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화-“본론 2: 정과 감정(emotion)의 차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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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살아가면서 수많은 감정을 경험한다.
기쁨, 슬픔, 분노, 사랑, 기대, 두려움.
이 모든 감정은 특정한 사건이나 상황에 대한 반응으로 생겨난다.
감정은 찰나의 순간에 타오르고, 때로는 빠르게 사라진다.
하지만 ’정(情)’은 다르다.
정은 순간의 반응이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 차곡차곡 쌓이는 감정이다.
그렇기에 정은 감정과 구분되는 독특한 성질을 지닌다.
감정은 본능적이다.
불현듯 다가온 기쁨, 예기치 않은 상실 앞에서 터져 나오는 슬픔, 모욕을 당했을 때 솟구치는 분노.
이러한 감정들은 우리 의지와 무관하게 순간적으로 발생한다.
감정은 강렬하지만, 대부분 짧다.
하루에도 몇 번씩 오르락내리락하는 감정의 파도 속에서 우리는 살아간다.
반면 정은, 그렇게 쉽게 생기지 않는다.
정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어진다.
함께한 시간, 쌓아온 신뢰, 공유한 기억들이 엮이고 엮여야 비로소 ‘정’이라는 이름 아래 자리 잡는다.
감정이 ‘순간의 불꽃’이라면, 정은 ‘오래 피워낸 불씨’다.
또한 감정은 개인적이다.
내가 어떤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감정이 결정된다.
하지만 정은 철저히 ‘관계적’이다.
정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만 형성된다.
내가 혼자서 느끼는 기쁨이나 슬픔은 감정일 수 있지만, 정은 반드시 ‘누군가’와 함께한 시간의 결과다.
감정은 자주 변한다.
오늘은 누군가를 좋아하다가도, 내일은 서운함에 마음이 멀어질 수 있다.
반면 정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서운함을 느껴도, 갈등이 생겨도, 정이 깊은 관계에서는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갈등 속에서도 상대를 이해하고 품으려는 마음이 생겨난다.
정은 감정의 총합이 아니다.
감정이란 작은 조각들이 모여 자연스럽게 정을 형성하는 듯 보이지만,
단순히 많은 감정을 주고받았다고 해서 정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정은 감정을 넘어선 ‘관계의 역사’를 필요로 한다.
예를 들어보자.
어린 시절 친구와의 관계를 생각해보자.
어릴 때는 사소한 다툼에도 절교를 선언하고 며칠 동안 말을 하지 않을 정도로 감정적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다툼과 화해를 반복하며, 서로의 부족함을 이해하게 된다.
그때쯤 우리는 알게 된다.
“그래도 저 친구가 내 곁에 있었지.”
이렇게 쌓인 감정은 더 이상 순간의 기쁨이나 분노가 아니다.
그것은 깊은 정이 된다.
정과 감정의 또 다른 차이는 ‘의지’의 개입 여부다.
감정은 의지를 통제하기 어렵다.
어떤 상황에서 울컥 올라오는 감정은 막을 수 없다.
하지만 정은 때로는 의지적이다.
서로 멀어질 수 있는 순간에도, 관계를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게 만든다.
갈등을 넘어 다시 손을 내밀게 하는 힘, 이해하려고 애쓰게 하는 마음.
이것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정이 주는 힘이다.
정은 또한 복합적이다.
좋아하는 마음만으로는 정을 설명할 수 없다.
정 속에는 사랑과 미움, 기쁨과 슬픔, 만족과 아쉬움이 모두 섞여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감정이 모여도, 정은 여전히 이어진다.
이 복합성과 견고함이 정을 감정과 구별짓는다.
심리학에서도 감정과 정을 다르게 본다.
감정은 자극에 대한 즉각적 반응이며, 주로 신경계 차원에서 설명된다.
하지만 정은 기억, 경험, 관계의 지속이라는 복합적인 심리적 과정을 필요로 한다.
정은 한 개인의 심리적 특성뿐 아니라, 사회적 상호작용의 산물이다.
예를 들어, 가족 간의 정은 혈연이라는 자연적 유대에서 출발하지만,
그 유대를 실제로 깊게 만드는 것은 함께한 시간과 상호작용이다.
부모와 자녀가 오랜 시간 동안 사랑하고 다투고, 용서하고, 이해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정은 단단해진다.
마찬가지로, 이웃과의 정도 단순히 ‘옆집 사람’이라는 이유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오랜 시간 동안 마주치고, 인사를 건네고, 서로의 일상을 조금씩 공유하면서 서서히 스며든다.
정은 이처럼 감정보다 훨씬 더 크고 복잡한 존재다.
감정은 ‘순간’을 다루지만, 정은 ‘시간’을 다룬다.
감정은 나를 중심으로 발생하지만, 정은 ‘나’와 ‘너’ 사이에 놓인 다리를 다룬다.
감정은 타오르고 사그라지지만, 정은 속삭이듯 오래도록 남는다.
결국, 정은 인간 존재의 깊이를 증명하는 감정이다.
우리가 단순한 본능적 존재가 아니라, 시간을 견디고 관계를 지속할 수 있는 존재임을 보여주는 표지다.
감정이 삶을 생동감 있게 만든다면,
정은 삶을 단단하고 깊게 만든다.
그리고 우리는 알고 있다.
정이 없으면, 삶은 결국 텅 빈 외침에 불과할 것이라는 것을.
다음 예고
본론 3. 정이 인간 관계에 미치는 영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