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5장: 미래와 책임 - 희망의 원리

by 이호창

제5-25장: 미래와 책임 - 희망의 원리



5-25.1. 책임의 원칙: 미래 세대를 위하여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세대입니다. 우리의 손끝에는 지구 반대편으로 정보를 순식간에 날려 보내는 기술뿐만 아니라, 버튼 하나로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를 몇 번이고 멸절시킬 수 있는 핵무기와 생태계를 돌이킬 수 없이 파괴할 수 있는 산업 기술이 쥐어져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 신화 속의 프로메테우스는 신들로부터 불을 훔쳐 인간에게 문명을 선물했지만, 현대의 프로메테우스는 그 불로 지구 전체를 태워버릴 수도 있는 '풀려난 거인'이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인간의 행동이 기껏해야 이웃 마을이나 당대의 사람들에게만 영향을 미쳤습니다. 내가 잘못을 저질러도 그 피해는 국지적이었고, 시간은 그 상처를 치유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릅니다. 우리가 무심코 사용하는 플라스틱, 우리가 배출하는 탄소, 우리가 조작하는 유전자는 수백 년, 아니 수만 년 후의 미래에까지 돌이킬 수 없는 흔적을 남깁니다. 우리의 행위 능력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확장되었지만, 불행히도 우리의 윤리적 상상력은 여전히 ‘지금, 여기, 우리끼리’의 좁은 울타리 안에 갇혀 있습니다.


이 ‘능력과 책임의 거대한 간극’ 앞에서, 20세기 독일 출신의 철학자 한스 요나스 (Hans Jonas, 1903-1993)는 인류를 향해 서늘하고도 엄중한 경고를 던집니다. 그는 그의 주저 『책임의 원칙, Das Prinzip Verantwortung』에서, 전통적인 윤리학이 더 이상 기술 시대의 파국을 막을 수 없음을 선언합니다. 칸트의 정언명령이나 기독교의 사랑의 계명은 “너와 나”, 즉 동시대인들 사이의 관계만을 다룰 뿐, 아직 태어날지조차 불확실한 먼 미래의 후손들과 말 못 하는 자연에 대해서는 침묵하기 때문입니다. 요나스는 이 침묵을 깨고, 우리에게 전혀 새로운 차원의 의무를 부과합니다. 그것은 바로 “미래 세대가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장해야 할 무한한 책임”입니다.


요나스가 제시하는 새로운 정언명령은 다음과 같습니다.


“너의 행위의 결과가 지구상에서 진정한 인간의 삶이 지속될 수 있는 가능성과 조화되도록 행위하라.”


이 명령은 우리에게 “지금 행복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미래의 존재 가능성을 파괴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이것은 권유가 아니라 절대적인 금지입니다. 우리는 미래 세대의 행복까지 보장해 줄 수는 없습니다. 그들이 어떤 세상을 원할지 우리는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적어도 그들이 ‘존재’할 수 있는 물리적, 생물학적 기반, 즉 숨 쉴 수 있는 공기와 마실 수 있는 물, 그리고 인간으로서 존엄을 지킬 수 있는 환경을 남겨주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현재의 풍요를 위해 이 기반을 파괴한다면, 그것은 단순히 자원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 세대의 ‘존재할 권리’ 자체를 박탈하는 범죄, 즉 살인 행위나 다름없습니다.


요나스는 잠들어 있는 우리의 책임감을 흔들어 깨우기 위해 ‘공포의 발견술 (Heuristics of Fear)’이라는 독특하고도 충격적인 방법론을 제안합니다. ‘발견술’이란 진리를 찾아내는 기술을 뜻합니다. 즉, 우리가 진정으로 지켜야 할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역설적이게도 ‘공포’를 통해서 발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과학 기술이 결국엔 문제를 해결해 줄 거야”, “미래는 지금보다 더 풍요롭고 좋아질 거야”라는 막연한 낙관주의에 기대어 살아갑니다. 요나스는 이러한 희망 섞인 낙관주의야말로 인류를 “파멸로 이끄는 달콤한 마약”이라고 맹비난합니다. 낙관은 우리를 안심시키고, 지금 당장 멈춰야 할 파괴적인 소비와 개발을 정당화하며, 행동을 미래로 미루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반면, 진정한 책임은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상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요나스는 우리가 미래에 대해 알 수 없는 것 (불확실성)이 너무 많을 때는, 희망보다는 공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윤리적으로 더 안전하다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건강할 때는 건강의 소중함을 모릅니다. 폐가 병들어 숨쉬기가 고통스러워질 때, 비로소 공기의 소중함과 숨 쉰다는 것의 가치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공포의 발견술입니다. 우리는 기후 위기로 해수면이 상승하여 도시가 잠기고, 꿀벌이 사라져 식량이 고갈되며, 핵전쟁이나 통제 불능의 AI로 인해 문명이 붕괴하는 끔찍한 미래를 머릿속으로 생생하게 그려보아야 합니다. 그 전율할 공포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아, 인류의 존속이 이토록 위태롭고 소중한 것이구나”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게 됩니다.


