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로수가 온통 배롱나무 길이었다. 꽃은 활짝 피어 방글거리고, 바람도 가로수길 사이로 헤집고 다녔다.
강의가 없는 토요일 오후였지만, 강의실 밖에는 노트북을 든 형과 누나들이 많이 보였다.
노크도 하지 않고 교수실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어이, 해윤!”
해윤은 외삼촌 품속으로 뛰어들었다. 외삼촌한테만 느낄 수 있는 포근함, 그 품에서 떨어진 해윤이 말했다.
“에이, 거짓 뿌리!”
해윤에게 앉으라는 시늉을 한 외삼촌이 말을 이었다.
“분명 아이슬란드에 있었는데, 내가 이렇게 교수실 창밖을 보고 있더라니까.”
“그보다 나에게는 낯선 나라인데, 아이슬란드는 어디쯤 있어요?”
“북유럽에 있는 섬나라야, 대서양의 중앙에 있지.”
“정말 궁금한 것은 이름처럼 얼음 나라예요?”
“이름보다는 따뜻해. 대서양의 따뜻한 기운과 북극의 찬 공기가 만나 기후 변화가 심하더군.”
외삼촌은 신나 보였다.
“아이슬란드에서 날씨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5분만 기다리라는 말이 있어. 금방 비가 왔다 개이고, 개었다가 또 비가 오더라고.”
외삼촌은 책상에 놓여있는 구슬을 가리켰다.
어릴 적 가지고 놀던 노랑 빛깔의 구슬 같은 사탕이었다.
“사탕이잖아요.”
“그래, 마법의 알사탕이지.”
외삼촌은 여행 가방에서 책 한 권을 꺼내 해윤에게 건넸다.
“여기, 선물.”
“그림책이잖아요!”
해윤은 실망한 듯 퉁명스럽게 말했다.
멋진 선물을 기대했었는데, 그림책이라니 실망스러웠다.
단단한 표지에 보통 그림책보다 가로가 길었다. 주황색 뭉툭한 부리를 가진 새가 도깨비 같은 트롤의 어깨 위에 앉아있었다.
“아이슬란드 새 퍼핀이란다.”
“퍼핀? 펭귄을 닮았네요.”
“그래, 알사탕과 그림책 덕분이지, 꿈인지 현실인지 아직도 헷갈린단다.”
“꿈인지 현실인지 헷갈린다고요?”
꿈을 꾸는 듯한 외삼촌의 얼굴은 처음이었다. 마치 무대에 선 배우 같았다.
외삼촌의 볼록 튀어나온 목울대가 무척 낯설었다. 왼손으로 오른 팔꿈치를 잡고 오른손으로 턱을 감싸며 말했다.
내가 불과 얼음의 나라, 아이슬란드에 간다고 하니 조교 선생님이 말했지.
“아쿠레이리에 가거든 카페 ‘파란 주전자’에 들렀다 오세요. 멋진 곳이에요.”
그림엽서 같은 그 마을에 간 이유는 조교 선생님 때문이었어.
내일이면 아쉬운 귀국 날이라 차나 한잔 하러 그곳을 찾았어.
네거리 모퉁이에서 그 카페를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단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서점이었어. 별마당 도서관처럼 서가로 가득 찬 서점에서 유난히 그림책이 진열된 곳에 눈이 가더라. 주황색 부리가 예쁜 새가 손짓하는 것 같았거든.
“오, 퍼핀이구나.”
도깨비같이 생긴 트롤 머리 위에 앉은 퍼핀에게 마음이 갔어. 다른 책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림책을 계산하러 가다가 멈췄지.
“이 요술 카드를 보고, 사탕을 먹으면 신비한 경험을 할 수 있어요.”
여러 가지 그림엽서와 카드가 꽂힌 곳이었어. 사탕까지 달린 카드에 입맛이 당기더군, 비싼 물가에 비하면 가격까지 착했어.
나는 퍼핀과 황금 폭포, 그리고 오로라가 찍힌 카드 석 장을 골라 그림책과 함께 계산하고 나왔어. 사탕 때문이었는지 코끝으로 스치는 바람까지 달게 느껴졌어.
“아, 저기, 파란 주전자!”
하얀 바탕에 파란 주전자가 그려진 카페가 보였어. 간판이 너무 작아 바로 곁에 있었는데도 찾지 못했단다. 낯선 곳에서 조교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지.
창가에 자리 잡은 나는 카페 안을 둘러보았단다. 손님은 나까지 여섯이었는데, 모두 혼자고 종업원은 보이지 않았어.
나는 그림책과 함께 요술 카드를 테이블 위에 놓았단다.
디자인이 멋진 북유럽형 의자는 푹신했어. 팔걸이에 팔을 얹고 잠시 눈을 감았다 뜨고는 카드 한 장을 들었어.
“이 요술 사탕을 먹으면 당신은 오로라를 볼 수 있어요.”
빨강 알사탕이 든 오로라 카드였지,
“허허, 여름인데도 오로라를 볼 수 있다고?”
다른 카드도 궁금해졌어. 엄청난 양의 물을 품은 폭포 가운데 무지개가 동그랗게 걸려있는 황금 폭포 풍경이었어.
“이 사탕을 먹으면 당신은 상상의 나라로 갈 수 있어요.”
“상상의 나라?”
오로라보다 내 마음을 당기는 것은 상상의 나라였어. 나는 망설이지도 않고 바로 투명하고 맑은 파랑 사탕을 까서 입에 넣었단다. 새콤달콤하면서 약간 짠맛이 느껴졌어.
입안에서 이리저리 굴리다가 탁자 위에 있는 벨을 발견하고는 꾹 눌렀단다.
바퀴 달린 로봇이 네모난 액정에 동그란 눈을 달고 내 곁으로 오고 있었어.
빙하와 화산으로 이루어진 장엄한 폭포에서 핀 무지개, 깎아지른 절벽에 사는 예쁜 새 퍼핀, 화산재로 덮인 삭막한 땅에 추위를 뚫고 자란 이끼와 잔디, 그리고, 멋지게 물을 뿜는 고래와 펄떡거리는 대구 떼를 본 이곳에서 최첨단 로봇이 서빙하는 모습이 낯설고 신선했단다.
목에는 퍼핀이 그려진 하얀색 수건으로 매듭을 묶었는데, 비행기 승무원 같았어.
나는 주문할 생각도 하지 않고, 위아래로 훑어보았어. 사람의 팔처럼 관절을 꺾어 화면을 가리키고 있었지.
눈을 크게 뜨고 한 번 더 쳐다보았어.
“주문하세요.”
눈이 예쁜 물총새처럼 목소리도 맑았어. 메뉴판에 있는 카페라테에 버튼을 누른 후, 카드로 결제까지 했단다.
찰랑찰랑 넘칠 듯 말 듯 담긴 커피는 향기로웠어.
먼저 아이슬란드를 다녀온 조교 선생님이 여러 곳의 풍경 사진을 보여준 적이 있었어. 멋진 풍경에 반한 나도 무척 가고 싶은 곳이었지.
하지만, 논문 마무리와 강의 시간 때문에 벼르고만 있었거든. 마침 가까운 노르웨이에서 학회가 있었단다.
“학회를 마치면, 며칠 여유가 있으니 다녀오세요. 아마 상상이 현실이 될 것입니다.”
조교 선생님이 이 카페를 소개해준 이유를 알 것 같았어.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 깊숙이 앉아 그림책을 들었어. 표지에 그려진 퍼핀에게 자꾸 눈이 가더라. 잠시 보고 있는데, 트롤 머리 위에 앉아 있던 퍼핀이‘포르르’ 날더니 내 맞은편에 앉는 거야.
순간, 모든 것이 그대로 멈춰진 것 같았어. 그런데 말이야,
“안녕하세요?”
인사까지 하더라고.
“네, 반갑습니다.”
엉겁결에 나도 인사를 했단다.
“불과 얼음의 나라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네, 감사합니다. 여긴 동화 나라네요.”
비록 새이긴 했지만, 말을 낮출 수 없었어.
그리고는 친구를 만난 것처럼 그동안 다녔던 곳을 신나게 이야기했어, 특히 여기서 보았던 무지개에 대해서 말했단다.
황금 폭포에서 보았던 거대한 물줄기 사이로 동그랗게 핀 무지개와 양과 말이 비에 젖은 풀밭 저편에 핀 무지개는 환상적이었다고 했어. 그렇게 크고 멋진 무지개는 태어나 처음 보았고, 너무 아름다웠다고 말했지. 그리고, 그 풍경이 사라질까 조바심을 내면서 여러 장의 사진을 찍었다고 했어.
퍼핀은 미소를 머금은 채, 내 얘기를 듣고는 이름을 먼저 말하더라.
“티나라고 해요.”
“한국에서 온 동길산입니다,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칩니다.”
내가 손을 내밀자, 티나도 내 손을 잡아주었어.
“그럼”
티나가 날개를 사뿐 들어 올렸어. 나는 날아가 버릴까 봐 조바심이 났어.
“아쉽습니다, 전 내일 떠나야 하거든요.”
나는 가방 속에 든 카메라를 꺼내서 이 순간을 찍고 싶었지. 티나 또한 나에게는 아름다운 풍경이었기 때문이야.
“다이아몬드 해변에는 다녀오셨나요?”
“네, 빙하 조각이 다이아몬드처럼 쫙 깔린 곳, 너무 아름다워 사진을 백 장도 넘게 찍었답니다.”
나는 흥분해서 말을 이었단다.
“얼음 조각이 햇볕을 받아 보석을 뿌려놓은 것 같이 반짝거렸어요. 드레스를 입은 신부와 턱시도를 한 신랑이 영화 장면 같아서 그것도 카메라에 담았지요.”
“햇볕을 받아 반짝이던 얼음 조각이 당신에게 관심을 가지던가요?”
“관심이라뇨? 무슨 관심······.”
“사진만 찍었군요.”
“난 아름다운 것을 보면 사진부터 찍는답니다, 사진밖에 남는 것이 없으니까요.”
“길산은 아름다움을 대하는 태도가 부족한 것 같군요.”
“네?”
“아름다운 것은 우리에게 관심이 없어요, 무지개가 그렇고, 다이아몬드 해변 또한 그래요.”
머릿속에 번개가‘번쩍’ 지나가는 듯했어.
“아름다운 것을 보면 잠깐 멈춰 보세요, 숨을 죽이고 아무것도 하지 말아요.”
티나가 마치 어린 왕자처럼 말을 이었어.
“아름다운 것은 마음으로 보아야지요.”
멋진 장면을 느끼지도 않고, 사진만 찍어댄 자신이 부끄러웠단다.
“아, 미처 생각하지 못했네요.”
내가 자리를 고쳐 앉아 잔을 들었을 때, 커피는 이미 바닥을 보였어.
“이곳에서 즐기지 못하고, 떠나니 아쉽네요.”
그런데, 티나가 조심스럽게 묻는 거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여기선 시간을 늘릴 수 있거든요.”
“시간을 늘릴 수 있다고요?”
“네, 남은 하루를 일주일로 만드는 겁니다. 그러면 진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을 텐데요.”
“정말입니까?”
“길산에게는 요술 사탕이 있잖아요.”
“네, 파랑 사탕은 먹었고, 빨강과 노랑 사탕이 남아있어요.”
“길산은 이미 상상의 나라에 와 있어요, 하루를 일주일로 만들기는 쉽답니다.”
“그렇다면?”
“빨강 사탕을 드세요, 운이 좋으면 여름에도 오로라를 볼 수 있듯이, 길산의 시간도 느리게 갈 수 있어요.”
어리둥절했지만, 나는 그림책을 안고 일어섰어. 들어올 때는 아무도 반기지 않았는데, 나가려니 목소리가 예쁜 로봇이 인사하더라.
“안녕히 가세요.”
꿈을 꾼 것 같은 나는 카페를 나와 ‘파란 주전자’가 그려진 간판을 올려다보았지.
간판 너머 파란 하늘에서 날개를 파닥이며 티나가 손짓하고 있었어.
“함께 하려면 날아오르세요.”
엉겁결에 나는 양팔을 벌리고, 손바닥을 하늘을 향해 펼쳤지.
어느새, 한 마리 퍼핀이 된 나는 티나를 따라 날아가고 있었어.
“아, 마법의 알사탕!”
2. 퍼핀이 된 길산
얼마나 날았는지, 강한 바람에 눈뜨기조차 힘들었어. 끔뻑거리며 바라본 풍경은 아찔했지. 절벽 끝이더라고.
“맘!”
티나가 절벽 가장자리에 사뿐 앉았어. 티나 엄마는 주황색 부리로 티나의 목덜미를 콕콕 쪼아주며 반가워했단다. 말린 허브를 두 손 가득 들고 있었지.
“맘, 멀리 한국에서 왔어요.”
“네, 동길산입니다.”
“반가워요, 티나가 친구를 데리고 온 것은 처음이에요.”
주황색 부리로 내 목덜미도 콕콕 쪼아준 티나 엄마는 나를 보고 자꾸 웃었어. 눈 화장이 짙은 멋쟁이 퍼핀이었어. 은은한 허브 냄새 때문에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는 곳이었지.
절벽 곳곳에는 퍼핀이 무리 지어 바다를 향해 앉아있었어. 파도가 하얗게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이 구름이 모였다 흩어지는 하늘과 닮았어. 마치 교향곡을 연주하는 것처럼 소리까지 아름다웠단다. 포근하고 따뜻했으며 정겨운 어릴 적 동네에 온 것 같았지. 둘, 셋씩 무리를 지어 바다를 향하고 있는 퍼핀들이 한 번씩 물속으로 들어가 부리로 청어를 낚아 올려 절벽 곳곳에 말려두기도 하더라.
밤이 되자, 티나 엄마는 잠자리를 마련해 주었지. 폭신한 건초 위에 꽃잎을 말린 베개가 놓여있었어. 그리고, 머리맡 창문에는 파란색 거미줄에다 깃털과 구슬로 장식하고 말린 허브까지 꽂혀있었단다.
“낯선 곳이니 좋은 꿈을 꾸라고······.”
티나 엄마는 창문을 가리키며 웃어주었어.
“드림캐처야. 악몽을 꾸지 않게 도와준단다.”
티나도 웃으며 ‘잘 자.’하고 손사래를 쳐주었어.
“아, 잘 잤다.”
드림캐처 덕분인지 구름 위에서 잔 것처럼 가볍고 산뜻한 아침이었단다. 나는 어깻죽지를 쭉 펴고 일어났어. 티나는 날개를 파닥이며 중얼거렸단다.
