겹겹의 시간 위에, 나는 서 있다
어쩌면 삶은 종이처럼 얇은 것인지도 모른다.
한 장을 넘기면 또 한 장이 나오고,
그 위에 또 다른 하루가 얹힌다.
보이지 않게 쌓이지만,
분명히 무게를 가진 채로.
푸른 산이 겹겹이 포개진 풍경을 바라보며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저 산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았겠지.
바람이 지나가고,
비가 스며들고,
빛이 머물다 간 시간들이
조용히 쌓여 지금의 결을 이루었을 것이다.
우리의 하루도 그렇지 않을까.
대단하지 않아도,
누군가 알아주지 않아도,
견디고 건너온 날들이 모여
어느새 한 사람의 풍경이 된다.
푸른 결 위로 하얀 꽃이 피어 있다.
조용하고, 담담하게.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겠다는 듯이.
나는 한동안 그 꽃을 바라보았다.
왜 이렇게 마음이 놓이는 걸까.
아마도 그 꽃이
서두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봄이 오기 전까지는 피지 않고,
피어야 할 때가 되면
망설임 없이 제 빛을 드러낸다.
우리는 자주 조급해진다
남보다 늦을까 봐,
남보다 작아 보일까 봐.
그래서 아직 피지 않은 자신을
스스로 꺾어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저 꽃은 말한다.
피는 시기가 다를 뿐,
늦은 것은 아니라고.
산 아래로 흐르는 푸른 물결은
굽이치며 흘러간다.
똑바로 가지 않아도,
속도가 빠르지 않아도,
자기만의 길을 만들어낸다.
나는 그 흐름이 부러웠다.
목적을 몰라도 괜찮고,
잠시 멈춰도 괜찮은 삶.
우리는 언제부터 이렇게
계속 달려야만 안심이 되었을까.
어쩌면 우리는
정상에 오르는 법은 배웠지만,
자기 자리에서 피어나는 법은 배우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하얀 꽃은 푸른 배경 덕분에 더 또렷하다.
빛은 어둠이 있어야 드러난다는 말처럼.
상처가 있었기에 단단해졌고,
눈물이 있었기에 부드러워졌다.
돌이켜보면 지워버리고 싶었던 날들이
지금의 나를 받쳐주는 층이 되었다.
무너졌다고 생각했던 순간들이
오히려 나를 더 깊게 만들었다.
겹겹이 쌓인 시간은
흉터가 아니라 결이 된다.
종이처럼 얇아 보이는 꽃잎이
쉽게 찢기지 않는 이유는
그 안에 지나온 계절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나 또한 그렇지 않을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아 보여도,
속에는 수많은 계절이 스며 있다.
누구도 몰랐던 눈물,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고민,
조용히 버텨낸 밤들.
그 모든 시간이 지금의 나를 만든다.
그래서 나는 오늘,
조금 느리게 서 보기로 한다.
남의 산을 바라보며 비교하지 않고,
남의 꽃을 보며 초조해하지 않고,
내가 선 자리에서
작게라도 피어보기로.
푸른 산은 여전히 겹을 더하고,
하얀 꽃은 다시 피어난다.
계절은 돌아오고,
시간은 멈추지 않지만,
그 안에서 우리는
각자의 속도로 자란다.
이 풍경은 말없이 속삭인다.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다고.
지금 이 자리에서도 충분하다고.
이미 당신은,
겹겹의 시간을 견뎌낸 하나의 산이라고.
그리고 그 위에,
조용히 피어 있는 한 송이 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