위해 행동하는 것, 이것이 프락시스입니다.
파울루 프레이리는 “교육은 세상을 바꿀 수 없다. 교육은 세상을 바꿀 사람을 바꾼다”라고 말했습니다. 진정한 교육은 사람을 기능적인 부품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깨어있는 시민으로, 따뜻한 가슴과 비판적인 이성을 지닌 온전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억압받는 자의 교육학은, 우리 내면에 잠자고 있는 거인을 깨우는 알람 소리입니다. 주입된 지식의 무게를 비워내고, 세상의 아픔과 진실하게 연결될 때, 교육은 비로소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희망의 실천이 될 것입니다.
5-24.2. 무지한 스승: 지적 평등의 선언
우리가 가진 교육에 대한 가장 견고한 믿음 중 하나는, ‘아는 자’가 ‘모르는 자’에게 지식을 전달해 주어야만 배움이 일어난다는 생각입니다. 우리는 선생님의 친절한 설명 없이는 수학 공식을 이해할 수 없고, 전문가의 해설 없이는 난해한 철학책을 읽을 수 없다고 믿습니다. 이러한 믿음 위에서 학교가 세워지고, 교사가 양성되며, 거대한 교육 과정이 설계됩니다. 그런데 만약, 이 모든 것이 거대한 사기극이라면 어떨까요? 선생이 지식을 설명해 주면 줄수록 학생은 더 멍청해진다면요?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 (Jacques Rancière, 1940-)는 그의 도발적인 저서 『무지한 스승, Le Maître ignorant』을 통해 우리를 지배해 온 이 ‘설명의 신화’를 산산조각 냅니다. 그는 19세기의 괴짜 교육자 조제프 자코토 (Joseph Jacotot, 1770-1840)의 실화를 빌려, 스승 없이도 혼자서 배울 수 있는 인간의 무한한 능력을 증언하며, 모든 인간의 지능은 평등하다는 급진적인 선언을 던집니다.
이야기는 1818년, 프랑스 혁명 이후 망명길에 오른 조제프 자코토가 네덜란드 루뱅 대학의 불문학 강사로 부임하면서 시작됩니다. 그에게는 난감한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는 프랑스어밖에 할 줄 몰랐고, 그의 학생들은 네덜란드어 (플랑드르어)밖에 할 줄 몰랐습니다. 언어가 통하지 않으니, 자코토는 자신이 가진 지식을 학생들에게 ‘설명’해 줄 방법이 없었습니다. 고심 끝에 그는 우연히 구한 책 한 권, 페넬롱의 『텔레마코스의 모험, Télémaque』이라는 소설의 프랑스어-네덜란드어 대역본을 학생들에게 던져주었습니다. 그리고 통역을 통해 딱 한 가지 지시만 내렸습니다. “이 책의 프랑스어 문장을 네덜란드어 번역과 대조해 가며 외우고, 모르는 단어는 문맥 속에서 추측하여 끝까지 읽으시오.”
자코토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선생의 설명 없이 학생들끼리 웅얼거리는 것만으로 외국어를 배운다는 것은, 당시의 상식으로나 지금의 상식으로나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몇 달 후, 자코토는 학생들의 작문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설명은커녕 알파벳조차 제대로 가르쳐준 적 없는 학생들이, 프랑스어로 완벽에 가까운 문장을 구사하며 자신의 생각을 표현해낸 것입니다. 그들은 문법 규칙을 외운 것이 아니라, 책 속의 문장들을 분해하고 조립하며 스스로 언어의 규칙을 발견해 냈습니다. 이 충격적인 사건 앞에서 자코토는 교육학의 근본을 뒤흔드는 위대한 깨달음을 얻습니다.
“사람은 설명 없이도 혼자서 배울 수 있다. 아니, 설명이야말로 배움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다.”
랑시에르는 자코토의 이 발견을 토대로 설명이라는 행위의 본질을 해부합니다. 우리는 흔히 설명을 학생의 이해를 돕기 위해 베푸는 친절한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랑시에르는 설명이 사실은 학생을 영원한 미성년자로 묶어두는 권력의 기술이라고 폭로합니다.