“또 섬을 옮겨 놓았네.”
약간 언짢은 듯한 목소리가 들렸어. 어제까지 멀리 보이던 섬이 바로 코앞 가까이 와 있는 것이었어.
“내가 자는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눈을 비빈 후, 다시 보았지.
“장난꾸러기 트롤 짓이야.”
“트롤이라면?”
“심술궂고, 장난이 심한 괴물이지.”
티나 엄마가 곁에서 거들었어.
“힘이 세서 나무를 통째로 뽑거나 돌이나 바위를 번쩍 들어 올린단다.”
“낯선 손님이 오니까 힘자랑하고 싶은 거지.”
“정말 대단하네요. 섬을 옮겨놓을 만한 힘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겠어요.”
“심술궂고 장난이 심하단다. 착한 척하기도 하지만, 뒤통수를 칠 때가 많아.”
티나가 작은 숨을 내쉬며 엄마를 바라보았다.
“걱정하지 마! 햇볕을 싫어해서 낮에는 돌이나 바위가 되어 꼼짝도 못 한단다.”
토닥토닥 나의 등을 두드리며 티나 엄마가 또 웃어주었어.
“트롤은 햇볕을 받으면 바위로 변한단다, 아마 저 섬 어딘가 돌이 되어 있을 거야.”
“와, 굉장하네요, 섬을 절벽 가까이 옮겨 놓을 수 있다니!”
신기한 트롤의 힘을 생각하니 자꾸‘와’ 소리와 함께 입을 다물 수가 없었어.
“힘자랑하는 거야.”
두 팔을 번쩍 치켜들었다 내리는 티나가 우스웠단다.
“그러다 마음이 변하면 제자리로 돌려놓기도 해.”
티나 엄마는 내 목덜미를 콕콕 쪼아주며 아침상을 차려주었어. 바위틈에서 자란 해초 한 줌과 청어 한 마리가 전부였지만, 맛있었단다.
“이건 루핀 꽃차란다. 아침에 루핀 꽃에서 떠 온 맑은 이슬 차야.”
“음, 허브차 맛과 비슷하네요.”
“그래, 오늘은 어디 갈 거니?”
찻잔을 치우며 티나 엄마가 물었어.
“악마의 섬을 한 바퀴 돌다 올게요. 해지기 전에 돌아올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늘 조심해야 한다.”
집을 나서는데 하얀 꽃잎 가운데 노란 수술이 도드라진 꽃이 여기저기 피어있었어.
“아, 예쁘다!”
“아이슬란드 나라꽃, 담자리 꽃이야,”
“오, 담자리 꽃! 널 닮은 것 같아.”
“호호, 고마워.”
티나가 입은 흰 블라우스에 노란 치마가 예뻐서 칭찬해 주었어. 예쁜 꽃을 따서 티나 귓가에 꽂아주고 싶었지만, 참았단다. 티나 엄마가 저만치 서서 웃고 있었어.
티나는 나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주었단다. 퍼핀은 1분에 400번 날갯짓한다면서 날개를 퍼덕이는 방법을 차근차근 말하면서 보여주었어. 나는 티나를 따라 절벽 아래로 내려갔다 올라갔다 수천 번을 연습한 후, 한숨을 돌렸지.
“자, 해변으로 날아가 앉는다.”
바로 눈앞이었는데, 실제로 엄청나게 멀었지. 수없이 날개를 퍼덕이며 검은 모래와 자갈이 깔린 해변에 사뿐 앉았단다. 육각기둥 모양으로 굳어진 바위가 쫙 펼쳐져 있었지. 살짝 건드리면 와르르 무너질 것 같았어. 갑자기, 바람이 불고 파도의 키가 높아져 무서웠단다.
“너 떨고 있구나.”
“아냐, 약간 추워서 그래.”
나는 날개를 두어 번 퍼덕이며 애써 태연한 척했지.
“그래도 비가 오지 않아서 다행이야.”
바다에서 막 솟아오른 것 같은 뾰족한 바위가 눈에 들어왔어.
“저기가 ‘악마의 손가락’이라는 섬이야.”
“흐흐, 저기 어딘가 바위가 된 트롤이 숨어있겠네.”
“가볼까?”
티나가 싱긋 웃었어.
“트롤이 나타나면 어떡해!”
“걱정하지 마, 낮에는 돌로 변해서 힘을 못 쓴다니까.”
3. 트롤 브로와 게임
티나가 날아올랐어. 나도 파닥파닥 날갯짓하면서 날았지. 힘들지 않게 바위섬에 닿았단다. 뾰족한 바위섬에는 도드라진 동그란 손잡이가 여럿 보였어.
“한 번 열어 볼까?”
한껏 호기심에 부푼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 티나가 손잡이를 이리저리 돌리면서 낑낑거렸어. 나도 거들었더니 바위가 스르르 열렸어. 안은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단다. 티나가 조심조심 한 발짝씩 앞으로 나가면 나도 벽에 바싹 붙어 따라갔지.
바위문이 저절로 닫혔어. 빛도 없이 캄캄했지만, 조금 더 들어가니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어. 돌을 깎아 만든 의자가 여러 개 놓여있었어. 검은 모래 해변에서 보았던 육각형 기둥이 병풍처럼 두르고 있었단다. 뾰족한 겉모양과 달리 천장은 둥글었어. 모빌처럼 별 모양의 돌이 여러 개 달려있었지. 그 한가운데는 긴 줄에 달린 금빛 사과도 여러 개 있었는데, 전구처럼 안을 밝혀주었어. 육각형 기둥 벽에는 삼각형과 사각형, 오각형 돌이 여기저기 튀어나와 있었지. 볼록한 삼각형 돌을 가만히 만져보았어.
“흠흠. 사람 냄새가 난다?”
그러더니 삼각형이 조금씩, 조금씩 튀어나와 삼각뿔이 되더니 바닥에 툭 떨어졌어.
“냄새가 난다. 냄새가 나, 분명 사람이 왔어.”
삼각뿔은 바닥에서 귀를 기울이는 듯하더니 돌벽에서도 두런두런 소리가 났어.
“사람이 올 리가 없는데.”
“그러게, 말이야.”
티나가 검지를 입술에 붙이고, 고개를 두어 번 흔들며 움직이지 말라고 했어.
“어제, 티나네 집에 손님이 왔더라고.”
“그래서 네가 섬을 옮겨 놓았구나.”
“흐흐, 악몽을 꾸게 하려고 들여다보는데, 드림캐처를 다는 바람에 놀라서 엉덩방아를 찧었지, 뭐야.”
“호호, 네 엉덩이가 파란 이유를 이제야 알았네.”
“오늘 밤은 어떻게 혼내줄까 생각 중이야.”
“먼 데서 온 손님이니까 봐주지, 그래.”
“그럴까, 헤헤.”
트롤끼리 하는 이야기가 다 들을 수 있었어.
‘남의 꿈까지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말도 안 돼.’
티나가 문 쪽으로 나가자며 손짓해서 살금살금 걸음을 옮겼단다. 그런데, 여기저기 바위를 밀어보았지만, 문이 열리지 않았지. 분명 들어온 쪽이었는데 끄떡도 하지 않았어. 그때, 모빌에 달린 별 모양 돌이 툭 떨어지더니, 내 발밑 가까이 굴러왔단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티나도, 나도 그 자리에서 멈췄어.
“멀리서 오신 손님, 반가워!”
가슴이 팔랑거리며 떨고 있는 나에게 별 모양 돌이 말했지.
“퍼핀이 된 사람이구나, 너 퍼핀으로 살고 싶니?”
티나가 검지를 입술에 붙이고 대꾸하지 말라며 고개를 흔들었지만, 나도 모르게 소리쳤단다.
“아니요! 돌아가서 학생을 가르치고, 어머니도 모셔야 해요.”
“학생을 가르치는 사람?”
“네.”
“오호, 선생님이라, 멋진데.”
나에게 호감을 느끼는 듯했어.
뭐라고 중얼거리던 돌별이 몸을 한 번 굴리고 또 굴렸어. 캄캄하던 바위 안에서 번쩍번쩍 번갯불이 스치는 듯하더니 내 앞에 뭔가 턱 버티고 섰어. 돌별로 변해있던 트롤이 모습을 드러냈지. 왕방울 같은 눈과 무같이 뭉툭한 코, 팔랑거리는 두 귀와 길게 늘어진 빨간 혓바닥, 혓바닥 사이로 툭 튀어나온 이빨이 긴 괴물이 아니었어.
초록 머리, 까만 머루눈, 눈 아래 길게 달린 눈썹, 쌍방울 같은 코에다 초승달처럼 얇고 긴 입술, 초록색 브로콜리 같은 귀가 무척 귀여웠단다.
귀여운 트롤을 본 순간, 나는 왈칵 손을 잡고 싶었어. 내 손안에 들어올 만큼 작아서 전혀 무섭지도 않았지. 어릴 적 갖고 놀던 장난감 같았거든.
“뭐야!”
그런데, 갑자기 키가 커지더니 목에서 갈라진 두 개의 얼굴이 나타났어. 나는 그만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단다.
“이래도 내가 장난감으로 보여?”
“아니, 분명 어릴 적 장난감 같았는데······.”
“어릴 적이라? 네가 어릴 적에 사과를 무척 좋아한 것을 알고 있어, 이거 먹어.”
황금 사과가 또르르 굴러와 내 발밑에서 멈추었어. 마침 목이 말랐던 나는 사과를 덥석 집어 와싹와싹 베어 물었단다. 부드럽고 달콤하면서 단물이 듬뿍 들어있었지. 티나가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지만, 이미 늦었어.
“오, 귀여운 소년!”
사과를 먹고 나니 내 몸은 가벼워지고, 팔딱팔딱 뛰고 싶었단다. 트롤도 갈라진 얼굴이 하나로 합쳐지면서 또래의 귀여운 트롤로 변했어.
“우리 친구 하자, 나는 늘 사람 친구가 있었으면 했거든.”
브로콜리처럼 생긴 귀를 쓰다듬으며 웃는 모습이 귀여웠단다.
“사람 친구는 무얼 하면서 놀지?”
“게임하면서 놀아.”
“게임이라고? 좋아.”
“게임을 하려면 이름부터 알아야지, 내 이름은 동길산이야.”
내가 먼저 손을 내밀었지만, 트롤은 선뜻 손을 내주지 않았어.
트롤은 자기 이름을 말해주지 않고, 잠시 생각에 잠긴 듯했어.
“음, 만나자마자 이름을 알려주는 것은 네가 처음이야. 난 브로야.”
“흐흐, 브로라고? 브로콜리 할 때 그 브로?”
초록빛 몸이 브로콜리를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이름까지 브로라고 하니 재미있었어.
“‘브로콜리’라고? 흐흐, 마음대로 생각해.”
“브로, 친구니까 게임만 하면 문을 열어줄 거지?”
“그럼, 네가 이기면 바로 나갈 수 있어.”
“그렇다면.”
티나를 보니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 들어 올렸다 내리더라.
“세 문제를 낼 거야. 다 맞혀야 해, 내 말이 곧 정답이야.”
“뭐라고?”
말도 안 되는 말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어.
“낮에도 별은 반짝인다, 아니다, 밤에만 반짝인다?”
“낮에도 별은 반짝인다.”
나는 브로의 입을 바라보며 ‘하나, 둘, 셋!’하면 무조건 외쳐야 했어. 긴 손가락으로‘하나, 둘, 셋’ 리듬을 맞추면서 문제를 내는 모습이 어릴 적 친구처럼 재미있었단다.
“흐, 첫 문제는 통과!”
브로는 초승달 같은 입을 귀까지 올렸단다.
“다음은 꽃잎 모양 문제야.”
문제를 내면서 아주 즐거워 보였어.
“백합 꽃잎은 한 장, 등대풀은 두 장, 붓꽃은 석 장. 채송화는 다섯 장, 그럼, 모란은 몇 장일까?” “여덟 장!”
브로가 셋을 세지도 않았는데 대답해 버렸지.
“어려운 문젠데, 역시 선생님?”
“피보나치수열로 맞춘 거야.”
“피-보-나-치 수열이라고?”
“그래, 앞의 두 수의 합이 다음 수열이 되는 거야. 1, 2, 3, 5, 8, 13, 21······.”
브로는 쌍방울 같은 코를 잠시 씰룩거리더니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만들고 웃어주었어.
“그럼, 불행이와 행복이가 싸우면 내가 누구 편을 들까?”
“불행이!”
“틀렸어, 행복이야!”
“네가 행복이 편이라고? 거짓말!”
따지려다 나는 입을 다물었어. 일단 브로의 말은 곧 정답이라니까, 듣는 수밖에 없었지.
“말하는 것이 다가 아니야, 불행을 좋아하는 것은 세상엔 없어.”
답답한 마음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웃고 있었더니 브로가 선심 쓰듯이 말했어.
“우린 친구니까 기회를 줄게, 네가 문제를 내 봐.”
나는 한 발짝 브로 앞으로 다가갔어. 브로는 호기심 가득한 머루눈으로 초승달처럼 웃었지. 잠시 주변을 살핀 나는 조개껍데기 하나를 주워서, 바닥에 코끼리 한 마리를 그렸단다.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으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
“난 한 방에 넣을 수 있어.”
브로는 내가 그린 코끼리 주변을 돌더니, 잠깐 생각에 잠겼어. 그러더니 코끼리를 일으켜 세웠지.
“어, 코끼리를.”
한 발 뒤로 물러간 내가 말했지.
“넌 코끼리를 세울 순 있지만, 이 코끼리를 냉장고에 어떻게 넣을래?”
내가 코끼리 등을 어루만지며 웃었지.
“이 큰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다?”
“하나, 둘, 셋!”
브로가 한 것처럼 나도 답을 재촉했지.
“그러니까, 코끼리를 잘라서 말이야.”
“아니, 아니야.”
나는 고개를 흔들며 목소리를 높였어.
“세 번 셀 때까지 못 맞췄으니 문을 열어 줘, 빨리!”
“나에게도 기회는 주야지.”
긴 손가락을 깍지 낀 채, 초승달처럼 생긴 입을 귀까지 올리며 사정하듯 말했어. 나는 더 이상 브로가 무섭지 않았지.
티나가 엄지를 곧추세우며 둥근 벽을 더듬어 나갈 준비를 했어.
“나갈 거야.”
나도 힘껏 벽을 밀면서 소리쳤어. 거짓말같이 바위가 열렸단다.
“빨리, 빨리 날아.”
나는 티나와 함께 날아올랐어.
