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론과 기억 속의 신

by 이호창

1-3.5. 아우구스티누스 (St. Augustine)의 시간론과 내면의 기억 속에 현존하는 신



초기 기독교 신비주의가 동방의 그리스어권 세계를 중심으로 발달하며 우주의 구조와 지성적 상승의 원리를 규명하는 데 집중했다면, 서방의 라틴어권 세계에서는 인간 내면의 심리적 심연을 파헤치는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신비주의가 태동하고 있었습니다. 이 내면적 전환을 완성하여 서방 기독교 사상 전체의 확고한 철학적 기반을 마련한 인물이 바로 북아프리카 히포의 주교인 아우구스티누스 (Aurelius Augustinus, 354-430)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을 외부의 광활한 우주나 객관적인 자연 법칙 속에서 찾으려 했던 고대의 전통적인 탐구 방식을 거부했습니다. 그는 인간이 신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외부 세계를 향한 시선을 거두고 자신의 내면 깊은 곳으로 철저하게 회귀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인간의 영혼 내부는 우주보다 더 광활하고 복잡한 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창조주인 신은 그 영혼의 가장 깊숙한 중심에 현존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핵심적인 통찰이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내면의 심연을 탐구하기 위해 철학사상 유례가 없는 독창적인 시간론과 기억에 대한 정밀한 분석을 시도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 체계에서 가장 획기적인 업적 중 하나는 시간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 규명입니다. 당시의 기계적인 우주관이나 이교도 철학자들은 시간이 천체의 움직임이나 물질의 물리적인 변화에 종속된 객관적인 실체라고 여겼습니다. 이들은 신이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는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는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며 기독교의 창조 신앙을 공격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시간이라는 개념 자체를 근본적으로 해체합니다. 그는 신이 우주를 창조할 때 물질뿐만 아니라 시간이라는 차원 자체도 함께 창조했다고 논증했습니다. 따라서 시간이 존재하지 않았던 창조 이전의 상태에 대해 시간적 잣대인 '이전'이나 '이후'를 적용하는 것 자체가 논리적인 오류가 됩니다. 신은 시간의 흐름 안에 종속된 존재가 아니라, 시간을 창조하고 시간의 바깥에서 일체를 주관하는 영원한 실재입니다. 신의 세계인 영원에는 흘러가버리는 과거도 없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도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모든 것이 완벽하게 실현되어 있는 영원한 현재만이 존재합니다.

시간이 물리적 외부 세계의 객관적 실체가 아니라면 시간은 도대체 어디에 존재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아우구스티누스는 그것이 인간의 마음 안에 존재한다고 답변합니다. 그는 시간을 ‘영혼의 분산’이라는 뜻의 라틴어 아니미 디스텐티오 (animi distentio)로 정의했습니다. 우리가 과거, 현재, 미래라고 부르는 시간의 세 가지 차원은 물리적 공간에 늘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인간 의식의 세 가지 다른 작용일 뿐입니다. 과거는 이미 소멸하여 존재하지 않고, 미래는 아직 도달하지 않아 존재하지 않으며, 현재는 머무르지 않고 순식간에 과거로 사라져 버립니다. 그럼에도 인간이 시간을 인식한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마음이 이 소멸하는 순간들을 붙잡아 늘려 의식 안에 동시적으로 존재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과거를 기억하는 ‘마음의 작용’, 현재를 직시하는 ‘주의력’, 그리고 미래를 예상하는 ‘기대’라는 세 가지 의식 활동을 통해 시간이 성립한다고 분석했습니다. 즉 과거는 ‘과거의 일들에 대한 현재의 기억’이며, 현재는 ‘현재의 일들에 대한 현재의 직시’이고, 미래는 ‘미래의 일들에 대한 현재의 기대’입니다. 결국 시간은 물질의 이동 거리가 아니라 ‘인간 내면의 의식이 겪는 심리적인 현상’으로 재정의됩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이 치밀한 시간론은 신비주의적 신 인식에 결정적인 철학적 근거를 제공합니다. 시간을 ‘영혼의 분산 (아니미 디스텐티오)’으로 파악한 그의 통찰은, 인간이 단일한 신적 영원에 머물지 못하고 다수의 세속적 사건들 사이로 분열되어 있는 타락의 상태를 정확히 진단한 것입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소멸하고 분열하는 시간의 흐름 속에 갇혀 자신의 의식을 파편화하여 흩어버리기 때문에, 존재의 불안정과 심리적인 산만함을 피할 수 없습니다. 결국 인간이 겪는 모든 고통과 허무함은 영원한 실재에 머무르지 못하고 지나가 버리는 가변적인 시간의 순간들에 의식을 빼앗긴 결과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구원과 신비적 합일은,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분열된 의식을 한데 모아 신이 거주하는 영원한 현재의 차원으로 완전히 집중시키는 과정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시간 속으로 무의미하게 팽창할 때 흩어지고 소모되지만, 시간을 초월하여 영원한 진리이신 신에게 사랑의 의지를 고정할 때 비로소 분열을 끝내고 온전한 하나됨을 성취하게 됩니다.

