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 신학』
기독교 사상사가 고대 세계의 황혼을 지나 중세라는 거대한 바다로 이행하던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 무렵, 시리아의 어느 수도원에서는 기독교 신비주의의 흐름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을 기념비적인 문헌들이 작성되고 있었습니다. 이 문헌들의 저자는 자신을 사도행전 17장에 등장하는 사도 바울의 제자이자 아테네의 관원이었던 디오니시오스라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후대의 문헌학적 연구와 사상적 분석은 그가 사도 시대의 인물이 아니라, 신플라톤주의 철학자 프로클로스 (Proclus)의 사상을 깊이 흡수한 후대의 시리아 수도승임을 밝혀냈습니다. 학계에서는 이 익명의 저자를 위디오니시오스 (Pseudo-Dionysius the Areopagite)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위 (僞)'는 '거짓 위' 자를 사용하여 역사적 인물인 디오니시오스가 쓴 글이 아님을 나타내며, 영어권에서 사용하는 접두어 '프세우도 (Pseudo)' 또한 '거짓의' 혹은 '가짜의'라는 의미를 지닌 헬라어에서 유래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이러한 가명을 사용한 것은 독자를 속이려는 단순한 기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개별적인 자아를 철저히 감추고 사도적 권위 뒤로 물러나려는 겸손한 영성적 태도이자, 개인의 이름보다 보편적 진리를 앞세우려는 고대적 저술 관습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가 남긴 네 권의 저작 중에서도 가장 짧지만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신비 신학, The Mystical Theology』은 인간의 언어와 이성으로 신을 포착하려는 모든 시도를 멈추게 하고, 절대적인 침묵과 어둠 속에서 신과 연합하는 부정의 길을 체계화한 신비주의의 헌장과도 같습니다.
위디오니시오스의 신학은 기본적으로 인간이 신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두 가지 방식, 즉 긍정 신학 (Cataphatic Theology)과 부정 신학 (Apophatic Theology)의 긴장 관계 속에서 전개됩니다. 긍정 신학은 신을 만물의 원인으로 전제하고, 피조물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선하고 아름다운 속성들을 신에게 귀속시키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성서와 자연을 통해 “하나님은 선하시다”, “하나님은 생명이시다”, “하나님은 빛이시다”라고 고백합니다. 이러한 긍정적 진술은 신이 존재의 충만함 그 자체이며 모든 가치의 원천임을 드러내는 데 유효합니다. 기성 종교의 교조주의나 원리주의는 대개 이 긍정 신학의 차원에 머무르며, 신에 대한 정의와 교리적 명제들을 절대적인 진리로 고수하려 합니다. 그들에게 신은 언어로 규정될 수 있는 대상이며, 교리가 그려낸 신의 이미지는 숭배와 복종의 확실한 근거가 됩니다. 교조주의자들은 신을 전능한 왕이나 엄격한 심판관으로 묘사하고, 그 이미지를 수호하는 것을 신앙의 본질로 착각하곤 합니다.
그러나 위디오니시오스는 이러한 긍정의 방식이 필연적으로 우상숭배적 요소를 내포할 수밖에 없음을 예리하게 간파했습니다. 인간이 사용하는 선함, 생명, 빛과 같은 언어는 모두 유한한 피조 세계의 경험에서 추출된 개념들입니다. 무한하고 초월적인 신을 유한한 인간의 언어 틀에 가두는 순간, 신은 더 이상 절대자가 아니라 ‘인간이 만든 개념적 우상’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따라서 그는 긍정 신학이 세워놓은 모든 명제들을 다시 허물어뜨리는 부정 신학의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부정 신학은 신은 선함이 아니다, 신은 생명이 아니다, 신은 빛이 아니다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이 악하거나 죽어있거나 어둡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가 이해하는 선함이나 생명, 빛이라는 개념의 한계를 훨씬 뛰어넘는 초월적 실재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방식입니다. 신은 존재 (Being)조차 아닙니다. 그는 존재를 초월하여 존재 너머에 있는 초본질적 (Hyperousios) 실재이기 때문입니다.