“기다려, 답은 말해주고 가야지!”
바위는 저절로 닫혔어. 햇살이 쏟아지고 있으니 브로는 나를 따라 나올 수 없었단다.
4. 세이두르
해님은 바닷물을 노랑과 빨간색으로 칠하며 내일을 위해 빠른 걸음을 하고 있었어. 어느덧 어둑발이 내리고 있었단다. 내 가슴은 여전히 콩닥거렸지만, 아름다운 바다색을 보니 마음이 편안해졌어. 나는 두 손을 살짝 바닷물에 담그며 생각했단다.
“아, 이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야 하는데.”
티나가 내 손을 잡으며 말했지.
“아름다움을 즐기라고 했지, 아름다운 노을은 너에게 관심이 없어.”
나는 티나의 손을 잡고 그냥 웃어주었어.
“왜 이렇게 늦었니? 해가 지고 있잖아.”
엄마가 말린 청어를 거두며 말했단다.
“악마의 섬에 가서 브로와 게임을 했어요.”
“길산이 이겼다고?”
“네. 엄청, 자랑스러워요.”
티나는 두 손을 가슴에 모으며 재미있었다는 듯이 말했어.
“지고는 못 사는 트롤인데, 분명 다시 올 거야.”
“트롤이 그렇게 나쁜 것 같지는 않았어요.”
“네가 트롤을 몰라서 그래, 섬을 옮겨 놓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약간 걱정되기는 했지만, 길산이 있으니까 든든했어요.”
티나가 눈을 지름 뜨면서 엄마를 바라보았어.
“늘 조심하는 것 잊지 마.”
엄마는 내 어깨에다 두 손을 얹고 다짐하듯 말했어.
“트롤은 널 영원히 퍼핀으로 만들 수도 있어, 마음을 놓아선 안 돼.”
항상 웃는 얼굴이었는데, 그 말을 할 때는 어쩐지 어두워 보였지. 그러나, 다시 웃는 얼굴로 티나 엄마가 말했어.
“티나, 악마의 섬에서 탈출했으니 이제 구슬을 찾아갈 수 있을 것 같은데 도전해 볼래?”
“그 마법의 구슬 말이에요?”
티나 엄마가 고개를 끄덕였지.
“원한다면 길산이와 함께 가도 좋아.”
“네, 자신 있어요.”
내가 당장이라도 구슬을 찾으러 갈 것처럼 일어서니까 티나 엄마가 손사래를 쳤어.
“유라시아 쪽 협곡에 가면 유난히 반질거리는 바윗면이 있어. 그 면에는 천 개의 서랍이 있단다. 꼭대기에서 아래로 예순아홉 번째 서랍을 열면 앵무조개가 있다고 했어.”
“앵두무 조개요?”
“그 안에는 파랑, 빨강, 그리고 노랑 구슬이 있단다. 파랑 구슬만 가지고 나와.”
저녁을 먹자마자, 새로운 곳에 간다는 부푼 꿈을 안고 잠에 곯아떨어졌어.
다음 날, 새벽 갓밝이에 눈이 떠졌어. 창밖을 본 나는 또 한 번 놀랐단다. 가까이 있던 바위섬이 신기하게도 본래 자리로 돌아가 있었어.
“트롤이 제 자리에 옮겨놓았구나.”
티나 엄마가 들으라는 듯 말했어.
드디어, 협곡에 가는 날이었지. 휘영청 보름달에서 하현달로 넘어간 아침, 파도가 잔잔하고 맑은 날이었어. 노란 구명조끼까지 준비해 놓은 티나 엄마는 조심해야 한다고 몇 번이나 다짐을 주었단다.
파랗고 금빛 나는 바다를 가로지르며 깎아지른 언덕 밑으로 내려가 협곡이 있는 곳으로 헤엄쳤어. 이제 날고 헤엄치는 일은 그리 어렵지는 않았지. 고래를 만나고, 상어도 만났지만, 이리저리 잘 피했단다. 유난히 잔잔한 곳에서는 대구 떼가 몰려다니는 것도 보았어. 머리를 풀어헤치고 흔들리는 해초 사이로 한참을 헤엄쳐갔지. 촛대처럼 생긴 바위를 본 티나가 손짓했어.
“여기인 것 같아.”
“이 협곡 사이에 서랍장이?”
“그래, 여기서는 잘 살피며 가야 해.”
다시 머리를 물속으로 쏙 넣은 티나가 양쪽으로 갈라진 거대한 바위 사이로 들어갔어. 바닷물은 따뜻했고 깊어질수록 점점 밝아왔단다.
“바로 저기다.”
수많은 물고기가 쪼개진 틈 사이로 아래서 위로, 위에서 아래로 헤엄치고 있었어. 빌딩처럼 쏟아있는 바위기둥의 쪼개진 틈 사이에 층층 계단이 보였어. 아래를 보아도 위를 보아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아 보였지.
“날 꼭 잡아, 그렇지 않으면 다른 대륙으로 빨려갈 수도 있어.”
두어 번‘부르르’ 몸을 떨던 티나가 머리를 곧추세우고, 다시 위로 오르기 시작했단다. 함께 오르던 나는 푸른 바다 가운데 갈라진 바위 절벽 꼭대기에 앉았어.
“여기서 아래로 다시 내려가 예순아홉 번째 서랍을 찾아보자.”
나는 검지와 중지로 V자를 만들며 웃어주었지.
“반대편 쪽으로 밀려 나가면 너와 나는 다시 만날 수 없어. 여기가 북아메리카와 유라시아 지각판이 맞닿은 경계거든.”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엄지를 추켜올렸지.
“예순다섯, 여섯, 일곱, 여덟. 예순아홉! 바로 여기야.”
절벽 사이로 잔물결이 손사래 치면서 부드럽게 온몸을 감쌌어. 바위 서랍은 누구의 손에도 닿지 않은 듯 초록 이끼와 갈색 해초가 엉겨 붙어 열기가 힘들었단다. 티나와 내가 부리로 해초를 걷어내자, 반듯하면서 반짝이는 검은 바위 면이 나타났어. 바위 서랍을 조심스레 당긴 티나가 소리쳤어.
“앵무조개가 보이지?”
“그래, 열어봐.”
알록달록한 앵무조개 안에는 티나 엄마 말대로 구슬이 세 개 들어있었어. 빨강, 파랑, 그리고 노랑 구슬이 얌전하게 놓여있었어.
“아, 예쁘다! 다 가져가면 안 될까?”
티나가 세 개를 한 손에 올려놓고 날 보며 말했어.
“안 돼, 파랑 구슬만 가져가야지.”
농담하는 줄 알면서도 나는 티나를 보고 눈을 흘겼어. 그때, 티나가 나 몰래 또 하나의 구슬을 가져온 것은 비밀이었어.
“네 입에 물어.”
파랑 구슬을 나에게 건네며 티나가 명령하듯이 말했어.
난 두말하지도 않고, 파랑 구슬을 입에 물었지. 돌아가는 길도 오는 길처럼 어렵지 않을 거로 생각했어. 혼자서도 돌아갈 수 있을 만큼 자신도 있었지.
그때, 엄청난 대구 떼가 빠르게 움직이면서 흩어졌다 다시 모이면서 우리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단다.
“조심해, 고래가 나타났나 봐.”
“알았어!”
말하자마자, 나는 파랑 구슬을 그만 물속으로 빠뜨리고 말았단다.
“이걸, 어쩌나. 어째!”
나는 재빠르게 놓친 파랑 구슬을 잡으려고 아래로 헤엄쳤어.
“조심해, 길산!”
“악, 으악!”
아주 깊고 넓은 터널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어. 소리치던 티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단다.
“여기가 어디지?”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 두 손으로 눈을 비비며 사방을 둘러보았지. 터널 같은 둥글고 단단한 곳에 굵은 뼈가 규칙적으로 세워져 있고, 매끈매끈하면서 진득한 곳에 떨어져 있었어. 손으로 여기저기를 더듬다가 내 손에 휙 감겨오는 것을 확 잡아당겼단다.
“뭐야? 이건 비닐이잖아.”
다시 더듬어보니 긴 밧줄 끝에 뭔가 묵직한 게 끌려왔어.
“놀라워라, 이게 뭐지?”
동화책에서 보았던 인어 공주가 아니라, 인어 왕자였어. 머리가 노란 곱슬머리에 파란 눈의 남자 인어도 무척 놀라는 표정이었어.
“여기가 어디지?”
혼잣말로 중얼거렸단다.
“고래 뱃속입니다.”
“고래 뱃속이라고요?”
난 고래 밥이 된 것이 너무 슬프고 억울했어. 외할머니 생각에 왈칵 눈물이 나더라고. 그때였어.
“걱정하지 마세요. 잠깐 한눈을 파는 사이, 나도 빨려 들어온 것 같아요.”
인어는 나를 보고 더 놀랐다면서 어떻게 여길 오게 되었냐고 물었지.
나는 협곡에서 구슬을 찾아 돌아가는 중이었는데, 대구 떼가 몰려오는 바람에 구슬을 떨어뜨렸고 구슬을 찾으려다 빨려 들어왔다고 말했어.
“이 구슬 말인가요?”
“네, 맞아요!”
여기서 꼼짝없이 죽는다는 생각에, 파랑 구슬 따위는 잊고 있었어,
그런데, 구슬을 찾으니 티나도 생각나고 정신이 번쩍 들었어. 정말 고마웠어.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전 길산이라고 합니다.”
“제 이름은 플랑입니다.”
“여기서 나갈 수 있을까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고래가 물을 뿜었다 내뱉을 때 나가면 됩니다.”
“우리가 입구 쪽으로 옮겨가야 할까요?”
“아닙니다. 고래는 물속에서 숨을 쉴 수 없어서 한 번씩 물 밖으로 숨을 내쉽니다. 숨구멍이 등 가운데 있으니까 그때 기회를 보고 나가는 겁니다.”
“네, 플랑을 만나지 않았으면 전 고래 밥이 되어서······.”
파랑 구슬을 만지며 다시 울먹거리자, 플랑이 말했어.
“소중한 구슬인가 봅니다.”
“네, 소중한 것입니다.”
“준비하세요, 내가 밀어주면 힘껏 나가는 겁니다.”
플랑은 내 이름을 부르며 말을 이었어.
“길산, 밖으로 나가면 얼른 돌아가세요. 가까이 있다가는 또 빨려들 수 있습니다.”
“이렇게 헤어지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인연이 되면 다시 보게 될 것입니다.”
순간 고래가 힘껏 물을 뿜으면서 내뱉었어. 나는 있는 힘을 다하여 물 밖으로 튀어나왔단다.
“어푸어푸!”
그때였어, 누가 나의 목을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았어.
“길산, 고마워! 이렇게 돌아오다니.”
티나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지.
“날 기다리고 있는 거야?”
“그럼, 널 두고 어떻게 가.”
나는 티나를 힘껏 안아주었어.
바다는 푸르고, 일렁거리는 잔물결이 나와 티나를 부드럽게 감싸주었지.
“어, 플랑은?”
“플랑이라니?”
“응, 고래 뱃속에서 남자 인어를 만났거든.”
“그렇구나, 플랑이 아니었으면······.”
남자 인어는 귀한 몸이라 아무 데나 나타나지 않는다고 티나는 말했어. 그리고, 엄지를 들어 올리면서 분명 우주가 나를 도와주고 있다면서 치켜세웠어.
“아무튼, 네가 다치지 않고 온 것만 해도 꿈만 같아, 너무 기뻐!”
티나의 눈이 다이아몬드 해변에서 본 얼음 조각처럼 빛났단다.
“엄마가 기다리고 있을 거야.”
티나 말대로 절벽 가장자리에서 엄마가 보였지.
“무사히 돌아왔구나.”
티나 엄마는 나를 먼저 안아주었지.
“파랑 구슬 이야기는 하지 마, 실망하실 거야.”
내 손을 잡은 티나가 속삭였지. 나는 티나 손바닥에 파랑 구슬을 살그머니 올려놓았어.
“와, 구슬을 잃어버리지 않았구나.”
“그럼, 플랑이 찾아주었어. 구슬도 함께 빨려 들었나 봐.”
“정말, 다행이야.”
티나는 파랑 구슬을 꼭 쥐고, 가슴에다 안았어.
“잃어버린 줄 알고, 마음을 졸이며 엄마한테 어떻게 말하나 엄청나게 고민했거든.”
엄마가 파랑 구슬을 손으로 살살 닦으니 그림 같은 문자가 보였어. 그냥 맑은 파랑 구슬이었는데, 하얀 글씨가 또렷하게 보이는 것이 신비로웠단다.
티나가 두 손을 모으며 엄마를 바라보았지.
“세 이 두 르.”
“세 이 두 르.”
나도 ‘세 이 두 르’라고 따라 말했지.
아주 먼 옛날, 바이킹 시대부터 내려오는 주문이라면서 티나 엄마는 내 손을 가만히 잡아주었어.
“파랑 구슬을 몸에 지니면 힘들 때 도움이 될 거야.”
구슬에 대고 ‘세 이 두 르’하고 주문을 외면 위험한 곳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했어.
“길산아, 고마워! 네 덕분이야.”
“아닙니다. 저는 곁에 있었을 뿐입니다.”
“곁에 있는 것만으로 큰 힘이 된단다. 파랑 구슬을 가지고 올 수 있었던 것은 네 덕분이야.”
다시 나를 안아주었지. 난 티나 엄마 품에서 외할머니 냄새가 나는 것 같았어.
어릴 적 학교에서 돌아오면, 외할머니는 하던 일을 멈추고, 안아주었지. 내가 밥을 다 먹을 때까지 지켜보고는 재봉틀 앞에 앉아 옷을 만들곤 했단다.
외할머니가 선생님이었던 걸 너도 알지? 몸이 아파 학교를 그만둔 것까지도. 그 후, 옷을 짓거나 이불보를 만들어 나를 대학 공부를 시켰고, 나는 대학에 가서는 아르바이트하면서 대학원에도 가고, 남보다 일찍 교수가 되었지.
외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없어. 다만, 즐겨 부르던 노래를 외할머니가 자주 불러 나도 좋아한단다. 외할아버지도 선생님이었는데, 외삼촌이 다섯 살 때,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고 하더라. 사고를 낸 운전사가 달아나는 바람에 외할아버지는 그 길로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고 했어.
아빠하고 나하고 만든 꽃밭에
채송화도 봉숭아도 한창입니다.
아빠가 매어놓은 새끼줄 따라
나팔꽃도 어울리게 피었습니다.
애들하고 재밌게 뛰어놀다가
아빠 생각나서 꽃을 봅니다.