이때 요나스가 말하는 공포는 겁쟁이의 도피나 병적인 불안이 아닙니다. 그것은 낭떠러지 끝에서 놀고 있는 아이를 본 부모가 느끼는 본능적인 전율과 같습니다. 그 공포는 부모를 얼어붙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즉시 달려가 아이를 낚아채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행동의 원동력’이 됩니다.


요나스는 우리에게 호소합니다. 미래 인류의 운명은 도박판의 판돈이 아닙니다. 성공 확률이 아무리 높아도, 실패했을 때의 결과가 ‘인류의 멸망’이라면 우리는 그 도박을 멈춰야 합니다. 1%의 파국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100%의 현실로 가정하고 지금 당장 행동을 바꿔야 합니다. 이것이 끔찍한 미래를 미리 ‘공포’로 체험함으로써, 그 미래가 오지 않도록 막아내는 예언자적 책임의 자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미래 세대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까요? 그들은 아직 존재하지도 않고, 우리에게 어떤 권리를 주장한 적도 없으며, 우리가 그들을 위해 희생한다고 해서 우리에게 보상해 줄 수도 없습니다 (비호혜성). 전통적인 ‘계약 윤리’에서 책임은 권리와 의무의 교환 관계에서 성립합니다. “네가 나를 존중하니 나도 너를 존중한다”는 식입니다. 하지만 미래 세대와의 관계에서는 이 교환이 불가능합니다.


요나스는 이 비호혜적인 책임의 원형을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서 찾습니다. 갓 태어난 아기는 부모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습니다. 오직 젖을 달라고 울며 요구할 뿐입니다. 하지만 부모는 그 아기의 연약함과 의존성 그 자체로부터 “이 생명을 돌봐야 한다”는 절대적인 명령을 듣습니다. 아기가 “나를 돌봐 달라”고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저 그 생명이 거기에 존재하며, 부모의 돌봄 없이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그 사실 자체가 책임을 발생시킵니다. 요나스는 현세대와 미래 세대의 관계가 바로 이와 같다고 말합니다. 미래 세대는 우리의 ‘권력’ 아래 놓여 있습니다.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가 그들의 생존을 좌우합니다. 힘을 가진 자는 그 힘에 영향을 받는 약자에 대해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책임을 집니다. 이것이 바로 ‘책임의 원칙’입니다.


더 나아가 요나스는 형이상학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도대체 왜 인류는 계속 존속해야 하는가?” 삶이 고통뿐이라면, 차라리 인류가 조용히 소멸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요? 쇼펜하우어 같은 염세주의자들은 그렇게 물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요나스는 단호하게 “아니요”라고 대답합니다. 존재는 비존재보다 우월하며, 생명은 그 자체로 목적입니다. 인류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주 속에서 생명과 정신의 불꽃을 지켜내야 할 ‘존재론적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미래 세대가 태어나지 않기를 바랄 권리가 없으며, 그들의 존재 가능성을 차단할 권리는 더더욱 없습니다. 인류의 존속은 타협할 수 없는 절대 가치입니다.


한스 요나스의 철학은 오늘날의 소비지상주의 문명에 대한 통렬한 고발입니다. 우리는 자본주의가 부추기는 끝없는 욕망 충족을 ‘행복’이라 부르며, 미래의 자원을 가불해 현재의 파티를 즐기고 있습니다. 요나스는 이를 ‘집단적 자살’을 향한 행진이라고 경고합니다. 우리가 지금 누리는 풍요가 미래 세대의 무덤 위에 세워진 것이라면, 그것은 범죄입니다. 따라서 ‘책임의 윤리’는 필연적으로 ‘절제’와 ‘비움’의 윤리로 귀결됩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 것 (기술적 능력)’과 ‘해도 되는 것( 윤리적 허용)’을 엄격히 구분해야 합니다. 기술적으로 가능하다고 해서 무조건 실행해서는 안 됩니다. 유전자 조작으로 맞춤형 인간을 만들거나, 기후를 인위적으로 조작하는 지구 공학 같은 시도들은, 그 결과가 통제 불가능하고 비가역적일 수 있기에 멈춰야 합니다. 우리는 자연을 정복하고 착취하려는 ‘채움’의 욕망을 비워내고, 우리의 힘을 스스로 제한하는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또한, 이 책임은 개인의 차원을 넘어 정치적이고 집단적인 실천으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요나스는 자유 시장 경제나 개인의 양심만으로는 이 거대한 파국을 막을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공기, 물, 토양과 같은 공공재를 보호하고 미래 세대의 권리를 대변할 수 있는 강력한 ‘공적 통제’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투표할 때, 물건을 살 때, 기업을 운영할 때 항상 “이 결정이 7세대 후의 자손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를 물어야 합니다. 미래 세대는 투표권이 없기에, 현재를 사는 우리가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신탁 통치자’가 되어야 합니다.