선생이 무언가를 설명해 주는 순간, 교실에는 보이지 않는 위계가 생겨납니다. 선생은 알고 학생은 모르며, 학생은 선생의 설명 없이는 결코 이해할 수 없다는 암묵적인 전제가 깔리기 때문입니다. 이 메시지는 학생의 지능을 무시하고, 학생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마비시킵니다. 이것을 랑시에르는 바보 만들기라고 부릅니다. 설명은 학생에게 지식을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무능력함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뿐입니다. 결국 학생은 선생의 입만 쳐다보게 되고, 선생의 설명이 멈추면 자신의 사고도 멈추는 지적 의존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자코토의 학생들은 어떻게 설명 없이 프랑스어를 배울 수 있었을까요? 그 비밀은 바로 우리가 모국어를 배울 때의 과정과 똑같습니다. 어린아이는 문법책이나 선생님 없이도, 엄마의 말소리를 듣고, 흉내 내고, 틀리고, 다시 시도하면서 스스로 언어의 체계를 터득합니다. 아이는 자신의 지능을 총동원하여 주변의 단서들을 연결하고 의미를 구성해 냅니다. 자코토의 학생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텔레마코스의 모험』이라는 텍스트 안에서 이미 알고 있는 단어와 모르는 단어를 비교하고, 관계를 유추하며, 스스로 지식의 길을 뚫고 나갔습니다. 이 과정에서 작동한 것은 선생의 지식이 아니라, 학생 자신의 ‘지능’과 배우고자 하는 ‘의지’였습니다.
여기서 랑시에르는 교육 역사상 가장 급진적인 공리 하나를 선포합니다. 그것은 바로 모든 지능은 평등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사람마다 지능의 차이가 있다고 믿습니다. 누구는 똑똑하고 누구는 우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랑시에르는 이것이 사회가 만들어낸 불평등을 정당화하기 위한 허구라고 주장합니다. 박사가 논문을 쓸 때 사용하는 지능이나, 문맹인 농부가 날씨를 예측하고 농기구를 개량할 때 사용하는 지능은 본질적으로 같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지능의 높낮이가 아니라, 그 지능을 어디에 집중했느냐 하는 ‘주의력 (Attention)’의 차이와, 스스로 할 수 있다고 믿는 ‘자존감’의 차이일 뿐입니다.
랑시에르가 말하는 ‘지적 평등’은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이라기보다는, 우리가 교육을 시작할 때 반드시 전제해야 할 ‘출발점’입니다. 기존의 교육은 불평등 (선생은 똑똑하고 학생은 모른다)에서 출발하여 평등 (학생을 선생만큼 똑똑하게 만든다)을 목표로 삼습니다. 하지만 불평등에서 시작하면 영원히 불평등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선생은 언제나 학생보다 한발 앞서가며, 학생은 영원히 선생의 뒤를 쫓는 ‘열등한 존재’로 남기 때문입니다. 랑시에르는 순서를 뒤집습니다. 우리는 평등을 목표로 삼을 것이 아니라, 평등을 전제해야 합니다. 상대방이 이미 나와 똑같은 지능을 가진 존엄한 인간이며, 그렇기에 무엇이든 배울 수 있다는 믿음 위에서 시작할 때만 진정한 배움, 즉 ‘지적 해방 (Intellectual Emancipation)’이 일어납니다.
그렇다면 지식을 설명하지 않는 선생, 즉 ‘무지한 스승’의 역할은 과연 무엇일까요? 자코토는 프랑스어를 가르쳤지만, 역설적이게도 학생들에게 단 하나의 지식도 직접 전수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학생들이 자신의 지능을 사용하여 스스로 길을 찾을 수밖에 없도록 끊임없이 요청하고 독려했습니다.
그는 학생들에게 책을 펼쳐 읽게 하고, 자신이 본 것을 말하게 하며, 생각한 바를 스스로 증명해 보라고 주문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무지한 스승은 지식을 주입하는 자가 아니라, 학생의 ‘의지’를 북돋우는 존재가 됩니다. 그는 학생이 자신의 능력을 의심하여 중도에 포기하지 않도록 격려하고, 그들이 게으름이나 두려움 때문에 지능의 궤도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지켜보는 ‘의지의 조력자’ 역할을 수행합니다. 결국 그가 가르치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 해낼 수 있다는 믿음과 용기입니다.
이 ‘무지한 스승’의 철학은 현대 사회를 지배하는 전문가주의와 자격증 만능주의에 대한 가장 통렬한 비판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거대한 ‘설명의 감옥’과도 같습니다.