『신비 신학』은 저자가 동료 수도자인 디모테오 (Timotheus)에게 보내는 서신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가 하나님을 대면하는 과정을 영혼 상승의 알레고리로 삼아 논의를 전개합니다. 모세가 산을 오르는 과정은 인간의 영혼이 신성한 진리에 도달하는 단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는 먼저 평지에서 신의 명령을 경청하며 자신을 가다듬는 정화의 단계를 거칩니다. 이어지는 과정에서 모세는 산 중턱에 올라 신의 찬란한 영광을 목격하는 조명 (Illumination)의 상태에 진입합니다. 정점에 이르러 그는 산 정상의 짙은 구름 속으로 홀로 들어가는데, 이는 보이지 않는 신과 온전히 하나가 되는 합일의 경지를 의미합니다. 감각과 지각을 넘어선 이 어둠 속에서의 만남은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신성 앞에 도달해야 할 부정 신학의 궁극적인 지점을 명확히 드러냅니다. 위디오니시오스는 디모테오에게 “감각적인 지각뿐만 아니라 지성적인 작용까지 모두 멈추고,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모든 것을 떠나, 모든 본질을 초월해 계신 그분과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연합하기 위해 힘쓰라”고 권면합니다. 이 권면은 인간이 가진 모든 인식 수단을 내려놓고 신성한 차원으로 도약하라는 실천적 지침을 담고 있습니다.
여기서 감각적인 지각을 멈추라는 말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외부의 자극으로부터 시선을 거두라는 뜻입니다. 나아가 지성적인 작용까지 중단하라는 권고는 인간이 논리적으로 추론하고 개념화하며 쌓아 올린 모든 지식의 틀마저 일시적으로 비워내야 함을 의미합니다. 신은 인간이 만든 언어나 논리라는 그릇에 온전히 담길 수 없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모든 것을 떠나라는 표현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분별하는 유무의 범주를 초월하라는 요청입니다. 세상에 실재하는 사물들이나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비존재의 영역까지도 결국은 인간 사고의 산물일 뿐입니다. 따라서 모든 본질을 초월해 계신 분과 만난다는 것은 인간이 규정한 가치나 성질을 뛰어넘어 신을 그 자체로 마주하는 일을 뜻합니다. 위디오니시오스는 이를 알지 못하는 방식인 무지 (agnosia, 아그노시아)를 통해 이루어지는 연합이라고 설명합니다.
결국 이 권면은 인간의 유한한 지성이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이 있음을 인정하고, 자신의 앎을 스스로 부정함으로써 오히려 신의 신비 속에 깊이 침잠하라는 역설적인 가르침입니다. 인간이 스스로를 비워내어 지적인 한계를 넘어설 때, 비로소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는 신성한 어둠 속에서 신과의 직접적인 결합인 “합일 (henosis, 헤노시스)”을 경험할 수 있다는 원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위디오니시오스는 이 과정을 조각가가 대리석을 깎아내어 형상을 만드는 작업에 비유합니다. 조각가는 돌덩어리에 무엇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부분을 깎아내고 제거함으로써 그 안에 숨겨진 아름다운 형상을 드러냅니다. 마찬가지로 신비가는 신에게 덕목을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신을 가리고 있는 인간의 관념과 언어의 ‘껍질을 하나씩 벗겨냄 (Aphairesis)’으로써 순수한 신성을 드러내야 합니다. 먼저는 시각이나 청각 같은 감각적 이미지를 제거하고, 그다음에는 감정이나 정서적 상태를 배제하며, 마지막에는 이성과 지성이 만들어낸 가장 고상한 개념들, 즉 신성, 왕권, 지혜, 심지어는 하나님이라는 이름까지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 철저한 부정의 끝에서 영혼이 마주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공허가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모든 것을 초월하여 충만하게 존재하는 “신적 어둠 (Divine Darkness)”입니다.
이 초월적 어둠은 빛의 부재가 아니라, 인간의 시력을 압도하여 멀게 만들 만큼 강렬하고 찬란한 빛의 과잉 상태를 의미합니다. 마치 태양을 정면으로 응시할 때 눈이 멀어버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신의 본질은 인간의 지성을 초월해 있기에 우리에게는 마치 어둠처럼 인식되는 것입니다. 위디오니시오스는 이를 ‘찬란한 어둠 (Luminous Darkness)’ 혹은 ‘불가지 (Agnosia)의 구름’이라고 불렀습니다. 기독교 교조주의가 신에 대해 명확하게 알고 있다고 주장하며 그 지식을 체계화하여 권력의 도구로 삼는다면, 위디오니시오스의 신비주의는 “신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무지의 지 (Learned Ignorance)’를 고백하며 그 겸손한 침묵 속에서 신과의 연합을 추구합니다. 교조주의가 신을 소유하려 한다면, 신비주의는 신에게 압도당하여 자신을 소실시키는 길을 택합니다.