요나스의 『책임의 원칙』은 우리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줍니다. 미래를 걱정하느라 현재의 쾌락을 포기하라는 요구는 달갑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무거움이야말로 인간이 가진 위엄의 증거입니다. 짐승은 현재만을 살지만, 인간은 미래를 사유하고 책임질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실천해야 할 ‘비움’은 현재의 욕망에 대한 집착을 비워내는 것입니다. “나만 아니면 돼”, “내 살아생전에는 괜찮겠지”라는 지독한 에고이즘을 비워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연결’되어야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의 끈을 잡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생명들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그들의 얼굴을 상상하고, 그들의 숨소리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한스 요나스는 희망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두려움을 가지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 두려움의 끝은 절망이 아니라, 생명을 지키려는 뜨거운 사랑입니다. 우리가 오늘 불편함을 감수하고, 플라스틱 하나를 줄이고, 에너지를 아끼며, 생태적인 삶으로 전환하는 것은, 단순히 도덕적인 칭찬을 듣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아이들이, 그리고 그 아이들의 아이들이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지키기 위한 가장 구체적이고 절박한 사랑의 실천입니다. 책임은 미래를 위한 선물이 아닙니다. 책임은 현세대가 미래 세대에게 갚아야 할 빚입니다. 우리는 이 빚을 갚기 전까지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5-25.2. 7세대 원칙: 인류세의 지혜



현대 문명은 ‘속도’와 ‘단기적 성과’라는 두 개의 바퀴로 굴러가는 폭주 기관차와 같습니다. 기업은 분기별 실적 보고서에 목을 매고, 정치인은 다음 선거에서의 승리만을 계산하며, 개인은 당장의 쾌락과 편의를 위해 소비합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미래의 자원을 가불해 쓰는 것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단기주의 (Short-termism)는 우리 눈을 가려, 바로 한 치 앞의 낭떠러지를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지질학자들이 인류가 지구 환경을 돌이킬 수 없이 변화시킨 시대를 일컬어 ‘인류세 (Anthropocene)’라고 명명했을 때, 그것은 인류의 위대함에 대한 찬사가 아니라, 우리가 지구의 암적인 존재가 될 수도 있다는 섬뜩한 경고였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빠른 속도가 아니라, 시간의 지평을 아득히 멀리 확장하는 깊은 시선입니다.


북미 원주민 이로쿼이 연맹 (Iroquois Confederacy)이 수백 년간 지켜온 ‘7세대 원칙 (Seventh Generation Principle)’은, 벼랑 끝에 선 현대 인류에게 생존을 위한 가장 오래되고도 혁신적인 지혜를 건네줍니다.


미국 북동부의 다섯 부족 (후에 여섯 부족)이 결성한 이로쿼이 연맹, 즉 하우데노사우니 (Haudenosaunee) 족에게는 ‘평화의 위대한 법 (Great Law of Peace)’이라 불리는 헌법이 있었습니다. 이 법의 핵심 조항은 부족의 지도자들이 의사 결정을 내릴 때 반드시 지켜야 할 엄중한 의무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추장들은 자신들의 결정을 내릴 때, 그 결정이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앞으로 태어날 7세대 후의 자손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심사숙고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7세대 원칙입니다.


여기서 ‘7세대’는 대략 150년에서 200년이라는 물리적 시간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상징적으로는 ‘우리가 알 수 없는 먼 미래’이자 ‘지속 가능한 영원’을 뜻합니다. 그들은 나무 한 그루를 벨 때도, 강물에 댐을 건설할 때도, 사냥을 할 때도 항상 질문했습니다. “이 행동이 7세대 후의 아이들이 마실 물을 더럽히지는 않는가?”, “이 결정 때문에 7세대 후의 숲이 사라지지는 않는가?” 그들에게 미래 세대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라, 지금 여기의 의사 결정 테이블에 함께 앉아 있는, 침묵하지만 가장 중요한 구성원이었습니다.


이 원칙은 현대의 ‘지속 가능성 (Sustainability)’ 개념과 맞닿아 있지만, 그 깊이는 훨씬 더 심오합니다. 현대의 지속 가능성이 “자원을 효율적으로 관리하여 오래 쓰자”는 기술적이고 경제적인 접근이라면, 7세대 원칙은 “우리는 누구인가”를 묻는 존재론적이고 영적인 접근이기 때문입니다. 하우데노사우니 족에게 인간은 시간의 주인이나 자연의 정복자가 아닙니다. 인간은 과거의 조상들로부터 생명을 물려받아 잠시 보관하다가, 미래의 후손들에게 온전히 물려주어야 할 ‘수탁자 (Trustee)’입니다.