아빠는 꽃 보며 살자 그랬죠.
날 보고 꽃같이 살자 그랬죠.
외할머니가 어릴 적부터 가르쳐준 노래야. 나는 이 노래가 좋아서 종종 부른단다. 내가 부르면 네 외할머니도 재봉틀을 돌리면서 함께 부르곤 했지. 외할아버지와 같이 꽃밭을 만들고, 꽃을 심고 가꾼 것 같아 그리움이 피어나는 노래야.
“저녁 먹으러 와.”
티나 목소리에 나는 추억에서 깨어나 식탁 앞에 가서 앉았단다. 저녁은 정어리에다 야생 블루베리, 그리고 양젖으로 만든 치즈였어.
짙은 밤바다는 불빛 하나 없었지만, 찰싹거리는 파도 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렸지. 꿈꾸던 일을 온몸으로 겪은 꿈같은 하루였단다.
“아니, 비 그치면 나가야지,” 티나 엄마는 비가 오는데도 라바 필드에 있는 할머니 댁에 간다고 일찍 나가고 안 계셨었어. 갑자기 천둥소리와 함께 번개가 치면서 창문이 마구 흔들렸어.‘우르르 쾅쾅’ 천둥과 함께‘번쩍번쩍’ 번개가 계속 치면서 창문이 활짝 열렸단다.
그때였어. 열린 창문으로 나뭇잎 한 장이 폴 날아와 바닥에 사뿐 앉았어. 내가 나뭇잎을 들어 올리자, 내 손에서 빠져나가 빙그르르 돌면서 ‘쿵’하고 내려앉더라.
세상에, 비에 젖은 트롤 브로가 내 앞에 서 있었어.
“어머나!”
흠뻑 젖은 몸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면서, 연신 제치기 해댔어.
“에취, 에취!”
나는 얼른 수건을 가져다주었어.
“고마워.”
다시 만난 브로가 낯설지 않았지만, 그렇게 반갑지도 않았어.
“그때, 답도 알려주지 않고 가버렸지? 내가 쫓아가려다가 참았다.”
한낮이라 움직이지도 못하면서 마치 날 봐준 것처럼 으스대었지.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법, 빨리 말해, 지금 당장!”
숫제 명령하는 어투로 말하는 브로가 얄미웠어.
“곱게 말할 수 없어?”
두 팔을 깍지 낀 채, 티나가 노려보며 말했지.
“미안! 내 마음속에 있는 삼각형이 계속 콕콕 찔러.”
약간 멋쩍은 듯 브로가 말을 이었어.
“처음엔 나도 죄책감이 들지만, 나쁜 짓은 할수록 모서리가 닳아서 아픔이 사라지고 죄의식도 느껴지지 않아.”
“모서리가 닳으면 부드러워져야지.”
째려보는 티나의 눈이 무서웠어.
“그러니까 괴물이라는 소리를 듣는 거야.”
나도 한몫 거들었지.
“세상엔 완전한 것은 없어.”
나는 외할머니한테 들은 이야기를 브로에게 해주었지.
“이란 사람들은 말이야. 아름다운 모양으로 양탄자를 짤 때, 일부러 흠을 하나 남긴대.”
“왜?”
“세상에 완벽한 것은 없대, 조금 모자라고 부족한 것이 좋을 때도 있다더군.”
언제 왔는지 티나 엄마가 베리를 한 바구니 들고 와서 거들었어.
“인디언도 구슬로 목걸이를 만들 때, 깨진 구슬 하나를 살짝 꿰어 넣는대.”
“깨진 구슬 때문에 목걸이를 못쓰게 되잖아요.”
티나가 말했어.
“아니야, 깨진 구슬 때문에 더 예쁘게 보이지 않을까?”
티나 엄마는 엄지를 들면서 웃어주었지.
“난 흠도 없고, 깨진 것이 없는 완전한 것이 좋아, 히히히.”
브로는 고개를 짤짤 흔들며 트레바리 같은 소리를 했어. 그러니까 티나와 엄마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마주 보더라.
그새 파랗게 맑아진 하늘에는 솜사탕을 여기저기 널어놓은 것 같이 구름만 많았단다. 언제 천둥이 치고 번개가 번쩍거렸는지 알다가도 모를 날씨였어.
“나가자.”
티나가 재촉하자, 브로가 먼저 일어났어.
“안녕히 계십시오. 티나 어머니!”
브로가 꾸벅 인사를 해도 엄마는 고개만 끄덕이고 웃어주지는 않았어.
“브로에게 마음을 주면 안 돼,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까. 꼭 자기 아버질 닮았다니까.”
나는 빙그레 웃으며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꾸벅하고 나섰어.
“황금 폭포로 안내할게.”
브로가 초록색 귀를 만지며 중얼거리자, 한 마리 퍼핀이 되었어. 신기하더라고.
“여기가 굴포스라고 불리는 황금 폭포란다. 빙하가 녹아서 흘러내리는 물이야.”
세상에 있는 물이라는 물은 모두 황금 폭포로 모인 것 같았어. 금빛으로 빛나는 물보라가 계속해서 피워내는 곳에서 무지개를 본 나는 갑자기 허전해졌지. 이 아름다운 풍경 앞에 카메라가 없다는 것이 아쉬웠어. 혼자 왔을 때, 사진만 찍었던 곳이었지. 티나가 내 마음을 눈치채고 볼을 살짝 꼬집었단다.
“벌써 잊었어? 아름다운 것은 우리에게 관심이 없다고, 그냥 즐겨!”
그때도 사진을 찍고 싶은 마음이 사그라지지 않았어. 깊게 자리 잡은 욕심 때문이겠지.
“티나! 저기 좀 봐.”
나는 흥분한 나머지 소리치면서 손가락을 가리켰지.
금빛 물보라 속에서 함께 튀어 오르는 물고기, 남자 인어 플랑이었어.
“뭔데?”“
“플랑이야! 구슬을 찾아주었던 플랑이 여기 와 있다고.”
“어디, 어디?”
나는 플랑을 향해 날았단다.
“인연이 되면 볼 수 있다고 했죠?”
“그러게요, 무사히 돌아갔네요.”
티나가 곁에 와서 인사를 했어.
“구슬을 찾아줘서 너무 감사합니다.”
“무슨 구슬인데?”
브로가 끼어들었어. 나는 브로에게는 구슬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어. 그런데, 브로가 플랑에게 바싹 다가가 물었어.
“파랑 구슬인데, 고래 뱃속에 있는 걸 찾아주었지. 소중한 것인가 봐.”
“뭐라고, 앵무조개 안에 있는 그 구슬 말인가?”
갑자기 트롤의 모습으로 돌아온 브로가 플랑에게 다가가 물었어.
“아니, 넌 퍼핀도 아닌 것이······.”
플랑은 인사도 하지 않고, 물보라 속으로 미끄러지듯 사라져 버렸어.
“앵무조개 속 구슬을 찾았다고? 네가?”
브로가 다그치듯, 나의 턱까지 얼굴을 갖다 대며 물었어.
“으음, 그래,”
“한 번 보여줘. 어떻게 생겼는지 보기만 할게.”
“그냥 구슬이야.”
나는 시무룩하게 말하면서 뒷걸음쳤지.
“그만 가자.”
티나가 나의 손을 잡으려는데, 브로가 냉큼 끼어들었어.
“구슬을 보여주지 않으면 물보라 속으로 티나를 처넣어버릴 거야.”
“뭐라고?”
티나도 소리쳤지.
“어디 한 번 해봐. 네 마음대로 안 될걸.”
브로가 초록 귀를 만지면서 눈을 감고 중얼거리자, 눈썹이 엄청나게 길어지면서 티나를 휘감아버렸어. 명주실처럼 가늘었지만, 촘촘하고 긴 눈썹에서 빠져나가기 힘들어 보였어.
“브로, 티나를 풀어줘. 제발, 네 마음속 삼각형을 부드럽게 만들어.” 내가 달래자, 브로는 초승달처럼 예쁜 입을 크게 벌려서 빨갛고 긴 혀로 나의 얼굴을 마구 핥았어.
“이래도 안 보여줄 거야? 보여 달라고!”
“악!”
티나가 소리치자, 브로는 티나를 공중에서 한 바퀴 크게 돌리더니 물보라 치는 폭포 가운데로 훌쩍 던져버렸단다.
“티나, 티나!”
소리쳤지만, 티나는 물보라 치는 폭포 속으로 사라졌어. 파랑 구슬을 만지며 주문을 외워야 했는데, 망설이다가 티나를 잃어버리고 말았지.
“티나를 돌려놔!”
“헤헤, 이래도 구슬 안 보여 줄 거야?”
온몸에 침을 바르며 간질이는 브로에게 나는 외쳤어.
“제발, 멈춰, 멈추라고!”
나는 깃털 주머니에 든 파랑 구슬을 보여주고는 재빨리 넣어버렸지.
“뭐야, 그렇게 잠깐 보여주기야?”
“네가 보기만 한다고 했잖아, 그냥 구슬이야.”
억지웃음을 지으며 브로를 달랬단다.
“우리 할아버지 때부터 구슬을 찾으려고 애썼는데, 네가 가지고 있을 줄 몰랐어. 구슬은 한 가지 소원은 꼭 이룰 수 있게 해 준단 말이야!”
“트롤은 바위를 옮기고, 뿌리째 나무를 뽑고 농장에 있는 그 많은 우유까지 시어 버리게 하는 재주가 있잖아, 더 이상 무얼 바라니?”
“힘은 우리가 최고지. 하지만, 잘못된 것을 바로 돌리는 데는 그 구슬밖에 없대.”
“이미 저질러 놓은 것을 바로 잡는다고? 말도 안 돼.”
억지를 부리는 브로가 너무 얄미웠지.
“황금 사과를 너무 먹은 우리 엄마가 아기가 되어 버렸어. 되돌리기 위해서는 앵무조개 속 구슬이 필요하대.”
“뭐? 엄마가 아기가 되었다고?”
“영원히 병들지 않고, 젊어진다는 말을 들은 엄마가 욕심을 부린 거지.”
“세상에, 영원히 병들지 않고 젊어진다고?”
“그래서 바이킹 때부터 전해오는 그 구슬이 필요하다고.”
어이없는 이야기를 들은 나는 혀를 차면서 말했단다.
“모든 것은 태어나면 늙고 병들어 죽는 거야. 늙지 않고 살고 싶다고? 어쩜, 그런 생각을.”
내가 가르치듯 말하니까, 브로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면서 소리쳤어.
“난 네 제자가 아니야, 구슬 이리 내놔!”
팔짱을 꽉 끼고, 두 다리에 힘을 주면서 노려보고 있을 때였어. 갑자기, 브로가 초승달 같은 입술을 오므리더니 풍선을 불 때처럼‘후’ 불었어. 브로의 입에서 큰 해바라기 꽃이 피어났어. 그 속에 박혀있던 씨앗들이 화살이 되어 나를 쏘아대기 시작했단다. 엎치락뒤치락하면서 피했으나 쓰러지고 말았어. 그때, 파랑 구슬에 대고, ‘세 이 두 르!’라고 주문을 외워야 하는데 나는 그러지 못했지.
내가 깨어났을 때, 브로는 없었단다. 티나와 구슬까지 잃어버린 나는 털썩 주저앉았어. 울음도 나오지 않았어. 브로를 믿어서는 안 된다는 티나 엄마 말을 가슴에 새기고 또 새겨야 했는데 말이다.
“우선 티나부터 찾아야 해.”
내가 벌떡 일어나 티나가 사라진 폭포를 쳐다보는 순간이었어. 무지개 꼭대기 빨간색 다리에서 플랑 품에 안겨있는 티나가 보였어. 순간 폭포가 멈추었고, 무지개가 일곱 빛깔 사다리로 변하더니 내가 있는 잔디밭으로 이어졌단다.
티나를 풀밭으로 살짝 내려준 플랑이 가쁘게 숨을 내쉬었지. 해녀들이 내는 숨비소리와 비슷했어. 플랑은 물에 젖은 머리를 손으로 빗어 올리며 말했단다.
“트롤을 늘 조심해야 해요!”
“플랑, 고맙습니다.”
거센 물보라 속으로 사라진 플랑을 나는 두 손 모으며 바라보았어.
“돌아가자.”
어깻죽지가 축 처져있는 모습을 본 티나 엄마는 말없이 야생 베리 차를 내왔어.
“또 구슬을 찾으러 가겠어요.” “구슬은 색깔에 따라 쓰임이 달라. 파랑 구슬은 힘들 때, 빨강 구슬은 시간 여행을, 그리고, 노랑 구슬은 공간 이동을 할 수 있단다.”
“브로도 할아버지 때부터 그 구슬을 찾으려고 애썼나 봐요.”
브로가 한 말을 티나 엄마에게도 일러주었지.
티나 엄마는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지.
“파랑 구슬로는 아기가 된 엄마를 되돌릴 수 없어. 트롤에겐 그냥 구슬일 뿐이야.”
“파랑 구슬을 다시 찾아야 할 텐데, 어떡하죠?”
“라바 필드에 있는 할머니한테 가봐야지. 많은 것을 알고 계신 분이니까.”
“그럼, 아빠도 뵙고 다녀올게요.”
티나 엄마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단다.
‘할머니가 사는 곳에 티나 아빠가 있다고?’
나는 티나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궁금했어.
티나 엄마는 담자리 꽃을 꺾어 꽃다발을 만들고, 하양 리본으로 묶어주었지.
6. 라바 필드에 사는 카트린 할머니
할머니 집으로 가는 길은 너무 바람이 불어서 몸이 자꾸 뒤로 밀려났어. 이끼로 덮인 넓은 벌판을 지나고 초록 잔디가 쫙 깔린 곳에 닿았단다. 나란히 줄을 맞춰 지어진 삼각형 지붕 위에는 초록 잔디가 덮어져 있었어. 가문비나무 숲을 사이에 두고 십자가가 우뚝 선 교회가 보였어. 흰 벽에 빨간 지붕으로 색을 입힌 교회가 그림엽서 같았단다. 교회 앞에는 하얀 십자가 묘석이 초록 잔디 위에 줄을 맞춰 꽂혀있었어.
“할머니를 뵙기 전에 우리 아빠한테 인사드리고 가자.”
나는 말없이 티나 뒤를 따랐지.
“열두 번째 십자가 묘석에 우리 아버지가······.”
티나는 하얀 십자가 앞에 담자리 꽃을 놓고 고개를 숙였어.
“여기 한국에서 온 친구랍니다. 함께 인사드려요.”
