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화-본론 1. 정(情)의 개념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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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라는 감정은 어디서 시작되는 것일까?
우리는 왜 어떤 사람에게는 쉽게 마음이 가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깊은 정을 느끼지 못할까?
정(情)은 인간 관계 안에서 스며들듯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감정이다.
그것은 하루아침에 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보낸 시간, 공유한 경험, 그리고 서로에 대한 신뢰가 축적되면서 서서히 자리 잡는다.
정은 누군가를 특별히 사랑하거나 좋아해서 생기는 것도 아니고, 특정한 사건이 있어서 생기는 것도 아니다.
때로는 무심한 듯 흘러가는 시간들 속에, 아무렇지 않게 주고받은 말들 속에,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 채 쌓여가기도 한다.
정은 한 사람을 단순히 좋아하는 마음을 넘어서, 그 사람의 존재 자체를 소중히 여기게 만드는 감정이다.
그 사람의 약점이나 실수를 알면서도 미워할 수 없는 마음, 때로는 이유 없이 그 사람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
이 모든 것들이 정이라는 이름 아래 한데 엮인다.
특징적인 것은, 정이 항상 긍정적인 감정만을 포함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정 속에는 때로는 서운함과 아쉬움, 슬픔과 원망도 함께 자리 잡는다.
하지만 그러한 감정들조차 관계를 끊는 이유가 되지 않고, 오히려 관계를 더 깊게 만든다.
이것이 바로 정의 복합성과, 그 특별함이다.
정은 자연의 이치와도 닮아 있다.
꽃이 피기 위해서는 단순히 햇빛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바람과 비, 뜨거운 햇살과 차가운 바람을 모두 견디면서, 꽃은 더욱 단단해진다.
정 또한 기쁨만으로 쌓이는 것이 아니다.
다툼과 오해, 용서와 기다림을 함께 겪으면서 진짜 정은 깊어진다.
정은 또한, 일방적이지 않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한쪽이 먼저 마음을 내어주고 기다려야 할 때도 있다.
하지만 진짜 정은 결국 서로가 조금씩 다가서고, 서로를 받아들이면서 완성된다.
그 과정은 서두를 수도, 강요할 수도 없다.
정은 강제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다림 속에서 자연스럽게 자라나는 것이다.
또한 정은,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감정이다.
서로에게 이득이 있어서 가까워진 사이는, 이해관계가 끝나면 멀어질 수 있다.
하지만 정은 그런 이해타산을 뛰어넘는다.
손해를 보더라도, 불편함을 감수하더라도, 마음이 끌리고 신경이 쓰이는 것,
그것이 바로 정이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정은 인간 관계를 단순한 계약 이상의 것으로 만든다.
정이 있는 관계는, 법이나 계약서 없이도 지속된다.
그 안에는 신뢰와 관용, 서로에 대한 깊은 이해가 녹아 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특히 ‘정’을 매우 중요한 관계의 기초로 여겨왔다.
가족 관계는 물론, 이웃, 직장 동료, 심지어는 오랜 단골손님과 가게 주인 사이에도 정이 스며든다.
한 동네에서 오래 산 사람들은 서로에 대한 특별한 애착을 갖는다.
같은 공간과 시간을 공유했다는 이유만으로도,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자라난다.
이처럼 정은 인간 관계의 ‘시간’과 ‘공간’을 필요로 한다.
급하게 맺은 관계에서는 정이 쉽게 생기지 않는다.
빠른 속도로 변하는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이 종종 ‘공허함’을 느끼는 이유도,
진정한 정을 나눌 수 있는 관계를 맺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정은 또한, 사소한 일상 속에서 가장 강하게 자라난다.
거창한 선물이나 큰 사건보다, 매일 마주치는 눈빛, 아무 말 없이 건네는 따뜻한 음료,
아플 때 조용히 건네는 약 한 봉지 같은 작은 행동들이 정을 키운다.
우리는 삶의 끝자락에서조차,
누가 나에게 어떤 물질을 주었는지보다,
누가 나와 함께 시간을 나누었고,
누가 내 작은 기쁨과 슬픔을 기억해주었는지를 더 오래 기억한다.
그것이 바로, 정이 인간의 마음에 남기는 깊은 흔적이다.
정은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갈망 — ‘연결되고 싶다’는 마음 — 에 응답하는 감정이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 상처를 입고도 다시 사람을 믿고, 다시 마음을 열게 된다.
정이 없었다면, 인간 관계는 훨씬 더 메마르고 차가운 것이 되었을 것이다.
정은 말하자면, 인간 관계 속에서 자라는 ‘마음의 숲’과도 같다.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그 숲 속 어딘가에서 우리는 여전히 서로를 향해 손을 뻗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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