그들은 시간을 직선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원형의 순환으로 보았습니다. 우리는 앞서간 7세대의 조상들이 지켜준 땅과 지혜 덕분에 지금 이곳에 존재합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이 선물을 훼손하지 않고 다음 7세대에게 전해줄 신성한 의무가 있습니다. 14세대에 걸친 이 장구한 시간의 연결 고리 속에서, ‘나’라는 존재는 고립된 점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를 잇는 다리입니다. 이 다리가 튼튼해야 생명의 강물이 끊기지 않고 흐를 수 있습니다.


인류세의 위기는 바로 이 시간의 연결 고리를 우리가 끊어버렸기 때문에 발생했습니다. 우리는 화석 연료라는 수억 년 전의 태양 에너지를 단 200년 만에 다 태워버리며 기후를 붕괴시켰습니다. 우리는 썩지 않는 플라스틱과 방사능 폐기물을 만들어, 향후 수만 년 동안 후손들을 괴롭힐 독성 물질을 남겼습니다. 이것은 세대 간의 단절을 넘어, 현세대가 미래 세대를 상대로 벌이는 ‘시간의 식민지화’이자 ‘독재’입니다. 미래 세대는 투표권도 없고, 불매 운동도 할 수 없기에, 우리는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그들의 몫을 약탈하고 있습니다.


7세대 원칙은 우리에게 ‘좋은 조상 (Good Ancestor)’이 될 것을 요구합니다. 이 질문을 가장 깊이 있게 던진 인물은 소아마비 백신을 개발한 미국의 면역학자 조너스 소크 (Jonas Salk, 1914-1995)였습니다.


1950년대, 소아마비는 전 세계 어린이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재앙이었습니다. 수많은 아이가 목숨을 잃거나 평생 휠체어에 의지해야 했습니다. 소크는 오랜 연구 끝에 마침내 백신 개발에 성공하여 인류를 이 공포로부터 해방시켰습니다. 당시 언론은 그에게 “백신의 특허권은 누구에게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만약 그가 특허를 냈다며 천문학적인 부를 축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소크는 “특허는 없습니다. 태양에도 특허를 낼 수 있습니까? (Could you patent the sun?)”라고 담담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는 백신을 인류 공동의 자산으로 내놓음으로써, 가난한 나라의 아이들까지 누구나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고 미래 세대의 생명을 선택한 이 결단이야말로, 그가 말년에 던진 질문에 대한 가장 확실한 대답이었습니다. 소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희망은 인류가 살아남는 데 있다. 살아남는다는 것은 단순히 개개인의 생존이 아니라, 우리가 후손에게 물려줄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묻고 싶다.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당신은 좋은 조상이 되고 있는가?’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우리는 흔히 조상을 숭배의 대상으로만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는 매 순간 미래의 누군가에게 조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200년 후의 아이들이 2020년대를 살았던 우리를 회상할 때, 그들은 우리를 어떻게 기억할까요? 조너스 소크처럼 눈앞의 이익을 넘어 생명을 지켜낸 ‘지혜로운 수호자’로 기억할까요, 아니면 탐욕에 눈이 멀어 지구를 불태운 ‘이기적인 파괴자’로 기억할까요?


이 질문 앞에 설 때, 우리의 윤리는 확장됩니다. 7세대 원칙은 바로 이 엄중한 선택의 기로에 우리를 세웁니다. 쓰레기를 분리수거하는 작은 행동은 단순히 규칙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얼굴도 모르는 7세대 후의 아이에게 깨끗한 땅을 선물하는 사랑의 행위가 됩니다. 기업을 운영하거나 정책을 입안하는 사람들에게 이 원칙은 더욱 엄중합니다. 단기적인 주가 부양이나 지지율 상승이 아니라, 100년 후에도 이 기업과 국가가 건강하게 존속할 수 있는지를 묻는 ‘장기적 안목 (Long-termism)’을 강제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 7세대 원칙을, 현대 사회의 법과 제도로 구체화하려는 시도들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가장 선구적인 사례는 웨일스 (Wales)입니다. 웨일스는 2015년, 세계 최초로 ‘미래세대 웰빙법 (Well-being of Future Generations Act)’을 제정했습니다. 이 법은 정부와 공공기관이 정책을 수립할 때, 반드시 그 결정이 30년, 50년 후의 자손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고려하도록 법적으로 강제합니다. 이를 감시하기 위해 ‘미래세대 위원회 (Future Generations Commissioner)’라는 독립 기구를 두었는데, 이 위원장은 말 그대로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의 대변인” 역할을 수행합니다. 그는 정부가 당장의 지지율을 위해 미래를 팔아먹는 결정을 하려 할 때, 강력하게 제동을 걸고 수정할 권한을 가집니다. 투표권이 없어 정치적으로 소외되었던 미래 세대에게, 비로소 의회 한가운데 의석을 마련해 준 셈입니다.