두 손을 모은 나도 고개를 숙였지.
“······.”
무슨 말을 해야 하는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 티나가 내 마음을 아는지 십자가에 놓여 있는 꽃을 가리키며 말했단다.
“누군가, 내가 올 때마다 저렇게 꽃을 두고 간단다.”
십자가에는 꽃이 걸쳐져 있었어.
“예쁘다, 꽃 이름은 뭐지?”
“디기탈리스야, 여우 장갑이라고도 하지.”
긴 종 모양의 진분홍색 통꽃인데 꽃 안에는 보라색 점이 박혔고, 하얀 털이 나 있었어.
“여우가 꽃 안에 손을 넣으면 어떨까?”
“허허.”
나는 그냥 웃어주었어.
“가자, 할머니가 기다리고 계실 거야.”
티나가 앞장서 걸었지. 할머니 댁은 납작한 돌과 나무 그리고, 잔디로 지붕을 올린 세모 집이었어. 초록 잔디 속에 반쯤은 파묻혀 있는 것처럼 보였어. 자작나무로 된 현관 위로 반달로 된 조그마한 창문이 앙증스러웠어.
“카트린 할머니!”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바깥에서 보는 것과 달리 부채꼴처럼 넓어지면서 깊었어. 천장과 벽, 그리고 바닥까지 나무로 만들어져 흙냄새와 함께 나무 냄새가 확 풍겨왔지.
나무 의자에 앉아있던 할머니가 일어나 티나를 끌어안고, 이쪽저쪽 뺨을 비볐어. 한가운데 자리 잡은 탁자 위에 베리가 가득 담긴 바구니가 놓여있었지.
할머니가 내 손을 덥석 잡았단다.
“길산! 반가워, 얘기 많이 들었어.”
“처음 뵙겠습니다.”
방안의 격자 창문 앞에는 나무 책상이 놓여있고, 양옆으로 침대가 마주 보고 있었어.
“편하게 앉아.”
양털로 짠 침대보 위에 나를 앉힌 카트린 할머니가 특별한 것이라면서 내왔어.
“빙하로 만든 아이스크림이야.”
“와, 할머니 최고!”
티나가 할머니를 끌어안았어.
“감초 아이스크림이야, 감초는 피로를 없애고, 소화가 잘되도록 도와준단다. 우유를 듬뿍 넣어서 쫀득쫀득하고 부드럽지, 길산을 위해 준비했단다.”
“야, 맛있겠다.”
티나가 손뼉을 치면서 숟가락을 들었어.
“요쿨살론에서 가져온 깨끗한 눈 얼음을 거품기로 힘차게 저어 만든 거란다.”
야생 베리까지 넣은 아이스크림은 달콤하기는 했지만, 어릴 적 먹은 한약 냄새와 함께 씁쓰레한 맛이 거슬렸어. 하지만, 난 꾹 참고 먹었지.
“그래, 트롤 브로에게 구슬을 뺏겼다고?”
할머니는 우리가 온 이유를 다 알고 있었어.
“브로도 할아버지 때부터 구슬을 찾아다녔다고 했어요.”
할머니가 크게 숨을 쉬었어. 걱정이 있거나 힘이 들 때 내쉬는 한숨이었지.
“무엇이든 마음대로 변하게 하고, 섬도 옮길 수 있는 강한 힘은 가졌지만, 늙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재주는 없나 봐요.”
“세상 어디에도 그런 건 없어.”
카트린 할머니는 혀를 끌끌 차면서 티나를 바라보며 말했어.
“트롤이 자꾸 너희 집을 기웃거리는 건 다 속셈이 있기 때문이야,”
“엄마도 내게 늘 조심하라고 해요, 하지만······.”
“우리 퍼핀은 오는 것을 내치지 않고, 가는 것을 붙잡지 않는 법이지.”
카트린 할머니는 티나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를 길게 들려주었어.
“티나! 너도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아마 처음 들을 거다.”
할머니는 또 한숨을 쉰 후, 말했지.
동이 트려면 한참은 더 있어야 할 컴컴한 때였대. 일찍 일어난 티나 아버지가 절벽 가장자리에 앉아있었단다. 낯선 퍼핀 한 쌍이 두리번거리면서 티나 아버지에게 다가왔단다.
“나는 스코틀랜드 칸나 섬에서 왔어요. 풍경도 좋고 먹거리도 많아 여기 살려고 왔습니다.”
낯선 퍼핀 부부는 티나 아버지와 비슷한 또래였다고 했어.
“머물 곳은 얼마든지 있답니다. 마음이 가는 대로 보금자리를 텃세요.”
“아내가 임신 중이라 절벽 가장자리는 피했으면 합니다.”
“그럼, 내가 좋은 곳을 안내해 드리지요.”
티나 아버지는 가파르지 않은 언덕배기에 물고기 사냥이 쉬운 곳을 찾아주었대.
“고맙습니다. 낯선 곳이었는데 친구를 만난 것처럼 편안합니다. 내 이름은 그림손입니다.”
그리하여 그림손과 티나 아버지는 금방 친해졌다고 했어.
그림손은 참 부지런했단다. 티나 아버지가 일어나기도 전에 정어리를 20마리씩 잡아서 매일 티나 집에 가져다주었대. 말려도 소용이 없었단다. 좋은 친구에게 보답하는 것이라고 애써 변명까지 하면서 말이야. 친절하고 정이 많은 티나 아버지는 그림손과 형제처럼 지냈단다. 늘 갓밝이면 그림손은 고기를 잡아, 티나집 마당에 펼쳐놓고 부리나케 집으로 돌아갔단다.
“그림손! 차라도 한잔하세요.”
티나 엄마가 이슬차를 내놓아도 언제 사라졌는지 빠르게 사라졌단다.
“아내가 임신 중이니 빨리 가서 도와주려나 봐.”
“그래도, 저렇게 생선만 잡아주고 그냥 가다니.”
그날도 해가 뜨기 전에 가려는 그림손을 티나 아버지가 불렀대.
“무엇이 그리 급한가? 칸나 섬은 어떤 곳이야? 이야기 좀 하게.”
티나 아버지가 그림손의 손을 잡고 말했대.
“여기만큼 아름다운 곳이네, 하지만······.”
“고향을 떠나기 쉽지 않았을 텐데 후회는 안 하나?”
“자네같이 좋은 친구를 만났는데, 무얼 바라겠나.”
“함께 식사도 하면 좋을 텐데, 왜 부리나케 집으로 가는가?”
그림손은 잠깐 멈칫하더니 말했단다.
“일찍 일어나서 피곤하기도 하고, 또 햇빛 알레르기가 있어서······.”
막 솟아오르는 금빛 해를 보고는 얼굴을 가리며 돌아가더래.
“그럼, 오늘 저녁에 만나세.”
그날 저녁, 깜깜한 바다를 바라보며 티나 아버지와 그림손이 앉았단다.
“사실은 내가 찾는 게 있네.”
“무언가?”
“바이킹 시대부터 내려오던 구슬인데.”
“구슬이라고?”
“늙지 않고 병들지 않는 주문이 새겨진 구슬이야.”
“주문이 새겨진 구슬?”
“우리 아버지가 병이 깊은데, 그 구슬만 있으면 다시 일어날 수 있대.”
“자네는 부지런하고 효심까지 깊은 친구로군. 그런데 말이야. 그런 구슬은 없어.”
티나 아버지도 할아버지 때부터 듣긴 했지만, 영원히 사는 구슬 이야기는 처음 들었다고 말했단다.
“대륙 사이에 있는 협곡에 구슬이 있다고 듣긴 들었어. 하지만,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라 나는 흘려들었다네.”
“대륙 사이에 있는 협곡에 있다고?”
그림손은 티나 아버지한테 바싹 다가와 자세를 고쳐 앉았단다.
“함께 가보자.”
“그래, 날씨가 좋은 날 한번 가보자고.”
티나 아버지는 별생각 없이 약속하게 되었대. 그날부터 그림손은 티나 아버지를 닦달하기 시작했단다. 꼭두새벽에 와서는 예전처럼 생선은 잡지 않고 빨리 구슬을 찾으러 가자고 졸랐대.
“날씨가 좋아야 갈 수 있어, 위험한 곳이니 장비도 준비해야 하고.”
“걱정하지 마, 날짜만 잡으면 내가 알아서 할게.”
그림손은 힘이 세고 영리해서 어려운 일을 척척 해낼 것 같았지만, 티나 아버지는 조금씩 의심이 들기 시작했단다. 왜냐하면, 퍼핀은 지나친 욕심을 부리지 않고 자연의 섭리를 지키며 사는데, 갈수록 그림손은 퍼핀의 성향과 달리 집착이 심했단다.
“가는 길은 험하대, 고래와 상어도 많아 위험하다고 했어.”
“아무튼 가자고, 가!”
“협곡에 있다고 했지만, 꼭 찾는다는 보장은 없어.”
만나면 보채고, 으름장까지 놓는 바람에 어느 맑은 날, 협곡을 향했단다.
“네 아버지도 아무런 정보도 없이 그냥 간 거란다.”
빌딩처럼 쏟아있는 바위기둥의 쪼개진 틈 사이에 층층 계단까지는 함께 갔더래.
“그런데 이상했대. 협곡에 가까워지자, 갑자기 퍼핀 그림손은 사라지고 괴물 트롤로 변했단다.
사마귀가 있는 코에 붉어진 눈 그리고, 뒤틀린 입으로 변한 트롤을 본 순간, 네 아버지는 너무 놀라고 속은 것이 분해서 소리쳤단다. 그림손도 눈을 부릅뜨고 앵무조개가 든 서랍을 찾았지만, 구슬을 꺼내지 못하자, 고함을 치기 시작했대. 그러다가 협곡을 들이받아 유라시아 지각판으로 밀려가 버렸단다.
티나 아버지는 있는 힘을 다해 절벽 가까이 올라와 집으로 돌아왔지만, 배신을 당한 마음에 음식도 먹지 못하고, 앓다가 돌아가셨다고 했어.
그림손이 실종되자, 부인이 매일 찾아와 티나 엄마에게 해코지했단다. 그때마다 차를 내어서 달래고 어루만져 주었더니 잠잠해졌지. 그런데, 또 손님이 오니 심술이 난 모양이야.”
할머니는 이야기 중간중간에 차를 홀짝홀짝 마시면서 잔 받침에 찻잔을 딸깍 내려놓곤 했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들을 잃은 나는 구슬에 관한 이야기를 네 아빠에게 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어. 그 후, 티나 엄마에게는 구슬에 대해 자세히 말해주었지.”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은 나는 말했어.
“브로 엄마는 황금 사과를 너무 먹어 아기가 되었대요. 그래서 구슬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늙지 않고 젊게 살겠다고? 욕심이 지나친 거야.”
“카트린 할머니, 아기가 된 어른을 되돌리는 방법은 없나요?”
“그러려면 파랑 구슬이 아니라 뜸부기 깃털이 필요하단다. 파랑 구슬은 힘이 부족한 우리 퍼핀한테나 필요하지, 지금쯤 파랑 구슬이 소용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거야. 분명 다시 찾아올 거야.”
카트린 할머니는 일어서서 격자창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어.
“봐라. 브로가 오고 있지?”
“안녕하세요?”
“티나를 폭포 속에 던지고, 구슬까지 빼앗곤 또 어떤 패악질 하려고 왔니?”
“에이! 할머니도, 잘 아시면서.”
브로는 티나와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어.
“플랑이 아니었으면 난 폭포 속으로 빨려 들어가 죽을 뻔했어.”
티나가 두 팔을 깍지 낀 채, 브로 앞에 다가가 따졌지.
“트롤한테는 소용없는 구슬인 걸 이제 알았구나.”
“파랑 구슬만 있으면 엄마를 되돌릴 수 있다는 생각에 그만······, 그 순간은 삼각형 모서리가 닳아버려서 잘못도 느낄 수 없었어. 아기가 된 우리 엄마를 빨리 되돌려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거든.”
“넌 네 엄마만 생각해?”
“아기가 된 엄마를 먹여주고 씻겨주는 게 너무 힘들어, 구슬만 있으면 다 되는 줄 알았지. 그래서······.”
“그런데?”
“아니었어, 파랑 구슬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고.”
“다시 가져왔어?”
브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침대 위에 털썩 주저앉았지.
“분명히 그 구슬은 불가능한 것을 이룰 수 있게 해주는 것이라고 들었거든. 우리 아버지도 구슬을 찾으려다 실종됐잖아.”
“우리 아버진 돌아가셨다고!”
티나답지 않게 소리치는 모습이 낯설었어. 티나의 눈가에서 눈물방울이 쪼르륵 흘러내려 뺨을 적셨어.
“아기가 된 엄마가 울고 보채는 걸 더 이상 보고 있을 수는 없었어. 구슬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만 했어. 너무 힘들단 말이야, 엉엉!”
“너도 딱하긴 하다. 아버지는 행방도 모르고, 엄마는 아기가 되어 네 손길을 기다리고 있으니, 다 자업자득이지.”
“할머니, 도와주세요. 우리 엄마를 되돌리는 방법이 없을까요?”
할머니는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입맛을 다시곤 생각에 잠긴 듯했어.
“부탁이에요, 엄마만 되돌릴 수 있다면 마음속의 삼각형 다 부숴 버릴 거예요.”
브로가 무릎을 꿇고 두 손을 싹싹 비볐어.
“구슬이나 내놔.”
티나가 손을 내밀었지만, 브로는 구슬은 내놓지 않고, 할머니만 보고 있었어.
“제발, 부탁이에요, 할머니!”
“구슬도 필요한 곳에 써야지, 욕심만 부리다가 다 헛것이 된 거야.”
“할머니, 제발! 엄마를 되돌릴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어요. 힘자랑을 하면서 섬을 옮겨놓지 않을 거고요. 뿌리째 나무를 뽑아 남을 위협하지도 않고, 농장에 있는 우유를 시어 버리게 하는 장난도 하지 않을게요.”
할머니는 말없이 일어나 브로에게도 감초 아이스크림을 내주었어. 브로는 얌전하게 두 손으로 받아서 먹지는 않고 바라만 보았어.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이지만, 못 먹겠어요. 맛있는 것도 당기지 않아요.”
조그맣게 숨을 내쉰 할머니가 물끄러미 브로를 보았어.
“그럼, 내가 시키는 대로 할 수 있겠니?”
“네, 뭐든 하겠어요. 할머니!”
그때, 티나가 나섰단다.
“할머니, 브로를 믿을 수 없어요.”