사회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너는 전문가가 아니니까 모른다", "너는 자격증이 없으니까 할 수 없다." 내 몸이 아파도 의사의 진단명이 없으면 어디가 아픈지조차 확신하지 못하고, 내 아이를 키우면서도 육아 전문가의 지침이 없으면 불안에 떱니다. 심지어 내가 먹을 음식, 내가 살 집, 내가 즐길 취미조차 전문가들의 추천과 별점에 의존하지 않고는 선택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편리함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권리를 전문가 집단에게 통째로 양도해 버린 ‘지적 노예 상태’입니다. 전문가들은 난해한 전문 용어라는 장벽을 세워 자신들의 영역을 신성불가침의 성역으로 만들고, 그 밖의 사람들을 무지한 대중으로 낙인찍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자신의 지성을 사용하는 법을 잊어버리고, 누군가 정답을 알려줄 때까지 멍하니 기다리는 ‘바보’가 되어갑니다. 랑시에르가 말한 ‘바보 만들기’는 학교 담장을 넘어 사회 전체의 작동 원리가 되었습니다.
랑시에르는 우리에게 이 의존성을 끊어내라고 요구합니다. 우리는 전문가의 도움 없이도, 스승의 설명 없이도, 우리 자신의 지능으로 무엇이든 배울 수 있습니다. 목수가 글을 배워 헌법을 해석할 수 있고, 주부가 철학책을 읽고 삶의 진리를 탐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지식의 습득 문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회복하는 문제입니다. 내가 타인과 동등한 지적 능력을 가진 존재임을 자각할 때, 우리는 누구에게도 지배받지 않는 주체적인 시민으로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지적 해방은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요? 랑시에르는 ‘보편적 가르침 (Universal Teaching)’이라는 원리를 제시합니다. 그것은 “무엇이든 하나를 배우고, 그것을 통해 다른 모든 것과 연결하라”는 것입니다. 자코토의 학생들이 『텔레마코스』라는 책 한 권을 통해 언어 전체를 배웠듯이, 우리는 우리 삶의 어떤 한 부분, 내가 진정으로 알고 있는 어떤 ‘하나’에서 출발할 수 있습니다.
내가 요리를 잘한다면, 요리의 원리 (재료의 배합, 불의 조절, 맛의 조화)를 통해 음악이나 경영, 심지어 인생의 원리까지 유추하고 확장해 나갈 수 있습니다. 모든 지식은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나는 요리밖에 몰라”라고 자신을 가두는 것이 아니라, “나는 요리를 통해 세상의 이치를 터득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미지의 영역으로 뛰어드는 태도입니다. 이 연결의 힘을 믿을 때, 세상의 모든 사물과 현상은 우리의 교과서가 됩니다.
랑시에르의 메시지는 오늘날의 제도권 교육에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지금의 학교는 여전히 설명하고, 평가하고, 등수를 매김으로써 학생들에게 ‘너는 부족하다’는 인식을 심어줍니다. 하지만 진정한 교육은 학생이 가진 무한한 잠재력을 신뢰하고, 그들이 스스로 숲을 헤쳐 나갈 수 있도록 지도를 쥐여주는 것이 아니라 나침반을 쥐여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교사는 지식 소매상이 아니라, 학생이 자신의 지적 능력을 발견하도록 돕는 ‘해방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제 우리 안의 ‘무지한 스승’을 깨워야 합니다. 그것은 내 지능을 신뢰하는 것이며, 타인의 지능 또한 나와 동등하게 존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가르쳐야 할 대상’이 아니라, ‘함께 탐구하는 동료’로 바라볼 때, 우리의 관계는 지배와 복종이 아닌 평등한 지성들의 연대로 바뀝니다. “나는 가르칠 자격이 없다”는 겸손함이 아니라, “나는 몰라도 가르칠 수 있다”는 역설적인 대담함이 필요합니다. 내가 모르는 것을 학생이 스스로 배우게 할 수 있는 능력, 아버지가 자식에게 모국어를 가르치듯 사랑과 신뢰로 기다려주는 태도, 이것이 바로 우리 시대를 구원할 교육의 참된 모습입니다. 지적 평등은 먼 미래의 꿈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 우리가 “나는 할 수 있다”고 선언하는 바로 그 순간 시작되는 현실입니다.