일본의 ‘퓨처 디자인 (Future Design)’ 운동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의 심리와 행동 양식을 실험합니다. 히로사키 대학의 사이조 다쓰요시 (西條辰義, Tatsuyoshi Saijo, 1952-)교수 가 주창한 이 운동은, 시민들이 정책 토론을 할 때 절반은 ‘현세대’ 역할을, 나머지 절반은 2060년에 살고 있는 ‘가상의 미래 세대’ 역할을 맡게 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미래 세대 역할을 맡은 시민들에게는 특별한 예복 (가운)을 입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평범한 시민들이 이 ‘미래의 예복’을 입고 가상의 2060년 시민이 되는 순간, 그들의 사고방식과 태도가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당장 예산이 부족하다”, “내 집값이 떨어진다”며 반대하던 사람들이, 미래 세대의 눈으로 현재를 바라보자 “우리가 조금 힘들더라도 아이들을 위해 숲을 보존해야 한다”, “빚을 남겨서는 안 된다”라며 훨씬 더 과감하고 이타적인 결정을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실험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희망의 증거를 제시합니다. 인간은 본래 이기적이고 근시안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 내면에는 이미 7세대 후의 자손들을 염려하고 배려하는 ‘좋은 조상’의 본성이 잠재되어 있습니다. 단지 현대의 단기적인 이익 중심 시스템과 근시안적인 정치 구조가 그 숭고한 본성을 억누르고 있었을 뿐입니다. 우리가 제도를 바꾸고 관점을 이동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언제든 미래를 구원할 지혜로운 조상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7세대 원칙이 우리에게 주는 또 다른 가르침은 ‘연결의 감각’ 회복입니다. 우리는 7세대 후의 자손뿐만 아니라, 지금 함께 살아가는 뭇 생명들, 즉 숲과 강, 동물들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북미 원주민들은 자연을 ‘자원 (Resource)’이라 부르지 않고 ‘친척 (Relations)’이라 불렀습니다. 7세대 후까지 보존되어야 할 것은 인간만이 아니라, 인간을 살게 하는 생태계 전체의 균형입니다. 꿀벌이 사라지면 인간도 사라진다는 사실을 그들은 직관적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7세대 원칙은 인간 중심주의를 넘어 생태 중심주의로 나아가는 길잡이입니다.


우리가 이 지혜를 받아들인다면, ‘성공’의 정의도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이 성공이 아닙니다. 진정한 성공은 내가 태어났을 때보다 세상을 조금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고 떠나는 것입니다.


물론 150년 뒤를 내다보며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당장 내일의 생계가 걱정인 사람들에게 먼 미래는 사치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7세대 원칙은 거창한 예언가가 되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방향성’의 문제입니다. 오늘 내가 걷는 이 발걸음이 파괴가 아닌 생명의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 소비가 아닌 돌봄의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점검하는 ‘마음챙김’입니다.


우리는 7세대 동안의 조상들이 꾼 꿈의 결과물입니다. 그들이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도 생명을 포기하지 않고 이어준 덕분에 우리가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그 빚을 갚을 차례입니다. 우리의 아이들, 그리고 그 아이들의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은 우리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7세대 원칙은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인류세’라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건너가기 위해 우리가 반드시 잡아야 할 미래의 밧줄입니다. 지금 심는 한 그루의 나무가 7세대 후의 아이들에게 시원한 그늘이 되어줄 것을 믿으며, 우리는 오늘 기꺼이 그 나무를 심는 수고로움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 장대한 시간의 연결 고리 안에서, 우리는 비로소 유한한 삶을 넘어선 영원한 생명의 일부가 됩니다.






5-25.3. 희망의 원리: 아직 오지 않은 것



우리는 종종 "이게 다인가?"라는 깊은 회의감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반복되는 일상, 변하지 않는 부조리한 사회, 그리고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개인적인 삶 앞에서 우리는 쉽게 절망하거나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게 됩니다. "세상은 원래 이런 거야", "꿈꿔봤자 상처만 받을 뿐이야"라는 말들이 어른스러운 지혜인 양 통용됩니다. 희망을 말하는 것은 현실을 모르는 순진한 몽상가들의 전유물처럼 취급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20세기 독일의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 (Ernst Bloch, 1885-1977)는 이러한 우리의 패배주의에 정면으로 맞섭니다. 그는 3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서 『희망의 원리, Das Prinzip Hoffnung』를 통해, 희망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가장 본질적인 충동이며, 세상을 변화시키는 가장 강력한 실재적 힘이라고 역설합니다. 그에게 희망은 막연한 낙관이나 기분 좋은 위로가 아닙니다. 그것은 현실의 결핍을 뚫고 아직 오지 않은 세계를 향해 온몸을 던지는 치열한 ‘철학적 실천’입니다.


