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머니가 오시던 날의 기억
외할머니는 가끔 오셨다.
큰 이모 댁에서 함께 지내시다,
아버지와 엄마가 싸우신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우리 집으로 오신다.
그날만큼은 참 좋았다.
엄마의 얼굴에 굳은 빛이 풀리고,
집 안에도 바람 한 줄기처럼 부드러운 기운이 돌았다.
나는 그 옆을 쪼르르 따라다니며,
할머니가 건네주는 커다란 눈깔사탕을 손에 꼭 쥐었다.
그 사탕은 유난히 반짝였고, 달콤했다.
할머니가 오실 때면 대개 초봄이었다.
아직은 찬 기운이 남았지만,
마당 한쪽 장독대에는 햇살이 따사롭게 내려앉았다.
항아리 사이로 고양이 한 마리가 지나가고,
바람에는 콩 삶는 냄새가 실려왔다.
가마솥 속에서 보글보글 끓는 콩 냄새는 참 구수했다.
할머니는 젓가락 하나 들지 않고,
그저 불길로 콩이 익어가는 걸 보고 계셨다.
“엄마, 이게 뭐예요?”
엄마는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닦으며 대답해 주셨다.
“청국장 만들 거야. 그리고 저건 메주 빚을 콩이야.”
나는 ‘메주’라는 말이 왠지 낯설고도 웃기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못생긴 사람을 두고 ‘메주 같다’고 말하곤 했는데,
어린 마음에 그게 늘 이해되지 않았다.
우리 엄마가 만든 메주는 네모나기도 하고 동글하기도 해서 예쁘기만 했으니까.
메주는 처마 끝에 걸려 햇빛에 잘 말렸다.
곰팡이가 피면 엄마는 손수 닦아내며 된장이 되고,
간장이 되는 과정을 보여주셨다.
그 손 길엔 늘 정성이 배어 있었다.
그날도 엄마와 할머니는 나란히 앉아 메주를 빚었다.
따뜻한 봄빛 아래에서 메주 덩이들이 햇살을 먹으며 차츰 굳어갔다.
그 냄새는 조금 구수하면서도 사람 냄새 같았다.
나는 장독대 앞에 쪼그려 앉아 그 모습을 바라봤다.
엄마는 조용히 웃고 있었고, 할머니는 “이 집은 올해도 복이 오겠네"
제비가 날아든 걸 보며 할머니는 덕담으로 한 마디 하셨다.
그리고 고춧가루를 풀어 고추장을 담그는 법도 알려주셨다.
항아리 안에서 빨갛게 물든 고추장 색이 참 고왔다.
봄볕에 반사된 두 사람의 얼굴엔 고된 세월이 묻어 있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한 폭의 그림처럼 따뜻했다.
나는 눈깔사탕을 살짝 깨물며 속삭였다.
“할머니, 또 오세요. 할머니 오시는 날이 제일 좋아요.”
그날의 냄새,
그 햇살,
장독대 소리 없는 미소—
지금도 그 장면만 떠올리면 마음 한쪽이 사르르 녹는다.
세상에서 제일 따뜻한 봄은, 바로 그날이었다.