5-24.3. 발도르프와 전인 교육
현대 사회에서 아이와 청소년은 종종 ‘아직 완성되지 않은 어른’ 혹은 ‘미래의 노동력’으로 간주됩니다. 학교는 이 미성숙한 존재를 하루라도 빨리 효율적인 사회 구성원으로 개조하기 위해 존재하는 거대한 공장처럼 작동합니다. 우리는 아이들의 머릿속에 경쟁에서 살아남을 지식과 기술을 주입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 아이가 어떤 영혼을 가진 존재인지, 그 내면에서 무엇이 자라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깊이 질문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머리’는 비대하지만 ‘가슴’은 메말라 있고, ‘손발’은 무기력한 기형적인 인간상을 만들어냈습니다. 지식은 넘쳐나지만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줄 모르고, 비판적 사고는 가능하지만 세상을 위해 실천할 의지는 박약한 이 분열된 인간이야말로 현대 문명이 겪는 위기의 근원입니다.
20세기 초, 오스트리아의 사상가 루돌프 슈타이너 (Rudolf Steiner, 1861-1925)가 주창한 발도르프 교육 (Waldorf Education)은 바로 이 ‘분열된 인간’을 치유하고, 머리와 가슴과 손발이 조화로운 ‘전인(全人)’을 길러내기 위한 가장 급진적이고 영적인 교육 예술입니다.
슈타이너의 교육 철학은 그가 창시한 ‘인지학 (Anthroposophy)’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인지학은 인간을 단순히 육체적인 존재나 사회적 산물로 보지 않습니다. 인간은 육체 (Body), 영혼 (Soul), 정신 (Spirit)이 통합된 우주적인 존재입니다. 슈타이너는 인간의 내면이 크게 세 가지 힘, 즉 ‘사고 (Thinking)’, ‘감정 (Feeling)’, ‘의지 (Willing)’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 세 가지는 각각 우리 신체의 머리, 가슴, 그리고 사지 (손발)와 연결됩니다. 건강한 교육이란 이 세 가지 힘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고르게 발달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머리의 냉철한 ‘지성’과 가슴의 따뜻한 ‘감성’, 그리고 손발의 굳건한 ‘의지’가 하나로 어우러질 때, 비로소 인간은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대 교육은 오직 ‘머리 (사고)’에만 집착합니다. 우리는 아이가 걸음마를 떼기도 전에 글자를 가르치고, 추상적인 개념을 주입하며 조기 교육에 열을 올립니다. 슈타이너는 이러한 ‘지적 조숙함’이 아이의 생명력을 갉아먹는 치명적인 독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식물이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뻗은 후에야 꽃을 피울 수 있듯이, 인간의 발달에도 엄연한 ‘자연의 순서’가 있습니다. 때가 되지 않았는데 억지로 꽃봉오리를 벌리려 하면 꽃은 시들어버립니다. 발도르프 교육은 이 자연스러운 발달 단계, 즉 ‘7년 주기설’을 철저하게 따르며 아이의 영혼이 숨 쉴 수 있는 시간을 기다려줍니다.
첫 번째 7년, 즉 태어나서부터 이갈이를 하는 7세까지의 시기는 ‘의지 (Willing)’와 ‘신체’가 발달하는 시기입니다. 이때 아이는 온몸이 하나의 감각 기관과 같습니다. 아이는 세상을 머리로 이해하지 않고 몸으로 만나며, 주변 환경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입니다. 이 시기 교육의 핵심은 지식 전달이 아니라 ‘모방 (Imitation)’과 ‘본보기’입니다. 아이는 부모와 교사가 하는 행동, 말투, 심지어 그들이 품고 있는 마음의 상태까지도 그대로 모방하며 자신의 신체를 형성해 나갑니다. 따라서 이 시기에 가장 필요한 것은 추상적인 글자 공부나 스마트폰 화면이 아닙니다. 흙을 만지고, 나무를 오르고, 리듬감 있는 놀이를 하며 신체 감각을 깨우는 것입니다. 슈타이너는 “이 시기에 억지로 지적 교육을 시키는 것은, 훗날 성인이 되었을 때 사용할 생명 에너지를 미리 당겨 쓰는 것과 같아 결국 병약한 신체와 신경질적인 기질을 만들게 된다”고 경고했습니다. 아이가 마음껏 뛰어놀며 자신의 손발을 움직여 의지력을 키울 수 있도록, 우리는 지식 주입의 유혹을 ‘비워내야’ 합니다.