할머니도 속을 것 같아서 나도 목소리를 높이며 말렸지. 그러나, 할머니는 아주 부드러운 목소리로 브로에게 말했어.
“꼭 비가 온 후에 가야 한다, 스포가 포스에서 무지개가 피거든 비프로스트 다리를 건너야 해. 건너면 바로 큰 나무가 있는데, 황금 항아리가 그 꼭대기에 있단다. 황금 항아리 안에 든 뜸부기 깃털을 가져와야 하는데, 갈 수 있겠니?”
“뜸부기 깃털요?”
브로는 고개를 잘래잘래 흔들며 말했어.
“무지개다리 비프로스트는 너무 가벼워 우리같이 무거운 트롤은 건널 수 없다고 들었어요.”
“왜, 너희들은 마음대로 몸을 바꾸는 재주를 가졌잖아. 엄마를 생각하는 마음이 기특해서 도와주고 싶었는데, 네가 힘들다면 나도 어쩔 수 없지.”
할머니는 손사래를 치면서 브로에게 돌아가라고 말했어. 브로가 그렇게 힘없는 모습은 처음 보았지. 말없이 돌아가는 브로의 뒷모습이 안돼 보였단다.
“할머니, 아이스크림이 하나도 녹지 않고, 그대로 있어요.”
“또 마술을 부렸구나.”
“흐흐, 이런 마술이라면 얼마든지 환영해.”
나는 녹지 않은 아이스크림이 신기해서 자세히 들여다보았어.
“할머니! 아이스크림 안에 파랑 구슬이 들어있어요.”
그날 밤은 할머니 집에서 자기로 했지. 침대는 포근하고 따뜻했지만, 나는 한잠도 자지 못했어. 내 마음은 무지개 색깔처럼 빨갛다가 파랑이 되고, 노랗다가 주황이 되고, 초록 초록하다가 보라가 되었지. 브로는 미웠지만,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아기가 된 브로 엄마가 가여웠어. 또, 브로도 참 안 됐다는 생각이 피었다 지고, 졌다가 다시 피어났어.
7.비프로스트 무지개다리
해님이 먼저 일어나 초록 잔디를 햇살 손으로 어루만지고 있었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맑은 날이었어. 아침 이슬은 사라졌고, 코끝으로 스미는 공기가 싱그러웠지. 카트린 할머니 집에서 제일 먼저 일어난 나는 밖으로 나왔단다. 금방 티나도 일어나 나왔어.
티나와 나는 말없이 걸었지. 먹구름에 갇힌 나의 마음이 서서히 거두어지는 듯했단다. 하지만, 갑갑한 마음은 초록색을 보아도 쉽게 나아지지 않았어.
“오, 여기도 담자리 꽃 천지야.”
담자리 꽃이 쫙 깔려있었어. 하나둘 꺾어 꽃다발을 만들었지. 그리고 제일 예쁜 꽃 하나를 따서 티나의 귓가에 꽂아주었단다.
“내 마음이야.”
수줍게 웃는 티나가 외할머니를 닮은 것 같았어. 꽃다발을 받은 티나가 아버지 묘석 쪽으로 걸어갔어. 십자가에는 싱싱한 디기탈리스가 또 얹어져 있었는데, 꽃잎에는 수정구슬처럼 투명한 물방울이 맺혀있었지. 아버지 묘석 앞에 멈춰 선 티나가 꽃다발을 나에게 건넸단다. 말없이 받아 십자가 앞에 놓고, 큰절을 했어. 담자리 꽃에서 피어난 향기가 코끝으로 들어왔단다. 잠시 눈을 감고, 그대로 엎드리고 있었어.
“그만 일어나, 길산!”
티나가 나의 팔을 잡았어. 나는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다시 한번 허리를 숙여 절을 하였어.
“아빠가 살아있다면 엄청나게 좋아했겠다.”
나는 티나 손을 한 번 잡아주고는 뒤로 물러나 잔디 위에 앉았지. 잔디밭이 부드럽게 내 몸을 감쌌고, 불어오는 바람과 풀냄새가 내 코끝에서 풀 풀 풀 날렸어.
“티나! 지난밤에 한잠도 못 잤어, 우리가 브로를 도와줄 방법은 없을까?”
만약 네 할머니가 아기가 되었다면, 난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해 보았지. 아기가 된 우리 엄마, 생각하기만 해도 괴로웠단다.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에 머문다는 건 사라지는 것보다 안타깝고 안 됐다는 생각이 자꾸 피어났어.
“브로가 좋은 친구는 아니지만, 미운 정도 정이잖아.”
“싫어!”
티나는 생각보다 냉정했어.
“도와주자고? 난 싫어! 브로는 약속도 지키지 않고,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잖아. 난 우리 아빠처럼 트롤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을 거야.”
“무지개다리는 우리만 건널 수 있어. 브로는 가고 싶어도 못 가잖아, 또 우리에게는 파랑 구슬도 있고······.”
대답도 하지 않고 벌떡 일어난 티나는 저만치 걸어가 버렸지. 나도 바지를 털면서 일어났어.
그때, 내 앞을 가로막는 소녀가 있었어. 맨발에 하얀 원피스를 입고, 손에는 손잡이가 긴 주머니를 흔들며 말을 걸어왔어.
“티나가 화났네.”
“누군데 갑자기 나타나서 그래?”
“난 이 마을에 사는 호드라고 해.”
이름을 말하면서 주머니를 흔들다가 어깨에 척 올리더라.
“······, 그래? 난 길산이야.”
그냥 무시하고, 티나를 따라갈까 하다가 이름을 말해주었지.
“길산, 티나가 왜 화났어?”
“별거 아니야.”
“브로 때문이지?”
“네가 브로를 알아?”
“그럼, 여긴 조그만 동네니까 대부분 안단다.”
“브로에게 마음을 다쳤나 봐, 그래서 힘들어해. 하지만, 금방 풀릴 거야.”
“비프로스트 다리 넘어 황금 깃털을 찾고 싶은 거지?”
“어쩌면, 내 생각까지 알고 있네. 여기는 생각도 소문이 나는 곳이야?”
“어쩌면······.”
“어떻게?”
“나에게는 수정 구슬이 있거든.”
“수정 구슬? 그건 어디에 쓰는 거야?”
“수정 구슬은 남의 생각을 읽을 수 있고, 네 마음을 불러올 수도 있어.”
“마음을 불러온다고?”
“그럼, 지나간 것이나 앞으로 올 것, 또는 보고 싶은 것까지 다······.”
“그래?”
나는 호기심이 바짝 일었지.
“언제, 어디로 가고 싶어?”
호드는 주머니를 풀어 수정 구슬을 꺼내더니 잔디 위에 살며시 놓더라. 나도 모르게 그 앞에 꿇어앉았어. 수정 구슬에 내 얼굴이 비쳐 커다랗게 보였다 사라졌어. 나는 추억으로 간직했던 어린 시절, 우리 집으로 걸어 들어갔지.
넓지 않았던 우리 집 마당에는 언제나 꽃이 피었어. 부지런한 외할머니는 쓸고, 닦고, 뿌리고, 가꾸는 것이 취미였어. 우리 마당에는 사철 꽃이 피었지. 꽃샘추위를 견딘 향기 좋은 매화, 솜사탕을 뜯어 걸쳐놓은 목련, 그리고 철쭉이 피고, 손톱에 물들이는 봉선화와 난쟁이 채송화, 향기 짙은 국화까지 가득했단다. 계절마다 피는 꽃은 나에게 말을 거는 듯했어.
“괜찮아, 괜찮아. 잘 크고 있어.”
나는 늘 혼자였지만, 피고 지는 꽃이 내 형제처럼 느껴졌어.
“예쁘다, 예뻐. 고마워!”
반들반들하게 잘 닦여진 마루에는 외할머니가 일하는 재봉틀이 있고, 내가 소반을 놓고 공부하던
곳이었어.
달달거리는 재봉틀 소리와 함께 마루 냄새는 아직도 날 따라다니고 있단다.
낙엽을 태우면 고소한 냄새, 초록 들길 냄새가 합쳐진 세상에서 가장 정겨운 냄새라고 생각했어.
그 냄새가 좋아서 코를 대고 킁킁거리다 두 손을 머리 뒤에 놓고 잠이 들곤 했단다.
어느 날, 재봉틀 소리와 살살 부는 바람과 함께 잠이 들었어. 얼마나 잤는지, 저녁인데 아침으로 착각한 나는 가방을 메고 마당으로 나섰어. 그때, 외할머니가 그렇게 크게 웃는 것을 처음 보았단다. 언제나 모범생이었던 내가 처음으로 한 실수라면 실수였지.
또 한 번씩 생각나는 곳은 내 방 동쪽 창문에서 보이는 좁고 낮은 길이 있었어. 버스 종점까지 이어진 길은 창문 앞에 놓인 책상에 앉으면 버스에서 타고 내리는 사람을 다 볼 수 있었지.
비 오는 날이었어. 그날은 외할머니가 안 계셨어. 턱을 괴고 길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지. 보슬보슬 내리던 비가 갑자기 소나기로 변했고, 방금 버스에서 내린 소녀가 우리 집으로 뛰어들었어. 낯설었단다.
내가 마루로 나가자, 비가 와서 그칠 때까지 있겠다고 말했어. 난 고개만 까닥하고 방으로 들어왔는데, 왠지 낯이 익었고,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지. 두근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약간 설레는 그런 느낌이었단다.
그냥 혼자 두는 것이 아닌 것 같아 다시 마루로 나갔더니, 꽃밭을 바라보며 그대로 서 있었어. 블라우스와 치마도 젖어있었고, 오늘 신은 것 같은 하얀 운동화에 빗물이 튀어 축축해진 것이 내 마음마저 젖는 것 같아 수건을 가져다주었어.
“고마워.”
두 손으로 수건을 받아 얼굴을 닦는 소녀를 본 순간, 숨이 멈추는 줄 알았어. 목련이 비에 젖어 있는 것 같았지. 내 가슴에 방망이 치는 소리가 소녀의 귀까지 들릴 것 같아 부끄러웠단다. 다시 방으로 들어와 빼꼼 문틈으로 보니 마루에 앉아 양말을 벗고는 발을 닦고 있었어. 하얀 발이 너무 예뻤어. 비는 사정없이 쏟아부었지. 천둥소리가 나고 번개가 번쩍번쩍 난리를 쳤단다.
“길산아!”
외할머니도 옷이 다 젖어서 들어왔지. 소녀를 방으로 들어오게 한 외할머니는 내 티셔츠와 작은 치마를 주면서 갈아입게 했단다. 물기를 꼭 짠 소녀의 옷을 외할머니는 다리미로 다려주었어.
“웃마실, 약방 할아버지 외손녀야.”
약방 할아버지에게 손녀가 있는 것은 알았지만, 처음 보았어. 약방을 그만두었는데도 외할머니는 여전히 약방 할아버지라고 불렀고, 속이 거북하거나 열이 나면 약을 받아오곤 했단다.
“수련아, 엄마는 좀 어때?”
“여전하세요, 안부 전해 달래요.”
“그래, 한 번 봐야 할 텐데······.”
수련 엄마랑 외할머니는 고등학교 동창이었어. 외할머니는 교육대학에 입학했고, 수련 엄마는 영문학을 전공해서 미국에서 결혼하고 귀국했다고 했어. 한동안 소식 없이 지내다가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단다. 그런데, 수련 엄마가 몹쓸 병에 걸린 후부터는 수련만 할아버지 집에 다녀간다고 했어.
“우리 엄마도 여기가 그립대요.”
“나아지면 함께 와.”
다림질한 옷을 갈아입은 수련이 인사를 했어. 비는 그쳤지만, 활짝 개지는 않았단다. 외할머니는 양단으로 만들어놓은 겨자색 목수건을 한지에 사서 수련에게 주었지.
“잘 가!”
나는 눈인사만 했는데, 수련은 작은 소리로 말했단다.
“잘 있어, 고마워!”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어. 수련은 자기 엄마보다 먼저 하늘나라 별이 되었다고 하더라. 그 소식을 들은 나는 며칠을 방에서 나오지 않고 소리 없이 울었어. 엄청 친한 친구를 갑자기 잃어버린 생각이 들어 너무 슬펐어. 외할머니도 말없이 내 등을 토닥거려 주었지.
“보고 싶다, 수련이!”
금세,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린 자리에 수정 구슬만 남았어. 나는 어질어질해서 바닥을 짚고 일어났단다.
“어머? 네 얼굴이 발그레해졌네.”
아쉬웠어.
“호드! 황금 깃털을 구하러 가면 나를 도와줄 수 있어?”
“음, 생각해 보니 그건 좀 그래, 내 몸이 보기보다 무겁거든.”
수정 구슬을 주머니에 넣은 호드가 손사래를 치며 걸어가 버렸어.
“네가 날 필요로 할 때, ‘짠’하고 나타날 테니.”
아주 잠깐, 난 호드 모습에서 수련의 얼굴을 보았어.
“길산, 길산!”
카트린 할머니가 불렀어.
“아침 먹자.”
할머니가 내놓은 아침은 온통 샐러드뿐이었어. 빨간 야생 베리를 퓌레로 만들어 샐러드 위에 뿌려놓았지. 흔한 정어리는커녕 치즈도 없는 야채 식단이었어.
“카트린 할머니는 비건주의자란다, 채식만 하셔.”
“참, 아이스크림을 만들기 위해 준비한 우유가 있었지.”
할머니는 파란 잔에 하얀 우유를 가득 부어서 식탁 위에 놓았단다. 자상하고 인정 많은 할머니가 채식주의자라면 살아있는 모든 것에 사랑이 많은 건 틀림없겠지. 나는 침을 한 번 삼킨 후, 용기를 냈단다. “할머니, 브로를 도와줄 방법은 없을까요?”
뜬금없다는 표정으로 할머니는 내 눈을 자세히 들여다보았어.
“브로를 도우려고, 왜?”
“어젯밤에 한잠도 못 잤어요. 할머니가 마련해 준 잠자리는 포근했지만, 브로를 생각하니 너무 불쌍하고 안 됐어요.”
“그래서?”
“브로가 가엽고, 브로 엄마 역시 안타까워서······.”
카트린 할머니는 티나를 힐끗 보고는 날 계속 바라보았지. 한 번 더 용기를 내서 길게 이야기했단다.