블로흐의 철학은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 현실이 ‘완성된 것’이 아니라는 자각에서 출발합니다. 우리는 흔히 지금 눈앞에 보이는 세상을 고정불변의 사실 (Fact)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블로흐는 현재의 상태가 종착역이 아니라, 거대한 과정의 한 단면일 뿐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이 세계를 관통하는 핵심 개념으로 ‘아직 아님 (Noch-Nicht, Not-Yet)’을 제시합니다. 우리 안에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이 잠자고 있고, 역사 속에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정의가 숨 쉬고 있으며, 물질세계 자체에도 아직 드러나지 않은 잠재력이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세상은 ‘닫힌 방’이 아니라, 미래를 향해 활짝 열려 있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현실에 안주하거나 절망하는 것은, 이 거대한 과정의 역동성을 보지 못하고 현재라는 찰나의 단면에 갇혀버리는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이 ‘아직 아님’의 세계를 감지하는 인간의 능력이 바로 ‘배고픔’과 ‘꿈’입니다. 블로흐는 인간을 근본적으로 ‘무언가 결핍된 존재’, 그래서 끊임없이 ‘더 나은 것’을 갈망하는 존재로 규정합니다. 우리는 배가 고프면 먹을 것을 찾고,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정의를 갈망합니다. 이 결핍감은 우리를 괴롭히는 고통이 아니라, 현재의 불완전함을 깨닫고 미래로 나아가게 만드는 엔진입니다. 특히 블로흐는 프로이트가 주목했던 ‘밤의 꿈 (Night dream)’과 자신이 주목하는 ‘낮의 꿈 (Daydream)’을 날카롭게 구분합니다.


밤의 꿈은 억압된 과거의 욕망이 왜곡되어 나타나는 것으로, 종종 우리를 과거로 퇴행시킵니다. 하지만 우리가 깨어 있을 때 꾸는 꿈, 즉 ‘백일몽’은 다릅니다. “더 나은 삶을 살고 싶다”, “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낮의 꿈은 미래를 향해 열려 있습니다. 이것은 도피가 아니라, 다가올 미래를 미리 앞당겨 체험하는 ‘예행연습’이자, 현실을 개조하기 위한 청사진입니다. 블로흐는 이 낮의 꿈속에서 인류를 구원할 ‘미래의 불빛’이 반짝이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블로흐가 말하는 희망은 단순히 “잘 될 거야”라고 믿는 ‘막연한 낙관 (Optimism)’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그는 허황된 공상이나 현실에 뿌리박지 않은 망상을 ‘추상적 유토피아’라고 비판했습니다. 로또 당첨을 꿈꾸며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천국이 도래하기만을 기다리며 현실의 고통을 외면하는 태도는 진정한 희망이 아닙니다. 그것은 현실 도피에 불과합니다.


블로흐가 제안하는 것은 ‘구체적 유토피아 (Concrete Utopia)’입니다. 이것은 철저하게 현실에 대한 냉철한 분석에 기초합니다. 현실이 아무리 어두워 보여도, 그 안에는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씨앗, 즉 ‘객관적인 가능성’이 숨겨져 있습니다. 블로흐는 이를 ‘경향 (Tendency)’과 ‘잠재성 (Latency)’이라고 부릅니다.


겨울나무는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봄에 꽃을 피울 경향과 잠재성이 이미 들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부조리한 사회 속에서도 변화를 열망하는 사람들의 움직임,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기술적, 정신적 싹들이 존재합니다. ‘구체적 유토피아’는 이 숨겨진 가능성의 씨앗을 찾아내어, 그것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울 수 있도록 물을 주고 가꾸는 적극적인 행위입니다. 즉, 희망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진흙탕 속에서 우리가 직접 캐내고 제련해야 하는 보석입니다.


따라서 블로흐의 희망은 필연적으로 ‘전투적 낙관주의 (Militant Optimism)’를 요구합니다. 미래는 결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세상은 천국이 될 가능성과 지옥이 될 가능성을 모두 품고 있습니다. 블로흐는 이를 ‘모 아니면 도 (All or Nothing)’의 과정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관한다면, 그 가능성은 ‘무 (Nothing)’로 추락하여 파국을 맞이할 것입니다. 반면 우리가 희망을 품고 개입한다면, 그것은 ‘전부 (All)’가 되어 구원을 이룰 것입니다.