두 번째 7년, 즉 7세부터 사춘기가 시작되는 14세까지는 ‘감정 (Feeling)’이 발달하는 시기입니다. 이제 아이는 세상을 ‘아름다움’으로 느끼고 받아들입니다. 이 시기의 핵심은 ‘권위 (Authority)’와 ‘예술 (Art)’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권위는 억압적인 힘이 아니라, 아이가 믿고 따를 수 있는 ‘사랑하는 권위’를 의미합니다. 폭풍우 치는 바다에서 등대가 필요하듯, 혼란스러운 성장기 아이에게는 존경할 수 있는 어른이라는 안전한 울타리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모든 수업은 ‘예술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수학은 딱딱한 공식이 아니라 리듬과 춤으로 배우고, 역사는 건조한 연대기가 아니라 가슴 뛰는 영웅들의 이야기로 만납니다. 아이들은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부르고, 시를 낭송하며, 지식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먼저 느낍니다. 이 풍부한 예술적 체험을 통해 아이의 영혼에는 타인과 공감하고 세상을 긍정할 수 있는 따뜻한 감성이 자리 잡게 됩니다.
세 번째 7년, 14세부터 21세까지는 비로소 ‘사고 (Thinking)’가 꽃피는 시기입니다. 신체가 튼튼하게 자라고 감성이 풍부하게 채워진 후에야, 비로소 날카로운 비판적 지성이 안전하게 들어설 수 있습니다. 이제 청소년들은 “이것은 진실인가?”를 묻습니다. 교사는 더 이상 권위자가 아니라, 함께 진리를 탐구하는 선배이자 안내자가 됩니다. 아이들은 과학적 인과관계를 파고들고, 사회적 모순을 비판하며, 자신만의 세계관을 정립해 나갑니다. 이때 형성된 지성은 차가운 논리에 머물지 않고, 앞서 길러진 따뜻한 감성, 굳건한 의지와 결합하여,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변화시키는 실천적인 지혜가 됩니다.
발도르프 교육이 추구하는 이 긴 호흡의 여정은 현대 교육의 속도전과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현대 사회는 “남보다 빨리”를 외치지만, 발도르프는 “제때에”를 강조합니다. 1등을 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발도르프 학교에는 시중에서 판매하는 정해진 교과서가 없습니다. 대신 아이들은 ‘에포크 노트 (Epoch Note)’라고 불리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자신만의 교과서를 직접 만들어갑니다. 발도르프 학교는 매일 아침 약 2시간씩, 3~4주 동안 국어, 수학, 역사, 과학 중 한 과목만을 집중적으로 깊이 있게 탐구하는 ‘에포크 수업 (주기 집중 수업)’을 진행합니다. 아이들은 이 기간 동안 선생님에게 들은 이야기, 자신이 직접 실험하고 관찰한 내용, 그리고 그 과정에서 느낀 감정을 빈 공책에 자신만의 글과 그림으로 아름답게 채워 넣습니다.
이 노트는 단순한 필기장이 아닙니다. 그것은 남이 요약해 놓은 정답을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을 자신의 호흡으로 소화하고 예술적으로 재창조해낸 ‘영혼의 기록물’입니다. 아이들은 이 과정을 통해 배움이 외부에서 억지로 주입되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생생하게 생성되는 기쁨임을 깨닫게 됩니다.
또한 이 학교에는 시험과 등수가 없습니다. 경쟁은 친구를 적으로 만들고 배움의 순수한 기쁨을 앗아가기 때문입니다. 대신 아이들은 서로 협력하며 함께 성장하는 법을 배웁니다.
특히 발도르프 교육의 독창적인 교과목인 ‘오이뤼트미 (Eurythmy)’는 슈타이너의 전인 교육 철학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보이는 언어’, ‘보이는 노래’라고도 불리는 오이뤼트미는 단순한 무용이나 체조가 아닙니다. 그것은 언어와 음악의 소리가 가진 내적 성질을 몸의 움직임으로 표현하는 예술입니다. 아이들은 오이뤼트미를 통해 자신의 몸 (의지)과 감정 (가슴), 그리고 소리의 질서 (머리)를 조화롭게 통합하는 훈련을 합니다. 또한, 여럿이 함께 원을 그리며 움직이는 과정에서 나와 타인 사이의 공간을 지각하고, 서로의 리듬을 맞추며 공동체 감각을 몸으로 익힙니다. 이는 분절된 신체와 정신을 연결하고, ‘나’와 ‘우리’를 연결하는 치유의 춤입니다.