“우리 아버지는 뺑소니 사고로 돌아가셨어요. 처음에 엄마는 아버지를 치고 달아난 운전사를 용서할 수 없었대요. 미움과 괴로움의 나날을 잊기 위해 책을 많이 읽었다고 했어요. 어느 날, 마하트마 간디가 한 말이 도끼처럼 가슴에 와닿았대요. ‘약한 자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용서하는 마음은 강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특성이다.’ 그 말을 곱씹으면서 뺑소니 운전사를 용서할 수 있게 되었고, 마음은 편해졌으며 나를 더 강하게 키울 수 있었다고 했어요.”
나는 티나를 바라보니까 티나도 날 빤히 보고 있었어.
“넌 항상 아름다운 것은 우리에게 관심이 없다고 말했잖아. 아름다운 것 그대로 보라고 말이야. 미운 마음이 가득하면 아름다운 것을 볼 수 없어. 미운 마음을 지우려면 용서해야 한다고 생각해.”
카트린 할머니는 일어나 내 어깨를 한 번 두드려주고는 창가로 갔어. 티나는 가만히 있었어.
“길산 말이 맞아, 내 마음을 위해서라도 용서는 필요하지. 하지만, 쉽지는 않을 거야.”
“브로가 파랑 구슬을 살짝 놓고 간 것은 미안했기 때문일 거야. 우리에게 도와달라는 뜻이기도 해, 그렇지 않아?”
나는 티나를 보며 애써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말했으나 마음은 조마조마했단다. 또 싫다고 하면 어떡하나? 걱정스러웠지.
“하지만, 비프로스트 다리를 어떻게 건넌담?”
혼잣말처럼, 나 들으라는 듯, 할머니에게 묻듯이 중얼거렸어.
“티나, 고마워!”
“아직은 용서가 안 돼. 하지만, 길산 네 말대로 노력은 해 보겠어, 자신은 없지만.”
“먼저 용서하겠다는 마음만 먹어 봐. 그러면 마음이 알아서 한다고.”
“치, 누가 선생님 아니랄까 봐.”
나는 창밖의 초록 잔디를 바라보았어. 초록 잔디가 내 눈으로 들어오고, 그 초록이 내 마음을 흠뻑 적셔주었단다. 그러다가 문득 브로의 몸이 초록색임을 기억하고 빙긋 웃었어. 티나도 나를 보고 방긋 웃었고, 할머니도 빙그레 웃어주었지.
“무지개다리인 비프로스트는 보통 무지개와 달리 거꾸로 되어 있단다. 빨강이 제일 밑에 있고 보라가 위에 있어. 그 다리는 초승달이 반듯하게 누워있는 것처럼 가운데가 깊단다. 그 가운데가 제일 위험하다고 했어.”
티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나보다 더 열심히 듣고 있었어.
“비프로스트 다리를 건너면 바로 큰 나무가 있어. 스프러스라는 가문비나무지. 그 나무 꼭대기에 황금 항아리가 있단다. 그 안에 뜸부기 깃털이 있는데 너무 가벼워 날아가거나 부스러지기 쉽단다.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으니까, 파랑 구슬 말고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걱정하지 마세요, 플랑이 있어요. 도울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휘파람을 불라고 했거든요.”
티나의 눈이 반짝거렸어.
“글루카 베듀시한 날에 가는 거다. 비가 그치면 바로 무지개가 생길 거야. 빨리 건너서 빨리 돌아와야 해. 무지개가 사라지면 비프로스트 다리도 물속으로 빠져버린단다.”
“네, 알겠어요. 할머니!”
나는 카트린 할머니를 꼭 안았어. 할머니도 내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단다.
티나와 함께 집으로 온 나는 할머니와 했던 이야기를 다 했어. 티나 엄마도 한동안 가만히 듣고만 있었지. 티나가 엄마 뒤로 가서 허리를 껴안고 등에 얼굴을 묻었지.
“엄마, 저도 받아들이기 힘들어요. 하지만, 길산과 할머니 말을 곱씹어 보니 마음속 파란 멍을 치료하는 데는 용서밖에 없는 것 같아요.”
“······.”
한참 말이 없던 티나 엄마가 돌아서서 티나 손을 잡으며 말했어.
“그래, 미움도 싹이 있어서 자꾸 물을 주면 자라지만, 물이 없으면 메말라서 죽게 되겠지. 사랑으로 대하면 모두 행복해질 거야.”
나는 비로소 마음이 놓였단다. 어려운 숙제를 다 한 아이처럼 야호! 하고 외치고 싶었지. 티나 엄마까지 마음을 모아주니 힘이 불끈 나는 듯했어. 살며시 밖으로 나온 나는 바다를 바라보며 앉았어. 외할머니한테 배운 노래가 생각나 조그맣게 불렀어. 언제 왔는지 티나도 나의 노래를 듣고 있었어. 약간 멋쩍었으나 끝까지 불렀지. 바다도 행복의 노래를 철썩철썩 함께 불러주는 것 같았어.
아침 바다 갈매기는 금빛을 싣고
고기잡이 배들은 노래를 싣고
희망에 찬 아침바다 노 저어 가요
희망에 찬 아침바다 노 저어 가요
저녁 바다 갈매기는 행복을 싣고
고기잡이 배들은 고기를 싣고
넓고 넓은 바다를 노 저어 와요
넓고 넓은 바다를 노 저어 와요.
8.황금 항아리에 든 뜸부기 깃털
드디어, 그날이 왔어.
“티나! 파랑 구슬은 네가 가지고 있어.”
“왜, 자신이 없어?”
“응, 급한 일이 생기면 구슬 생각이 나지 않아, 주문도 잊어버리고.”
나는 티나를 보고 웃었어.
“걱정하지 마, 내가 가지고 있을게. 할머니가 튼튼한 주머니를 만들어주었거든.”
비가 그친 스포가포스는 엄청난 물소리로 다른 소리는 다 집어삼켜 버렸어.
“저기 봐, 무지개다리 비프로스트가 생겼어.”
티나가 큰 소리로 외쳤어.
“그래, 조심해서 건너자.”
티나가 먼저 날아올라 다리 끝에 섰어. 보라색 다리는 마치 한 줄로 되어 있는 곡예사의 줄처럼 출렁거렸단다. 균형을 잡지 않으면 폭포 밑으로 떨어져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 같았지. 하얗게 일어나는 물거품이 떨어지면서 물방울이 튀어 올라 온몸을 적셨어. 한발 한발 줄에 몸을 맡기듯 조심조심 내려갔단다. 초승달이 반듯하게 누워있는 것 같은 다리는 미끄러지듯이 내려가면서 앞으로 나가야 했지. 초승달 모양의 실 다리는 팽팽해졌다가 느슨해졌다가 제멋대로여서 자칫하면 폭포 속으로 떨어질 것 같았어. 마음을 졸이면서 한참 내려가니 약간 편편한 곳에 닿았는데, 무언가 ‘반짝’하고 빛났단다. 자세히 보니 맑은 물이 고인 작은 웅덩이였어. 티나가 웅덩이를 폴짝 뛰어 건넜단다. 작은 개울물 건너듯 쉽게 보였어.
“길산, 빨리 뛰어! 웅덩이가 점점 커지고 있어.”
힘껏 티나가 있는 쪽으로 모둠발로 뛰었지.
그런데, 아이고, 오른발은 티나 쪽에 닿았는데, 왼발이 웅덩이 속에서 달랑거렸어.
“내 손을 잡아!”
티나의 손을 잡고 간신히 올라가 돌아보니 깊고도 푸른 우물이었지. 우물은 점점 커지면서 푸르고 깊은 물이 찰랑거렸단다.
“후!”
이제는 다시 올라가야 했어. 여전히 줄은 출렁거렸단다. 두 손과 두 발로 이를 악물고 올라갔지.
“난 할 수 있어, 난 할 수 있어, 난 할 수 있어!”
할 수 있다고, 나는 할 수 있다고 마음속으로 외치고 또 외쳤단다. 다리 끝에서 티나가 소리쳤어.
“와, 저기 나무 위에 반짝거리는 것이 보여!”
가슴이 두근거렸지. 축 늘어진 가지에 뾰족한 잎이 나 있고, 갈색 나무껍질을 보니 오래된 스프러스 가문비나무가 틀림없었어. 티나가 ‘폴’ 날아올라 황금 단지를 들여다보면서 외쳤단다.
“야, 뜸부기 깃털이 있어!”
나도 스프러스 나무 위로 날아올랐지. 황금 단지에는 뚜껑은 없었는데, 깃털 하나가 단지 안을 빙빙 돌고 있었어. 단지는 온통 금빛으로 빛났고, 깃털 또한 황금색이었어. 움직이는 깃털 말고도 바닥에는 깃털이 더 있었는데 그 깃털은 모두 은빛이었단다.
“어떻게 잡지? 마치 나비처럼 팔랑거리며 돌고 있으니.”
티나가 침을 꿀꺽 삼키며 조심스럽게 말했지.
“그러게, 빙빙 도니까 잡기 힘들구나.”
두 손으로 살며시 잡아보려고 했으나 쉽지 않았단다. 손 사이로 빠져나간 깃털은 계속 빙빙 돌았어. 반짝반짝 빛나서 눈이 부시기도 했어. 손에 힘을 실을 수도 없었지. 그러면 바스러질 수가 있으니까, 나는 가만히 지켜보았단다.
“어머, 어떡해. 어떡하면 좋지.”
발을 동동 굴리는 티나를 보고 검지로 입을 가렸어.
황금 깃털은 어느 정도 돌다가 단지 아구리에서 잠깐 쉬는 순간을 발견했거든.
그때, 깃줄기 끝을 냉큼 잡아버렸단다.
“잡았다,”
“휴!”
황금 깃털은 약간 움찔하더니 내 엄지와 검지에 깃대가 잡혔지.
“이걸 어떻게 가져가지?”
걱정스러운 티나의 눈 사이가 찌푸려졌어.
“깃털 사이에 꽂아 가면 어떨까?”
티나가 손뼉을 치면서 기뻐했단다.
“길산, 넌 천재야!”
내가 날개를 펼치자, 티나가 도리질했어.
“아니, 내 날개에 꽂아. 파랑 구슬도 내가 가지고 있으니까, 자. 어서.”
티나의 날개 속 사이로 조심스럽게 깃털을 꽂자, 티나는 황금 퍼핀이 되었지. 눈이 부셨어.
“출발!”
내가 앞장섰단다.
한 번 지나왔던 길이니까 힘들지 않을 거로 생각했어. 그런데, 너무 낯설었지. 올 때와 완전히 딴판이었단다. 파랑 구슬을 찾아올 때처럼 긴장을 풀지 않으려고 눈을 부릅떴어. 조심조심 앞으로 나아갔어. 드디어 중간 지점인 편편한 곳에 닿았는데, 올 때처럼 작은 우물이 아니었지. 끝이 보이지 않는 넓고 푸른 호수가 펼쳐져 있었어. 물결은 잔잔하고 반짝반짝 빛났단다.
“우리가 건넜던 작은 우물이 넓은 호수가 되어버렸어.”
“끝이 보이지 않는구나, 빨리 건너야 해.”
티나가 조바심을 냈어.
“자, 날자.”
티나가 날아올랐어. 얼마쯤 갔을까?
“길산, 길산! 내 몸이 점점 무거워지고 있어. 더 이상 날 수가 없어.”
“주문을 외워!”
“세 이 두 르!”
“주문을 외우고 있는데도 가벼워졌다가 또 무거워져!”
“세 이 두 르!”
티나 곁에서 함께 주문을 외웠지만, 축 처져있는 날개가 너무 힘들어 보였단다.
“오, 저기 섬이 보여. 저기까지 힘내!”
“그래, 좀 쉬어 가야겠어.”
금모래가 쫙 깔린 섬 가운데 모자를 얹어놓은 것 같은 바위산이 있고, 야자나무가 빙 둘러싸고 있었어.
“아, 목말라.”
야자나무 아래 모래를 동그랗게 모아 티나를 쉬게 하고는 호수 쪽으로 갔어. 티나에게 목을 축이게 하려고 두 손으로 물을 뜨다가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단다. 동글동글한 마리모처럼 생긴 식물들이 어깨를 걸고 떠 있었는데, 초록색이 아니라 모두 빨간색이었어. 빨간 물빛을 보니 왠지 기분이 좋지 않았지. 뒷걸음치면서 돌아가려는데 빨갛고 동글동글한 마리모처럼 생긴 물체가 나를 덮쳤어. 빨강 실타래처럼 부드럽긴 했는데, 진흙처럼 끈적끈적한 것이 내 몸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단다. 나는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호수 속으로 빨려 들어갔어.
호수 안은 온통 빨갛고 동글동글한 마리모처럼 생긴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단다. 나는 이리저리 헤엄치면서 올라가려고 애를 썼으나 그럴수록 더 깊이 들어가고 있었어.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호수 속에서 한참을 헤맸지. 그러다가 오로라처럼 반짝거리는 날개를 가진 새를 보았어. 장미색 갈매기였단다.
“끼룩끼룩!”
흰 눈과 연분홍 얼음 속에 비친 것처럼 투명한 새가 노을 색 날개를 편 채로 서 있었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날개만 파닥이고 있었지. 그때, 장미색 갈매기가 한쪽 날개를 약간 움칠거리면서 말했단다.
“여긴 퍼핀이 오기에 너무 위험한 곳인데······.”
가만히 있으니까 빨강 마리모 같은 것들이 내 몸에서 떨어져 올라가 버리더라.
나는 지금 여행 중이며 그동안 퍼핀을 만나 친구가 되고, 트롤 브로와 여러 일이 있었지만, 그를 위해 황금 단지 안 뜸부기 깃털을 구해서 가는 중이라고 했지.
“결국 뜸부기 깃털은 욕심을 부린 죄를 다시 사해준다는 말이군.”
장미색 갈매기는 입맛을 다시며 말했어.
“그럼, 나에게도 뜸부기 깃가지 하나 주고 가렴.”
처음엔 호수 위에 떠 있는 동글동글한 마리모가 일곱 색깔이었다고 했어. 그런데, 장미색 갈매기가 무지갯빛 날개를 갖고 싶어 마리모가 가진 색으로 마구 칠을 했단다. 그랬더니, 마리모들은 모두 빨강으로 변해버렸고, 반짝이는 날개는 가졌지만, 날지 못하게 되었다고 했어.
“하지만, 뜸부기 깃털은 바스러지기 쉬워서······.”
“그래서 못 준다는 건가?”
“깃털은 친구가 가지고 있으니 내 마음대로 할 수도 없어.”
“그럼, 친구를 여기로 데리고 올까?”
“아니야, 깃털은 진흙처럼 끈적끈적한 물속에는 붙어버리지, 내가 올라가 이야기해 볼게.”
