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르비용tourbillon은 프랑스어로 ‘회오리바람’을 뜻한다.
다이얼 위 둥글게 뚫린 부분을 보면 시계 방향으로 회전하는 부품이 눈에 띄는데, 이게 투르비용이다. 일반적으로 60초에 한 바퀴 회전하는 형상이 소용돌이와 유사해 붙은 이름이라고. 19세기의 개막과 동시에 이 기능을 개발한 사람은 천재 시계공 아브라함 루이 브레게. #브레게 의 창립자다.
지구는 자성과 중력의 영역이다. 손목 시계가 받는 중력의 영향은 탁상 시계와 다르게 불균일하다. 정적인 탁상 시계와는 달리 손목 시계는 인체 말단에 둘러져 예측불가능하게 쉴새없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손목 위 변수는 시계에 치명적인 오차로 작용한다. 깔끔한 시계에 구멍을 뚫고 투르비용을 집어넣은 이유는 시계의 오차를 줄이기 위해서다.
정확한 시간을 표시한다는 시계의 본질을 지키기 위해 고안된 투르비용은 쿼츠 시계의 등장 직후 사양의 길로 접어들었다.
한 평생 시계만 만들어온 장인이 점점 흐릿해지는 시신경을 혹사해가며, 주름이 가득 자리한 손을 떨어가며, 1년 이상을 바쳐 공들여 조립한 기계식 시계는 컨베이어 벨트에서 착착 찍어낸 배터리 시계의 정확성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다.
본질에 기댄다면 기계식 시계가 저무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지만, 수백년 역사가 염가판 배터리 시계에 짓눌려 잊히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찬란함을 뒤로 하고 검붉은 노을을 허망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던 그들은 고개를 들어 드높은 하늘을 보기로 결심을 굳혔다.
대중을 위한 기능에만 의존하지 않고, 소수의 부유층을 위한 럭셔리로 접근했다.
시계 제조에 일생을 건 사람만이 만들 수 있는 복잡 기능을 선보이기로 했다.
한때는 실용을 위해 존재하던 것들이 시간의 흐름이란 양념을 품고 예술로 승화했다.
도전은 성공했다. 오늘날 백화점 저층부에 스위스 고급 시계 매장이 줄지어 있고, 그 앞에 길게 늘어선 인파가 성공을 증명한다. 전 세계를 막론하고 그랑 컴플리케이션 워치를 보면 단전에서부터 올라온 듯 깊고 묵직한 탄성을 내뱉는다. 아…
혹자는 손목 시계를 오로지 ‘명품’으로만 본다.
시계를 좋아한다는 말에 “2030세대가 요즘 명품을 좋아하니까” 또는 ”10년 전에 태어났어도 명품 시계를 좋아했을 거냐“고 되묻는 어느 교수처럼 말이다.
한 면만 보는 얄팍한 시선으로 무슨 학문을 어떻게 연구한다는 걸까 의아했지만, 그게 또 어떻게 보면 우직함이나 흔들리지 않는 꾸준함 따위로 그에게 작용할 수도 있겠구나 싶어 무시하기로 했다.
숏폼 시대에 글로 전하고픈 철학은 ’시계 명품 맞는데, 명품으로만 보지 마‘다.
금통에 다이아몬드를 휘감고, 투르비용을 넣은 저 시계는 몇 억은 할 텐데 비싼 시계면 죄다 명품이라 하는 건 저 시계와 그를 둘러싼 역사나 기술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예술이라고 하자. 21세기에도 3백 년 전 기술을 잊지 않고 되뇌이는 거. 개인의 정신 상태를 난해하게 표현해놓고 팸플릿 몇 장으로 설명해놓는 휘발성 전시 같은 거 말고, 눈 맞추는 순간 감탄 나오는 게 예술이지. 구구절절 설명이 필요한 것보다 본능에서 발현된 반응을 탐닉하는 게 예술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