또한 슈타이너는 ‘손의 지혜’를 강조했습니다. 발도르프 학교에서는 남녀를 불문하고 뜨개질, 목공, 원예와 같은 수공예 수업을 필수적으로 받습니다. 현대인은 손을 잃어버렸습니다. 손가락 하나로 스마트폰을 터치하는 것이 손을 쓰는 전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손은 ‘외부로 뇌’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 손끝에 집중할 때, 우리의 의지력은 단련되고 두뇌는 창의적으로 깨어납니다. 한 올 한 올 실을 엮어 양말을 만들고, 거친 나무를 깎아 숟가락을 만드는 과정은, 인내심과 성취감을 가르쳐줄 뿐만 아니라, 사물의 소중함과 노동의 신성함을 일깨워줍니다. 머리로만 아는 지식은 공허하지만, 손발을 움직여 체득한 지식은 삶을 지탱하는 뿌리가 됩니다.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교육 현실은 참담합니다. 교실은 붕괴하고, 아이들은 ADHD (주의력 결핍 과잉 행동 장애)와 우울증에 시달리며, 학교폭력은 끊이지 않습니다. 슈타이너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아이들의 잘못이 아닙니다. 아이들의 내면에서 자라나야 할 의지와 감정이 억압당하고, 오직 머리만 혹사당한 결과, 갈 곳 잃은 생명 에너지가 병리적인 형태로 폭발하는 것입니다. 몸을 움직여야 할 시기에 책상에 묶어두니 의지는 공격성이 되고, 예술로 감성을 채워야 할 시기에 경쟁으로 몰아넣으니 감정은 메말라 냉소와 혐오가 됩니다.
발도르프 교육은 우리에게 ‘회복’을 제안합니다. 그것은 교육의 속도를 늦추는 ‘느림의 미학’이자, 아이를 기능적 도구가 아닌 영적 존재로 대우하는 ‘존중의 윤리’입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서 빼앗아 간 ‘어린 시절’을 돌려주어야 합니다. 멍하니 공상을 즐길 시간, 흙투성이가 되어 놀 시간, 쓸모없는 짓을 하며 몰입할 시간을 허락해야 합니다. 그 ‘비움’의 시간 속에서 아이는 스스로 자라나는 힘을 얻습니다.
또한, 교육은 학교 안에 갇혀서는 안 됩니다. 가정과 사회 전체가 거대한 학교가 되어야 합니다. 슈타이너는 “교육은 사회적 문제”라고 말했습니다. 병든 사회에서는 건강한 교육이 불가능하고, 병든 교육은 병든 사회를 재생산합니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것은 1등 성적표나 많은 유산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고, 아름다움을 느끼며, 선한 의지로 행동할 수 있는 ‘자유로운 영혼’입니다.
결국 발도르프 교육이 지향하는 바는 ‘자유를 향한 교육 (Education towards Freedom)’입니다. 여기서의 자유는 제멋대로 하는 방종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의 편견과 욕망, 그리고 사회가 주입한 고정관념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참된 본성 (참자아)에 따라 삶의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능력입니다. 머리로 진리를 판단하고, 가슴으로 타인을 사랑하며, 손발로 세상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 루돌프 슈타이너가 꿈꾸었던 이 ‘조화로운 인간’이야말로, 기계 문명과 물질 만능주의에 갇힌 이 시대를 구원할 미래의 희망입니다. 우리는 아이들을 기르며 동시에 우리 자신을 다시 기르게 됩니다. 잃어버린 감성을 깨우고, 무력해진 의지를 다시 세우는 것, 이것이 우리 모두가 걸어가야 할 전인 교육의 길입니다.
5-24.4. 도래할 공동체
우리는 흔히 ‘공동체’라는 말을 들을 때, 피를 나눈 가족이나 같은 언어를 쓰는 민족, 혹은 같은 신을 섬기는 종교 집단처럼 끈끈한 공통점으로 묶인 폐쇄적인 집단을 떠올립니다.우리는 내가 속한 이 울타리 안에서 안정을 느끼고, 그 바깥에 있는 사람들과 나를 구분 지으며 ‘정체성 (Identity)’을 확인합니다. “나는 한국인이다”, “나는 기독교인이다”, “나는 진보주의자다”라는 선언은 내가 누구인지를 설명해 주는 동시에, 나와 다른 타자를 배제하는 경계선이 됩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이 견고했던 ‘정체성의 공동체’는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세계화와 이주로 인해 우리는 낯선 타자들과 뒤섞여 살 수밖에 없게 되었고, 고정된 정체성은 오히려 갈등과 혐오의 불씨가 되고 있습니다. 내 편과 네 편을 가르는 배타적인 민족주의, 종교 분쟁, 인종 차별은 모두 ‘순수한 우리’를 지키겠다는 낡은 공동체 의식이 낳은 비극입니다. 과연 공통점이나 조건 없이, 타자를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공동체는 불가능한 것일까요?
