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겨울 한낮의 멈춰진 시간, 동묘 벼룩시장에서

by 박순동

[에세이] 겨울 한낮의 멈춰진 시간, 동묘 벼룩시장에서 길을 잃다

박순동


겨울 햇살이 낮게 내려앉은 오후, 나는 종로의 낡은 골목 끝에 서 있었다. 그곳은 1980년대 어느 지점에서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곳, 바로 동묘 벼룩시장이다. 화려한 빌딩 숲 사이를 지나 이곳에 발을 들이는 순간, 공기의 온도와 소음의 결이 달라짐을 느낀다. 마치 거대한 타임머신을 타고 낯선 과거의 한복판으로 툭 떨어진 기분이다.


누군가의 계절이 쌓여있는 언덕

시장에 들어서자마자 나를 반기는 것은 산더미처럼 쌓인 옷가지들이다. 사진 속 풍경처럼 사람들은 허리를 숙여 그 '기억의 더미' 속을 헤집는다. 단돈 몇 천 원에 누군가의 한 계절을 통째로 살 수 있는 곳. 손끝을 스치는 거친 코트의 질감과 빛바랜 소매깃에는 이전 주인이 보냈을 겨울의 시린 바람과 어느 따뜻했던 저녁의 온기가 여전히 배어 있는 것만 같다. 유행이 지나 외면받았던 물건들이 이곳에서는 다시 누군가의 선택을 기다리며 새로운 생명력을 얻는다.


없는 것 빼고 다 있는, 기억의 박물관

길가에 펼쳐진 좌판들은 그 자체로 작은 박물관이다. 태엽을 감아야 움직이는 낡은 시계, 이제는 사용법조차 가물가물한 빈티지 전자제품, 그리고 누군가의 손때 묻은 장신구들까지. "없는 것 빼고 다 있다"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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