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박사학위
논문 심사가 시작되었다.
“논문이 통과되더라도 나중에 문제가 발견되면 학위가 취소될 수 있습니다.”
심사위원장이 엄포를 놓는다. 떨리긴 했지만 후배들 앞에서 떠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 질문에 대답도 잘해야 했다. 한 번 꼬이면 당황하여 쩔쩔매는 선배들을 여럿 봤다. 신 교수님의 날카로운 질문은 공격적인 답변으로 해결할 수 있다. 늘 나를 지원해 주시는 박 교수님이 문제다. 전공이 달라서 어떤 질문을 하실지 모른다. 가끔 엉뚱한 질문을 하시는데 그럴 때 제일 난감해진다. 다행히 지도교수님이 엉뚱한 대답을 재미있게 해 주셔서 무사히 넘어갔다. 외부 심사위원으로 한 교수님이 오셨는데, 내내 말이 없으시다가, 심사가 끝 날 무렵에 한마디 하셨다.
“논문 아이디어도 좋고, 크게 지적할 게 없어요.”
자잘하게 고칠 것은 논문에 메모해 뒀으니 나중에 참고하라고 심사 논문을 건네주셨다. 지도 교수님이 흡족하신 듯 미소 지으셨다.
“그래도 심사 3번은 해야죠?”
지도교수님은 심사를 많이 하는 것을 좋아하셨다. 심사보다는 끝나고 다 같이 모여 한잔하는 자리를 더 좋아하셨기 때문이다.
최종심이 끝나고 회식자리가 이어졌다. 회식자리에는 다른 전공 박사학위 예정자와 그 심사위원들도 다 같이 합류한다. 큰 방에는 이미 상차림이 되어있었다. 학과 교수님들과 외부 심사위원들 포함하여 20명 가까이 되었다. 교수님들께 한잔씩 드리고 받으면 20잔은 마셔야 한다. 술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박 교수님께서는 오늘도 6년 전의 편지 얘기를 감격스럽게 꺼내셨다.
“내가 말이야~ 이 학교 부임 이후에 편지를 받은 것은 이 박사가 처음이야.”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때 선생님께 보내드린 편지가 나를 살렸고, 박 교수님의 응원 덕분에 지금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이 박사, 논문 쓰느라고 고생했어.”
눈물이 난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이 자리에서 다 해봐.”
“진짜 다 해도 됩니까?”
“그럼~”
순간 지도교수님과의 서운했던 수많은 일들이 머리를 스치며 지나갔다.
“지도교수면 다야? 안 교수, 너 그러면 안 되지. 제자를 부려 먹기만 하고...”
어떻게 집에 왔는지 모른다. 다음 날 오후에 가까스로 정신이 들었다. 후배가 업어 데려다주었다 했다. 잠자면서도 계속 토해 이불을 다 벼렸다고, 아내가 괜찮으냐고 걱정을 했다.
아이고 머리야.
어제 내가 뭔 일을 벌인 거지?
머리가 쭈뼛 섰다. 큰일 났다. 어제 술 취해서 뭐라고 소리를 질렀는데. 아니겠지. 설마 아니겠지.
아, 이런, 박사학위 받기도 전에 취소되게 생겼다.
망했다.
안 교수님께 달려가서 무릎 꿇고 잘못했다고 빌었다.
“뭔 일이냐? 뭔 일 있었니?”
깜짝 놀라 부스스한 눈으로 곰곰 생각하시던 교수님이 어디론가 계속 전화를 하셨다.
“걱정 마라. 한 분은 아직 못 일어났고, 두 분은 술병이 나서 병원에 가셨다 하고 그리고...”
다들 취해서 기억이 없다고 하셨다. 천만 만만의 다행이다. 박사학위 받기도 전에 학위가 취소될 뻔했다. 술을 달고 사시던 우리의 할아버지께서 나를 도와주셨나 보다.
수호천사님 감사합니다. 앞으로 자중할게요!
2) 술생각 수제자의 교수되기
4월 한식날 공주에서 20대조 할아버지의 시제가 있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전설처럼 늘 이야기해 주셨던, 대제학을 역임하신 그 할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매년 열리는 시제였다. 박사학위 받은 사람은 종중 행사에 참석하여 신고식을 해야 했다. 그런데 지도교수님께서 종중 행사에 같이 참석하고 싶다고 하셨다.
박사학위 가운을 입고 사회자의 지시에 따라 엄숙하게 제를 지냈다. 지도교수님도 열심히 다른 사람들을 따라 머리를 조아리고 무릎 꿇고 절을 드렸으며 음복도 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마이크를 잡으신 지도교수님이 종중 행사에 대한 감회를 말씀하셨다.
"제자가 많이 있지만, 여기 이 박사가 제 수제자입니다. 참 고생을 많이 시켰는데... 대제학 할아버지를 따라 큰 인물이 될 겁니다."