이 절박한 물음 앞에서, 프랑스의 철학자 장 뤽 낭시 (Jean-Luc Nancy, 1940-2021)와 이탈리아의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 (Giorgio Agamben, 1942-)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차원의 공동체를 상상할 것을 제안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공동체는 ‘만들어진 성 (城)’이 아니라, 끊임없이 ‘도래하는 (coming)’ 열린 가능성입니다. 그리고 이 철학적 모험은 우리가 다음 세대를 어떻게 길러내야 할지, 즉 교육의 미래에 대한 근본적인 전환을 요청합니다.
장 뤽 낭시는 그의 저서 『무위의 공동체, La Communauté désoeuvrée』를 통해, 우리가 가진 ‘공동체에 대한 환상’을 깨트리는 것으로 논의를 시작합니다. 우리는 흔히 공동체를 잃어버린 낙원처럼 생각합니다. 과거에는 모두가 하나로 융합된 따뜻한 공동체가 있었는데, 현대화로 인해 그것이 파괴되었다고 믿으며, 그것을 다시 ‘복원’하거나 ‘제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낭시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런 융합된 공동체는 존재한 적도 없으며, 그것을 인위적으로 만들려고 할 때 전체주의의 폭력이 발생한다.”
나치즘이나 파시즘이 보여주었듯이, ‘하나의 피’, ‘하나의 정신’으로 똘똘 뭉친 공동체를 만들려는 시도 (Work)는 필연적으로 그 기준에 맞지 않는 이들을 제거하는 학살로 이어집니다. 낭시가 말하는 ‘무위 (無爲, désoeuvrée)’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공동체를 하나의 ‘작품 (Work)’이나 ‘생산물’로 만들려는 인위적인 시도를 멈추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공동체는 우리가 노력해서 완성해야 할 목표가 아니라, 우리 존재의 근원적인 조건 그 자체입니다.
낭시에 따르면, 우리는 ‘나 홀로’ 존재하는 원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미 타자와 ‘함께 (with)’ 존재합니다. 그는 이를 ‘함께 있음 (Being-with, Être-avec)’이라고 부릅니다. 이 ‘함께 있음’은 서로 녹아들어 하나가 되는 융합이 아닙니다. 그것은 서로의 다름을 유지한 채, 서로의 곁에 노출되어 접촉하는 상태입니다. 마치 피부와 피부가 맞닿아 있듯이, 우리는 타자와 연결되어 있지만 결코 타자가 될 수는 없는 ‘단수적 복수 (Singular Plural)’의 존재들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공동체는 정체성으로 묶인 닫힌 원이 아니라, 서로 다른 단독자들이 서로에게 자신을 개방하고 노출하는 열린 네트워크입니다.
조르조 아감벤은 그의 얇지만 강력한 저서 『도래할 공동체, The Coming Community』에서 낭시의 논의를 이어받아, 이 새로운 공동체의 주체가 될 인간상을 제시합니다. 그는 이를 ‘임의의 특이성 (Whatever Singularity)’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임의의 (Whatever)’라는 말은 ‘아무거나 상관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라틴어 ‘쿠오들리벳 (Quodlibet)’에서 온 이 말은, ‘어떠어떠함 (조건)에 상관없이, 있는 그대로의 그 존재’라는 긍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사람을 설명할 때 ‘속성’이나 ‘조건’을 붙입니다. “저 사람은 한국인이다”, “저 사람은 의사다”, “저 사람은 노동자다.” 이러한 속성은 그 사람을 특정한 집단에 소속시키지만, 동시에 그 사람의 고유한 존재 자체를 가려버립니다. 아감벤이 말하는 ‘임의의 특이성’은 이러한 속성 (Predicate)으로 규정되지 않는 존재입니다. 그는 ‘한국인’이기 때문에, ‘노동자’이기 때문에 공동체에 속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저 ‘그 자신’으로서 존재합니다.
