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지 않은 우리를 위하여
전체 기획 의도
이 연재는 “괜찮아지기 위한 글”이 아니라
“괜찮지 않은 채로 살아도 된다는 허락”을 건네는 글입니다.
졸리앙이 말한 것처럼,
결핍은 제거해야 할 오류가 아니라
사유의 자리이며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통로입니다
괜찮지 않은 우리를 위하여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자주 스스로를 고치려 할까.
조금 더 부지런해지면 괜찮아질 거라고,
조금 덜 예민해지면 사랑받을 수 있을 거라고,
조금 더 단단해지면 비로소 어른이 될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우리는
늘 ‘지금의 나’ 바깥 어딘가에
괜찮은 나를 따로 두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삶은 이상하게도
완성된 이후에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늘 불완전한 채로
이미 하루를 버티고 있었고,
이미 관계를 맺고 있었고,
이미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이 글은
‘더 나은 사람이 되는 법’을 말하려는 연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고쳐지지 않는 나,
여전히 서툰 나,
때로는 무기력하고 때로는 쉽게 흔들리는 나와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가를 묻고 싶었습니다.
프랑스 철학자 **Alexandre Jollien**의 글을 읽으며
저는 한 가지를 배웠습니다.
고통은 제거해야 할 결함이 아니라,
인간을 더 깊이 이해하게 만드는 자리일지도 모른다는 것.
그는 자신의 신체적 한계를 숨기지 않았고,
오히려 그 자리에서 인간의 존엄을 이야기했습니다.
정상이 되려 애쓰기보다,
이미 존재하고 있는 자신의 삶을 인정하는 태도.
그 문장들을 따라가다 보니
저 역시 묻게 되었습니다.
나는 나를 너무 오래
고쳐야 할 대상으로만 바라본 것은 아닐까.
이 연재는
괜찮지 않은 날들을 통과하는 사람들을 위한 기록입니다.
완성되지 않았기에 흔들리지만,
그래서 더 인간다운 우리를 위한 사유입니다.
누군가는 여전히
“그래도 괜찮아져야 하지 않나요?”라고 묻겠지요.
아마도 우리는 완전히 괜찮아지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괜찮아지기 전에도
우리는 이미 충분히 살아내고 있고,
이미 존엄합니다.
이 글은
그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 씁니다.
그리고 어쩌면,
당신과 저 사이에
조금은 느린 숨을 함께 나누기 위해 씁니다.
괜찮지 않아도,
우리는 오늘을 살아가고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