어쨌든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단다.
“분명 다시 돌아올 거지?”
“그건 힘들어, 가지고 온다고 해도 못쓰게 되면 소용이 없잖아, 네가 올라오든지.”
나는 어쩔 수 없이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할 수밖에 없었어. 마음이 무거웠지. 장미색 갈매기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부리로 올라가라는 시늉을 했어. 힘들게 호수 위에 올라와 털썩 주저앉았단다. 야자나무 아래에 있어야 할 티나가 보이지 않았지.
“티나, 티나!”
큰 소리를 불렀더니 티나가 손짓했어.
“왜 이렇게 늦었어?, 목이 말라 떨어진 야자열매 물을 먹었어.”
“후, 다행이다. 좀 어때?”
“괜찮아, 더 쉬면 좋겠는데······.”
“아니야, 티나! 여긴 위험한 곳이야, 빨리 가야 해.”
“무슨 일이 있었구나.”
“응, 호수는 빨간 마리모로 가득 찼고, 욕심 많은 장미색 갈매기가 뜸부기 깃털을 탐내고 있어.”
내가 호수 깊은 곳에 끌려간 이야기를 해주자, 티나가 주문을 외면서 날아올랐어. 그러자, 수천 개의 빨강 마리오들이 풍선처럼 떠서 우리를 따라오고 있었단다. 우리는 주문을 외면서 더 높이 날아올랐어.
“세 이 두 르, 세 이 두 르, 세 이 두 르!”
“툭, 툭, 툭, 툭!”
한참을 오르다가 내려다보니 빨강 마리오가 하나둘씩 호수 위로 떨어졌지. 날지 못하는 장미색 갈매기는 끼룩끼룩 황금 모래 위에서 울고 있었단다. 호수를 벗어나자마자, 화산이 폭발하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호수가 사라져 버렸어.
“휴, 다행이다.”
“이제, 다 왔어. 이곳만 오르면 비프로스트 다리 끝이야.”
다리는 팽팽해졌다가 느슨해졌다가 제멋대로였지만, 우렁찬 폭포 소리가 들리는 듯했어.
“폭포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얼추 다 왔나 보다.”
한 손과 한 발만 오르면 바로 다리 끝이었어. 이제 다리 끝에서 ‘폴’ 날아서 잔디가 있는 곳으로 닿기만 하면 되었지. 가슴이 불타는 듯 뜨거워지고, 해냈다는 생각에 티나를 부르는 순간이었어.
“악!”
티나가 다리 밑으로 떨어지고 있었어. 나는 얼른 한 손으로 티나를 잡고, 다른 손으로 비프로스트 다리 난간을 잡았단다. 다리가 출렁거렸어. 그때, 빨간 마리오들이 높은 사다리를 만들어 꼭대기에 분홍 갈매기를 태우고 나를 낚아채려고 했어. 이리저리 피하면서 이를 악물고 견뎠으나, 힘이 빠져 난간을 놓치려는 그 순간이었지. 티나가 휘파람을 부니까 어디서 나타났는지 플랑이 티나와 나를 안고 폭포 밖으로 밀어 올리고 있더라.
“세 이 두 르!”
“세 이 두 르!”
“세 이 두 르!”
티나가 쉬지 않고 주문을 외웠지. 분홍 갈매기가 폭포 속으로 쓰러져 들어가고, 하나, 둘씩 빨간 마리오들이 폭포의 물살 속으로 사라졌단다. 폭포는 쉬지 않고 빛나는 물보라를 피워내다가 잠깐 멈췄던 무지개다리도 함께 빠져버렸어. 순간 폭포가 멈추었고, 나는 잔디밭에‘퍽’하고 떨어져 버렸지.
티나를 풀밭으로 내려준 플랑이 또 숨비소리를 내었어. 그때처럼 플랑은 물에 젖은 머리를 손으로 빗어 올리며 말했단다.
“저는 깊은 바다로 떠납니다. 이제, 다시는 못 만날 수도 있어요. 안녕히!”
폭포 속으로 뛰어든 플랑의 꼬리가 마치 손을 흔드는 것처럼 보였지.
“플랑, 플랑, 플랑!”
나는 고맙다는 말 대신에 플랑의 이름을 부르고 또 불렀어. 흐린 하늘이었지만, 한 번도 보지 못한 오로라가 춤추는 것 같았단다.
9.거꾸로 핀 무지개
“괜찮아?”
걱정되어 티나에게 물었어.
“응, 뜸부기 깃털이 어떻게 됐는지 봐.”
티나가 날개를 좍 폈을 때, 누군가 다가왔어.
호드였어.
“어머나, 너무 멋져! 이런 날개는 처음 봐.”
깜짝 놀란 티나가 날개를 오므리며 노려보았단다.
“괜찮아, 호드야. 라바 필드 할머니 동네에 사는 친구야.”
“난 처음 보는데?”
티나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았지.
“네 아버지 묘석에 디기탈리스를 두고 가는 주인공이라면, 처음 본다고 하지 않겠지?”
“뭐라고? 네가 여우 장갑을 놓고 가는······.”
그제야 티나는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어.
“누군지 궁금했는데, 너였구나. 고마워!”
다정한 미소를 띤 티나가 호드에게 다시 물었어.
“그런데, 우리 아빠를 어떻게 알아?”
“한때는 나도 카트린 할머니 집에 자주 들렀지, 그때, 너희 아빠를 만났거든. 점잖고 무척 다정했단다.”
“그렇구나, 우리 지금 카트린 할머니 댁에 갈 건데 너도 갈래?”
그런데, 호드는 볼 일이 있다면서 손사래를 쳤어. 나는 아쉬워서 가는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단다.
“음, 저게 뭐지?”
호드 치마 단 아래에 꼬리 같은 것이 붙어 있었어. 걸을 때마다 언뜻언뜻 보이는 하얀 속치마에 꼬리가 질질 끌리는 것 같았지. 호드는 모르는 것 같아 안타까웠단다.
“호드!”
쫓아가면서 불렀어. 호드가 다른 사람에게도 아름답게 보였으면 하는 내 마음이 컸단다.
“호드, 치마 끝에 뭔가 묻어 있어.”
깜짝 놀란 호드가 재빨리 치마를 내리며 날 보고 웃었어.
“고마워, 길산!”
언제 어디로 사라졌는지 호드는 없었어.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티나에게 말하려다가 그만두었지.
“카트린 할머니!”
티나 엄마도 와있었어. 탁자 위에는 금테를 두른 책 한 권과 은저울이 놓여있었지. 하얀 레이스를 덮은 탁자 앞에 모두 둘러앉았단다. 할머니가 티나의 날개에서 조심스럽게 뽑은 깃털을 탁자 위에 놓으니 방 안이 환해졌어. 뜸부기 날개는 깃털 하나 다치지 않았단다. 나는 두 손을 모았어. 그때, 브로가 아기가 된 엄마를 안고 문 앞에 서 있었어.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던 브로가 오른손을 살짝 저울 위에 올렸지. 모두 숨을 죽이며 바라보았어. 저울 눈금이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듯하더니 영점에 딱 멈췄어. 그때, 뜸부기 깃털에서 여태 보지 못한 찬란한 빛줄기가 브로 가슴속으로 들어갔단다.
“휴!”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어.
“다행이구나. 그동안 좋은 일을 많이 한다는 소문이 뜬 것이 아니었네.”
브로가 일어서서 아기가 된 엄마를 안고 탁자 앞에 앉았어. 아기는 방글방글 웃고 있었지. 하고 싶은 말을 모두 웃음으로 보여주는 듯했어. 너무 귀여워 금발 머리를 살짝 만져보고 싶었지만, 꾹 참았지. 엄마를 안은 브로는 양심의 책장에 있는 글귀를 다시 읊었단다.
나는 물을 더럽히지 않겠습니다.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남의 물건을 훔치지 않겠습니다.
나는 헛된 장난을 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욕심을 부리지 않겠습니다.
욕심이라는 단어에 힘주어 읽는 브로를 보고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았어. 아기 브로 엄마의 눈이 반짝거리며 방실방실 웃었단다. 할머니가 아기의 포동포동한 손을 오른쪽 저울 위에 가만히 올렸어. 아기 손은 깃털보다 훨씬 가벼워 영점에도 미치지 못했어. 할머니는 뜸부기 깃축을 잡고 아기의 금발 머리 위에 서너 번 흔들었단다. 아기 얼굴이 점점 커지면서 팔과 다리가 자라더니 드디어 엄마의 모습으로 돌아왔어.
브로 엄마가 사방을 살피고 있을 때, 황금 깃털은 열려있는 문으로 날아가 버렸어.
나는 깃털을 따라 나갔단다. 사라져 버린 하늘 저편에 거꾸로 핀 무지개가 보였어. 라바 필드가 마치 천국처럼 느껴졌어. 너무 아름다웠지.
10.노랑 구슬의 비밀
“길산, 고마워요.”
브로 엄마가 날 꼭 껴안아 주었단다.
“할 말이 많은데 할 수가 없네요, 이 은혜는 꼭 갚을게요.”
브로 엄마는 할머니와 티나 엄마에게도 연신 고개를 굽히며 인사를 여러 번 했어.
브로의 손을 잡고 돌아가는 브로 엄마가 행복해 보였어.
브로가 나에게 말했지.
“안녕, 내일 놀러 갈게.”
티나도 손을 힘차게 흔들어주었어.
실컷 자고 일어난 아침은 몸도 마음도 가벼웠어. 해가 뜨지 않은 새벽에 일어나 절벽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지. 어제를 생각하니 행복해졌어.
아침 바다 갈매기는 금빛을 싣고
고기잡이 배들은 노래를 싣고
희망에 찬 아침바다 노 저어 가요
희망에 찬 아침바다 노 저어 가요
저녁 바다 갈매기는 행복을 싣고
고기잡이 배들은 고기를 싣고
넓고 넓은 바다를 노 저어 와요
넓고 넓은 바다를 노 저어 와요
여기서 있었던 일들이 물결 따라 나부끼고 있었어. 생각나는 대로 종이비행기에 접어 바다를 향해 날렸지.
파란 주전자
그림책
마법의 알사탕
무지개
퍼핀 티나
티나 맘
트롤 브로
카트린 할머니
인어 플랑
브로 엄마
호드
무지개다리
뜸부기 깃털
장미색 갈매기
점점 바다가 아침노을로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어.
“넓고 넓은 바다를 노 저어 와요.”
브로가 나에게 꽃을 내밀었어. 디기탈리스 여우 장갑이었지.
“너에게 줄 것이라곤 꽃밖에 없네.”
‘퉁’ 치면 소리가 날 것 같은 방울 모양의 꽃 한 다발이었어.
“호드가 좋아하는 꽃인데.”
“참, 호드가 너처럼 친절한 사람은 처음 봤다고 하더라.”
“친절하다고?”
내가 호드에게 그렇게 친절했나 잠깐 생각했어. 그런데, 브로가 귓속말로 말했어.
“사실, 호드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사람을 홀리는 훌드라야.”
“훌드라?”
“응, 숲 속에 사는 요괴야.”
“뭐라고?”
“치맛단에 붙은 소꼬리를 보면 다 도망가는데, 너는 그걸 보고도 친절하게 고운 말을 했다더군. 너무 부끄러워 뛰어가 버렸다고 하더라.”
“······.”
호드가 훌드라였다니 망치로 머리를 한 방 맞은 듯 얼얼해졌지. 그러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어.
“그래, 난 꿈속에서 또 꿈을 꾸고 있는 거야.”
중얼거리면서 브로를 보았더니, 브로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어.
“난 이제 떠날 거야.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무슨 말이든지.”
“쓸데없이 힘자랑하지 말고, 장난으로도 남을 괴롭히지 마!”
“알았어, 약속할게.”
브로는 새끼손가락을 내 새끼손가락에 걸더니 힘껏 당긴 후, 흔들었어.
“참, 길산! 잊어버린 것 있지?”
“뭔데?”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법 가르쳐줘야지.”
“하하하! 그것이 궁금했구나.”
“응.”
“첫째, 문을 연다. 둘째, 냉장고에 넣는다. 그리고, 문을 닫는다. 끝!”
“하하하, 하하하!”
바다에서 아침 해가 떠오르자, 브로는 크게 웃으며 손사래 쳤어.
돌아가는 브로 등 뒤에 대고 소리쳤어.
“브로야, 안녕!”
“안녕, 길산!”
그때, 티나가 웃으며 다가왔어.
투명한 주머니를 내밀며 말했지.
“그동안 즐거웠어. 선물이야.”
“선물?”
노랑 구슬이었어.
“네가 노랑 구슬을 어떻게······?”
“사실은 파랑 구슬을 가져올 때, 살짝 가져온 거야.”
“뭐라고? 이건 반칙이잖아.”
“이게 나의 큰 그림이었다고.”
“큰 그림이라니?”
티나는 재촉하듯 말을 이었어.
“벌써 일주일이 다 되었어, 시간 안에 널 보내줘야지.”
활짝 웃던 티나가 내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단다.
나는 노랑 구슬을 만지며 엉겁결에 말했지.
“세 이 두 르.”
“세 이 두 르.”
“세 이 두 르.”
분명 날고 있었는데, 내가 교수실 창밖을 보고 있더라고.
“교수님, 공항에서 짐을 가져가라는 연락을 받고 찾아왔어요.”
조교 선생님이 여행 가방을 가지고 왔어.
“가방이 두 개인데 하나만 들고 오면 어떡합니까? 교수님도, 참.”
“그러게, 꿈을 꾼 것 같기도 하고······.”
상상에서 깨어난 나는 조교 선생님을 보고 어깨를 들썩 들어 올렸지.
외삼촌은 해윤의 손바닥에 노랑 구슬을 올려주었다.
“아, 마법의 노랑 사탕?”
“먹어 봐, 혹시 아니? 너도 날 수 있을지······.”
해윤은 사탕을 까서 입에 넣었다. 매끄럽고 달콤하면서도 고소했다.
잠깐 구름 위를 지나는 하늘길에 퍼핀이 되어 날아오르는 상상을 해봤다.
‘세이두르!’하면 해윤도 날아오를 것 같았다.
웃음이 자꾸 나왔다.
“외삼촌, 저도 마법에 걸린 것 같은데요.”
“하하하! 어쩜, 사는 게 마법인지도 모르지.”
외삼촌의 목울대가 갑자기 멋져 보였다.
“창밖에 핀 배롱나무가 예쁘구나. 이제 아름다운 것을 보면 일단 멈춰. 그리고, 가만히 바라본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