시간에 대한 분석은 필연적으로 인간 내면의 가장 신비로운 인식 공간인 ‘기억 (memoria)’에 대한 탐구로 이어집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기억을 단순히 과거의 정보를 저장하는 창고나 기능으로 축소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기억은 인간이 감각을 통해 수집한 물질세계의 이미지, 학문과 기술의 법칙들, 기하학적이고 수학적인 추상적 진리들, 그리고 심지어 기쁨이나 슬픔 같은 감정의 상태까지 모두 보존하고 있는 한계를 알 수 없는 거대하고 깊은 인식의 공간입니다. 인간은 이 기억의 공간 안에서 외부 세계의 도움 없이도 사물들을 불러내어 조합하고 분류하며,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고 자아의 정체성을 형성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더 나아가 인간이 망각이라는 상태조차 기억하고 있다는 놀라운 역설을 지적하며, 기억의 심연이 인간의 지성으로는 그 끝을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초월적인 영역임을 증명합니다.

가장 중요한 지점은 이 거대한 기억의 공간 안에서 인간이 어떻게 신을 발견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이 행복을 열망한다는 사실에 주목했습니다. 모든 인간이 예외 없이 절대적인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은, 인간이 과거 어느 시점에 이미 그 완벽한 행복을 경험했고 그 진리를 기억의 심연 어딘가에 간직하고 있음을 전제합니다. 인간이 알지도 못하는 대상을 갈망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절대적인 행복과 변하지 않는 진리의 실체가 바로 신이라고 규정합니다. 신은 인간이 외부 세계에서 감각으로 찾아낼 수 있는 물질적 대상이 아니며, 지성으로 발명해 낸 개념도 아닙니다. 신은 인간이 존재하기 이전부터 인간의 가장 깊은 기억 속에 내재해 있던 근원적인 진리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유명한 고백인 "당신은 내 존재의 가장 깊은 곳보다 더 깊은 곳에 계시며, 내 존재의 가장 높은 곳보다 더 높은 곳에 계십니다"라는 명제는, 신이 인간과 철저히 분리된 타자가 아니라 인간의 자기 인식 과정의 가장 밑바닥에서 발견되는 “내재적 실재”임을 보여줍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제시한 내면적 신 인식은 인류의 보편적인 신비주의 전통과 깊은 공명을 이룹니다. 고대 인도의 철학서인 『우파니샤드, Upanishad』는 우주의 궁극적 원리인 브라만 (Brahman)이 인간 내면의 참된 자아인 아트만 (Atman)으로 현존한다고 가르칩니다. 외부의 현상계가 아닌 내면의 깊은 곳에서 절대자를 발견하며, 그 발견이 곧 진정한 자아를 찾는 과정이라는 논리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합니다. 모든 현상이 마음의 작용에 달려 있다는 대승불교의 일체유심조 (一切唯心造) 사상 또한 시간을 객관적 실체가 아닌 마음의 확장으로 보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론과 철학적 맥락을 같이합니다. 물론 아우구스티누스는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인격적 구분을 명확히 한다는 점에서 동양의 범신론적 (pantheistic) 합일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에 이르는 경로를 외부에서 내부로, 다시 내부에서 상부로 향하는 과정으로 설정했다는 점은 동서양 신비주의를 관통하는 거대한 진리 체계를 공유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신이 내면에 내재해 있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은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신을 곧바로 인식할 수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지성이 스스로 진리를 파악할 수 있는 독립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인간의 지성은 본질적으로 유한하고 오류를 범하기 쉬운 가변적인 상태에 있습니다. 이러한 불완전한 지성이 어떻게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절대적인 수학적 진리나 도덕적 선의 기준을 인식할 수 있는지에 대해, 그는 ‘조명설 (Illumination)’이라는 인식론을 제시합니다. 인간의 지성 위에 영원하고 불변하는 신의 빛이 비치고 있으며, 지성은 오직 이 신성한 빛의 조명을 받을 때에만 객관적인 진리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은 지성이 인식해야 할 여러 대상 중 하나가 아니라, 지성이 다른 모든 것을 인식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근원적인 인식의 조건이자 빛 그 자체입니다. 신비주의적 관상 단계는 지성이 외부의 사물이나 내부의 환상을 모두 내려놓는 데서 시작합니다. 지성은 감각적인 자극에 머물지 않고, 자신의 내면을 비추는 신성한 빛을 향해 의식의 방향을 완전히 돌려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인간의 의식은 그 빛과 직접적으로 하나가 되는 일치 상태에 도달합니다. 즉, 관상이란 분산된 시선을 거두어 내면의 근원적인 빛과 온전히 결합하는 경험을 뜻합니다.

