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막내 입양
드디어 내게도 제자가 생겼다.
1993년쯤으로 기억된다. 어느 날 갑자기 한 제자가 사고를 당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들렸다.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한 학생이었는데, 학비를 마련한다고 새벽부터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다가 졸지에 교통사고를 당했다. 강의를 마치고 몇 학생들과 병원 장례식장으로 달려갔다. 썰렁한 영안실에 갓난아기를 안고 흐느끼는 앳된 여자가 보였다. 제자의 부인이었다. 다른 가족은 보이지 않았다.
한 달쯤 지난 후에 한 학생을 불렀다.
“아이 엄마가 어려서 아이 키우기 힘이 들 거야. 혹시, 재혼할지도 모르고... 그 아이 내가 키우고 싶다.”
아이 엄마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한 달 정도 여유를 갖고 생각해보고 답을 달라고 부탁했다.
“자기야, 우리 작은아이와 나이 차이도 적당하고, 큰아이도 여동생이 생겼다고 좋아할 거야. 우리도 딸이 있으면 참 좋겠다.”
아내는 처음엔 많이 고민하고 머뭇거렸지만, 무거운 마음으로 우리 막내딸로 받아들이기로, 큰 결심을 했다.
내가 대학생 시절에 우리 부모님도 똑같은 생각을 하셨다. 어머니는 아들만 둘인 우리 집에 딸이 하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셨다. 외할머니댁 근처에는 자녀 5명을 둔 가난한 이웃이 있었다. 그 집에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안일을 도와주는 여자아이가 있었는데 웃는 모습이 예뻤다. 어머니가 그 부부에게 딸을 키워주겠다고 제안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교육을 시켜주고, 시집을 보내는 것까지 책임지기로 했다.
그 아이는 내 막내 동생이 되었다.
어머니는 막내가 친엄마를 찾아갈 것을 걱정하셨다. 몇 달만 참으면 중학교에 진학할 거고 그러면 친엄마 생각이 덜 나겠지. 그때까지는 절대 용돈을 주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셨다. 막내에게 필요한 것이 있으면 직접 사주셨다. 어머니를 졸졸 따라다니는 막내는 어머니가 퇴근하기만을 기다렸다. 집에 혼자 있을 때가 많았다. 안방에서 슬픈 라디오 소리가 들린다. 막내가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어느 날 아침 그날도 막내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오빠, 토큰 하나만 줘.”
오늘도 친엄마가 보고 싶은가 보다.
“한 개만 있으면 안 되잖아.”
막내가 친엄마한테 갈지도 모른다고 눈치챘지만 너무 애처로워 보여서 꼭 다시 돌아오라고 토큰 두 개를 쥐어주었다. 막내는 밤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어머니가 안절부절못하고 계신다.
“어디 간 거라니? 얘가 길을 잃었으면 어쩌니?”
토큰을 준 얘기를 했더니, 화를 버럭 내시면서 막내가 살던 집으로 달려가셨다. 불빛이 새어 나오는 저 집에 막내가 있을까? 발걸음 소리를 죽이며 다가갔다. 도란도란 거리는 말소리와 가끔 깔깔 웃는 소리도 들려왔다. 거기에 막내의 예쁜 웃음소리도 있었다.
“그냥, 가자.”
어머니의 말에 기운이 없으셨다. 다음 날 그 집을 다시 찾아가신 어머니는 막내를 찾지 말아 달라는 친엄마의 애절한 마음을 듣고 힘없이 돌아오셨다.
불운한 제자가 세상을 작별한 지 몇 개월 후 갓난아기 엄마에게 입양 의사를 전했던, 그 학생이 찾아왔다. 아이 엄마는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결심을 굳혔다고 했다. 입양을 보내면 아이 아빠가 불쌍하다고, 아빠를 생각해서 힘이 들더라도 스스로의 힘으로 딸을 씩씩하게 잘 키우겠다고 했다. 작은아이를 안고 있던 아내가 낮은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
“자기는 엄마의 마음을 너무 몰라.”
나는 입양을 너무 쉽게 생각했다. 상을 당해 경황이 없을 어린아이 엄마한테 재혼을 얘기하고 아이를 달라고 했다니, 지금 생각하면 너무 많이 부끄럽다. 아내의 말대로 나는 엄마의 마음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내 막내 여동생! 가난해도 엄마는 아이와 있어야 행복하다. 학교를 못 가는 아이도 엄마와 있어야 행복하다. 우리 막내딸이었을 그 아이! 그 아이도 엄마 옆에서 행복하겠지. 그 아이를 안고 있는 엄마도 행복하겠지. 가족의 인연으로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내 마음 깊은 곳에 남아있다.
2) 자동차 사고와 세 번째 후회
여름 방학에 포항에서 학교 연수회가 있었다.