아감벤은 이 새로운 주체의 예로 ‘난민’을 듭니다. 난민은 국가라는 공동체의 보호막 (시민권)을 잃어버린 존재들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프랑스인’도 ‘독일인’도 아닌, 벌거벗은 인간 그 자체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이들은 국적이나 신분이라는 조건 없이 오직 ‘인간’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공동체에 속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아감벤이 꿈꾸는 ‘도래할 공동체’는 바로 이런 존재들, 즉 정체성의 꼬리표를 떼어내고 서로의 얼굴을 있는 그대로 마주 보는 특이성들이 이루는 공동체입니다. 여기에는 입국 심사도, 자격 조건도 없습니다. 오직 서로의 곁에 머무는 ‘함께 있음’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철학적 통찰은 우리 교육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엄청난 시사점을 던져줍니다. 지금 우리의 학교는 어떤 인간을 길러내고 있습니까? 우리는 아이들에게 끊임없이 ‘정체성’을 주입합니다. “너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딸이다”, “너는 미래를 이끌어갈 리더다”, “너는 우리 학교의 명예다.” 이러한 교육은 아이들을 특정한 집단의 일원으로 묶어세우고, 그 집단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국민’이나 ‘인적 자원’으로 만듭니다. 이것은 낭시가 경계했던 ‘공동체 제작’의 과정이며, 필연적으로 ‘우리’와 ‘그들’을 가르는 배타성을 내면화하게 합니다.
낭시와 아감벤의 논의를 확장하여, 우리는 ‘정체성으로 묶이지 않는 열린 시민’을 길러내는 새로운 교육을 천명해야 합니다.
첫째, 교육은 ‘속성 (Predicate)’을 벗기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학교는 아이들에게 “너는 무엇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사회가 덧씌운 꼬리표 (성별, 계급, 인종, 성적 지향 등) 너머에 있는 자신의 고유한 ‘특이성’을 발견하도록 돕는 해방의 공간이어야 합니다. 1등이냐 꼴찌냐, 부자냐 가난하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네가 너라는 사실” 그 자체가 가장 소중하다는 것을 경험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은 아이들을 ‘아무나 (Nobody)’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대체 불가능한 ‘단독자 (Singularity)’로 대우하는 것입니다.
둘째, 교육은 ‘경계’가 아닌 ‘접촉’을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우리나라”, “우리 민족”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지만, 때로는 그 사랑이 타자에 대한 혐오로 변질되기도 합니다. 새로운 교육은 국경과 담장을 넘어서는 상상력을 길러주어야 합니다. 내 짝꿍이 나와 다르게 생겼어도, 말이 통하지 않아도, 우리는 함께 밥을 먹고 웃을 수 있다는 ‘함께 있음’의 감각을 몸으로 익히게 해야 합니다. 교실은 작은 ‘도래할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곳은 성적이나 배경으로 끼리끼리 뭉치는 곳이 아니라,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아이들이 ‘임의의 특이성’으로서 만나 우정을 나누는 실험실이어야 합니다.
셋째, 교육은 ‘목적 없는 수단’으로서의 만남을 주선해야 합니다. 아감벤은 목적 (이익, 생산)에 종속되지 않은 순수한 수단 (제스처, 놀이)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오늘날 학교는 친구조차 ‘인맥’이라는 목적으로 사귀도록 부추깁니다. 하지만 진정한 공동체는 목적 없이 함께 노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아이들이 어떤 이득을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함께 있는 것이 좋아서 어울리는 시간, 쓸모없어 보이는 놀이에 몰입하며 서로의 존재를 기뻐하는 그 ‘무위 (無爲)’의 시간을 돌려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꿈꾸는 미래의 시민은, 태극기를 흔들며 애국심을 외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이 속한 집단에 충성하기보다, 인류라는 보편적 지평 위에서 고통받는 타자의 얼굴을 외면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는 “나는 한국인이다”라고 말하기 이전에 “나는 당신 곁에 있는 사람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정체성의 갑옷을 입고 자신을 방어하는 전사가 아니라, 갑옷을 벗고 자신의 취약함을 드러내며 타인과 연결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열린 이웃’입니다.
‘도래할 공동체’는 먼 미래에 완성될 유토피아가 아닙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 교실에서, 가정에서, 거리에서 우리가 타자를 ‘조건 없이’ 환대하고 그들과 ‘함께 있음’을 선택하는 매 순간 도래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것은 높고 튼튼한 성벽이 아니라, 그 성벽을 넘나들 수 있는 가벼운 발걸음과 열린 가슴입니다. 정체성이라는 낡은 닻을 걷어 올리고, 차이와 다름이 춤추는 넓은 바다로 항해하는 법을 가르칠 때, 교육은 비로소 우리 아이들을 과거가 아닌 ‘도래할 미래’로 안내하는 나침반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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