수제자란 말에 아버지가 감동하셨다.
종중 큰 어른께서는, 지금까지 종중 행사에 박사 지도교수님이 참석한 전례가 없다 하시며, 매우 특별하게 대우하셨다. 재실 집 안방에서 큰 절로 인사를 나누셨고, 술상을 봐주시고, 교통비도 두둑하게 챙겨 주셨다. 신이 나셨는지 지도교수님이 말씀하셨다.
“나 잘했지? 서울 가서 한잔해야지?”
선생님은 오늘도 또 술 생각에 빠지셨다. 이제부터 지도교수님을 ‘술생각’이라고 불러야겠다.
나는 이제부터 술생각 선생님의 수제자다.
10월이 되니 신문에 교수 초빙 공고가 뜨기 시작했다. 지도교수님과 상의한 후 충북대학교에 지원했다. 영원한 나의 응원자이신 박 교수님이 부르시더니 확실하게 힘써 주시겠다고 하셨다. 그런데 한 선배가 자신도 충북대에 지원할 거라며, 지도교수가 같은 두 사람이 동시에 지원하면 둘 다 불리하니, 나보고 양보하라고 부탁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지도교수님께서는 마음 약해지지 말고 절대 양보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얼마 후 그 선배가 달려와 또 부탁을 했다. 난감했다. 난 양보 못 하겠다고 몇 번 말했지만 마음이 자꾸 무거워졌다. 보다 못한 선생님께서 선배한테 다른 제안을 했다.
“너는 군산대에 지원해라. 거긴 내가 도와줄 수 있다.”
아무리 설득해도 그 선배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나도 작은 도시에 있는 그 대학에는 마음이 당기지 않았다.
“그럼, 우편으로 접수한 내 서류는 선배님이 받아오세요.”
선배한테 내 주민등록증을 내어 주었다. 눈물을 머금고 충북대는 철회하기로 했다. 지도교수님이 나를 측은하게 바라보셨다.
춥다. 집으로 달려가 보자.
집에 가면 둘째 아이를 품에 안은 아내가 반갑게 맞아 줄 거고, 계단 발걸음 소리를 듣고 큰아이가 뛰어나와 품에 안길 거다.
며칠 지나니 교수 초빙 공고가 많이 보였다. 아무도 모르게 공주대와 경북산업대에 지원했다. 서류전형에 합격하고 면접을 기다리던 어느 날 지도교수님이 급하게 부르셨다. 작년에 박사 학위를 받은 부산에 있는 선배가 올라와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술생각 교수님은 오늘도 술잔을 기울이고 계셨다. 선배가 손으로 대충 오려낸 종이쪽지를 내밀었다. 부산일보에 늦게 난 OO대 교수 초빙 공고였다.
경북산업대에 면접을 보러 갔는데 반가운 얼굴을 보았다. 서울에 있는 모 대학에 면접을 보러 갔을 때 만났던 사람이었다. 공주대 역시 최종 면접에서 탈락했다. 면접에서 계속 떨어지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부산에 있는 OO대에서 최종 면접대상자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이 왔다. 총장님이 이것저것 물어보더니 학교 자랑을 하셨다.
“이 학교는 훌륭한 교수님들도 많으시고... ”
느낌이 좋았다. 면접을 끝내고 나오는데 문 앞에서 누군가 모르는 사람이 내게 인사를 건넸다. 총장 비서실장이었는데, 내가 졸업한 대학의 동문 선배라고 했다. 총장 면접은 각 학과 교수 후보 중 1순위 자를 먼저 면접을 보고, 마땅치 않으면 2순위 자 면접이 진행된다고 알려 줬다. 음~ 내가 1순위였어? 모처럼 일이 딱딱 맞아떨어진다. 기분이 너무 좋았다.
면접 후 학과를 둘러볼 겸 공대로 걸어 올라가는데 앞서가는 사람이 왠지 눈에 익었다. 아는 사람인가? 아는 친구였다. 서울대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했고, 석사장교 시절에 같이 군 복무를 했던 친구였다. 그 친구도 면접을 보고 학과 교수님들께 인사를 하러 가는 길이었다. 나는 그 친구와 입사 동기가 되었다.
세상 참 좁다.
우리는 언젠가 다시 만나야 하는 사람들이다. 만날 일이 없었을 것 같았던 군대 동기가, 나와 함께 30년도 더 넘게 근무할, 같은 대학의 동료 교수가 되었다. 전공이 같아 대학 면접 대기실에서 우연히 몇 번을 더 만난 경쟁자들도 있었다. 내게 양보해 달라고 요구했던 그 선배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 또다시 마주칠지 모른다.
때로는 힘들고 마음이 아프더라도 서로 양보하고 이해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어느 날 그 사람의 등진 뒷모습을 보고, 후회의 눈물을 흘릴지도 모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