그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인상적인 비유를 듭니다. 환자가 위독하여 죽을 확률이 높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때 상황을 그저 관조하는 통계학자나 평론가는 “데이터를 보니 사망 확률이 90%입니다”라고 말하며 죽음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에 입각한 태도일지 모르지만, 생명을 살리는 태도는 아닙니다. 하지만 환자를 살리려는 의사는 다릅니다. 의사는 단 1%의 생존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그 가능성을 붙잡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습니다. 의사의 희망은 단순한 예상이 아니라, 그 1%를 100%로 만들기 위한 ‘결단’이자 ‘행동’입니다. 블로흐가 말하는 희망의 인간은 바로 이 의사와 같습니다. 세상이 멸망할 것이라는 징후가 아무리 뚜렷해도, 아직 오지 않은 구원의 가능성을 믿고 현실과 싸우는 사람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현실은 그 어느 때보다 암울해 보입니다. 기후 위기는 되돌릴 수 없는 임계점을 향해 치닫고 있고, 불평등은 심화되며, 혐오와 분쟁은 끊이지 않습니다. 많은 지성인이 “이제는 늦었다”며 비관론을 쏟아냅니다. ‘둠스데이 (Doomsday)’를 예견하는 것이 지적인 태도인 양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블로흐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비관주의는 지적인 통찰이 아니라 ‘비겁한 포기’일 뿐입니다. 절망은 현실에 굴복하는 가장 편안한 방법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반면 희망은 불편합니다. 희망은 우리에게 “가만히 있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지금의 편안함을 버리고,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모험을 떠나라고 등 떠밉니다. 블로흐는 말합니다. “희망을 배우는 일이 필요하다.” 희망은 타고난 기질이 아니라, 우리가 배우고 익혀야 할 능력입니다. 절망적인 뉴스 앞에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말할 수 있는 능력, 닫힌 문 뒤에 숨겨진 열린 틈새를 찾아내는 능력, 그리고 혼자가 아니라 함께 꿈꿈으로써 그 꿈을 현실로 만드는 능력을 우리는 훈련해야 합니다.


블로흐는 이 희망의 여정이 도달해야 할 최종 목적지를 ‘고향 (Heimat)’이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고향은 우리가 과거에 떠나왔기에 다시 돌아가야 할 물리적 장소가 아닙니다. 엄밀히 말해 인류는 한 번도 인간이 인간답게 살고 자연과 온전히 화해하며 소외되지 않는 ‘진정한 고향’에 살아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고향은 회복해야 할 과거가 아니라, 창조해야 할 미래에 있습니다. 블로흐는 이 역설적인 장소를 두고 “모든 사람이 어린 시절에 꿈꾸었으나, 그 누구도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이라고 아름답게 묘사했습니다. 우리가 막연히 그리워하던 그 평화로운 세상은 기억 속의 과거가 아니라, 앞으로 만들어가야 할 세상이라는 뜻입니다. 바로 이 ‘아직 없는 고향’을 우리 손으로 건설하는 것이야말로 인류에게 주어진 궁극적인 과제입니다.


우리는 ‘아직 아님’의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 온전한 우리가 되지 못했고, 세상은 아직 온전한 세상이 되지 못했습니다. 이 미완의 상태는 불안의 원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자유의 증거이기도 합니다.


블로흐의 철학은 우리에게 ‘기다림’이 아닌 ‘마중 나감’을 요청합니다. 희망은 미래가 우리에게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미래를 향해 마중 나가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내 주변의 작은 부조리에 저항하는 것, 냉소적인 농담 대신 진지한 꿈을 이야기하는 것, 절망에 빠진 이웃에게 “우리는 할 수 있다”고 손을 내미는 것. 이 모든 구체적인 실천들이 바로 ‘아직 오지 않은 것’을 ‘지금 여기’로 불러오는 희망의 노동입니다.


우리가 꿈꾸는 더 나은 세상은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보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희망이 발명해 내야 할 발명품입니다. 어둠이 짙을수록 별은 더 밝게 빛나듯, 현실의 결핍이 클수록 우리의 희망은 더 높고 강렬하게 타올라야 합니다. 인간은 희망하는 한 패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함께 희망할 때, 그 ‘아직 아님’의 세계는 마침내 ‘지금, 여기’의 현실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끝까지 희망을 포기하지 말아야 할 이유이자, 우리에게 주어진 엄숙한 희망의 원리입니다.






5-25.4. 위대한 전환: 하나됨의 문명으로



인류 문명은 지금 거대한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물질적으로는 그 어느 때보다 풍요롭고 기술적으로는 신의 영역을 넘볼 만큼 강력해졌지만, 정신적으로는 전례 없는 고립과 불안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기후 위기, 전쟁, 혐오, 그리고 깊은 내면의 공허함은 모두 하나의 뿌리에서 자라난 독초들입니다. 그것은 바로 ‘분리의 환상’입니다. “나는 너와 다르다”, “인간은 자연과 분리되어 있다”, “내 이익은 너의 손해와 무관하다”라는 이 지독한 착각이 우리를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우리가 낭떠러지 끝에서 찾아야 할 희망은 더 강력한 기술이나 더 많은 부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잃어버린 존재의 본질, 즉 ‘비움’과 ‘연결’, 그리고 ‘하나됨’의 감각을 회복하는 ‘위대한 전환 (Great Transition)’에 있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발명이 아니라, 고대의 지혜들이 끊임없이 속삭여 온 ‘오래된 미래’로의 귀환입니다.