이러한 아우구스티누스의 내면적이고 체험적인 신비주의는 기성 종교에서 나타나는 기독교 원리주의나 교조주의의 경직된 신관과 명확한 대조를 이룹니다. 기독교 원리주의와 교조주의는 신앙의 근거를 철저히 외부에서 찾습니다. 이들에게 진리는 과거의 특정한 역사적 시점에 고정되어 있거나, 문자적으로 기록된 율법과 경전의 조문 안에 갇혀 있습니다. 교조주의 체계 안에서 신은 우주 밖의 높은 보좌에 앉아 인간의 행위를 감시하고 역사적 심판을 집행하는 물리적이고 공간적인 타자로 설정됩니다. 구원 또한 먼 미래에 일어날 역사적이고 외형적인 사건으로 간주되며, 신앙 생활은 그 미래의 보상을 얻기 위해 현재의 율법과 제도의 규칙에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행위로 전락합니다. 이들에게 종교적 진리는 교단이 공인한 문서를 무비판적으로 암기하고 수용하는 것이며, 인간 내면의 복잡한 심리적 갈등이나 철학적 의심은 신앙의 불순종으로 치부되어 억압받습니다.

반면 아우구스티누스의 신비주의는 종교적 진리의 현장을 외부의 공간이나 미래의 시간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진동하는 인간 영혼의 가장 깊은 내부로 이동시킵니다. 그에게 신은 문자적 교리에 갇힌 율법주의적 심판관이 아니라, 나의 존재를 지탱하고 나의 지성에 빛을 비추는 영원한 생명의 원리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앙을 외부의 권위에 대한 기계적이고 피동적인 굴복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참된 신앙은 자신의 의식의 흐름을 냉철하게 해부하고, 시간의 덧없음과 기억의 무한함을 철학적으로 통찰하는 극도로 치열하고 지적인 영적 투쟁의 결과물입니다. 교조주의가 인간을 교리의 소비자로 만든다면, 아우구스티누스의 신비주의는 인간을 자신의 심연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직접 소통하는 능동적인 탐구자로 격상시킵니다. 구원은 미래에 주어지는 공간적 이동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로 찢겨진, 자아의 분열을 치유하고 내면에 현존하는 신의 영원한 현재 속으로 나의 의식을 온전히 통합시키는 존재론적 결합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에 대한 탐구와 인간 자신의 내면에 대한 탐구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단일한 과정임을 완벽하게 증명했습니다. 자아를 알지 못하는 자는 신을 알 수 없으며, 신을 알지 못하는 자는 자신의 진정한 존재 기반을 알지 못합니다. 그는 헬라 철학의 치밀한 분석력을 기독교 신앙의 가장 뜨거운 사랑의 열망과 융합시켰으며, 이를 통해 감각적 물질세계를 초월하여 영적 실재로 도약하는 서방 기독교 신비주의의 굳건한 사상적 뼈대를 완성했습니다. 그의 치열한 철학적 여정은 외부 세계를 헤매던 인간의 시선을 의식의 깊은 내부로 돌려놓은 인식론적 혁명이었으며, 시간이라는 유한한 감옥에 갇힌 인간이 어떻게 기억이라는 내면의 통로를 거쳐 영원이라는 무한의 실재에 접속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가장 위대한 사상적 성취로 지성사에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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