『신비 신학』의 마지막 장에서 위디오니시오스는 “신이 영혼이나 마음, 상상이나 의견, 이성이나 사유가 아니다”라고 단언합니다. “신은 말로 표현할 수 없으며 생각으로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신은 숫자도, 순서도, 위대함도, 작음도, 평등함도, 불평등함도, 유사함도, 다름도 아닙니다. 신은 움직이지 않으며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쉬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신은 능력이 아니며 능력 자체도 아니고 빛도 아니며 생명도 아닙니다. 신은 본질도 아니고 영원도 아니며 시간도 아닙니다. 신은 지식도 진리도 왕권도 지혜도 아닙니다. 신은 하나 (One)도 아니고 신성 (Godhead)도 아니며 선함도 아닙니다. 심지어 신은 영 (Spirit)도 아니고 아들도 아니고 아버지도 아닙니다.” 이 충격적인 부정의 연쇄는 우리가 신에 대해 가지고 있는 모든 친숙한 관념을 산산이 부수어 버립니다. 위디오니시오스는 신이 긍정에 의해서도 규정될 수 없지만, 부정에 의해서도 규정될 수 없음을 강조합니다. 신은 모든 긍정의 원인이면서 동시에 모든 부정을 초월해 있는, 긍정과 부정의 대립조차 뛰어넘은 절대적인 자유의 영역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급진적인 부정 신학은 자칫 허무주의나 불가지론 (不可知論)으로 오해될 수 있으나, 위디오니시오스에게 이것은 신을 향한 가장 지극한 사랑과 찬양의 표현입니다. 신을 우리가 만든 언어나 생각의 틀 안에 고정하지 않고 그분의 끝없는 무한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는 매우 중요합니다. 인간이 신을 특정한 개념으로 정의하려 하는 순간, 역설적으로 신은 인간의 좁은 인식 속에 갇힌 유한한 대상이 되고 맙니다. 따라서 인간이 자신의 지적인 한계를 겸허히 인정하고 신의 신비를 그 자체로 존중하는 모습은, 피조물이 창조주 앞에서 보일 수 있는 가장 깊고 정중한 예의이자 최고의 경건함입니다. 결국 참된 신앙은 신에 대해 무엇을 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다 헤아릴 수 없는 그분의 거대함 앞에 침묵하며 머무는 데서 완성됩니다.
기성 종교가 고정된 교리의 틀 안에서 신을 인간의 이해 가능한 대상으로 한정하려 할 때, 위디오니시오스는 그 한계를 타파하고 신자들이 인간의 지성으로 파악할 수 없는 무한한 신비의 영역으로 나아가도록 촉구합니다.
위디오니시오스의 사상은 이후 서방의 중세 신비주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Meister Eckhart, 1260-1328)와 십자가의 요한 (John of the Cross, 1542-1591), 그리고 익명의 저술인 『무지의 구름, The Cloud of Unknowing』의 저자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신앙이 지적인 동의를 넘어선 존재론적 체험이어야 함을, 그리고 신은 우리가 아는 그 어떤 것과도 같지 않기에 (Totaliter Aliter),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을 버려야만 만날 수 있는 분임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오늘날 교조주의적 확신이 야기한 배타성과 폭력성 앞에서, 위디오니시오스의 부정 신학은 신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인간의 모든 독단적인 판단을 중단시킵니다. 나아가 인간 지성의 한계를 인정하는 겸손한 '무지 (Agnosia)'의 상태를 통해 신과의 진정한 연합에 이르게 하는 실천적 원리를 제시합니다. 인간이 신을 규정하려는 언어적 시도를 멈출 때 비로소 신의 본질이 내면에서 드러나기 시작한다는 그의 통찰은,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구도자에게 본질적인 깨달음을 얻게 해주는 보편적 진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