이 전환의 첫 번째 단계는 ‘비움’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채우는 것만이 발전이라고 믿어왔습니다. 더 많은 소유, 더 높은 지위, 더 큰 자아를 향해 달려왔습니다. 하지만 꽉 찬 그릇에는 새로운 것이 담길 수 없듯, 욕망과 에고로 가득 찬 마음에는 타인도, 자연도, 신성도 깃들 수 없습니다. 수피즘의 시인 루미 (Rumi)가 “당신이 아무것도 아닐 때 (Nothing), 비로소 모든 것 (Everything)이 된다”고 노래했듯이, 비움은 패배나 상실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를 가두고 있던 껍질을 깨는 일입니다.


내가 세상의 중심이라는 오만, 나만 옳다는 독선, 그리고 영원히 살 것처럼 움켜쥐려는 집착을 내려놓을 때, 우리 내면에는 거대한 공간이 생겨납니다. 고대 연금술사들이 비금속을 황금으로 바꾸기 위해 먼저 물질을 검게 태워 죽이는 ‘니그레도 (Nigredo, 흑화)’의 과정을 거쳤듯이, 우리 또한 에고의 죽음이라는 어두운 비움의 시간을 통과해야만 영혼의 황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텅 빈 공간이야말로 새로운 문명이 싹트게 될 자궁입니다.


그렇게 비워진 공간에서 비로소 ‘연결’이 시작됩니다. 벽이 무너진 자리에 다리가 놓입니다.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나의 숨이 숲의 숨과 연결되어 있고, 나의 식탁이 농부의 땀과 연결되어 있으며, 나의 평안이 지구 반대편 난민의 안녕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것은 머리로 이해하는 지식이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는 통증이자 기쁨입니다.


북미 원주민들은 이를 ‘미타쿠예 오야신 (Mitakuye Oyasin, 우리 모두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이라는 기도로 표현했습니다. 그들에게 나무와 돌, 동물과 사람은 남이 아니라 모두 한 형제자매였습니다. 연결된 존재로서의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불교의 ‘동체대비 (同體大悲)’ 사상처럼, 왼손이 다치면 오른손이 자연스럽게 감싸 쥐듯, 우리는 세상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움직이게 됩니다. 경쟁이 아닌 협력, 지배가 아닌 돌봄이 삶의 원리가 될 때, 차갑게 얼어붙었던 세상에는 다시 따뜻한 피가 돌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 연결의 깊은 끝에서, 우리는 마침내 ‘하나됨 (Oneness)’이라는 궁극의 진실과 마주합니다. 파도는 제각기 다른 모양으로 솟구치지만, 그 본질은 모두 하나의 바다입니다. 우리 또한 인종, 국적, 성별, 신념이라는 파도의 모양은 다르지만, 그 깊은 곳에서는 ‘생명’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바다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힌두교의 ‘아트만 (Atman, 개별 자아)이 곧 브라흐만 (Brahman, 우주적 자아)이다’라는 가르침이나, 에메랄드 타블렛의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 (As above, so below)’라는 격언은 모두 이 하나의 진리를 가리킵니다.


너는 타인이 아니라 ‘또 다른 나’입니다. 자연은 정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확장된 나의 몸’입니다. 이 하나됨을 자각하는 순간, 모든 폭력은 불가능해집니다. 나를 해치는 것이 곧 너를 해치는 것이고, 너를 사랑하는 것이 곧 나를 사랑하는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꿈꾸는 미래의 희망입니다. 희망은 막연히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가 아닙니다. 희망은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의식의 변화입니다. 분리된 개인으로 살기를 멈추고, 전체와 연결된 우주적 존재로 살아가겠다는 결단입니다. 이 결단이 모일 때, 세상은 변합니다.


우리가 서로의 눈에서 자신의 얼굴을 발견할 때, 숲의 침묵 속에서 태고의 지혜를 들을 때, 그리고 낯선 이의 고통 앞에서 기꺼이 나의 몫을 나누어줄 때, 우리는 이미 새로운 문명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어둠이 깊을수록 별은 더욱 빛나듯, 지금의 위기는 우리가 더 높은 차원으로 도약할 수 있는 가장 큰 기회입니다.


이제 우리는 두려움 없이 나아가야 합니다. 에고의 좁은 감옥을 벗어나 (비움), 서로의 손을 맞잡고 (연결), 생명의 거대한 춤 속에서 하나가 되는 (하나됨) 그날을 향해. 이것이 우리의 오래된 미래이자, 지금 여기에서 시작되는 영원한 희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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