오랜만에 동기 교수와 함께 시원한 바닷가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시골길 정류장에서 한 할머니가 태워달라고 손짓을 하신다. 비를 맞고 계신 게 안쓰러워 뒷좌석에 태워 드렸다. 굽은 길을 달릴 때 오른쪽으로 약간 미끄러져 두 바퀴가 정비되지 않은 갓길에 놓인 상태로 달려야 했다. 갓길이 많이 파여 차를 도로에 올리기가 쉽지 않았다. 액셀을 세게 밟으며 핸들을 좌측으로 돌렸다. 그런데 아뿔싸! 차는 도로에 올라왔는데, 중심을 잃고 기우뚱거리며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핸들을 돌려 봐도, 브레이크를 밟아 봐도 소용없다. 순식간에 중앙선 넘어 산언덕에 쾅하고 부딪혔다. 다시 쿵하고 갓길 배수로에 처박혔다. 속도를 줄여야 했는데 실수였다. 이미 늦었다.
유리가 사방으로 갈라져 가는 모습이 슬로 모션처럼 선명하게 보인다.
지난 세월의 기억들이 수십 장의 사진이 되어 하나씩 스쳐간다.
우리 아이들의 모습이 연달아 비껴간다.
아, 이렇게 죽는 거구나.
정신을 차려보니 엔진 보닛에서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다행히도 동기 교수와 할머니도 크게 다친 모습은 아니다. 할머니는 자신 때문에 사고 난 것 같다고 미안해하셨다. 태워줘서 고맙다고 아무 이상 없으니 그냥 가라고 하셨다. 할머니를 억지로 모시고 택시를 타고 울산 강동병원으로 갔다. 할머니 이마에 든 멍이 미심쩍어 시티 촬영도 했지만, 이상이 없다는 의사의 말에 안심이 되었다. 얼마 후 할머니의 아들이 뛰어왔다. 빗길에 할머니를 태워줘서 고맙다고, 어디 아픈 데는 없냐고, 나를 걱정해 주었다.
참 착한 아들이다.
다음 날, 할머니의 아들한테서 전화가 왔다.
지금은 괜찮지만 후유증이 있을지 모른다고, 그러니 보약 값을 달라고 했다. 보약 값 드릴 테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경찰서에 가서 정식 사고 접수를 하고, 경찰과 함께 현장조사도 받아야 하고, 보험처리도 해야 하고, 전복된 차를 폐차 처리도 해야 했다.
그다음 날 그 아들한테서 또 전화가 왔다.
짜증 난 투로 보약 값 언제 줄 거냐고, 주기는 확실히 줄 거냐고 큰 소리를 냈다. 당시 기본 보약 값은 15만 원 정도였다. 좀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고맙다고 인사할 때는 언제고 보약 값 빨리 달라고 보채는 게 너무 싫었다. 하는 수 없이 부산에서 택시를 타고 울산으로 달려가 그 아들을 만났다.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이거 5만 원인데요. 할머니 맛난 거 사드리세요.”
“아니, 이걸로?”
어이가 없다는 듯이 나를 노려봤다. 실망이다. 설마 했는데. 그런 사람이었군. 다시 봉투 하나를 더 내밀었다.
“이 거로는 할머니 보약 사드리세요.”
두 개의 돈 봉투를 받은 아들이 만족한 듯 웃음 지었다.
경찰서를 찾아갔다. 교통과에 있는 나이 어린 경찰의 태도가 너무 고압적이다.
육하원칙 몰라요?
거기가 어디냐고? 할머니는 왜 태웠냐고?
그래서 몇 킬로로 달렸는데?
반말로 큰소리치는 것은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내가 사고를 냈으니 경찰이 윽박질러도 할 말이 없었다. 중죄인 취급당하며 한참 동안을 쩔쩔 매야했다.
몇 달 후에 학교 직원이 연구실로 큰일 났다며 서류를 들고 뛰어왔다. 법원에서 온 공무원 범죄 처벌규정에 의한 통보였다. 교육공무원이 사건에 휘말리면 그 결과를 기관장인 총장한테 통보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할머니가 다치지는 않았지만, 인사사고로 접수되어, 약식 재판에 회부된 결과였다.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이제는 모르는 사람은 절대 태워주지 않을 거다.
어느 날 차를 몰고 약속 장소로 가는 중이었다. 학교를 빠져나가 얼마 가지 않았는데, 누군가 도로에 뛰어나와 차를 세워달라는 손짓을 했다. 얼 핏 보니 배를 움켜쥐고 피를 흘리고 있었다. 순간 당황을 했다.
'어쩌지? 병원에 데리고 가야 하나? 아냐, 곧 구급차가 오겠지.'
비 맞고 계신 할머니를 태우고 가다 낸 교통사고와 보약 값을 요구하던 그 할머니 아들이 생각나고, 경찰서에서 죄인처럼 조사받던 생각이 악몽처럼 떠올랐다. 나는 차를 세우지 않고 그 앞을 그냥 지나쳤다.
아! 위험에 빠진 사람을 모른 척하다니.
살면서 세 번째 후회되는 날이었다.
민주화운동 당시 내 양심과 의지를 스스로 져버렸고, 군 복무 시절에도 잠시의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내 자유의지를 지켜내지 못했었다. 그런 일이 다시는 없기를 바랐는데 오늘도 후회하고 있다. 학생들에게 행동하는 지성을 말하고, 양심을 따라 행동해야 한다고 강조했는데, 나는 그 소중한 약속을 지켜내지 못하고, 때 늦은 자책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